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뚱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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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기 연구원 장성한
카를 융-기억 꿈 사상(2)
칼 구스타프 융 글 / A. 야페 편집
조성기 옮김 / 김영사
1. 저자에 대하여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
- 인간 정신의 깊은 바다를 연 한 의사의 삶과 사상 -
1. 칼 융과의 만남
저 창 밖의 보름달이 파랗게 보이는 이유는 쌀쌀한 겨울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래 서 그 겨울밤에 찬바람이 잔잔히 흐르는 들녘에 나와 저 달을 향해 힘껏 후- 하고 따스한 입김을 보내주 었던 유년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미한 잔상으로 기억 언저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더 군다나 지금의 삶은 그 어린 시절의 따스한 세계를 훨씬 이탈해 버린 듯한 느낌이다. 세계에 대한 무조 건적인 친화력을 상실해 버린 느낌이다. 이제 나는 융을 만나려 한다. 융과 더불어 저 어두운 그늘에 고 여 있는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건져내는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그리하여 인간 정신의 깊은 의미를 헤아려 보고자 한다.
나는 1992년 대학 도서관에서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을 통하여 융을 처음 만났다. 이 책은 융의 방대한 저서와 깊은 사상을 독자들에게 쉽게 전하기 위하여 융과 제자들이 집필한 책이다. 지금 생각컨 데, 그 책에 대한 첫 인상은 여느 책과는 조금은 달랐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책은 다양한 장면을 담은 사진과 그림과 미술작품, 심지어는 만화책에 나올 법한 낙서들 덕분인지, 글자가 정갈하게 배열된 여느 책과는 달리 매우 현란한 잡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앞 페이지에 있는 융의 시선은 나를 뚜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어디에서부터 홀연히 다가왔는 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융과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모든 만남은 이렇듯 우연한 만남일까. 그 때부터 지금 까지 융과의 만남은 나의 가슴을 잔잔한 감동과 여운으로 이끄는 소중한 만남이 되었다. 이제 융은 마음 의 고향이자 삶의 풍요로운 자양분이 되어주는 커다란 그루터기이다. 그리고 그는 안개와 같은 내면의 세 계를 향해 길을 조금씩 열어주는 영원한 유혹이다.
우리가 심리학자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십중팔구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를 머리에서 기억해 낼 것이다. 융은 프로이트만큼의 대중적 지명도가 없지만 그 또한 깊은 세계를 갖고 있 다. 게다가 융은 프로이트가 가장 아끼는 동료이자 제자였다. 이후 프로이트와 융이 결별을 선언한 후 프 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새 지평을, 그리고 융은 <분석심리학>의 새 지평을 심리학 분야에서 개척하였 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진 이는 프로이트이고 오히려 융은 많은 이들에게는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온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의 세계는 프로이트의 세계로 환원될 수 없는 그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갖 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융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융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오묘한 진실을 감상하 려 한다.
2. 칼 융의 삶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단히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우리가 기억의 그물로 건져낼 수 있는 최초의 경험들은 몇 살부터의 경험들인가? 융 은 놀랍게도! 자신이 유모차에 누워서 푸른 하늘과 황금의 햇빛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두 세 살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것도 팔십 세가 넘은 나이에 말이다. 아무래도 그는 망각의 기능을 상실한 운명을 지닌 사람이었나보다. 그는 역마살과 같은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이유 때문에, 소년시절에 많은 발작증세를 앓았다. 실로, 마음은 감수성의 크기만큼 세계에 민감하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고통스러운 느낌은 오히려 자기만의 내면의 세계로 발걸음을 인도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융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고독은 내면에 대한 탐구로 전이되었다.
융은 어느 날, 깊은 숲 속에 숨어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아버지는 아들 융 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많은 재산을 없앴고, 아들이 평생 돈을 벌 수 없게 된다면 슬픈 일이 될 것이 라고 친구에게 말하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아버지와 친구분의 대화를 엿들었지만,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현실(現實)에 대한 최초의 경험 이 되었다. 융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버지 서재로 달려가서 라틴어 문법책을 꺼내서 공부하기 시작했 다. 그 와중에 몇 번의 발작증세는 융에게 나타났고, 결국 융은 굽히지 않고 발작을 극복하고 끈질기게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이후 융은 발작증세가 사라졌다. 이러한 경험은 자신을 철저하게 엄격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이후 융으로 하여금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칼 융의 사상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사건이 되고 밖의 현상으로 나 타나며, 인격 또한 그 무의식적인 여러 조건에 근거하여 발전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게 된다.
