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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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저자에 대해
역자 : 조성기
조성기는『라하트 하헤렙』『야훼의 밤』을 필두로 한 종교 소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랑』 『우리 시대의 소설가』같은 세태 소설 등으로 이미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작가이지만 이것과 별개로 고전 연구가이기도 하다.
1951년 3월 30일 경남 고성에서 출생하여 부산중, 경기고를 거쳐 서울법대를 졸업했다.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시 카를 융 분석심리학에 기초한 논문「삼위일체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로 학위를 받았고, 카를 융의 분석심리학을 응용한 「마음의 비밀」강연회를 학교,기업, 각종 단체에서 수십차례 개최했다. 대학 재학 중이 1971년 소설 「만화경」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으며, 1985년 「라하트하헤렙」으로 제9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함으로써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1991년 중편 「우리 시대의 소설가」로 제1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그는 동양 고전을 번역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계속 해왔으며,『굴원의 노래』,『전국시대』,『맹자가 살아 있다면』 등은 그 성과물이다. 성경도 그에게는 중요한 서양 고전의 하나이다. 이런 이유로 한문을 계속 배우고 접해왔듯, 성경을 제대로 독해하고 이해하기 위해 히브리어를 공부했다. 고전 연구가로서의 그가 지금까지 동서양 고전을 통해 선대의 지혜를 이끌어내고 그것을 읽기 쉽도록 현대화했다면, 소설가로서의 그는 현세대의 문제점들을 부각시키는 작업들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장편소설로 『야훼의 밤』, 『슬픈 듯이 조금 빠르게』, 『가시둥지』, 『욕망의 오감도』, 『베데스다』, 『바바의 나라』, 『우리시대의 사랑』, 『굴원의 노래』, 『너에게 닿고 싶다』, 『천년 동안의 고독』,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 『전국시대』, 소설집 『왕과 개』, 『통도사 가는 길』, 『실직자 욥의 묵시록』, 『종희의 아름다운 시절』, 『우리는 완전히 만나지 않았다』, 『안티고네의 밤』,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 , 소설시 『내 영혼의 백야』, 저서 및 번역서로 『한경직 평전』, 『유일한 평전』, 『예수의 일기』(노먼 메일러), 『카를 융 자서전』(아니엘라 야페), 『삼국지』(모종강) 등이 있다.
언어와 인간, 종교, 자유 등 정신의 영역을 다루면서도 치밀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현실과 소설의 거리를 좁혀 나가는 표현력, 인간 본성을 비판하고 풍자하면서도 그에 대한 희망과 연민의 시선을 놓지 않는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세속에 대한 욕망과 초월, 그리고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 본연의 의미를 주로 종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관념 소설을 주로 집필하였으나, 그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갈등 양상과 역사 돌아보기 등 다채로운 영역을 부지런히 오가는 ‘우리 시대의 소설가’이다
II.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P.211
나는 아무도 나를 따라오려고도 하지 않고 따라올 수도 없는 옆길로 들어섰다가는 것을 분명히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러나 결심은 섰고 그것은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P.217
인간이란 스스로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들의 판결에 맡겨진 하나의 사건인 셈이다.
P.226
정신의학 사례 중 많은 경우 환자는 말하지 않은 사연을 가지고 있으며 대개 그것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는 개인적인 사연을 조사한 다음 비로소 진성한 치료가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환자의 비밀이며 바로 거기서 좌절하고 만 것이다.
P.229
내가 정신치료법을 시행하게 된 것은 이와 같이 한 어머니가 정신이 병든 아들 대신에 나를 자기 아들로 삼은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P.239
나는 바베트와, 그와 비슷한 다른 환자들의 사례를 열심히 살펴본 결과, 이제까지 정신병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던 많은 사실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정신이 돈' 것들만은 결코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 나는 그런 환자들에게도 그 배후에는 정상이라고 일컬을 수밖에 없고 그렇게 간주될 만한 '인격'이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따금 이러한 인격 역시 주로 목소리나 꿈을 통해 아주 이치에 맞는 발언과 항변을 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몸이 병들어 있는 중에도 이런 인격이 다시 전면에 나타나 환자를 거의 정상으로 보이게까지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P.241
환자를 연구함으로써 나는 피해망상과 환각이 일종의 의미의 핵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의 인격, 하나의 인생사, 하나의 희망과 욕망이 그 배후에 있었다. 우리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단지 우리의 문제일 뿐이다. 나는 정신병에 보편적인 인격심리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과, 여기서도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우둔하고 감정 없이 멍청하게 행동하는 듯한 환자들의 마음 속에도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많은 일, 훨씬 의미 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새로운 것이나 미지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P.243
겉으로 보게 되면 정신병 환자에게서는 비극적인 붕괴만이 보인다. 하지만 감추어져 있는 환자 영혼의 다른 측면의 삶을 보는 일은 드물다. 우리는 자주 환자의 외관에 속는다.
