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gum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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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에 대하여
융의 이론
융은 분석심리학을 만들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는 구별된다. 융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분석심리학을 탄생시켰다. 융은 1913년 프로이트의 리비도의 정의를 확대시킨 자신의 심리학을 분석심리학으로서 공표함과 동시에, 프로이트 및 그 학파와 결별했다.
프로이드(Freud) | | 융(Jung) |
무의식에 의한 수동적 존재 | 인간관 |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통합적 존재 |
성적에너지 | 리비도 | 일반적인 생활에너지 |
5세 이전에 결정 | 성격발달 |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짐 (생애후반기 심리학) |
무의식이 인간성격 결정 | 무의식 |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 무의식과 의식간의 대립 |
5세 이전의 정신적 외상(원인)의 발견 및 치료 | 정신병리 | 정신의 전체성을 확보하지 못해서 발생, 의미의 발견 및 치료 |
서양적 의료주의적 사고체계 | 사고체계 | 동양적 신비주의적 사고체계 강조 |
융의 분석심리학은 성격에 대한 정신분석 이론보다 훨씬 덜 결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성이나 공격성을 덜 강조하는 반면에 신비하고 종교적인 역사나 문화적 배경을 강조하고 있다. 융은 개인적 무의식 외에도 집단적 무의식의 개념을 정립하고 신화나 상징적인 것들 속에 집단적 무의식이 표현되어 있다고 했다. 따라서 융의 분석심리학에 있어서는 개인의 경험이 무의식에 억압되어 있는 것을 의식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집단적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분석심리학에서는, 무의식에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특징만이 아니라 건설적이고 창조적 측면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파생된 것들로는 MBTI, 내면아이 등이 있다.
융은 무의식을 개인 및 집단 무의식으로 구분하였다.
개인 무의식은 일상적 체험과 관련하여 발생한 에너지의 공간으로서 의식에 인접해 있는 부분으로 쉽게 의식화될 수 있는 망각된 경험이나 감각경험으로 구성된다. 개인무의식의 자료는 개인이 과거에 경험한 내용에서 비롯된다. 이런 점에서 개인무의식은 프로이트의 전의식과 유사한 개념이지만 무의식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개인무의식은 의식되었지만 그 내용이 중요하지 않거나 고통스러운 것이므로 망각되었거나 억제된 자료들의 저장소이라는 것이다. 즉,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의식에 도달할 수 없거나 또는 의식에 머물 수 없는 경험은 모두 개인무의식에 저장된다. 개인무의식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인자는 콤플렉스(Complex)이다. 콤플렉스는 인간 정신의 한쪽에 뭉친 비정상적 에너지의 다발로서 그 자리에 닿는 순간 정상적 정신 에너지는 지체된다.
․ 콤플렉스(Complex)
개인 무의식에는 콤플렉스가 포함된다. 콤플렉스란 현실적인 행동이나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감정적 관념, 인간의 행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욕망이나 기억을 뜻한다. 또한 억압된 불쾌한 생각 또는 감정적 색채를 띤 표상이다. 콤플렉스는 무의식적인 것이며 심하면 꿈과 히스테리 증상을 일으킨다고 정신분석학에서는 말한다. 강한 감정적 경험은 오래 의식 속에 남아 있으며, 특히 그것이 현실 의식과 반발하는 성질의 것일 경우에는 무의식 속에 억압된 채 존재하여 거기서 여러 가지 작용으로 간접적으로 현실의식을 제약한다고 본다. 그 예로 어머니 콤플렉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세 콤플렉스 등을 들 수 있는데, 후자의 두 가지 콤플렉스는 정신분석 문헌에서도 종종 언급된다.
집단 무의식은 인류 전체가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무의식의 특징이다. 정신분석학의 성격이론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다. 집단 무의식에 대해서는 두가지 이론이 있는데, 첫째로 유전에 의해 무의식이 전해내려와서 같은 무의식을 지니게 됐다는 이론. 둘째로 보이지 않지만 인간들은 무의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 라고 융은 설명했다.
인간의 성격구조와 기능의 기초가 된다. 어떤 사물, 인간, 사태에 대해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모든 반응의 양식을 집단 무의식이 이루게 된다. 집단 무의식은 인류가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경험을 통해서 저장해 온 모든 잠재적 기억의 흔적이다. 칼 융은 마음이 병든 사람이 겪는 현상이 온 인류에게 태고적부터 이어져오는 심상이나 상징의 집단 공유적인 저장고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다.