융의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자기>Self와 <자아>Ego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는 우리의 생각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의 세계이다. 무의식의 밑바닥에 깊이 놓여 있는 세계이다. 또 한 그 세계는 집단 무의식의 원형으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자아>는 자기의 세계보다 훨씬 작은 세계이다. 그리고 의식과 분별의 세계이다.
자아는 자기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의식의 세계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의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식으로서의 자아는 무의식으로서의 자기를 지각할 수 있을까? 그것은 꿈이다. 꿈은 무의식의 활동이 우리의 인식 속에 지각되는 현상이다. 자기는 끊임없이 자아에게 꿈의 상징들을 통하여 자신의 메세지를 전하려 고 한다. 이제 꿈은 자기와 자아가 만나는 접촉점이다. 나를 넘어선 세계와 나의 세계는 꿈을 통하여 이 어진다. 그래서 융은, 꿈이야말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 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꿈의 언어를 잘 이해하는 길이 저 심연에서 고요히 놓여있는 자기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자기와 자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사건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한 등산가가 융을 찾아왔다. 그 등산가는 어느 날 밤 높은 산의 정상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 자신의 꿈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융은 그 꿈을 다 듣고 등산가의 앞에 닥쳐올 위험을 알았다. 그리고 융은 꿈이 주는 경고를 강조하여 그에게 스 스로 등산을 자제하도록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다. 왜냐하면 그는 결국 등산 중에 발을 헛디뎌 "허공으로" 낙하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는 자아의 미래를 감지하고 그것은 꿈으로 전달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등산가는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의식적인 이성이 자신의 미래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두 컴컴한 순간일 지라도, 인간의 무의식은 정확히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융에게 있어서 <자기실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자아>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 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원형의 세계에서 뿜어내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 그것이 융이 말한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융에게 있어서 삶은 자아가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 과 정은 바다 위에서 출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자아가 수 천 해리 깊이를 가진 마음의 중심인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하지만 중심으로 향해 가는 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특히 상징과 신화의 언어를 상실한 현대 일수록 자아가 자기를 찾는 여정은 그만큼 힘겨워진다. 왜냐하면 분화된 의식으로서의 자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세계를 내동댕이쳤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징과 신화의 상실은 자기 상실이다. 이러한 상실의 시대를 가로질러 어둠의 세계인 자기의 세계를 빛의 세계인 자아의 세계로 끌어올리는 과정 이 깨달음의 과정, 즉 <자기실현>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실로 그 깨달음의 과정은 한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에서만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융은 더 나아가서 인류의 문명 또한 기나긴 깨달음의 과정으로 본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인류를 한 개인으로 볼 때, 우리는 인류가 무의식의 힘에 의해 끌려가는 사람과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은 문명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들을 거쳐 서서히, 그리고 힘들여 의식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가 온전히 완성되기에는 아직은 거리가 멀다. 저 안개와 같은 인간 본성의 허다한 부분이 아직 어둠에 쌓여있다. 그 자아의 세계는 빛이 닿지 않는 무한한 자기의 세 계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한 세계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은 자연이 획득한 매우 새로운 것이어서 그것은 아직도 실험적 상태에 있다. 실로 의식은 불완전한 기능이다. 이렇듯 인류는 험난한 진화의 과정을 통하여 자아의 세계를 열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아는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은, 인류는 무의식의 힘에 의해 이끌리고 있고 무의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융은 원형Archetype,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 개성화Individuation, 그림자Shadow, 아니 마Anima, 아니무스Animus 등, 다양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개념을 사뭇 조심스럽게 선보인 다. 사실 융이 인류를 향해 새롭게 선보인 개념은 몇 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개념은 앞으로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왜냐하면 그의 개념은 이론가의 책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철저한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진지한 숙고의 과정을 통하여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융은 일생동안 수 만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았다. 그리고 융은 분석가나 이론가이기 이전에 '영혼의 의사'로서의 순결한 사명을 수행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삶 가운데서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서 삶의 목적은 "환자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고 보존하여 환자가 그의 생애를 그 자신의 뜻의 따라서 살도록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환자에 대한 따스한 시선은 "병든 의사만이 치료할 수 있다"는 융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렇듯 융의 삶은 환자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삶이었고, 환자의 고통과 같이 하는 삶이었다.
