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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2일 12시 40분 등록

카를 융 자서전(112째 주)

11기 정승훈

 

저자 연구

 

카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1875~ 1961)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정신과 개원의 중 한 명이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1895히스테리 연구(Studies of Hysteria)를 발표하고 1900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프로이트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정신분석 사례를 토론하거나, 문학작품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는 모임인 수요회를 결성했다. 정신과 의사뿐 아니라 루 살로메(Lou Andreas Salomé, 1861~1937) 등의 문화예술인들까지 참여하면서 수요회는 점점 더 활성화되었다.

 

어느덧 정신분석은 유럽 전역으로 조금씩 퍼져나가며 중요한 학문이자 치료법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석학의 지지자가 되거나 제자가 되었다. 칼 아브라함(Karl Abraham, 1877~1925),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 산도르 페렌치(Sándor Ferenczi, 1873~1933), 오토 랑크(Otto Rank, 1884~1939), 알프레드 어니스트 존스(Alfred Ernest Jones, 1879~1958) 같은 이들이 핵심 멤버였다. 하지만 빈을 중심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모임은 유럽 전역을 아우르지 못했고, 대부분의 멤버들이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소수민족인 유대인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 발전의 한계로 작용할 것을 절감한 프로이트는 적극적으로 외연을 넓히고자 했다.

 

이때 스위스 정신과 의사 카를 구스타프 융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프로이트보다 스무 살 정도 어리고 스위스 출신에, 목사의 아들이며, 무엇보다도 유대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가장 유명한 정신과 의사 중 한 명인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 1857~1939)가 운영하는 부르크휠츨리라는 명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융은 1906년 프로이트의 자유연상이론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단어연상검사를 개발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구름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오르는 단어를 말하는데,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다. 이때 만일 하늘이라고 답한다면 자극이 된 구름을 듣고 대답하기까지의 시간차를 정교하게 측정한다. 너무 빠르거나 늦게 대답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와 무의식적 콤플렉스가 연관이 있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었다. 정신분석이 비과학적이고 지나치게 성()에 집착한다고 비판받았던 프로이트에게 융의 단어연상검사는 가뭄에 단비와 같았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제자 아브라함에게 융의 지지가 훨씬 귀중하네. 오로지 그가 나타났기 때문에 정신분석이 유대인의 민족적 관심사가 될 위험에서 벗어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융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고 융도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등한 자격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처럼 교수님과 우정을 나눌 수 있게 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등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어 더욱 친근하고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을 기꺼이 여겼다. 프로이트는 1911년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처음 발족하면서 초대 회장으로 융을 선출할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지시했다. , 공식적으로 융을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 것이다.

융을 국제정신분석학회의 회장으로 세우고 아들러와도 결별한 프로이트는 이제 융이 정신분석학계를 이끌어주기를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09년 프로이트는 미국 클라크 대학의 초청으로 갔던 미국여행에 융을 동반하여 두 사람의 친분을 드러냈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서 프로이트는 자신의 꿈을 제자들과 공유하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융은 최선을 다해 그 꿈을 해석했다. 그러나 거부감을 느낀 프로이트는 자신을 분석하지 말라고 요청했고, 이에 융은 프로이트가 꿈의 분석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융은 이때부터 프로이트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존경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융은 프로이트를 옛날의 헤라클레스와 같고,” “인간 영웅이자 더 높은 신으로 여겼으며, 의견이 불일치되는 것은 자신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융도 정신분석 이론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넓혀가면서, 프로이트의 생각들과 부딪치는 부분들이 생겼다. 스위스와 빈에서 각각 활동하던 융과 프로이트는 주로 서신으로 친교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12년 스위스 크로이츨링겐 정신병원 원장이었던 루트비히 빈스방거(Ludwig Binswanger, 1881~1966)의 병문안을 했던 프로이트가 불과 60킬로미터 거리의 취리히 대학에 있던 융을 방문하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이에 기분이 상한 융은 프로이트가 자신을 등한시할뿐더러 자신의 독립적 활동에 부정적이라고 받아들이면서 프로이트를 비난하는 일이 잦아졌다. 두 사람의 공고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마침내 프로이트는 페렌치에게 융이 신경증인 것 같다고 하면서 정신분석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융합하려는 것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자인하기에 이르렀다.

 

1912년 겨울부터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정립해서 강연하기 시작했고, 성욕으로만 신경증을 해석하는 것에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중의 긍정적인 반응에 자신감을 얻은 융은 지금 나의 입장은 개인적 거부감 같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는 문제입니다라고 프로이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일종의 독립 선언이었다. 하지만 아들러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국제정신분석학회의 회장인 융과 반목하는 것이 보기 좋지 않은 일이기에, 사람들의 중재로 뮌헨에서 오랜 시간 대화한 후, 융이 사과하는 것으로 봉합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프로이트가 기절한 사건이 있었다. 3년 전에도 한 번 있었던 일로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난 흔치 않은 일이었다. 프로이트는 융의 죽음소망이 드러난 것이면서 동시에 내면의 심리적 갈등이 주요한 원인이라고 해석했지만, 융은 프로이트가 자신을 다소 두려워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여겼다.

 

조금씩 대담해지기 시작한 융은 프로이트에게 이런 편지를 쓰기에 이르렀다.

 

교수님이 의심한다면 그것은 교수님의 문제입니다. 제자들을 마치 환자처럼 대하는 교수님의 기법은 큰 실수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프로이트는 일종의 위기감을 느꼈다. 국제정신분석학회의 회장은 융이었으니 자칫하면 창시자인 프로이트 본인이 퇴출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35월 프로이트는 페렌치, 아브라함 등 초창기 추종자들에게 융을 사임시키자는 제안서를 극비리에 돌렸다. 반면에 융은 강연에서 프로이트의 이론과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를 강조했으며, 19137월부터는 분석심리학이라는 명칭을 따로 쓰기 시작했다.

 

융은 프로이트와 달리 비교(秘敎)적 영향을 받았고, 원형(archetype), 집단무의식, 종교적 경험에 대한 공감, 콤플렉스, 신화와 연금술의 중요성 등을 이론에 포함시켰다. 정신분석학을 합리적·과학적 학문으로 세우고자 했던 프로이트로서는 이러한 신비주의적 속성을 정신분석의 한 갈래로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19144월 융은 국제정신분석학회의 회장직을 사임했고 공식적으로 프로이트와 결별했다. 이후 융은 취리히 의대를 사임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갔고, 자신만의 이론을 심화시켰다. 1922년부터 취리히 인근 볼링겐 마을에 33년간이나 집을 증개축했는데, 마치 융의 사상적 발전과 학문적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융은 스위스에서 분석심리학을 가르치고 학회를 만들어 후학을 키우다가 1961년 사망했다.