원형(아키타입)은 특정 시대나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형태를 지닌' 이미지나 심상을 말한다.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전 시대와 문화에서 나타나는 원형도 존재한다.
특정한 문화권이나 인종에 속한 사람들이 같은 유형의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면, 그들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정신적 반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무의식적 경향이나 특질이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것이다. 원형은 역사를 통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해져온다고도 한다. 주목할 점은 역사적으로 교류가 전혀 없던 두 문화권들 사이에서도 동일한 원형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원형은 밤에 보는 꿈의 이미지나 상징을 낳는 근원이 되는 존재다.
성격의 주요한 구성 요소이기도 한 원형의 수는 무수히 많다. 예를 들어 신, 악마, 부모, 대모, 현자, 사기꾼, 영웅, 지도자 등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며 형성해온 수없이 많은 원초적인 이미지가 원형이다. 융이 언급한 인간 정신에 속하는 대표적인 원형으로는 페르조나,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림자, 자기의 다섯 가지가 있다.
융은 말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 융이 말하는 '자기'의 실현이란 일종의 형식적인 틀일 뿐이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내용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사람에게는 자기 실현이 종교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학문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운동을 통해 일어날 수도, 대인관계를 통해 일어날 수도, 직업을 통해 일어날 수도 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자기 실현의 방식과 목표가 있다. 따라서 각자의 무의식을 움직이는 내면적 힘은 모두 다르다. 그리고 이 개인적인 삶의 맥락과 무의식 성숙의 맥락 속에서 꿈의 상징들이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315. 프로이트와 결별한 후 얼마 동안 나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방향상실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말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 같다. 프로이트의 수제자라는 말까지 들으면서 관계를 유지했는데 결별하기가 쉬웠겠나. 학문적 성공이나 부, 명예 모든 것을 따져봤을 때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게 더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결별을 선택했다. 자기 길에 대한 명확한 의지가 돋보인다.
315. 해석은 환자의 대답과 연상에서 자연히 도출되는 듯 했다. 나는 이론적인 관점을 모두 접어두고 환자가 꿈의 이미지를 스스로 이해하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316. 꿈은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사실이다.
꿈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기분 나쁜 꿈을 꾸면 그냥 재수없다고 생각했었고 말도 안되는 꿈을 꾸면 개꿈이라고 생각했다.
316. 나는 생각했다. ‘너는 이제 신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 그리고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모든 문을 열려고 하는가?”
316. 그런데 오늘날 인간은 어떤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기독교 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너 자신은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솔직히 말해, 아니오! 나는 그 신화속에서 살고 있지 않소”
318.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환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319. 나는 무의식에는 고대 체험의 유물이 남아 있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 꿈과 비슷한 꿈들과 무의식의 실제 체험을 통해 나는 이 유물이 결코 죽은 형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정신에 속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었다. 나는 내 후기연구에서 이 가정을 증명했으며, 여러 해가 지나면서 이것으로부터 원형설이 발전되어 나왔다.
320. 이런 꿈들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나 방향상실의 느낌을 지워주지는 못했다.
320. “이토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둬보자.” 그리하여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다.
모든 일들이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안 풀릴때는 그냥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두면 어느순간 답이 나오더라.
321. 아이의 놀이를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정말로 아무것도 없을 때 크나큰 체험과 굴욕감의 고통이 따랐다.
이런 감정 속에서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시도했을 것이다.
322. 내 신화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는 확신은 느끼고 있었다. 건축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것은 한줄기 환상을 풀어놓았다.
322. 내 후반기 인생에서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언제난 그림을 그리거나 돌을 다루었다.
무언가 돌파구를 만들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이 필요하긴 하더라. 나에겐 음악을 듣는 것처럼.
322. 아내의 인생 완결, 종말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내게 명료하게 다가온 인식들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사납게 잡아채갔다. 나는 나를 다시금 안정시킬 필요를 매우 절실하게 느꼈고, 돌과 접촉함으로써 도움을 얻었다.
322. 내가 혼자사 여행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환상이 나를 압도해버렸다. 나는 북해와 알프스산 사이의 지대 낮은 북쪽 나라들을 모두 삼키는 무시무시한 홍수를 보았다.