P.246
소녀시절에 당했던 근친상간으로 인해 그녀는, 세상의 관점에서는 굴욕을 느꼈지만 환상의 세계에서는 고양된 기분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소위 신화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었다. 근친상간은 전통적으로 왕과 신들의 특권이기 때문이었다.
P.251
의사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다룰 줄 알고 있을 경우에만 환자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
P.251
치료자는 자기 자신이 환자와의 대결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수시로 해명해야 된다. 우리는 의식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의식이 이 상황을 어떻게 체험하고 잇는가?" 하고 항상 자문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세심한 데까지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자기 자신을 환자와 마찬가지로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정에 따라서는 치료 전체가 빗나갈 수도 있다.
P.253
의사는 그 자신이 고통을 당할 경우에만 효과를 얻는 법니다.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P. 254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큰일입니다! 환자를 잘못 인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먼저 당신 자신을 분석하는 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P.260
모든 질투의 핵심은 사랑의 결여에 있다.
P.260. 원형적인 상황(이 사례에서는 죽음이라는 상황이지만)과 관련하여 종종 관찰되는 전형적인 동시성 현상이다.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P.264
나는 사람들이 인생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너무나 좁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삶에는 흡족한 내용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좀 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인격의 발달이라는 관념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P.267
내적 체험의 모험, 즉 영적인 모험은 많은 사람에게는 친숙하지 않다. 정신적인 실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파문에 해당한다.
P.272
단지 어떤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무엇보다 나 자신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오류와 실패로부터 배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P. 278
사람은 인생을 거짓 위에 세울 수 없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그와 함께 할 것입니다. 연구를 제한하고 진리를 숨기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나는 경력 따위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P.278
하지만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신경증이 성적 억압이나 성적 외상으로 인해 생긴다는 그의 주장은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떤 사례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맞았으나 다른 사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P.279
프로이트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 당시의 내 경험으로는 그 어떤 사람도 프로이트에 견줄 수 없었다. 그의 태도에는 진부함이 전혀 없었다.
P.287
마음의 진동 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진리의 전부인 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P.287
왜냐하면 신성한 힘이란 어떤 면에서는 진실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성한 힘의 체험은 사람을 고양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추락시키기도 한다.
P.288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제의 진리가 오늘은 허위가 되며, 그저께 잘못된 결론으로 간주되던 것이 내일은 하나의 계시가 될 수도 있다. 이럴진대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이 너무도 적은 심리학적인 사실들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덧없을 정도로 작은 의식이 어떤 것을 인식해주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아직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P.294
나는 진리탐구에 관심이 있는 것이지 개인적인 명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P.300
나에게 꿈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속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 식물이 가능한 자라나려 하고 동물이 가능한 한 먹이를 찾으려고 하는 것과 똑같이, 꿈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우리 자신이 근시안이어서 스스로를 속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지 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다.
P.301
프로이트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무의식과 무의식의 직접적 표현인 꿈을 자연의 과정으로 여겼다. 이 과정에는 무엇보다 요술이나 속임수, 그리고 어떤 자의적인 것도 끼어들 수 없다. 나는 의식의 잔꾀가 무의식의 자연과정에도 확대된다는 가정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반대로 나날의 경험을 통해 오히려 무의식이 의식의 경향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저항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P.302
자연(본성)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삶들은 물론 신경증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그들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주어야 한다.
P.303
나는 여전히 프로이트를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그에게 비판적이었다. 이런 분열된 태도는 내가 아직도 그 사태를 의식하지 못하고 어떤 성찰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모든 투사의 특징이다.