 

융의 이론은 종교적 철학적 측면에서 해석의 측면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고, 민담과 전설의 연구등에서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며, 치료적 측면에서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비해서 꿈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집단무의식, 콤플렉스의 존재와 같은 독특한 면에서 현대 정신분석의 한 흐름으로 위치를 단단히 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신분석학을 확장시킨 아들러와 융 - 프로이트를 배반한 제자들 (정신의학의 탄생, 2016.01.15)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해석은 환자의 대답과 연상에서 자연히 도출되는 듯했다. 나는 이론적인 관점을 모두 접어두고 환자가 꿈의 이미지를 스스로 이해하도록 도와줄 뿐이다. (315)

의사도 상담사도 조력자이지 해결자가 아니다. 본인이 스스로 방법을 찾고 직접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이토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둬보자.” 그리하여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다. (320)

이 순간이 내 운명의 전환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 놀이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이의 놀이를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을 때 크나큰 체념과 굴욕감의 고통이 따랐다. (321)

이런 종류의 일은 내 인생에서 늘 되풀이되었다. 내 후반기 인생에서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림을 그리거나 돌을 다루었다. 그런 일은 늘 그 다음에 이어지는 생각과 일을 취한 통과의례였다. (322)

자신만의 문제해결을 위한, 혹은 피난처를 찾는 행위다. 그림과 돌을 다루는 것이라. 난 생각이 복잡하거나 많을 땐 그걸 글로 써서 정리했다. 비밀유지가 되는 사람에게 말로 풀 때도 있다. 하지만 말은 간혹 하고 나면 허한 느낌이 있다.

요가는 내가 안정되어 무의식과 더불어 다시 작업을 시도할 수 있을 때까지만 했다. 나 자신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갖자마자 나는 감정제어를 풀고 환상의 이미지와 내부의 소리가 새롭게 말하도록 했다. 인도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다양한 정신 내용과 이미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요가를 사용하고 있다. (325)

나는 무의식이 스스로 선택한 양식으로 모든 것을 받아쓰는 수밖에 없었다. (326)

참치선배가 알려준 모닝페이지와 비슷해 보인다.

의식의 문턱 아래서는 모든 것이 펄펄 살아 있었다. (326)

가장 심각한 어려움들 중 하나는 나의 부정적 감정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327)

자기 제어력을 잃어버리고 무의식의 제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327)

 

필레몬과의 대화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또다시 나의 두려움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만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마치 바닥이 실제로 내 밑에서 무너져내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캄캄한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329)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에 몸이 반응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 거다. 대부분의 외부에서 오는 것인데 융은 생각하다가 그랬단다. 융은 철저히 외부가 아닌 내부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이다.

환상을 붙들기 위해서 나는 자주 하강을 상상했다. (332)

나의 환상에서도 뱀의 출현은 영웅신화임을 가리키고 있다. 살로메는 하나의 아니마 형상이다. 그녀는 사물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님이다. (334)

살로메가 사물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님인 건 몰랐다.

심리학적으로 필레몬은 탁월한 통찰을 나타냈다. 그는 나에게 신비로운 형상이었다. (336)

나중에 필레몬은 내가 카라고 부른 다른 형상이 출현함에 따라 상대화되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왕의 카는 왕의 지상적 형태, 즉 형상을 지닌 혼으로 간주되었다. (338)

필레몬은 불구의 발을 가졌지만 날개 달린 혼이고, 반면에 카는 일종의 흙이나 금속에 깃든 혼을 나타낸다. 필레몬은 정신적 측면, 이해력이지만 카는 이와 반대로 그리스 연금술의 안트로파리온(일종의 꼬마 난쟁이 요술사) 같은 자연혼이다. (338)

내 안에서 생겨난 한 여인이 나의 생각에 간섭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십중팔구 그것은 원시적인 의미의 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혼이 왜 아니마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자문해보았다. 왜 사람들은 그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상상하는가?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서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라고 불렀다. (340)

아니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미무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 줄 알았는데 언급하지 않았다.

매일 저녁 나는 글쓰는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의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341)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341)

글로 적어놓으면 무의식이 작용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목표를 적어 붙여놓으라고 한다.

아니마의 말은 대개 유혹하는 힘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교활함을 지니고 있다. (342)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342)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343)

오늘날 내게는 그 관념들이 직접 의식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무의식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내면의 이미지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343)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나는 그 많은 환상이 든든한 토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내가 우선 인간적인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현실이란 과학적인 이해를 의미했다. (344)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345)

정신병 환자를 치명적인 혼란에 빠뜨리는 무의식 이미지의 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합리적인 우리 시대에 사라져버린 신화를 형성하는 환상의 모태이기도 하다. (345)

그런 비현실성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347)

환상과 꿈 이야기를 많이 하고 꿈에서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것하고는 다른 것이다. 현실을 살기 위해 빌려 온 것뿐이다.

마치 대기에 유령 같은 실체가 가득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집 안에 유령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의 맏딸은 밤중에 허연 형상 하나가 방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았다. (347)

이런 느낌이 들면 무섭겠다. 온 가족이 다 느낄 정도라면 특히나.

내가 펜을 쥐자마자 유령의 무리는 모두 사라졌다. 유령사건은 끝이 났다. 방은 조용해지고 대기는 맑아졌다. (349)

이런 걸 실제로 느끼다니, 아무래도 융은 무당인가보다.

이 체험이 있기 얼마 전에 나는 영혼이 내게서 떠나 날아가는 환상을 기록했다. ... 영혼, 즉 아니마는 무의식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 무의식은 신화적인 죽음의 나라’, 즉 조상의 나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349)

나로서는 중요하다고 여겨져 찾아본 지식들은 당시 학문에서는 아직 만날 수 없었다. (350)

이렇게 시대를 앞서 산 옛사람들을 보면, 이 사람들이 지금의 세계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궁금하다.

사람들은 이미지들이 그대로 떠오르도록 하면서 거기에 대해 무척 놀라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고심하지 않는다. 거기서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은 더구나 하지 않는다. (351)

보통은 그럴 거다. 융이 특이한 거다.