한 개인이 경험하는 고통에 대한 융의 사려깊고 진지한 노력은 그의 삶의 여러 곳에 스며있다. 특히 환자의 꿈에서 드러난 상징을 분석가(分析家)가 해석하는데 있어서, 환자의 <상징>과 분석가의 임상 결과 에서 일반화된 <의미>를 쉽게 대응시키지 말라고 융은 당부한다. 융은 상징을 연구하는 데 반 세기 이상을 보내 온 의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상징과 그 상징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분 석가 개인의 일반화된 이론을 미련없이 버려야 함을 강조한다. 회색 이론은 삶을 찢는다. 오히려 "나는 환자의 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자세로 환자를 만나야만 한다고 말한다. 환자의 상징은 환자와의 끊임없는 대화와, 환자의 삶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야만 그 상징의 의미가 올바로 드러난다 고 보았기 때문이다.
융에게 있어서 꿈 해석의 보편적인 규칙은 없었다. 환자의 삶만이 유일한 해석의 경전이 되었던 것이 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환자는 자신의 이론의 적용대상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만이 유일한 현실이다." 이러한 융의 자세는 이후 프로이트와 영원히 결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꿈해석에 있어서 보편적인 이론을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다면, 융은 인간 그 자체에 관한 이해 위에서만 꿈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화해할 수 없는 견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4. 신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동시성 현상
융의 일생은 정신의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신의 불멸과 맞닿아 있는 '신의 문제'와 정신의 사멸과 맞닿아 있는 '죽음의 문제'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다.
1959년, 융은 영국 방송공사(BBC)의 죤 프리만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프리만은 융에게 신을 믿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영국의 수많은 시청자들은 융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며 긴장하였다. 융은 차분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신을 압니다." 저 대답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우 리는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 신의 세계까지도 접근해 들어간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바울이 그러하였듯이(갈라디아서 2:20), 융은 자신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마음 안에 내재하는 신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융은 자신의 삶 가운데 죽음을 아주 가깝게 체험하곤 하였다. 실제로 융은 죽은 자를 만나기도 하였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융은 기이한 환상을 경험한다. 융은 밤중에 깨어 전날 장례를 치룬 친구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문득 융은 죽은 친구가 방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후 친구는 수 백미터 떨어진 자신의 집으로 융을 데려갔다. 융은 그 친구를 따라갔다. 그리고 친구는 서재에서 적색 표지의 책 한 권을 가리켰다. 너무도 기이한 체험이어서 융은 다음날 아침 죽은 친구의 서재를 직 접 찾아가서, 환상에서 가리킨 적색 표지의 그 책의 제목을 확인해 보았다. 그 책의 제목은 <死者의 유 산>이었다.