P.308
분석이 그들에게 뭔가 보다 나은 다른 것을 깨우쳐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론 그 자체로 그들을 묶어놓고 단지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결정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며 유치한 것들을 버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정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의지하여 설 수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어떤 삶의 방식도 그것이 다른 것으로 교환되지 않는 한 버릴 수 없다.
P.309
프로이트가 이론과 방법을 동일시하고 그것들을 교리화하려는 의도를 밝혔을 때 나는 더 이상 그와 협력할 수 없었다.
P.310
나는 고독해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것과 나의 확신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희생’장이 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통찰로 나는 다시 집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나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말이다.
P.311
프로이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신경증 환자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들의 독특한 개인적인 심리를 파고들어간 데 있을 것이다. 그는 환자의 사례가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개별적인 환자의 심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말하자면 환자의 눈으로 관찰했으며, 그 결과 병에 대하여 그때까지 가능했던 것보다 한층 더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
P.312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외람되게도 저 문을 열어 젖혀라. 사람마다 통과하기를 주저하는 저 문을.
P.315
나는 단지 질문만을 던졌다. “그것과 관련하여 당신에게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당신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까?”“그것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의 질문이었다.
316. 그 무렵 나는 이상하게도 명료한 정신상태 속에서 내가 걸어온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너는 이제 신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 그리고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문을 열려고 하는가?" 그러자 갑자기 내가 무엇을 이뤄왔는지 의문이 생겼다.
P.317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너는 어떤 신화 속에 살고 있는가?
P.320
"이토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둬보자." 그리하여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다.
P.321
“아하! 여기에 삶이 있구나!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내게 결여되어 있는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성인이 된 남자와 열한 살 소년을 서로 이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그 시절과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돌아가 아이의 놀이를 하면서 아이의 삶을 한번 더 살아보는 수 밖에 없었다. 이 순간이 내 운명의 전환점이었다.
P.322
물론 나는 내 놀이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자문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너는 종교의식을 치르듯이 작은 말들을 세워 완성해가고 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내 신화에 이른 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는 확신은 느끼고 있었다. 건축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것은 한줄기 환상을 풀어놓았다. 그 환상은 나중에 상세히 기록해두었다.
P.325
나는 자주 흥분되어 내 감정을 요가로 제어해야만 했다. 요가는 내가 안정되어 무의식과 더불어 다시 작업을 시도할 수 있을 때까지만 했다. 나 자신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갖자마자 나는 감정제어를 풀고 환상의 이미지와 내부의 소리가 새롭게 말하도록 했다.
P.326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그만큼, 다시 말해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그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만일 내가 감정에 나 자신을 내맡겼더라면 무의식의 내용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무의식의 내용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어쩔 수 없이 신경증에 걸렸을 것이고, 결국 무의식의 내용이 나를 파괴했을 것이다.
P.327
내가 이러한 시도를 하게 된 한 가지 중요한 동기는 내가 감히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을 나의 환자에게 기대할 수는 없다는 확신이었다. 돕는 자가 환자 옆에 있지 않느냐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P.328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환상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나 자신을 그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해야만 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저항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무척 불안하기도 했다. 자기 제어력을 잃어버리고 무의식의 제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신과의사로서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미지들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감행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미지들이 나를 자기들 것으로 삼았을 위험성이 있었다. 내가 이러한 시도를 하게 된 한 가지 중요한 동기는 내가 감히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을 나의 환자에게 기대할 수는 없다는 확신이었다.
P.332
"의지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도 그와 같이 하려고 했다.
나를 수행하여 그 암살을 주도한 갈색 피부의 원시인은 원시적 '그림자(그늘)' 화신이었다. 비는 의식과 무의식의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가리켰다.
P.334
살로메는 하나의 아니마 형상이다. 그녀는 사물의 의미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님이다. 엘리야는 지혜로운 노인 예언자의 모습으로 인식의 요소를 나타내지만, 살로메는 애욕의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두 형상은 로고스와 에로스의 화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P.338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구루로 삼지만, 늘 영혼을 구루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는 나를 위로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그러니까 나는 결코 인간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가 아니었다.
P.341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은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중략)
매일 저녁 나는 글쓰는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의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성실한 글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적어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가지고 책략을 쓰지도 못할 것이었다.