무의식의 이미지는 인간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준다. 그것에 대한 몰이해와 윤리적 의무의 결핍으로 많은 개인이 전체성을 상실하고 분열적 성질로 변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 (352)

나는 지적인 세계와 관련된 직업을 이제는 계속할 수 없다고 느꼈다. 나는 실제로 사로잡고 있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무의식으로부터 드러난 내용들은 나를 이를테면 벙어리로 만들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형상화하지도 못했다. (352)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나는 미지의 어둠으로부터 차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두 가지 사건이 계기가 되어 어두운 대기가 밝아졌다. 첫째는 나의 환상이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나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은 어느 부인과 절교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은 내가 만다라그림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354)

만다라 그림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건 놀랍지 않다. 앞부분에서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고 했었다.

만다라가 참으로 무슨 의미인지 나는 차츰 깨달았다. 그것은 형성, 변환, 영원한 마음의 재창조였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즉 인격의 전체성이었다. 모든 것이 잘돼가면 조화로우나 자기기만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356)

이러한 우연의 일치, 즉 동시성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그 만다라 밑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었다. “1928년 내가 난공불락의 황금성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을 때, 프랑크푸르트에서 리하르트 빌헬름이 황금빛 성, 죽지 않는 몸의 맹아에 관한 천 년 묵은 오래된 중국 경전을 보내오다.”

그 꿈을 꾼 후에 나는 만다라 표시하기 혹은 그리기를 그만두었다. 그 꿈은 의식의 발달과정에서 절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왜냐하면 그 꿈은 내 상황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360)

융은 모든 것이 꿈으로 나타나고 그걸 잘 해석한다. 이 책을 보다보니 꿈을 꾸면 그 꿈이 뭘 의미하는 건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모르겠다 난.

내가 그 무렵 체험하여 기록한 것을 과학적 작업의 그릇 속에서 추출해내기까지 따지고 보면 45년이나 걸렸다. (361)

나의 내적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그 무렵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361)

내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기간에 무의식에서 솟아나와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은 필생의 작업을 위한 원재료였다. (362)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무의식에 관한 나의 작업은 오랜 기간이 걸렸다. 20년쯤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내 환상의 내용을 약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365)

20년이나 걸려서 자신의 환상을 그것도 약간 이해했단다. 나 같은 범인은 그냥 생긴 대로 살아야겠다. 하긴 나는 그런 환상조차 없다.

연금술과의 만남은 나에게 결정적인 경험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때까지 부족했던 역사적 기반을 나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이었다. (365)

연금술하면 허무맹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금을 만들다니. 그런데 융이 말한 연금술은 단순히 금을 만들어내는 것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가보다.

연금술은 하나의 중세 자연철학으로서 한편으로는 과거 즉 그노시스주의에,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 즉 현대 무의식의 심리학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366)

연금술철학에서는 여성원리가 두드러져 남성의 그것과 동등한 역할을 했다.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었다. (367)

15년쯤 지난 후에 나는 그 꿈에 나온 것과 거의 비슷한 장서를 실제로 모았다. (368)

참 여러 번 놀란다. 꿈에서 본 장서를 기억하는 것도 놀랍지만 그걸 15년에 걸쳐 모았다는 건 더 놀랄 일이다. 집요함이 좀 무섭기도 하다.

후기 연금술 문헌은 환상적이며 바로크적이다. (370)

연금술도 초기가 있고 후기가 있나보다.

나는 뮌헨의 한 서적상에게 부탁해 그의 수중에 들어오는 연금술책은 무엇이든지 내게 알려달라고 했다. (370)

물론 그 문헌의 내용은 여전히 명백한 헛소리로 여겨졌으나, 여기저기에 의미있는 듯이 보이는 것들이 있었고 때로는 내가 이해할 수 있다고 느끼는 문장도 몇 군데 발견되었다. (371)

고작 몇 군데라니. 그런데도 그걸 계속 보고 연구하는 걸 보면 볼수록 융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나는 곧 분석심리학이 연금술과 기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72)

유형에 관한 책은 한 인간의 모든 판단은 그의 유형에 의해 제약되며 모든 관점은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375)

다시 말해 나는 이제 더 이상 허기본능, 공격본능, 성적 본능 따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이 모든 현상을 정신적 에너지의 다양한 표현으로 보고자 했다. (376)

보여지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그 근원은 같다는 것인가.

연금술을 배워서 알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무의식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무의식 내용에 대한 자아의 관계에 의해 정신의 변환과 발달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77)

글로는 알았고 깨달았다고 하지만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융의 저작을 봐도 모를 것 같다.

녹색 금은 연금술사들이 인간뿐 아니라 무기물에도 존재한다고 여긴 생동하는 본성이다. (380)

나의 환상은 그리스도 형상이 물질 속에 있는 그의 유사물, 즉 대우주의 아들과 합일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었다. (380)

환상에 대해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거 아닐까.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내가 개인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몰두한 모든 문제와 거의 마찬가지로 전이의 문제도 꿈이 수반되거나 꿈의 예시가 있었다. (383)

너무 심하지 않나?

그 꿈에서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유령들의 응접실과 물고기 실험실이었다. 전자는 융합 또는 전이를 좀 별나게 표현하고 있고, 후자는 그 자신이 물고기인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몰두를 보여주고 있다. 둘 다 내가 10년 이상 줄기차게 탐구해온 내용이었다. (386)

종교에 대한,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은 예전에 결론 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나의 아내가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는 성배전설에 관한 엄청난 작업도 아직 완수하지 못했다. (386)

아내도 연구자였나. 좀 더 아내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았을 걸.

맹목적인 수용은 결코 해답을 주지 못한다. 기껏해야 답보상태로 있게 알 뿐이며, 그로 인해 다음 세대가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된다. (387)

감정을 억제하지 않은 채 체험한 그대로 써내려갔다. (389)

요즘 내가 쓰는 칼럼이 이렇다.

분석심리학의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의 진술, 즉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서도 흔히 서로 일치하는 진술이다. (390)

캠벨이 신화연구를 하며 밝혀낸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물고기이며, 함무라비가 숫양자리시대의 왕이었듯이 새로운 기원의 통치자로 나타난다. (396)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397)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나는 가장 깊은 생각과 나 자신의 인식 들을 이를테면 돌에 표현하거나 돌로써 고백해야 했다. 내가 손수 볼링겐에 지은 탑이 그 일의 시작이었다. (401)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이걸 실행에 옮기다니.