융은 실제로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說法>을 마흔 한살이 되던 1941년에 개인적으로 내놓았다. 이 설법은 죽은 자들이 질문을 하고 융이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문헌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융은 죽은 자와의 대화를 하였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 문헌은 융이 죽기 바로 전에 어렵게 세상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결론부에 있는 글자 수수께끼인 아나그람마(Anagrama)는 끝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 암호의 열쇠를 공개하지 않고 융은 죽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상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한 번 왔었다는 느낌, 혹은 현실에서의 이 순간은 언젠가 꿈에서 한 번 보았던 순간 같은 느낌을 자주 경험 한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이러한 기이한 느낌을 자주 체험하기 때문에 앞으로 그 체험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하려 한다. 물론 본인 뿐만 아니라,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위와 같은 경험을 자주 듣곤 한다. 융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실 융의 삶의 대부분은 이러한 환상과 희귀한 체험으로 채색되 어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날 융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순간 뒷머리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환자 가운데 한 사람이 권총자살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총알은 마침 융이 심한 통증을 느낀 부 분에 박혀 있었다. 1918년 융은 영국인 수용소의 지휘자로 있으면서, 자기(Self)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像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 그림은 황금의 성 모양을 한 만다라였다. 얼마 뒤에 리햐르 트 빌헬름이 융에게 보낸 책 안에는 융이 그렸던 만다라 그림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융은 이러한 정신적 사건과 물질적 사건의 의미있는 일치를 동시성(Synchronicity) 이론[11]으로 부르 고, 이와 같은 정신현상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한다. 사실 융이 최초로 이론화한 동시성 이론은 우리시대의 양자물리학적 세계상의 정신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많은 과학자들은 융의 저 이론 에 대하여 다각도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13] 실로 융에게 있어서 텔레파시나 예언현상은 신비한 체험 이나 주관적 환상이 아니라 자명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5. 결론 : 칼 융이 주는 의미
첫째, 융은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중심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문명화된 의식이다. 의식은 자아의 세계이다. 이 <자아>라는 것은 <자기>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는 우리의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우리의 중심인 자기를 향해 나아가야 하겠다. 우리는 자아의 세계가 전부로만 착각하며 살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기의 세계와 같이 설명되지 않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해리는 자아의 세계를 전부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의 자리에서 노예의 자리로 추방당하였다. 우리는 중심을 상실하였다. 현대인의 마음은 에덴동산을 상실한 보헤미안의 서글픈 운명이 맺혀 있다.
융은 희미한 잔영으로만 남아있는 자기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계속 해 왔고, 오늘 우리에게 그 세계는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건네주고 있다.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 고여 있는 자 기의 세계는 너와 내가 서로 넘나드는 화해의 세계이고 통합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보다 보편적이며 진 실한 세계이고 영원한 세계이다. 오히려 그곳은 그늘에 가리워진 세계가 아니라 빛의 세계이다. 그리고 중심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꿈을 통하여, 신화를 통하여, 상징을 통하여 자기의 세계에서 자아의 세계를 향해 건네주는 메세지에 우리는 귀를 모아야 하겠다. 왜냐하면 의식의 치명적인 손실은 꿈에 의해 보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저 깊은 내면의 무의식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하겠다.
둘째, 우리의 세계는 설명 가능한 세계만이 전부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특히 자아의 세계 안에서의 '이성'이라는 것은 지극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으로는 마음의 전체성을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판적 이성이 지배하면 할 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곤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우리가 의식하면 의식할 수록 우리는 더 많은 삶을 통합할 수 있다." 의식을 넘어선 세계에 대한 겸허함을 상실한 채, 이성의 왕국으로만 전진하려는 현대문명의 기나긴 행렬은 사실 막대한 손실을 지불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문명은 합리성에 의하여 바벨탑을 축조하였다. 완고한 탑의 벽돌 하나 하나에 깃들어 있는 합리성 의 질료는 비합리성을 신화로 매도하였다. 왜냐하면 바벨탑의 세계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시대는 비합리성이 사멸한 시대이다. 그렇다면 비합리성은 존재하지 않는가. 단지 이성의 등불이 건져내지 못하는 심연의 세계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바벨탑이 감내해야 할 불길한 징후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심연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치 빛이 소멸하고 어둠에 깃든 저 밤하늘에는 단지 우리 눈에 보이는 저 별만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연은 존재를 망각케 한다. 하지만 존재는 심연에 앞선다. 오히려 존재는 어둠을 품는다. 심연과 어둠 에 서 있는 존재는, 비록 설명되지 않을지언정, 자명한 존재이다. 그래서 은폐되어 있고 불가해한 존재 (essentia absconditus et incomprehensibilis)는 모르는 존재(essentia ignotus)가 아니다. 사실 '비합리적인 것'은 모르는 것이나 인식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에 관하여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조차도 이름 붙일 수 없을 것이 다. 이름은 존재의 징표이기 때문이다. 실로 융의 동시성 이론이나 죽은 자와의 대화는 우리의 이성 이 얼마나 빈약한 기능인가를 예증해 준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는 않고 설명되지는 않는 세계가 우리 가까이에 있고, 그리고 그 세계가 우리를 인도한다고 융은 말한다.