P.342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P.343
10년 동안 나는 기분이 언짢고 안정을 잃었다고 느끼면 늘 아니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면 무의식에 무언가 배열이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아니마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또 무엇을 하려는 거요?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소? 나는 그것을 알았으면 하오!” 조금 저항을 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본 이미지를 항상 도출해냈다. 그 이미지가 나타나면 불안이나 우울은 사라졌다. 내 감정의 에너지 전체는 그 이미지 내용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면 나는 그 이미지들에 관해 아니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꿈을 이해하듯 그 이미지를 가능한 한 잘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P.344
많은 환상이 든든한 토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내가 우선 인간적인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현실이란 과학적인 이해를 의미했다. 무의식이 내게 가져다 준 통찰을 통해 나는 구체적인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과제의 요점이 되었다.
P.345
삶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언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언어가 삶을 대체하려고 시도한다면 언어뿐 아니라 삶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중략)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것이다.
P.346
환상에 관한 작업을 하던 바로 그 무렵, 나는 ‘이승’에 발판이 필요했다. 그것은 가족이며 직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낯선 내면세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대극,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었다. 가족과 직업은 내가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기반으로 남아 있었고, 그것은 내가 실제로 현실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임을 증명했다.
P.347
내가 체험한 모든 것은 나의 실제적인 삶과 연결됨을 나는 알고 있었고 삶의 의미를 폭넓게 채우고자 노력했다. 나의 좌우명은 ‘도전에 맞서 싸워라!’였다.
P.349
“적합하면 그것은 나타난다!” 지적인 측면에서는 물론 거기에 대해 자연과학적 인식을 장황하게 떠벌릴 것이고, 심지어 그 모든 체험을 변칙적인 것이라 하여 지워버릴 것이다. 변칙이 없는 세계는 얼마나 암울한 것인가!
P.350
이로써 내가 나 자신에게만 속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내 인생은 보편성에 속하게 되었다. 나는 원초적인 체험을 스스로 겪어야 했고, 더 나아가 내가 체험한 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세우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P.351
나는 영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기로 했다. 나는 그것을 사랑하면서 미워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아주 귀중한 보배였다. 내가 그 영혼의 말을 받아 쓴 것은 내 존재가 비교적 전체성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P.353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이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P.354
내가 심적 체험의 내용이 ‘진실’이며 그것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집단적 체험으로서도 진실이라는 사실을 남에게 제시해줄 수만 있다면, 바깥세계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 일이야말로 가장 철저한 노력을 요할 것이었다.
P.357
그 모든 것, 내가 걸어온 모든 길, 나의 모든 발걸음이 하나의 점, 즉 중심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다라가 중심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것은 모든 길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중심을 향한 길, 즉 개성화의 길이다.(중략)
나는 정신적 발달의 목표가 ‘자기’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직선적 발달은 없고 다만 자기를 중심으로 한 순환이 있을 뿐이었다..자기의 표현인 만다라로 인하여 나로서는 궁극적인 것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P.359
내 동반자들은 지독한 날씨를 탓하기만 했지 그 나무는 아마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나는 꽃이 핀 나무와 햇빛에 빛나는 섬이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는 그가 왜 여기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알겠다.’ 그러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P.360
나는 그 꿈속에 삶의 목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중앙이 그 목표다. 누구도 중앙을 넘어서 갈 수 없다. 그 꿈에서 나는 ‘자기’가 방향성과 의미의 원리이며 그것들의 원형임을 이해했다. 그 안에 치유의 기능이 들어있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나는 내 신화에 대한 예감을 처음으로 가졌다.
P.361~362
나의 내적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그 무렵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세부적인 것은 단지 보충하거나 명료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기간에 무의식에서 솟아나봐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은 필생의 작업을 위한 원재료였다.
P.365
나는 내적 체험에 관해 역사에서 예시의 증거를 찾아야만 했다. 다시 말해 나는 “나의 가설이 역사 속에서 어디에 나타나는가?”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중략)
분석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자연과학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다른 학문보다도 훨씬 더 관찰자의 개인적인 가설에 영향을 받기 쉽다. 그러므로 적어도 심각한 판단착오만이라도 범하지 않으려면, 심리학자는 역사나 문헌에서 찾은 유래에 많이 힘입어야 한다.