그곳은 나에게 모성적인 장소 같은 의미가 있었다. (402)

나는 이 두 번째 탑에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방을 정했다. (402)

외딴방에 나 혼자 있다. 나는 늘 열쇠를 지니고 있다. 아무도 내 허락 없이 그 방에 들어올 수 없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나는 벽에다 그림을 그렸다. (403)

돌에다 탑, 거기다 자신만의 방의 벽에 그림 그리기. 어려선 상상으로만 하던 것들을 성인이 되어 실제로 했다. 한 번에 다 지은 것도 아니고 하나씩 하나씩 했다고 한다. 가만 보면 피곤한 스타일 같다.

아내가 죽은 지 1년 후에 모든 건물이 완성되었다. (404)

탑은 내가 돌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404)

볼링겐에서는 고요함이 나를 에워싸고 사람은 겸허하기 그지없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산다. (405)

수도도 없고 전기도 없이 옛날식대로.

여기 돌이 있네. 보잘것없는 것.

값도 아주 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을 받는다네.

이 글은 무지한 자들로부터 경멸당하고 배척되는 연금술사의 돌을 묘사하고 있다. (406)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의식과 함께하는 삶이 전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무의식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나에게는 그것이 가장 인상적인 경험이다. (409)

물이 막 끓어오르자 주전자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현악기소리 같기도 했다. (410)

물 끓는 소리가 그렇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일부러 그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그걸 기억했다가 이렇게 글로 남기는구나. 난 이런 일들이 있었어도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칠 텐데.

이거 정말 이상한데?’ 하고 생각했다. 나는 발소리, 웃음소리, 말소리가 실제로 들렸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 내가 단지 꿈을 꾸었는지도 몰랐다. (411)

이거 건물이 낮에 있었던 소음을 흡수하고 있다가 조용한 밤에 들리는 것 같은 현상 아닐까.

우리가 내적 감각으로 지각하거나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외부의 현실과 자주 상응하게 되는 것을 동시성 현상이라고 한다. (413)

나의 딸은 그 시체가 거기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녀의 감지능력은 내 외가쪽 할머니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414)

외가쪽 할머니로부터 어머니, 융 그리고 딸에게 이어졌구나.

 

카르마

융가는 본래 불사조를 문장으로 삼았다. 불사조는 젊음’ ‘청년’ ‘회춘들과 연관이 있음이 분명하가. 나의 조부는 아버지에 대한 저항심에서인 듯 문장의 내용들을 바꾸었다. 그는 열렬한 프리메이슨 회원이며 그 스위스 지부의 총책임자였다. 이런 상황이 그의 특별한 문장 개조에 크게 작용한 셈이었다. (415)

프리메이슨이면 지금도 활동하고 있고 심지어 세계를 움직이는 조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들이 적그리스도 단체라고 하던데 아닌가?

분명히 유식했을 카를 융 박사가 그 두 연금술사의 글에 친숙했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417)

이걸 알고 나서 융은 자신의 삶이 조상과 연결된다고 느꼈겠다.

내가 석판에 족보를 새길 때 조상과 이어져 있는 숙명적인 연대성이 뚜렷이 인식되었다. 나는 부모나 조부모, 그리고 더 먼 조상들이 완성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놓은 일들과 문제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아주 강하게 느낀다. (417)

역시나~

나는 환생을 믿지는 않았지만 인도 사람들이 카르마(업보)라고 부르는 개념은 본능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419)

나는 어찌해서든지 해결책을 찾기로 했다. 나중에 나는 의식적으로 내 작업을 파우스트가 간과한 것들에 연결시켰다. , 영원한 인간권리에 대한 존경, 옛것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문화와 지성사의 연속성 등이 그것이었다. (420)

가장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422)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422)

융이 현대의 삶을 본다면 혀를 차겠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너무 뚜렷하면 우리는 오늘의 시간에 제약을 받아 우리 조상들의 혼이 오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 다시 말해 무의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감지할 수가 없다. (423)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나는 유럽인들을 한번 외부에서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느 모로 보나 생소한 환경 속에서 유럽을 보고 싶었다. (427)

문화인류학자들이 이런 마음이었겠지. 그래서 서로 다른 문화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엔 유럽, 서구인들이 문명인이라는 우월주의가 제국주의를 시작이 되긴 했었다.

내 통역은 동성애가 일반적으로 많고 또한 그것이 당연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확인시켜주었다. (429)

우리가 사하라로 들어갈수록 나는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느낌을 받았고, 심지어 시간이 거꾸로 위협당하고 있는 듯했다. (431)

시간 개념이 필요 없는 곳이기에 그럴 것이다. 여행은 일상과는 다른 일정이라 시간을 다투어 뭔가를 할 필요가 없어서 더욱 그렇다. 아프리카는 태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니 그럴 것 같다.

나는 나의 생활을 그런 것들과 바꿀 생각은 없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전염되고 있었다. 그것이 외적으로는 감염성 장염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쌀뜨물과 칼로멜을 사용하는 토속적인 방법으로 며칠 뒤에 치유되었다. (433)

장염이 어쩌면 풍토병일수 있는 것을 정신적으로 전염된 것이 몸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구나.

나는 늘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나 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무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꿈의 형태 이외로는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었다. (434)

무의식이 꿈과 밀접한 것 맞다. 그래서 융이 꿈에 대해 집착(?)하는 거겠지. 아마 지금처럼 다양한 연구를 통해 무의식을 심리와 연결한다면 꿈에 그렇게 매이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아랍문화와의 만남은 확실히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격정적이고 기분대로 살아가며 생 그 자체에 한층 가까이 있으면서도 성찰을 모르는 이러한 인간존재가 우리 안에 있는 저 역사적 층에 강력한 암시효과를 주었다. (436)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보게 되면 성숙한 문화인의 마음속에, 채우지 못한 욕구와 필요로 말미암은 갈망이 일어난다. 이것은 적응상태, 페르소나(자아가 외부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세계가 바라는 대로 보여주는 모습)를 위하여 인간의 전체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437)

어른들은 어린이만큼 타문화에 빨리 적응하기 힘들다. 그동안 형성된 습관과 관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린이의 순진성과 무의식성이 없어서 이기도 하겠다.