꿈이 아니라 환상을 보았다고 했다. 환상이란 무얼까.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환상을 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플 때 내가 붕 떠있는 듯한 느낌외에는 환상을 본적이 없는 것 같다.
323. 어느새 바다는 피바다로 변했다. 이 환상은 한 시간 가까이나 지속되었다. 나는 혼란스럽고 역겨워지면서 나 자신의 연약함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323. 나는 그 환상이 혁명을 의미하는지 자문해보았으나 그런 일을 상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이 나 자신과 관계된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내가 정신병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추측했다.
324.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제 나의 과제는 분명해졌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나 자신의 체험이 집단의 체험과 어느 정도까지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만 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을 성찰해야 했다.
얼마나 섬뜩했을까. 환상과 꿈이 이런 것을 계시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325. 내가 그것을 견뎌낸 것은 맹목적인 힘을 지닌 하나의 문제 덕분이었다. 다른 것들은 그 뇌우에 부서지고 말았다. 니체와 흴덜린과 그 외 많은 것이 부서졌다. 그러나 내 안에 마력 같은 힘이 있어, 내가 환상에서 겪은 것의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 되도록 처음부터 나를 붙들어주었다. 내가 노도와 같은 무의식의 엄습을 견뎌냈을 때, 보다 높은 어떤 의지에 순종하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고, 그러한 느낌은 나의 과제를 수행하는데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
325. 나는 자주 흥분되어 내 감정을 요가로 제어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경험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기 때문에, 요가는 내가 안정되어 무의식과 더불어 다시 작업을 시도할 수 있을때까지만 했다.
1914년도에 요가를 했다고 한다. 정말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으며, 여자가 아닌 남자가. 요가는 어찌보면 명상과 유사한 프로그램이 아닐까.
326.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그 만큼, 다시 말해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그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만일 내가 감정에 나 자신을 내맡겼더라면 무의식의 내용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무의식의 내용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어쩔수 없이 신경증에 걸렸을 것이고, 결국은 무의식의 내용이 나를 파괴했을 것이다. 나의 실험을 통해 나는 감정 배후에 숨은 이미지를 의식화시키는 것이 치료의 관점에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알았다.
약물에 의한 겉만 치료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면에 있는 근원에 대한 치료없이는 안될 것이다.
327. 가장 심각한 어려움들 중 하나는 나의 부정적 감정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 그것을 견뎌내려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었다. 나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야 비로소 그 미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327.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환상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나 자신을 그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해야만 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저항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무척 불안하기도 했다. 자기 제어력을 잃어버리고 무의식의 제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신과의사로서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미지들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감행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미지들이 나를 자기들 것으로 삼았을 위험성이 있었다.
327. 내가 이러한 시도를 하게 된 한 가지 중요한 동기는 내가 감히 스스로 행할수 없는 것을 나의 환자에게 기대할 수는 없다는 확신이었다.
내가 모른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수 없듯이. 아주 중요한 자세이다.
필레몬과의 대화
330. 나는 이 환상으로 몹시 충격을 받았다. 물론 나는 환상의 주제가 영웅과 태양 신화이며 죽음과 부활의 드라마라는 것을 알았다. 이집트의 갑충은 재생을 상징하고 있었다.
331. “너는 꿈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도 지금 즉시!” 마음속의 절박감은 점점 강도가 세져 마침내 이런 소리까지 들리는 무서운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만일 네가 이 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는 너 자신을 총으로 쏘아야 한다!” 내 침실용 탁자 안에는 장전된 권총이 있었다. 나는 불안해졌다.
331. 그것은 이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 문제가 아닌가!“ 독일사람들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안되는 것인가. 애매하게 얘기하네. 1차 세계대전을 얘기하는 것인지
335. 필레몬과 또 다른 환상의 형상들을 통해 나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필레몬은 내가 아닌 다른 힘을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환상 속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내가 의식에서 생각하지 않은 것들을 말했다.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 그라는 것을 정확히 지각했다.
336. “당신이 방 안에서 사람들을 본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그 사람들을 만들었다거나 당신이 그 사람들에게 만든 책임이 있다는 등의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차츰 나에게 정신적인 객관성, ‘마음의 진실’을 깨우쳐 주었다.
336. 필레몬과의 대화에서 나와 내 사고의 객체 사이에 있는 차이가 분명해졌다. 그는 이를테면 객관적인 태도로 나를 대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고 내 생각이 아닌 것들을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내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것은 심지어 나에게 적대적일 수 있는 것들까지도 말할 수 있었다.