P.374
나의 생애는 하나의 과제,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즉, 인격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과제요 목표였다.(중략)
나는 그 모든 경험을 객관적으로 보고 거기에 관해 사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 나 자신에게 던진 첫 질문은 ‘무의식과 더불어 무엇을 하는가’였다. 거기에 대한 회답으로 저술된 것이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였다.
P.377
내가 심리학을 위해 이루려고 한 것은 자연과학영역의 일반적인 에너지론과 같은 그러한 통일성이었다. 나의 저서 <정신의 에너지에 대하여(1928)>에서 내가 목표로 삼고 추구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P.382
목수의 아들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고 세상의 구주가 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일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그 시대의 기대를 그토록 완벽하게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격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인간 예수 이외의 그 누구도 그와 같은 메시지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다.
P.387
그리스도에 의해 제시되고 예고된 고통을 죽을 때까지 문자 그대로 체험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결과라고는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했다.
P.398
오늘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직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토록 성공을 거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더 많이 더 훌륭하게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P.404
처음부터 탑은 나에게 성숙의 장소였다. 즉, 그 안에서 내가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로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자궁, 모성적 이미지 장소였다. 탑은 내가 돌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P.407
시간은 어린이다. 어린이처럼 놀며 장기를 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P.421
옛 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P.422
앞을 향한 개혁, 즉 새로운 방법 또는 '묘안'을 통한 개혁은 지금 당장은 확실하겠지만 길게 볼 때는 의심스러우며 어떤 경우에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즐거움,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대부분 실재의 허울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P.437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린이나 원시인을 보게 되면 성숙한 문화인의 마음속에, 채우지 못한 욕구와 필요로 말미암은 갈망이 일어난다. 이것은 적응상태, 즉 페르소나 (자아가 외부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세계가 바라는 대로 보여주는 모습-옮긴이)를 위하여 인간의 전체상에서 떨어져나간 인격부분에 해당된다.
P.439
우리는 그것을 의식 속에 붙잡고,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 것인가, 잊혀진 것을 회복할 것인가, 두 가지 가능성을 두고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그것이 충분한 이유 없이 다시 그러한 발언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P.439
살아있는 정신구조에서는 단순히 기계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관리되며 전체와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특정한 목적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의식은 전체에 대한 조망이 없으므로 대개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사실확인으로 그쳐야 하며, ‘자기의 그림자’와의 충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회답은 앞으로 진전되는 미래의 연구에 맡겨두어야 할 것이다.
P.449.
산에서 흘러내리는 강을 바라보니 이런 견해가 생겨나게 된 외적 이미지가 어떠한 것인가 알 것 같았다. 분명 여기서는 모든 생명이 산에서 나왔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상으로 명백한 것은 없다. 나는 그의 물음에서 '산'이라는 말과 함께 고양되는 감정을 느꼈고, 그 산 위에서 거행되는 은밀한 의식에 관한 소문을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누구든지 당신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오."
P.450~451
그 순간 나는 인디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젓한 자기 확신감과 '위엄'이 어디서 나오는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그는 모든 생명의 아버지요 보존자인 태양이 날마다 떠오르고 지도록 돕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순전히 질투심으로 인디언의 순진함을 슬쩍 비웃고 우리가 그들보다 영리하다고 여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빈약하며 쇠락한 가운데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P.452
인간이 신의 압도적인 작용에 충분히 응답할 수 있으며 반대로 신에게조차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 개인을 형이상학적 요소를 지닌 위엄에까지 이르도록 고양하는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 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P.456
. 그 짐승들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며 풀을 뜯고 머리를 끄덕이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맹금의 침울한 소리 외에는 거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까마득한 태초의 정적이요, 언제나 비존재의 상태로 있어온 듯한 세계였다. 나는 동반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혼자라는 느낌을 가져보았다. 그때의 나는, '이것이 그 세계다!'라고 인식하고 자신의 지식으로 그 세계를 방금 이 순간 실제로 만들어낸 최초의 사람이었다.