하지만 위험이 있는 곳에 또한 구원이 싹튼다는 휠덜린의 말이 그런 상황에서 자주 떠올랐다. 구원은 경고해주는 꿈의 도움으로 무의식작용을 의식화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439)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밖에서 본다는 것은 다른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집단정신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데, 이러한 동화과정에서 국가적 편견과 고유한 특성들로부터 연유한 온갖 부담되는 것들과 마주치게 된다. (441)

그때 나는, 미국에서도 그랬지만, 내가 얼마나 백인의 문화의식 속에 갇혀 있거나 사로잡혀 있는가를 깨달았다. 그 무렵 좀더 깊은 문화수준으로 내려가서 역사적 비교를 계속해보리라는 소원이 무르익었다. (442)

다문화와 관련된 책을 쓰겠다는 동기 정욱이 생각난다. 한국인들도 편견과 동남아인들을 무시하는 인종차별이 있다. 한국이라는 너무도 좁은 울타리안에서, 밖에서 보려하지 않는다. 비단 다문화만 그런 건 아니다. 내가 쓰려고 하는 학교폭력에 관해서도 내 일이 아니면 관심 갖지 않는다. 그저 이슈가 될 때 흥분하고 화만 내다가 지나고 나면 잊는다. 그러니 바뀌지 않는다. 근본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 나는 아닐거란,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쉽게 깨지기 쉬운 것인지 겪어보고서야 안다.

유럽인과 말할 때는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으나 이해하는 것이 전혀 없는 모래사장으로 들어선 느낌을 언제나 받았지만, 이 인디언과 말할 때는 마치 배가 낯설고 깊은 바다 위를 헤쳐나가는 것 같았다. (443)

백인들은 항상 뭔가를 원하며 언제나 불안하고 차분하지 못하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소. 우리는 그들이 넋이 나간 사람들이라고 확신하오.“ (443)

전혀 다른 사람에게 듣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새롭기도 하지만 아프기도 하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책의 저자도 한국과 한국인을 외국인의 눈으로 보고 한국인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제가 대단하다고 자랑하지만 외국에서 한국은 존재도 모르거니와 그 자랑거리가 하나도 관심이 없다는 거다. 그것들이 다른 나라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한국은 그것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말해야 한다고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리가 식민지화, 이교도에 대한 복음전도, 문명의 전파 운운하는 것들이 또 하나의 다른 얼굴, 즉 사나운 맹금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 우리의 문장 방패를 장식하는 온갖 독수리와 그밖의 맹수들은 우리의 실제 본성에 잘 어울리는 심리학적인 표본들이다. (444)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위해서 하는 것이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더 이상 활용하지 않으면 그때는 10년 안에 태양이 뜨지 않게 될 것이오. 그러면 항상 밤이 되고 말 것이오.“ (450)

내 덕에 사는 거다?’ 대단한 자부심이다.

우리는 순전히 질투심으로 인디언의 순진함을 슬쩍 비웃고 우리가 그들보다 영리하다고 여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빈약하며 쇠락한 가운데 있는지 보지 않으려 한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451)

예전에 들은 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던 원주민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들에겐 그런 능력도 있는데 우린 도시의 빛과 소음 때문에 자연이 건네는 메시지를 하나도 모르고 지낸다.

산의 신성, 야훼의 시나이산 계시, 엥가딘산에서 받은 니체의 영감 들은 모두 같은 맥락인 셈이다. (451)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 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452)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될 수 있는 한 유럽과 관련이 적은 나라에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 제법 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소원을 품고 있었다. (453)

거기 우리 위 뾰족한 바위봉우리에 흑갈색의 호리호리한 형상이 꼼짝도 않고 긴 창에 몸을 의지한 채 기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거대한 촛대선인장이 우뚝 서 있었다. (455)

융은 이 사람을 보는 순간 어렸을 때 필통에 넣어두었던 검은 남자를 떠올렸단다. 어렸을 때 꿈 하나가 참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연금술에서는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 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인간인 내가 보이지 않게 창조행위를 하고 있는 그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로 완성되도록 해주었다. (457)

인간은 창조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 (457)

~ 멋진 표현이다. 인간이 없이는 창조도 없다.

선생도 아시다시피 이곳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고 신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무 걱정 말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십시오.” (458)

이 말대로 뭔가 일이 생기는 걸까.

이미 쉰 살이 된 나는 흰 머리카락이 있었으므로 늙은이라 불렸다. 그들이 보기에 내 나이는 100살이었다. 이곳에서는 고령의 노인이 드물었다. 나는 흰 머리카락이 있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463)

나는 내게 닥치는 우연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서 그 여인이 우리 세 남자의 집단에 속하는 것을 환영했다. (464)

나 역시 이런 편이다. 안 좋은 일이 생겨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해결하면 되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그리고 분명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얻는 것이 있기에 결코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연처럼 생겨나는 일이 지나고 나면 필연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나에겐 시기적으로 그렇더라. 뭐든 필요할 때, 그 시점에 기회가 온다.

백인이 흑인여자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해칠 뿐만 아니라 흑인화되는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된다. (466)

여기서 말하는 흑인화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현대사회에서 동성애가 맡은 역할은 대단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모성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일부는 자연의 합목적적 현상(번식의 저지!)이다. (470)

동성애를 자연의 합목적적 현상이라고 보는구나. 모계사회를 이렇게 보는 것은 봤다. 자연적으로 산하제한이 되다보니 가능하다는 거다. 일처다부가 아닌.

아마도 그들은 사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꿈을 알아내어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까 두려워했을 것이다. (472)

한국 사람들도 예전에 사진이 영혼을 앗아간다고 생각했었다. 초등학교때 읽은 [꿈을 찍는 사진관] 동화책이 생각난다.

대체로 그 사람들은 창조주가 모든 것을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476)

일몰 후부터는 다른 세계, 즉 어둠의 세계, 아이크의 세계가 지배한다. 그것은 악이요 위험이며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다. 낙관적인 철학은 중지되고, 유령에 대한 공포의 철학과 재앙을 막으려는 마술적 풍습의 철학이 시작된다. 그러다가 일출과 함께 아무런 내적 모순 없이 낙관주의가 다시 돌아온다. (476)

아디스타는 호루스와 같이 떠오르는 태양이며 빛인 반면, 아이크는 어둠이며 불안을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477)

이런 춤과 음악으로 흑인들은 일종의 혼수상태에 빠지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11시쯤 되자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고, 사태가 갑자기 자못 이상해지는 듯했다. 춤추는 사람들은 이제 단지 거친 무리에 불과했다. (482)

연구원 과정 초기에 리아가 썼던 칼럼에서 춤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다. 이와 비슷한 얘기였다. 접신한다고 표현했다. 춤이 가진 힘일까.