셋째, 융은 우리 각자의 生이 매우 소중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 심성의 뿌리에는 저 깊은 무 의식의 세계, 전체의 세계와 닿아 있다. 그렇다면 각자의 生은 결코 가볍거나 보잘것 없는 生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生은 우주를 닮아 있다. 영원의 세계인 무의식의 현현이 각자의 生인 것이다. 플레로마의 세계에서 클레아투라의 세계로 뛰어든 최초의 사건이 生이다. 우리의 生은 불멸의 무한한 세계가 유 한한 세계 속으로 뛰어든 사건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生은 끊임없는 성숙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그 지향이 바로 '개성화'인 것이다.
우리는 융을 통하여 살아있음(生)이 결코 예사스럽지 않음을 발견한다. 이제 생은 환희이고 생명은 경이로움이다.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펄럭거리며 비상하는 저 새를 보자. 새는 날기 위하여 얼마나 지난한 시간동안 새가 되려는 꿈을 꾸었을까. 인간은 인간이 되고 싶어서 얼마나 긴 계절을 인간의 꿈을 꾸었을까. 인간은 백 년의 삶을 만나기 위하여 백 만년 동안, 그 한 순간 만을 꿈꾸어 온 존재이다. 백 만년 겨울잠의 기나긴 제의를 통하여 우리의 삶은 주어진 것이다. 우리 삶의 밑둥에는 백 만년의 지난한 세월을 견뎌온 뿌리가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단지 백 년을 사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백 만년을 몸으로 살아가는 푸른 생명나무이다. 그 생명나무가 가장 찬연한 열매를 맺는 그 순간, 그 절묘한 순간이 바로 지금 의 生이다. 그러기에 生은 저 영원의 빛의 드러남이다. 또한 지금의 生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구현 (Individuation)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어디론가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꿈은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에게 예언한다. 꿈이란 자기와 자아가 체험하는 두 지대의 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삶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중심의 소리이다. 꿈은 삶의 해리를 통합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고백하였다면, 융은 "꿈이 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지금 우리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꿈을 타고 우리에게 건너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서늘하게 만났던 융에 대한 감정은 이제는 따스한 할아버지로, 예리한 관조의 시선을 통 하여 우리의 상한 영혼을 치유해 주는 영혼의 의사로, 오늘의 가난한 마음과 가난한 문명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하는 천상의 헤르메스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꿈은 마음의 가장 깊고, 가장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門)이며 그 문은 저 우주의 태고적 밤을 향하여 연다. 그것은 아직 자아의식이 없던 시기의 마음이었고 자아의식이 일찍이 도달할 만한 곳을 훨씬 넘어서 있는 마 음이 될 태초의 밤이다.
- 칼 구스타프 융 -
*전철의 신학동네 발췌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아름다운 시간들 – 대학시절
▶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P175.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 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글쎄,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큰 세계를 기준으로 보자면 한 인간은 먼지 같은 존재이겠지. 그 먼지는 나름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날아다니고, 어딘가에 안착했다 또다시 날아가고…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살아온 날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도 우리는 주연이다.
▶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 정신의학에서 길을 찾다
P217. 나는 나의 숙명을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을 만큼, 그 정도로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중략) 결국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 환자들
P224. 얼마 지나지 않아 잠복기가 지나고 소녀는 장티푸스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녀가 무척 사랑하던 딸이었다. 남자아이는 감염되지 않았다. 그때 그 부인은 우울증이 심해져 병원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 우울증, 정말 심각한 질환이다. 자신 뿐 아니라 주변사람도 죽이게 되지… 그리고 그것이 잘못인 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냥 방치하고, 오히려 자신의 분노를 그렇게 표출하기도 하지… 상처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P224. 그렇다면 치료법은 어떠했는가? 그때까지 그녀는 불면증 때문에 최면제 처방을 받고 있었다. 또한 자살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감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 외 다른 치료는 시행되지 않았다. 그녀는 신체적으로는 건강한 편이었다.