P.457
여기서 의식의 우주적 의미가 더한층 분명해졌다. 연금술에서는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 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인간인 내가 보이지 않게 창조행위를 하고 있는 그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로 완성되도록 해주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를 창조주의 몫으로만 돌려왔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인생과 존재를 정확하게 계산된 기계, 즉 인간정신과 함께 예지되고 예정된 법칙에 따라 무의미하게 계속 가동되는 기계라고 여기고 있음을 생각지 못한다. 그와 같이 암담한 태엽장치식 환상에는 인간과 세계와 신의 드라마가 없다. 거기에는 '새로운 해안'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날'이 없다. 단지 계산된 황량한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P.P463
나의 흑인들은 대부분 뛰어난 성격감정가임이 증명되었다. 그들의 직관적인 인식방법 가운데 하나는 상대방의 말씨, 몸짓, 걸음걸이를 기가 막히게 흉내내면서, 이런 방식으로 상대방이 되어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다른 사람의 감정의 특성을 꿰뚫고 있는 데 놀랐다. 나는 거리낌없이 그들과 오랫동안 환담을 나누었는데 그들은 그런 대화를 매우 좋아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P. 467
그것이 여자에게 품위와 자기확신감을 주었다. 여자는 강력한 동업자인 셈이었다. '여성의 평등권'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동반관계가 의미를 잃어버린 시대의 산물이다. 하지만 원시사회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여자가 바라는 대로 무의식적으로 충분히 잘 조절되고 있다.
P.470
나는 아직도 원시 그대로인 땅에서 '신의 평화'를 만끽했다. 나는 헤로도토스가 말한 '인간과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일찍이 그와 같이 관찰한 적이 없었다. 온갖 마귀의 어머니인 유럽과 나는 수천 킬로미터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귀들이 이곳까지는 미칠 수 없었다. 전보도, 전화도, 편지도 방문도 없었다! 그것이 '부기슈 심리학 탐험'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였다. 나의 해방된 정신력은 큰 기쁨을 안고 태고의 광대한 곳으로 역류하고 있었다.
P.477
그래도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적도의 어둠 속에서 돌발적으로 첫 햇살이 섬광처럼 분출하는 순간이다. 그 생명력 넘치는 빛 속에서 밤은 사라지고 만다.
P.478
그 무렵 나는 마음속에 태초로부터 빛에 대한 동경이 깃들어있다는 것과 태초의 어둠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절실한 갈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대한 밤이 오면, 모든 것은 빛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그리움과 깊은 우수의 음조를 띠게 된다. 이것은 원시인의 눈빛에 들어 잇고 또한 짐승의 눈에서도 볼 수 있다. 짐승의 눈에는 슬픔이 베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짐승의 혼인지 혹은 저 태초의 존재가 표현하는 간절한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
P.478~479
이것이 아프리카의 분위기이며 그곳의 고독에 대한 체험이다. 그것은 태초의 어둠이며 모성적인 비밀이다. 그러므로 아침마다 태양의 탄생은 흑인들을 압도하는 경험이 된다. 빛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신이다. 그 순간이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순간의 원초적 체험이다.
P.490
인도의 정신성이 선과 악을 똑같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것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기독교인은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에 빠진다. 이에 반하여 인도인은 선과 악의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거나, 명상이나 요가로써 이러한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P.491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대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면 거기에 해당하는 영혼의 부분을 그만큼 절단하는 셈이 된다.(중략)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P.495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뜻에서 그러하다.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테면 이성적 통찰로써,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P.496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성적 통찰로써,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P.500
낮이 잊어버린 신화를 밤이 계속 이야기하고, 의식이 평범하게 만들어버리고 우스꽝스럽고 하찮은 것으로 축소시켜버린 그 거대한 모습들을 시인이 다시금 일깨우고 선견지명으로 살려낸다.
P.516
나는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즉, 나는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말살되고 빼앗기거나 약탈당했다는 느낌이 지배적이기도 했으나, 한 순간 그런 느낌도 스러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지나간 듯이 여겨졌다. 하나의 기정사실만 남았다. 이전의 일들과 다시 어떤 연관도 맺지 않고 말이다. 어떤 것이 떨어져나갔다거나 빼앗겼다는 아쉬움은 이제 없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나라고 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오직 그것만을 가지고 있었다.
P.521
나는 우주공간을 떠다니며 우주의 성 안에서 보호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대한 허공이지만 가능한 모든 행복감으로 충만했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원한 지복이었다 .