336. 심리학적으로 필레몬은 탁월한 통찰을 나타냈다.
339. “이것은 예술이에요.” 나는 매우 놀랐다. 나의 환상이 예술과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무의식이 내가 아닌 어떤 하나의 인격을 이루었고, 그것이 자신만의 고유한 견해를 말로 표현하는가 보다.”
340. 내 안에서 생겨난 한 여인이 나의 생각에 간섭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십중팔구 그것은 원시적인 의미의 ‘혼’일거라고 생각했다. 그 혼이 왜 ‘아니마’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자문해보았다. 왜 사람들은 그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상상하는가?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라고 불렀다.
아니마라고 불러서 그렇지 모든 사람에게는 이런 현상이 있지 않을까. 비록 융처럼 직접적으로 여인이 생각에 간섭하지는 않지만. 나도 내안에 여성성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341. 매일 저녁 나는 글쓰기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의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성실한 글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적어 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가지고 책략을 쓰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편지를 스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옛 그리스 격언을 따른 것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융은 의사이면 훌륭한 기록자이다. 그러한 기록들이 많은 연구와 책을 통해 이 세계에 나온 것이다. 나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적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진실로 차이가 큼을. 사소한 하나라도 기록하고 메모하려고 노력한다.
341.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 내용을 구별하는 일이다. 무의식 내용은 이를테면 격리를 시켜야 한다. 그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그 내용을 인격화하여 의식으로 하여금 그 인격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무의식 내용에서 힘을 제거할 수 있다.
나는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이런 말은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무의식을 어떻게 인격화시키며 어떻게 관계를 맺도록 하라는 말인지. 융처럼 나도 경험주의자이기 때문에 경험을 해야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342.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데 아니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항상 의식이 무의식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함을 얘기하는거겠지.
343. 나는 내면의 이미지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나의 꿈을 통해 직접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중개자가 필요하지 않다.
이제 꿈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면서 꿈을 꾼다는데 나는 왜 도통 꿈을 꾸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 어느하나도 기억이 안날까? 1년에 1~2번만 고작 기억이 날 뿐이다. 그에게서 꿈꾸는 방법을 배우고 싶네.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344. 내게 나타난 환상들을 나는 처음에는 ‘검은책’에 기록했고 나중에는 ‘붉은 책’에 옮겨적었다.
일명 레드북이라는 책을 얘기한다. 이 책은 출판을 안 하기로 했었는데 융이 죽고 난뒤 출판사와 협의를 통해 출판하기로 했다는 책이다. 레드북 뭔가 더 보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344. 나는 그 많은 환상이 든든한 토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내가 우선 인간적인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 현실이란 과학적인 이해를 의미했다. 무의식이 내게 가져다준 통찰을 통해 나는 구체적인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인생과제의 요점이 되었다.
345. 삶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언어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언어가 삶을 대체하려고 시도하면 언어뿐 아니라 삶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345. 그것은 동시에 합리적인 우리시대에 사라져버린 신화를 형성하는 환상의 모태이기도 한다. 신화적 환상은 도체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금지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347. 나의 가족과 직업은 다행스럽게도 늘 현실감을 잃지 않게 했으며, 내가 정상인으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증해주었다.
가족만큼 나를 일깨우는 것은 없지. 그리고 현실로 내보내는 것도 가족이고.
348. 온 집 안이 많은 유령무리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찾던 것을 예루살렘에서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 말은 <죽은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의 첫 구절과 일치했다.
이 글을 읽는 시간이 새벽이었는데 갑자기 뒤통수가 서늘해지고 온 몸에 닭살이 돋았다. 책 읽으면서 공포를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책 읽기가..
349. 무의식은 신화적인 ‘죽음의 나라’, 즉 조상의 나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상 속에서 영혼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영혼이 무의식 또는 죽음의 나라로 되돌아간 셈이 된다. 이것은 원시 종족에서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는 소위 ‘영혼의 분실’현상과 일치한다.
350. 죽은 자와의 대화, 즉 ‘일곱 가지 설법’은 내가 세계를 향해서 무의식에 대해 전해줄 이야기에서 일종의 서곡을 이루었다. ..... 오늘날 내가 과거를 돌이켜보고 환상에 관해 작업하던 시절의 체험을 생각해 보면, 그 작업이 소명과도 같이 나를 압도하며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351. 그 무렵 나는 영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기로 했다. 나는 그것을 사랑하면서 미워했다..... 나의 저작, 즉 내가 정신적으로 이뤄어 놓은 모든 것은 다 초기의 명상과 꿈에서 나온 것이다.