P225. 내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사연을 조사한 다음 비로소 진정한 치료가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환자의 비밀이며 바로 거기서 좌절하고 만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치료의 열쇠를 지니고 있다.
→ 물론 정신의학, 심리학에서는 개인의 사연에 치료의 열쇠가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겪어 본 결과, 그래서?? 그것을 의사들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은 증상 완화를 위한 약물치료만 할 수 있다. 결국은 자신이 자신을 치료해야 한다. 직시해서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않으면 치료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당사자가 아니며, 문제에 대해 정말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해답의 자원은 자기에게 있는 법. 개인의 사연을 치료의 열쇠라고 하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P231. 그는 부자인 명문가 출신으로 마음에 드는 아내도 있고 이를 테면 외견상으로는 아무 걱정이 없는 듯했다. 다만 그는 술을 과음할 뿐이었다. 음주는 괴로운 상황을 잊기 위해 자신을 마취시키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 물론 이러한 방식으로는 그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절대 없지! 내 얘기구만
P233. 그는 이제 어머니로부터 벗어났고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가혹한 처방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는 훌륭한 경력을 쌓아갔다. 그의 아내는 나에게 감사했다. 그녀의 남편은 알코올중독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기 자신의 길을 아주 성공적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이것 역시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의사(융)의 처방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깨고 나와야 한다.
P236. 임상적 진단은 어떤 방향설정을 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지만 환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정적인 점은 환자 ‘사연’의 문제다. 그것이 인간적인 배경과 인간적인 고통을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사의 치료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사례가 이런 점을 나에게 아주 분명히 보여주었다.
P241. 여기서도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우둔하고 감정없이 멍청하게 행동하는 듯한 환자들의 마음속에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일, 훨씬 의미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 역시!
▶ 꿈의 분석
▶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P266. 나는 그가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그 공포를 건너뛰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환자가 자기 자신의 길을 감으로써 스스로 책임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나는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저항에 ‘지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진부한 가정에 동의할 용의는 없다. 저항은 특히 완강할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개 그런 저항은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경고를 뜻하기 때문이다. 치유에 효과적인 것은 독일수도 있어 모든 사람이 다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는 하지 못하도록 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그런 수술이 치료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 융의 이 말을 깊이 새겨놓아야겠다. 나에게 분명 이런 어려운 일이 앞에 닥칠 수 있으니, 현명하게 사람들을 대해야 겠다.
■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 카르마
P420. 어리석고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철학자 파우스트는 자신의 어두운 측면, 자신의 음흉한 그림자 메피스토텔레스와 맞닥뜨렸다. 메피스토텔레스는 그의 부정적인 본성에도 불구하고, 자살 직전까지 간 의기소침한 학자와는 대조적으로 참된 생명의 혼을 나타내고 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대극이 여기에 극화되어 있었다.
P421. 옛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악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큰 자유에 대한 희망은 국가에 대한 예속의 증대로 사그라들고 만다.
P422. 앞을 향한 개혁, 즉 새로운 방법 또는 ‘묘안’을 통한 개혁은 지금 당장은 확실하겠지만 길게 볼 때는 의심스러우며 어떤 경우에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즐거움,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대부분 실재의 허울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고 했다.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 환상들
▶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P516.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다. 나에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나’라고 말이다. ‘나’는 이를 테면 남아 있는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나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참으로 나라는 절실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나(자아)는 성취된 것과 지금까지 있었던 것의 그와 같은 묶음이다.’ 이런 체험은 나에게 극도의 결핍감을 안겨 주면서도 동시에 커다란 만족을 주었다. 내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즉, 나는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말살되고 빼앗기거나 약탈당했다는 느낌이 지배적이기도 했으나, 한순간 그런 느낌도 스러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지나간 듯이 여겨졌다. 하나의 기정사실만 남았다. 이전의 일들과 다시 어떤 연관도 맺지 않고 말이다. 어떤 것이 떨어져나갔다거나 빼앗겼다는 아쉬움은 이제 없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나라고 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오직 그것만을 가지고 있었다.