P.527
그런데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 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는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연속성이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P.533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가 있고 치유를 가져오는 법이다. 우리는 타고난 구조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고, 그리하여 우리의 존재와 사고로써 이 세계와 관련을 맺는다.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나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야 말로 쓸모 없는 사변일 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력이며 인간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 그 광채를 사람들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P.535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한 해답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P.536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동시성현상과 예언적인 꿈, 예감들을 생각해보라!
P.539
신화는 과학의 맨 처음 형태다. 내가 사후의 일들에 관해 말할 때 나는 내적 감동으로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 관한 꿈과 신화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진전할 수 없을 것이다.
P.542
그 신화는 그의 눈앞에 다른 이미지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것은 유익을 주며 정신을 풍성하게 하는 사후세계 삶의 이미지들이다. 그가 이미지들을 믿거나 약간만 신뢰하더라도 그것들을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무(無)'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두 사람 다 불확실성 속에 있다. 그런데 전자는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고 있고, 후자는 본능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현저한 차이이며 후자에게 이로운 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P.546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죽은 자에 비해 유리하다. 즉, 명쾌하고 결정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P.547
많은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미치지 못한 채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생존 시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생전에 습득하지 못한 의식적 부분을 죽음에서 얻으려고 요구하게 된다
P.551
오직 이곳, 대극이 서로 부딪치는 지상의 삶에서만 일반적인 의식은 고양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형이상학적 과제로 여겨지는데 '신화화'가 없이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채워질 수 있을 뿐이다.
P.552
신화는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 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인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오직 우리가 무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확충하여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줄 때에만, 앞에서 수를 예로 들어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이해의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측면이 우리에게 지각된다. 이러한 과정은 성공적인 꿈 분석이 이루어질 적마다 확실한 방법으로 항상 반복된다. 그러므로 꿈의 진술과 관련하여 교조적인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해석의 획일화’가 눈에 띄는 즉시 우리는 그 해석이 교조적이며 따라서 비생산적임을 알게 된다.
P.555
그 대극은 죽음이 한 번은 자아의 관점에서, 또 한 번은 영혼의 면에서 표현된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겠다. 전자의 경우 그것은 재앙으로, 악하고 무자비한 힘이 한 인간을 때려죽인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P.558
시공간의 상대성 때문에 무의식은 지각만을 처리하는 의식에 비해 더 나은 정보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후의 생에 대한 우리의 신화와 관련하여 꿈이 주는 약간의 암시나 이와 비슷한 무의식의 자발적인 발현을 통해 가르침을 받고 있다.
P.561
부처는 제자들이 니다나(인연)사슬을 명상하는 것, 다시 말해 출생, 삶, 늙음과 죽음, 고통스러운 사건들의 원인과 작용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욱 유익하리라고 여겼다.
P.562
나의 존재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은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P.565
내적 이미지는 개인적인 회고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외적 사건의 기억에만 얽매여 있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그 속에 갇혀 있는 반면, 자신을 성찰하고 이미지로 바꾸는 회고는 '전진을 위한 후진'을 의미하게 된다. 내 인생을 통하여 이 세계 안으로 이끌었고 다시 이 세계에서 밖으로 인도하는 그 줄(노선)을 보려고 시도한다.
P.567
카르마가 남아 있어 마무리를 해야 한다면 혼령은 다시 돌아오고 싶은 욕구에 빠지고 도로 삶을 취하게 된다. 심지어 무엇인가 더 완성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P.571
‘다른 쪽’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적 존재가 참다운 것이며 우리의 의식세계는 일종의 환각이거나 일정한 목적을 위해 세워진 하나의 가상적 현실임을 가리키고 있다.
P.572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있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 재능이나 '나의' 미모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P.573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서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합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P.583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P.584
우리의 신화는 벙어리가 되었고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 잘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신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런 방면의 온갖 시도를 억압한 우리 자신에게 있다.
P.589
해결은 사람들이 그렇게 일컫는 바와 같이 '은혜'로 여겨진다. 해결은 대극의 대립과 쟁투에서 나오므로 그것은 대개 의식에 있는 것과 무의식에 있는 것이 섞인, 깊이를 알 수 없는 혼합물, 그러니까 일종의 상징이다.