351. 사람들은 이미지들이 그대로 떠오르도록 하면서 거기에 대해 무척 놀라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고심하지 않는다. 거기서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은 더구나 하지 않는다.
352. 무의식의 이미지는 인간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안겨준다. 그것에 대한 몰이해와 윤리적 의무의 결핍으로 많은 개인이 전체성을 상실하고 분열적 성질로 변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
353. 나는 심사숙고한 끝에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무의식과의 실험이 끝나기까지는 내가 공중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다. ...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내가 대학교수가 되든 안 되든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교수직을 버리는다는 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었다. .... 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여러 면에서 후회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었고, 실은 하찮은 것이었다. 이에 반해 다른 것이 중요한 법이다.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어쩌면 보통사람과 아닌 사람과의 차이는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게 아닌지 알면서도 그 길이 보장해주는 악세사리 같은 것들에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덮으려 한다.
355. 나는 아침마다 노트에 작은 그림, 즉 만다라를 그렸는데 그것은 당시 나의 내면적 상황과 연관된 듯이 보였다. 그 그림으로 내 정신의 변화를 매일 관찰할 수 있었다.
글쓰기에 만다라 그림까지. 자기 연구의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보려고 하는 그의 노력을 엿볼수 있다. 그림과 돌에 집중했다고 하니. 그는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을까? 왜 하필이면 만다라였을까?
355. 어쨌든 현대예술은 무의식으로부터 예술을 창조해내려고 모색하고 있었다. .... 내가 만들어내는 환상이 정말 자연발생적인 것인지, 결국은 나 자신의 인위적인 발명품이 아닌지 헷갈렸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꿈도 무의식이라고 하지만 현실에서의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356. 만다라가 참으로 무슨 의미인지 나는 차츰 깨달아갔다. 그것은 ‘형성, 변환, 영원한 마음의 영원한 재창조’였다. 그것은 ‘자기’, 즉 인격의 전체성이었다. 모든 것이 잘돼가면 조화로우나 자기기만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357. 대략 1918~1920년에 나는 정신적 발달의 목표가 ‘자기’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직선적 발달은 없고 다만 자기를 중심으로 한 순환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 아닐까 싶다. 자기 즉 자아 실현, 자기 성장, 변화, 발전이 결국 삶의 목표가 아닐까. 자기를 알고 자기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 결국 삶의 목적이 아닌가.
357. 이와 같은 인식은 내게 확신을 주었고 차츰 내적 평안이 회복되었다. 자기의 표현인 만다라로 인하여 나로서는 궁극적인 것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아마도 다른 사람은 더 많이 알고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자서전인 것이 좀 아쉽다. 궁극적으로 만다라의 어떤 것이 그를 이렇게 깨닫게 했을까. 그저 원형의 그림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나로서는 이해가 불가하다. 그의 다른 책을 보고는 싶지만 내가 두렵다. 그를 받아들이기에는 준비가 안되었다.
358. 리하르트 빌헬름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은 이상한 우연의 일치였다. 그는 ‘황금꽃의 비밀’이라는 제목이 붙은 도교적인 연금술책 원고를 보내면서 내게 논편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즉시 그 원고를 탐독했다. 그 책은 뜻밖에도 만다라와 중심으로의 순회에 대한 나의 생각을 확증해주었다.
도교경전인 <태을금화종지>를 서양의 관점에서 바라본 책이라 한다. 융과의 짜릿한 만남. 빌헬름은 또한 융의 주역선생님이라 한다. 주역까지 섭렵한 융 선생님. 그의 학문적 깊이는 어디까지일까.
358. 이러한 우연의 일치, 즉 동시성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그 만다라 밑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었다. “1928년 내가 난공불락의 황금성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을 때, 프랑크푸르트에서 리하르트 빌헬름이 황금빛 성, 죽지 않는 몸의 맹아(萌芽)에 관한 천 년 묵은 오래된 중국 경전을 보내오다.”