→ 지금의 ‘나’라는 인간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어떤 느낌이 들까?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글쎄 굉장히 유쾌하고 뭐 기본적인 예의도 갖춘 것 같고, 직장생활을 하고 그래도 의식이 있는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해 주겠지? 하지만 온전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면 똑같이 볼 수 있을까? 아니면 편견이 생길까? 조금의 틈은 생긴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지금의 모습을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모습이 온전히 내가 살아온 그 결과로 인해 발현된 모습이라면? 어떻게 볼까? 나는 과거의 나도 갖고 있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는데? 그럼 반대로 나는 당당할 수 있을까? 편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편견인가? 나는 과거의 나까지 지닌 온전한 나인데, 나 그리고 타인이 지금의 온전한 나를 받아들이는 것일까? 남을 의심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 역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의미인가? 그것은 아닌데 뭔가 찜찜하다. 하지만 만약 내년에 내가 원하는 강의를 하려한다면? 나는 남에게 더 당당하게 나를 오픈해야 하겠지?
▶ 융합의 신비
P523. 이 모든 체험은 장려했다. 나는 밤마다 참으로 진정한 환희에 젖었는데 ‘만물의 형상이 주위에 떠돌고’ 있었다. 환상의 주제들이 점점 뒤섞이고 희미해졌다. 환상은 대개 한 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그러고는 다시 잠이 들었고 아침 무렵이 되면 나는 벌써부터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이제 다시 회색아침이 오는구나! 이제 감방과도 같은 회색의 세계가 찾아오는구나! 얼마나 따분하며 얼마나 역겨운 난센스인가!’
P523. 그러고 나서 찾아노는 낮의 대비! 나는 낮에는 괴로웠고 신경이 완전히 지쳐 있었다.
P525. 내가 어제와 동시에 오늘과 내일 존재한다고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떤 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다른 것은 너무도 분명한 현재이며,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이미 끝난 일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그래도 하나였다. 감정이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작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지나간 일의 결과에 대한 만족이나 실망이 모두 포함된 하나의 총체, 다채로운 전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빠져들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지각하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였다.
P526~7.
병을 앓은 후에 나에게는 왕성한 연구시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많은 주요저작이 그후에 비로소 출간되었다. 만물의 종말에 관한 인식 내지는 직관으로,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요기를 갖게 되었다. 이제는 나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려고 애쓰지 않고 생각의 흐름에 나를 맡겼다. 그리하여 문제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나에게 다가와 무르익으면서 형상화되었다.
→ 병을 앓고 난 후에 모두 이런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연구를 시작했고, 만물과 대화를 시작했고,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자연스러움에 나를 맡겼고, 모든 것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나 역시 병을 통해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영원성과 불변성이다. 그것은 긍정과는 다르면서 같다. 조건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 존재를 존재하게 만드는 또 다른 존재가 서로에게 영원성과 불변성을 준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 역시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병의 초기에 나는 나의 태도에서 어떤 과오를 저질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사고가 어느 정도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람이 개성화의 길을 가는 중에, 즉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과오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원만해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과오나 치명적인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들은 아마도 안전한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은 자의 길일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떻든 그건 바른 길이 아니다. 안전한 길을 가는 자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 나는 나의 병에 대해 생각을 했고, 그 원인에 대해 생각을 했다.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 아니다 있다. 하지만 그 과오는 감수해야할 것이 아니다. 감수는 직시하지 않는 것이며,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과오는 감수의 대상이 아니라 인정의 대상, 즉 받아들임의 대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이유는 ‘나’니까 말이다. 과오를 감수한다는 것은 수동적인 태도다. 하지만 과오의 인정은 능동적인 자세며 전진의 자세다. 개성의 길을 가려면 감수가 아닌 인정을 해야한다. 안전한 길은 있다. 안전한 길이라고 해서 죽은 자의 길이 아니다. 능동적으로 안전의 길을 선택했고, 자신의 심적 안녕이 그곳에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맞다고 믿는 길이라면 죽은 길이 아니다. 죽은 길은 안전하다고 믿지 않고 가는 길이 죽은 자의 길이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닌가? 반대로 무슨 일이 일어나야만 바른 길인 것인가?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바른 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선택하고 그것에 만족하고 거기에 자신이 있다면 안전한 길은 가는 자는 살아있는 자다. 만약 노예처럼 가게 된 길이라면 모를까, 자신의 길을 가는 자를 죽은 자로 만들 권한은 누구에도 없다. 그리고 만약 안전한 길이 죽은 자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그 자신이 되어야 한다.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연속성이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숙명의 의도를 주제넘게 간섭하지 않을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다.