P.594
인간은 성찰하는 정신 덕분에 동물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게 되며, 그는 인간 본성이 특히 의식의 발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그의 정신을 통하여 증명한다. 의식의 발달을 통하여 그는 자연을 소유하고 그 안에서 세계의 현존을 인식하며 이를테면 창조주를 입증한다. 이로써 세계는 현상이 된다. 의식적인 성찰 없이는 그렇게 될 수 없는 법이다.
P.596
우리가 우주에서의 인간실존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하나의 관념을 가진다면, 다시 말해 마음의 통합성, 즉 의식과 무의식의 협력이 이루어지게 하는 근원인 그러한 관념을 가진다면, 신화적 진술에 대한 욕구는 충족되는 셈이다. 무의미는 생의 충만을 방해하고 그렇기 때문에 질병을 뜻한다. 의미는 많은 것을, 거의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도록 해준다.
P.598
신의 경우 대극의 복합으로서 의미심장한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진실과 허구, 선과 악이 다 될 수 있다. 신화는 델피의 신탁이나 꿈처럼 이중의미를 지니고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또한 욥이 이미 파악했듯이, 본능이 우리를 긴급히 도와주고 신이 신에 맞서 우리를 지지해주리라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P.607
자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호조치의 도움으로 수천 년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아라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모든 대극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현상은 뜨거운 것과 찬 것, 높은 것과 깊은 것의 충돌 등에서 시작되는 에너지론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의식된 정신생활의 기초가 되는 에너지는 이런 현상들보다 먼저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무의식적이다. 그런데 그것이 의식화되기 시작하면서 우선 마나, 여러 신, 데몬 등과 같은 형상으로 투사되는 듯이 보인다. 그것들의 누멘이 인생을 결정하는 힘의 원천으로 여겨지는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이러한 형태로 관조하는 한 실제로 그러하다.
P.611
우리는 한 분야에서 인식한 것을 다른 분야로 옮겨와서 실제로 응용해볼 때 소위 발견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X광선이 물리학적 발견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의학에서 응용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숨겨진 채 남아 잇는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P.612
예컨대 내가 역사적이거나 신학적인 통찰을 정신요번분야에 응용한다면, 물론 그것은 다른 목적을 가진 전문분야에 한정된 채 남아 있을 때하고는 다른 조명을 받으며 드러날 것이고 다른 결론으로 이끌어질 것이다.
P.620
사랑은 그의 빛이며 그의 어둠이며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 그가 "천사의 혀로 말할지라도" 또는 과학적인 정밀성으로 세포의 생명을 가장 깊은 바탕까지 주의 깊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사랑에다 온갖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붙일 수 있겠지만 그는 단지 끝없는 자기기만에 빠질 뿐이다. 그가 한줌의 지혜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며 미지를 미지라고, 즉 신의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열등함, 불완정성, 그리고 의존성을 시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실과 오류 사이에서 선택의 자유를 증언하는 것이다.
P.623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 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 강물이 아니다. 나는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그들은 대개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이상 없기 때문이다." 강물을 길으려면 허리를 얼마만큼은 굽혀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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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었을 때 나는 외로움을 느꼈는데 지금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대부분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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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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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내적인 세계와 접촉하고 있는 한 나는 많은 사람과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나를 그들과 연결해주는 것이 이제는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비록 사람들이 나에게 말할 것이 더 이상 없다 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거기 있다는 사실을 배우느라 애를 먹었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 생동하는 인간성을 느끼도록 일깨워주었으나 그것은 그들이 심리학의 마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 나타났을 때뿐이었다. 다음 순간, 탐조등이 그 빛을 다른 곳으로 향하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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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동시에 훨씬 덜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다이모니온이 잠잠해진 곳에서만 사람들과 중간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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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일어난 것들은 그야말로 기대 밖의 일들이었다.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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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런 어리석음을 갖지 않았더라면 나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나는 인간에게서 경이로운 것들을 경험했고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나 나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현상과 인간이라는 현상은 너무도 큰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그만큼 더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인식하지 못하게 되며 알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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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노자는 빼어난 통찰을 지닌 사람의 모범이다. 그는 가치와 무가치를 보았고 경험했으며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 인식할 수 없는 영원한 의미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인생을 충분히 보아온 노인의 원형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지능의 어떤 단계에서도 이 유형의 등장하며, 그것이 늙은 농부든 노자와 같은 위대한 현인이든 동일한 유형이다.
III.네이버 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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