꿈들은 예외없이 공향의 풍경들을 보여줌으로써 아프리카여행을 원래 어떤 실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증후적이거나 상징적인 행위로 간주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483)

싸움터의 병사들은 전쟁에 관한 꿈보다는 고향 꿈을 훨씬 더 많이 꾸었다. 정신과 군의관들은 어떤 병사가 전쟁장면 꿈을 너무 많이 꾸면 그를 전선에서 떠나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그는 외부의 인상들에 대한 정신적 저항력을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484)

이건 일상생활에서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다. 그 상황에 대한 꿈을 자주 꾸는 것은 저항력이 없다는 신호인 거다. 잘 알아둬야겠다.

복잡한 아시아문화보다 이집트문화에 미친 함족의 기여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485)

아시아문화가 복잡하다고 느낀 건 같은 문화권이 아니기 때문일 거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나는 소위 자급자족하는 사람으로서 인도를 여행해야 했다. 나는 마치 시험관 속의 인조인간처럼 나 자신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인도는 꿈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을 움직였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 나의 고유한 진실을 찾으려 했고 그 일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487)

인도에 간 나이가 63세였는데 그 나이가 되도록 나 자신, 나의 고유한 진실을 찾으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었다는 거다. 나를 찾는다는 건 평생에 걸친 일이구나. 인도라는 나라가 가진 무언가가 있나보다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 사람도 인도에 가면 깨달음(?)을 얻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소위 성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것은 모두 피했다. 내가 그들을 피한 것은 나 자신의 고유한 진리로 만족해야만 했기 때문이며, 나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은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성자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의 진리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나에게 도둑질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488)

도둑질로 여기다니 독특한 생각이다.

내가 인도에서 주로 몰두한 것은 악의 심리학적 성질에 관한 물음이었다. 이 문제가 어떻게 인도의 정신생활에 의해 통합되는가 하는 것은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489)

동양 사람들에게는 도덕적인 문제가 우리의 경우에서처럼 우선적인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에게 선과 악은 의미상으로 본성에 포함되어 있어서 사실은 유사한 것으로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490)

동양 사람들이 도덕적인 문제를 우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 아닐까.

나에게 존재의 최고의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그것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하는 데 있지 않다. (491)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491)

나는 부처의 삶을 개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장한 자기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부처에게 자기는 모든 신을 넘어서, 특히 인간실존과 세계의 정수를 나타내고 있다. (495)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496)

한국의 기독교를 보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둔다고 볼 수도 없다. 목사직을 세습하는 종교도 권력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부처는 자신의 삶을 살다가 나이 들어 죽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한 기간이 무척 짧은 것으로 여겨진다. (496)

내가 다양하고 압도적인 인도의 인상들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자 이와 같이 유럽에 뿌리를 둔 꿈을 꾸게 되었다. (500)

인도에선 꿈을 안 꿨나 했더니 역시나.

인도는 어떤 자취도 없이 나를 스쳐지나간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영원에서 다른 영원으로 옮겨가는 자취들을 나에게 남겨놓았다. (503)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내가 그 벽화들을 잊은 모양이었다. 내 기억력이 조금도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나는 화가 났다. (505)

아니 뭐 화가 날 정도까지. 그 벽화가 그만큼 의미 있는 것이라는 건가.

특히 세례가 실제적인 죽음의 위험과 결부되어 있는 통과의례라는 주목할 만한 견해에 대해 토론했다. 그런 종류의 통과의례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원형적 사고를 통해 표현되는 생명의 위험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와 같이 세례 또한 본래는 적어도 익사의 위험을 암시하는 실제적인 잠김이었다. (505)

중학교 때 친구 따라 간 교회는 침례교회였다. 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산에 있는 낮은 계곡에서 몸 전체를 뒤로 담그는 세례의식을 했다. 낮았지만 익사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을 잠깐이지만 했었다. 이 구절을 읽으니 이런 의미였다면 제대로 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파리나 런던에 가듯이 로마를 여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도시나 저 도시나 기호에 맞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는 데마다 그곳을 지배했던 정신에 의해 마음 깊은 곳에서 충격을 받을 때, 그리고 거기 있는 성벽 잔해와 둥근 기둥 하나가 내 눈에 이제 막 새롭게 인식될 때 문제는 달라지는 법이다. (510)

그러게, 이런 마음으로 여행을 했어야 하는 구나. 지난 달 공주, 부여를 그저 유적지로 역사적 사실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 시대에 사람이 되어 느껴보았어야 했구나.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그것은 분명히 내가 죽음의 위험에 직면하여 헤매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이 내게 산소와 장뇌(특유의 향기를 가진 방향제로, 의식을 깨우는 데 사용되었던 것 같다)를 흡입시켰을 즈음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환상의 이미지들이 너무 강렬하여 나 자신도 죽음이 가까워졌구나 하고 마음을 정리할 정도였다. (513)

나중에 나는 사람이 그러한 넓이의 시야를 확보하려면 우주공간으로 얼마나 높이 올라가야 하는지를 알아보았다. 그 높이는 약 1,500킬로미터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지구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 멋지고 매혹적인 경험이었다. (514)

유체이탈 같은 건가? 난 끔에 이렇게 높이는 아니었지만 높이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 보기는 했었다. 기억에 오래남고 신기했었다.

나는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 나는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말살되고 빼앗기거나 약탈당했다는 느낌이 지배적이기도 했으나, 한순간 그런 느낌도 스러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지나간 듯이 여겨졌다. (516)

나는 무엇이 내 이전에 있었고 왜 내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내 인생이 어디로 계속 흘러갈 것인지 알게 될 것이었다. (517)

그 당시에 그랬다는 거였다. 이렇게 명확하게 보이는구나.

 

융합의 신비

사실은 내가 다시 살기로 마음먹을 수 있을 때까지 3주는 족히 걸렸다. 나는 모든 음식에 대해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에 먹지 못했다. (519)

모든 것이 마침내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갔다면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시금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실에 매달린 채 작은 상자 속에 들어가 있는 것에 익숙해질 것이다. (520)

우주공간에 비하면 당연 작은 상자 속이란 비유가 맞긴 하지.