361. 프로이트와 헤어졌을 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떨어질 것을 알았다. 그 무렵 프로이트를 넘어서 내가 아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둠속으로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이럴 때 그런 꿈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것을 은혜의 작용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361. 내가 그 무렵 체험하여 기록한 것을 과학적 작업의 그릇 속에서 추출해내기까지 따지고 보면 45년이나 걸렸다. 젊은이로서 나의 목표는 학문에서 뭔가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나중에 그 용암의 흐름을 만났고, 그 불길의 열정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1년도 아니고 45년을 했다.
361. 나의 작업은 그 뜨거운 물질을 우리 시대의 세계관에 접목시키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어느정도 성공한 시도였다. 그 최초의 환상과 꿈은 불에 녹아 흐르는 현무암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단단해져 돌이 되었고, 나는 그 돌을 다듬을수 있었다.
361. 나는 내적 이미지를 추적하던 그 몇 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기간에 온갖 본질적인 것이 정해졌다. 그 무렵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세부적인 것은 단지 보충하거나 명료하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기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기간에 무의식에서 솟아나와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은 필생의 작업을 위한 원재료였다.
나에게는 지금 이시기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행동이 뒷받침 못해주지만, 참으로 행복하고 달콤한 시기이다.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365. 나는 인생 후반기가 시작되면서 무의식과의 대면을 시도했다. .....우선 나는 내적 체험에 관해 역사에서 예시의 증거를 찾아야만 했다. 다시 말해 나는 “나의 가설이 역사 속에서 어디에 나타나는가?”하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 그런데 연금술과의 만남은 나에게 결정적인 경험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때까지 부족했던 역사적 기반을 나에게 제공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경험과 근거주의자이다. 연금술과 무의식이라 전혀 상관관계가 없을 것 같은 조합이 이루어졌다.
365. 분석심리학은 본질적으로 자연과학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다른 학문보다도 훨씬 더 개인적인 가설에 영향을 받기 쉽다.
사람을 분석하는 것이고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 다르고 하나로 규정화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366. 내가 연금술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통해 비로소 그노시스주의와 역사적인 연결이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로써 과거와 현재사이에 연속성이 생기게 된 셈이었다. 연금술은 하나의 중세 자연철학으로서 한편으로는 과거 즉 그노시스주의에,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 즉 현대 무의식의 심리학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상당히 어렵다. 중세시대 연금술은 그노시스파 기독교인이 주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그노시스에 의한 것은 물질이 다른 물질로 변환되는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고 미래는 물질이 변환됨으로써 영혼이 변한다는 논리를 얘기하는 것으로 추론된다. 진정한 연금술은 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영혼을 바꾼다는 그런 뜻으로 쓰인다.
367. 그노시스의 전통에 의하면 인류에게 크라터(섞는 그릇), 즉 정신적 변환의 용기를 부여한 것은 바로 그보다 높은 신이었다. 크라터는 여성원리로서 프로이트의 가부장적 세계에서는 자리잡을 데가 없었다. .... 가톨릭 사상의 영역에서 신의 어머니와 그리스도의 신부가 성스러운 신방으로 받아들여져 적어도 그 일부가 수용된 것은 수세기의 주저함 끝에 최근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다. 개신교나 유대교의 영역에서는 아버지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배적이다. 이에 반해 연금술 철학에서는 여성원리가 두드러져 남성의 그것과 동등한 역할을 했다.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었다. 나의 심리학적 발견의 핵심도 이와 같은 내면의 변환과정, 즉 개성화였다.
372. 나는 곧 분석심리학이 연금술과 기묘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사들의 경험은 나의 경험이었고, 그들의 세계는 어떤 의미로는 나의 세계였다. 이것은 물론 나에게는 바람직한 발견이었다. 이것으로 내 무의식의 심리학은 역사에서 대응물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대략적으로 의미는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구체적으로 연금술의 무엇에서 무의식의 심리학과 연계를 시켰는지 궁금하다.
373. 원초적 이미지와 원형의 본체가 내 연구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고, 역사 없이는 심리학, 특히 무의식 심리학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73. 치료과정에서 비상한 결단이 요구될 때 꿈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해석하려면 개인의 기억 이상의 것이 필요하게 된다.
373. 괴테의 비밀은 그가 수세기 동안 지속된 원형적 변환과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파우스트>을 필생의 역작 또는 신성한 작품이라고 여겼다. 그는 <파우스트>를 자신의 ‘주요과업’이라 불렀으며, 그의 생애는 이 드라마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파우스트를 통한 영원한 진리를 찾고자 하는 괴테의 주요과업을 어떤 식으로 달성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봐야할까? 너무 어렵다.