나는 또한 사람이 자기 자신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온갖 평가를 뛰어넘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옳으냐 그르냐 하는 범주는 항시 존재하지만 그것은 구속력이 없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존재가 주관적인 평가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가 또한 존재하는 생각으로서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도 전체성의 현상에 함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후의 삶에 관하여
▶ 꿈과 예감
▶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 단일성과 무한성
P562.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항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은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아마도 그것은 나의 조상이 이미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던 어떤 것일기도 모른다.
P572.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 개인적으로 나름 이 물음에 대해 나만의 답을 찾았다.
P572.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 내가 내린 결론과 비슷한데??
P573.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서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합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오로지 삶의 공간을 넓히고 합리적인 지식을 어찌해서든지 증가시키는 데만 관심을 두는 시기에는 자신의 단일성과 유한성을 의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단일성과 유한성은 동의어다. 이것 없이는 무한성을 지각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의식화라는 것도 없다. 단지 군중과 정치권력의 열광에서 표출되는 그런 것과의 망상적 동일시가 있을 뿐이다.
■ 만년의 사상
▶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P618.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집중하게 된다. 그것은 성찰의 영역 이외에 그보다 더 넓게 뻗어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만큼은 넓은 또 하나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영역에서는 합리적인 이해와 표현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것은 에로스의 영역이다.
P620. 사랑은 그의 빛이며 그의 어둠이며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 그가 “천사의 혀로 말할지라도” 또는 과학적인 정밀성으로 세포의 생명을 가장 깊은 바탕까지 주의깊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사랑에다 온갖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붙일 수 있겠지만 그는 단지 끝없는 자기기만에 빠질 뿐이다. 그가 한줌의 지혜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며 미지를 미지라고, 즉 신의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열등함, 불완전성, 그리고 의존성을 시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실과 오류 사이에서 선택의 자유를 증언하는 것이다.
■ 회고
P621.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아마도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 비밀로 가득 찬 세계
P623. 사람들이 나를 현명하다거나 ‘지자(知者)’라고 한다면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 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중략)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P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P629. 많은 일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졌으나 항상 나에게 이로운 것 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이 저절로 숙명적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내 고집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어리석은 많은 일을 후회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어리석음을 갖지 않았다면 나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나는 인간에게서 경이로운 것들을 경험했고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나 나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현상과 인간이라는 현상은 너무도 큰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그만큼 더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인식하지 못하게 되며 알지 못하게 된다.
P629. 나는 나 자신에 관해 놀라고 실망하고 기뻐한다. 나는 슬퍼하고 낙심하고 열광한다. 또한 나는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합을 계산할 수는 없다. 나는 어떤 결정적인 가치나 무가치를 확증할 입장이 못 된다. 나는 나 자신과 내 인생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내가 온전히 확신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확신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내가 태어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디에 실려다니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토대 위에 존재하고 있다. 온갖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존의 견고함과 내 존재양식의 연속성을 느끼고 있다.
P630. 우리가 태어난 이세계는 거칠고 잔혹하며 동시에 신성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무의미와 의미 중 어느 쪽이 더 우세하다고 믿느냐 하는 것은 기질의 문제다.
P630.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노자는 빼어난 통찰을 지닌 사람의 모범이다.
P630. 노년이란 그런 것이면서 또한 하나의 제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주 많다. 식물, 동물, 구름, 낮과 밤, 그리고 인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 등이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해 불확실해질수록 온갖 사물과의 친화성이 그만큼 더 높아진다. 그렇다. 마치 나를 그토록 오랫동안 세계와 갈라놓았던 저 생소함이 나의 내면세계로 옮겨와서 나 자신에 대한 예기치 않은 낯설움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