나는 그가 원형의 모습으로 나를 만났기 때문에 그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굳게 확신했다. (521)

치료해준 의사가 꿈에 나타난 모습이 원형의 모습이란 것을 알았던 것도 신기한데 그래서 위태롭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도 신기하다. 아무리 봐도 신기한 분이다.

이제 다시 회색 아침이 오는구나! 이제 감방과도 같은 회색의 세계가 찾아오는구나! 얼마나 따분하며 얼마나 역겨운 난센스인가! 내적 상태가 너무도 환상적이어서, 거기 비하면 이 세상은 아주 하찮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가 이생에 다시 다가감에 따라, 환상상태는 첫 환상 후 3주 가까이 지나고 나서 종료되었다. (523)

나는 그것이 그녀가 아니고 나를 위해 그녀로부터 제시되거나 유발된 이미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교제를 시작하고 결혼생활을 한 53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 그리고 또한 그녀 인생의 마지막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한 전체성을 대면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현상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만 말을 잃게 된다. (526)

전체성을 대면한다라... 이건 뭘까.

이제는 나 자신의 견해를 관찰하려고 애쓰지 않고 생각의 흐름에 나를 맡겼다. 그리하여 문제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나에게 다가와 무르익으면서 형상화되었다. (527)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527)

원래 좀 운명론자던데... 하긴 긍정하는 것하고는 또 다르긴 하다.

나는 또한 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온갖 평가를 뛰어넘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528)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엄밀히 말해 내 저작들은 이승과 저승의 조화에 대한 물음에 답을 주려는 늘 새로워지는 시도였다. (531)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532)

특히 나는 유념해야 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타고난 구조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와 사고로써 이 세계와 관련을 맺는다. (533)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야말로 쓸모없는 사변일 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력이며 인간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 (533)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한 해답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535)

무의식을 무의식적으로 흘려보낸다. 그 조언을 감지하지 못한다.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536)

미리 눈치채는 것이라기보다 미리 안다(좀더 확실하게 예감한다는 의미)’고 말할 수 있는 경우를 자주 만난다. (538)

융은 아무리 봐도 신끼가 있다. 그래서 더 무의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542)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나는 일찍이 무의식의 형상이거나 흔히 그 형상과 혼동하기 쉬운 죽은 자의 혼령을 가르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544)

죽은 자의 혼령들도 그들이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던 것만 알고그 외에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앎에 참여하기 위해 인생 속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애쓴다. (546)

혼령들도 이승에서 풀지 못한 고민, 해결하지 못한 것들을 풀기 위해 인간에게 나타나고 묻는다는 생각도 독특하다. 한국에선 원한이 있는 혼이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하는데...

사후에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하다면 인류의 의식과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으로 여겨진다. (547)

어딘가에서 이미 도달하게 된 의식성의 수준은, 내가 보기에는 죽은 자가 도달할 수 있는 인식의 상한을 이룬다고 여겨진다. (551)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551)

난 신화를 기피한다. 신화하면 그리스로마신화가 생각나서 그럴 수도 있다.

꿈의 진술과 관련하여 교조적인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해석의 획일화가 눈에 띄는 즉시 우리는 그 해석이 교조적이며 따라서 비생산적임을 알게 된다. (552)

사람들이 오래 살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인간은 삶의 한가운데서 저승으로 끌려가고, 쓸모없는 인간은 늙도록 살아남는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잔인한 현실이다. (556)

얼마 전 영화배우 김주혁도 허망하게 간걸 봐서 더 가슴에 들어오는 문구다.

내 부모님의 결혼생활은 서로 사이가 좋아 행복한 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많은 어려움으로 괴로웠던 인내의 시련이었다. (557)

 

단일성과 무한성

널리 퍼져 있는 저승의 신화는 재생에 관한 관념과 표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559)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다. (560)

어려서 일찌감치 종교에 고민이 많아서 그런지 타종교에 대해서도 배타적이지 않다.

내가 옛날에 한 번 특정한 인격으로 살았고 내세에서 이제 해방을 꾀할 수 있을 만큼 된 것인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561)

윤회설을 말하나 보다.

카르마의 문제는 개인적인 재생이나 영혼의 윤회 문제와 마찬가지로 내게는 이해하기 어렵다. (563)

보편적인 생각으로 자리 잡고 있어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젖어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류가 저승에 관해 지어내는 관념들은 그들의 희망적인 전망과 선입견이 그 형성과정에 개입하게 된다. (565)

나는 저승에도 역시 어떤 제한이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566)

요기의 형상은 말하자면 무의식적인 전생의 통합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극동은 꿈에서 자주 그러하듯이 우리에게는 낯선, 의식에 대립되는 정신상태를 가리킨다. (570)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572)

가지려고 할수록 마음은 더 가난해진다. 손에 쥐려고만 하니까. 그런 사람은 본질적인 것에 관심이 없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573)

만년의 사상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천사들은 특이한 종류의 무리다. 그들은 바로 그들 자체일 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영혼이 없는 존재로서 그들 주인의 생각과 직관 외에 다른 것은 나타낼 수 없다. (578)

천사가 영혼이 없는 존재구나. 생각도 없고 주인의 의지를 따를 뿐이라니. 천사는 그저 선한 존재라고만 생각했는데.

빛에는 창조주의 다른 측면인 그림자가 따른다. 이러한 전개는 20세기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다. 지금 기독교세계는 실제로 악의 원리와 대립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공공연한 부정부패, 폭정, 허위날조, 예속 및 양심억압과 대립하고 있다. (579)

우리는 결코 악에 더 이상 빠져들어서는안 되며 선에도 빠져들면 안 된다. 이른바 사람들이 빠져버린 선은 도덕적인 성질을 잃게 된다. 그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빠져버렸으므로 그것이 나쁜 결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580)

나약한 존재인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버린다는 거다.