373. 나의 생애는 하나의 과제,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인격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과제요 목표였다.
374. 나 자신의 무의식 이미지에 몰두하게 된 것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그 시기는 1913~1917년이었는데, 그 후로는 환상의 흐름이 차츰 스러져갔다.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더 이상 마법의 산속에 잡혀 있지 않게 되자, 나는 그 모든 경험을 객관적으로 보고 거기에 관해 사색을 시작할 수 있었다.
376. 나는 리비도를 물리적 에너지의 정신적인 유사물이라고 생각했다. ... 나로서는 그 무렵까지 우세했던 리비도학설의 구체주의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했다. 다시 말해 나는 이제 더 이상 허기본능, 공격본능, 성적 본능 따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이 모든 현상을 정신적 에너지의 다양한 표현으로 보고자 했다.
우리의 행동을 이끄는 에너지가 본능에 의해 좌우되긴 하지만 무조건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융의 말대로 우리는 정신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377. 심리학자 역시 모든 본능을 권력이나 성의 개념 따위로 분류할 수 없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초기에 범한 오류였다. 그는 나중에 이것을 자아본능이라는 가설로 수정했고, 좀더 지난 후에는 초자아에게 소위 최고의 힘을 부여했다.
결국 자기의 이론의 타당성을 세우기 위해 초자아를 끌고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자세한건 그의 책을 읽어본 다음 판단하는 것으로
378. 내가 무의식의 상징표현이 기독교 또는 다른 종교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문제를 항상 생각해 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기독교 복음에 문을 열어놓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서구인 정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379. 어느날 밤 잠에서 깨어나 침대 아래 환한 빛에 휩싸여 있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형상을 보았다.....나는 그리스도의 몸이 녹색 금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았다. ..... 녹색 금은 연금술사들이 인간뿐 아니라 무기물에도 존재한다고 여긴 생동하는 본성이다. 그것은 생명의 혼, 즉 ‘세계혼’ 또는 ‘대우주의 아들’, 전세계에 살아 있는 ‘안트로포스(원래는 인간, 인류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좀더 근원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음)’를 표현하고 있다. 이 혼은 무기물에게까지 부어진다. 그것은 금속에도 돌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의 환상은 그리스도 형상이 물질 속에 있는 그의 유사물, 즉 대우주의 아들과 합일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381. 그리스도가 어떻게 점성학으로 예언될 수 있었는지, 그리스도가 그가 살던 시대의 정신에 비추어서는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그리고 2천년 기독교 문명의 발전 속에서는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제시하는 것도 내게는 중요했다.
종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이해할려고 노력했다.
381. 이러한 탐구를 하는 동안 역사적인 모습, 즉 인간 예수에 대한 의문이 또한 제기되었다. 그 의문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가 살던 시대의 집단적 심성은 그 당시 형성되었던 원형, 즉 안트로포스의 원초적 이미지라고 할수 있는데, 그것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유대인 예언자에게 집중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유대 전통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집트 호루스 신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고대적 안트로포스 관념은 기독교시대 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시대정신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382. 목수의 아들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고 세상의 구주가 된 것을 단순한 ‘우연’으로 보는 것은 심각한 오해일 것이다. 그의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그 시대의 기대를 그토록 완벽하게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격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382. 그 시대에 신적인 카이사르에 의해 구현된 로마제국의 막강한 권력은, 수없이 많은 개인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자주적인 삶의 방식과 정신적인 독립성을 빼앗긴 세계를 만들어냈다. 오늘날의 개인이나 문화공동체도 비슷한 위협, 즉 대중화의 위험에 처해 있다. 그리하여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 재림의 가능성과 거기에 대한 희망이 이미 활발하게 논의되고 환상을 보았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는데, 그것은 구원을 기대하는 마음의 표현인 셈이다.
믿음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혼란을 야기하는 소문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의 삶이 다른 것에 의해 흔들리지 않도록 자신의 원형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성배전설과 동물상징
387. 그는 종교와 관련된 문제라면 어떤 것도 생각해보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믿음만으로 만족하려 했으나 신앙은 그에 대한 신의를 저버렸다..... 맹목적인 수용은 결코 해답을 주지 못한다. 기껏해봐야 답보상태로 있게 할 뿐이며, 그로 인해 다음 세대가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된다.