이제 도덕적 평가의 근거가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우기가 알기 때문에, 윤리적 결단은 오직 신을 따름으로써 보증할 수 있는 주관적이며 창조적인 행위가 된다. (581)

교육은 오로지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각 개인의 사적인 경험에 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이상주의적 관념들이 교육되고 있다. (582)

너무도 정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광학지식 없이 이른바 손목이나 좋은 의지만으로 만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583)

타고난 순진성으로 어느 정치가가 선언하기를, 자기는 악의 상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583)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었다. 지극히 평범함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적 관점에 한해서 보면, 신의 표상은 심적 토대에서 현시된 것이며 이제 심한 분열의 형태로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열이 세계정치에까지 미치고 있으며 벌써부터 이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 눈에 뛸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588)

과학은 정신의 실체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만 정신을 수단으로 사용해야만 인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591)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597)

신화가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이 편은 다음에 꼼꼼히 읽어봐야겠다.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남들과 뒤섞이지 않도록 개인을 보호하는 데는 지키고자 하거나 지켜야 하는 비밀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 (600)

공동의 비밀은 결속을 위한 시멘트 역할을 해준다. (600)

그래서 폐쇄적이 된다.

의무들의 충돌은 항상 훨씬 높은 책임의식을 전제로 한다. (605)

자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호조치의 도움으로 수천 년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아라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모든 대극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607)

인간 생존의 본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환경에 의해 자아가 형성되는 거다. 그래서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변할 수 있다.

의식은 계통발생학적으로나 개체발생학적으로 이차적인 것이다. (610)

어떤 의식적인 의지도 생의 충동을 오랫동안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610)

우리는 무엇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 생명의 원천으로 다가갈 뿐이다. (611)

내가 지금 가고자 하는 길도 생명의 원천으로 가고자 하는 무의식일까.

원형적 진술들은 본능의 전제조건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 진술들은 이성적으로 논증된 것도 아니고 이성적인 반론으로 제거될 수도 없다. (617)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이 영역세서는 합리적인 이해와 표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것은 에로스의 영역이다. (618)

내게는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한 바울의 조건문이 모든 인식 중에서 최초의 인식이며 신성 그 자체의 진수인 것처럼 여겨진다. (618)

난 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가보다 했더니, 이 역시 신앙이나 근본적인 에로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쉽다.

그는 사랑에다 온갖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붙일 수 있겠지만 그는 단지 끝없는 자기기만에 빠질 뿐이다. (620)

 

회고

비밀로 가득 찬 세계

사람들이 나를 현명하다거나 지자(知者)’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623)

다른 대부분의 사람과 나의 차이점은, 내게는 칸막이벽들이 투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고유한 특성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벽들이 너무 두꺼워서 그 뒤를 보지 못하므로 거기에는 전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624)

난 그 뒤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 벽을 경계로 inout을 정했다. 이제 안 그러려고 한다. 뒤도 인정하고 뒤에 있는 사람도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기로 했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624)

융 본인의 경험이네. 주위에 사람이 많다고 고독하지 않은 게 아니다. 나와 맞는 사람 몇 명만 있으면 된다.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이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625)

하긴 누구나 소속의 욕구가 있으니 당연하겠다.

나는 나의 환자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에 대해 참을성이 없었다. (626)

이건 또 의외네.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내가 계획한 일상적인 일들은 대개 손해를 보았다. 물론 언제나 어디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로서는 내가 뼛속까지 보수주의자인 것처럼 보인다. (628)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628)

나는 지금의 나도 만족스럽다. 잘 살아왔다. 그러기에 이젠 좀 쉬엄쉬엄 살려고 한다. 그동안 살아온 습관과 나의 타고난 기질로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융이야 이렇게 후세에 길이길이 남았는데 뭘~

나는 인간에게서 경이로운 것들을 경험했고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나 나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현상과 인간이라는 현상은 너무도 큰 것이기 때문이다. (629)

노자는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630)

~ 이게 노자의 말이었구나. 깨달은 사람일수록 이런 거 아닐까.

내가 나 자신에 관해 불확실해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화성이 그만큼 더 높아진다. (630)

 

편집자의 말 ; A. 야페

우리 모두는 이 작업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융이 자신과 자기 생활이 세상에 공개되는 것을 꺼려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631)

원래 그랬구나.

일단 동의하고 나서는 매주 하루, 오후시간을 나와의 공동작업에 할애해주었다. (631)

어느 날 아침, 그는 나를 맞이하면서 유년시절에 관해서는 자신이 직접 기록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632)

어린시절의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하나의 필수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은 하루라도 중단하면 그와 동시에 불쾌한 신체적 증상이 따라온다. 그러나 내가 그 작업을 하면 금방 그 증상은 사라지고 머리가 아주 맑아진다.” (633)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635)

그래도 너무 없다. 최소한 가족에 대해서는 할법한데... 부인도 성배연구에 대해서만 거론하고 있고 자식이 많았는데도 맏딸과 아들을 그것도 사례로 잠깐 언급할 뿐이었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 사이의 갈등은 그가 죽는 날까지 결코 수그러든 적이 없었다. 항상 회의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고, 미래의 독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637)

융은 유명한 인물이든 가까운 친지나 친구든 그들과의 만남에 관해서 말할 때는 특히 조심스러워했다. (638)

기억에 없기도 했겠지만,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일들에 대한 기록을 봐도 알 수 있겠더라.

학문적인 저작에서는 융은 신에 관해 말하지 않고 인간 마음 속에 있는 신의 형상에 관해 말할 뿐이다. (641)

그는 일반대중의 반응을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종교적인 경험과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642)

“‘자서전은 단지 소문자 아이의 윗점, 즉 전체를 완성하는 최후의 한 점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643)

사실 융의 회고록은 그의 학문적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가 어떻게 그의 사상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이야기하고 인식의 배후에 있는 주관적 체험을 보고하는 것이 독자를 연구자의 정신세계로 인도하는 데 가장 좋은 방도가 될 것이다. (643)

지금이야 과제처럼 읽었지만 두고두고 읽을 만한 책일 거란 생각이 든다.

융은 말이나 글에서 자신의 사상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해 전해주려는 의향이 없었을 것이다. (644)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자서전이라 시기적으로 연대순일거라 여겼는데 시대순이면서도 주제별로 엮여 있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자서전이라기보다 사상집 같다. 그래서 소제목이 더 잘 맞다. 어린 시절 내용엔 부모님의 이야기도 나오지만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전기 작가처럼 시대순으로 있었던 사실들과 연결해서 써졌더라면 어떨까 싶다.

 

3. 이 책의 장점

사상과 꿈 등 관념적인 내용이 많음에도 집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인간 융의 사상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저자가 직접 쓴 것이 아님에도 마치 저자가 직접 쓴 것 같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내가 저자라면 일대기 순으로 좀 더 사실에 입각한 내용 추가해서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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