어떤 것이든 맹목적인 수용은 안된다. 철저히 내 것으로 만들고 체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388. 신들이 동물 형상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신들이 초인간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 이하의 삶의 영역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나타낸다. 동물들은 말하자면 신들의 그림자이며 그 성질 자체가 밝은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388. 욥은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리스도와 욥은 고통의 관념으로 서로연결된다.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이며 욥 역시 그러했다. 그리스도의 경우 이세상의 죄악이 고통의 원인이며, 기독교인의 고통은 거기에 대한 일반적인 응답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죄악은 누구의 책임인가?”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궁극저그로 그 책임은 이 세상과 죄를 창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숙명적 고뇌를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하느님에게 있다.
389. 일반대중과 환자들이 제기한 많은 질문이 나로 하여금 현대인의 종교적 문제에 관해 나 자신의 견해를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도록 했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나는 망설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일으키게 될 물의를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의무는 대중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융은 대중에게 진실을 얘기해야 할까? 사실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종교계의 비난은 둘째치고 자신의 견해에 따라 세상에 불러올 혼돈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BBC에서 신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가 같이 대답했다. “나는 압니다. 믿을 필요가 없어요. 나는 압니다” 여기에 그의 대답이 있지 않을까.
389. 나의 책은 단지 대중들이 숙고하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한 개인의 목소리요 문제제기일 뿐이었다. 내가 형이상학적 진리를 선포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리하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나를 비난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학사상은 영원한 진리를 다루는 일에 늘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390. 분석심리학의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의 진술, 즉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서도 흔히 서로 일치하는 진술이다.
394. 인간은 신적인 소명 앞에서도 결행을 유보하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자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유를 위협하는 자를 위협할 수 없다면 그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395. 피할 도리가 없는 노쇠,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사슬은 큰 깨달음으로 끊어진다. 그리하여 존재의 환영은 소멸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부정은 이미 심상치 않게 가까이 다가온 미래의 문제를 예언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꿈은 인간세계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생각과 징후, 즉 피조물이 그의 창조주를 근소하지만 결정적으로 능가한다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이미 창조주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닐까. 만약 신이 있다면 이런 인간의 행위를 그냥 놔둘까 싶다.
396. 밑바닥에 도달한 그 순간, 나는 학문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마지막 한계에 부딫혔다. 초월적인 것, 원형 그 자체의 본질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학문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397. 나의 저술들은 내 생애의 정류장들이라 여겨질 만하다. 그것들은 나의 내적 발달의 표현이다. 무의식 내용을 탐구하는 일은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변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의 생애는 내가 행한 것, 내 정신의 작업이다. 이것들은 하나하나 떼어놓을 수가 없다.
397.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식세계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398 오늘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찍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토록 성공을 거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더 많이 더 훌륭하게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401. 나는 가장 깊은 생각과 나 자신의 인식 들을 이를테면 돌에 표현하거나 돌로써 고백해야 했다. 내가 손수 볼링겐에 지은 탑이 그 일의 시작이었다.
정말 융이 직접 다 지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설계에만 참여했겠지.
403. 1955년 아내가 죽은 후에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내적 의무를 느꼈다.
404. 처음부터 탑은 나에게 성숙의 장소였다. 즉, 그 안에서 내가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로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자궁, 모성적 이미지의 장소였다.
돌에 대한 저자의 집착에 가까운 모습을 볼수 있다.
405. 나는 전기를 쓰지 않고 벽난로와 화덕에 손수 불을 지핀다. 저녁에는 옛날 등잔에 불을 붙인다. 수도도 없어 나는 펌프로 직접 물을 긷는다. 장작을 패고 음식을 요리한다. 이런 단순한 일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런데 단순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제는 정말 어렵다.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것도 힘들게 됐다. 살아야 된다면 살겠지만 내가 찾아서는 못할 것 같다. 융은 멋지게 해냈다.
405. 여기서는 창조의 고통이 완화되며 창조성과 유희성이 거의 하나로 어울린다.
406. 여기 돌이 있네. 보잘것없는 것. 값도 아주 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을 받는다네.
이 글은 무지한 자들로부터 경멸당하고 배척되는 연금술사의 돌을 묘사하고 있다.
연금술사의 노래인데 연금술사가 보잘 것 없는 돌에 관심을 기울이듯 융도 돌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과거의 연금술사와 현대의 연금술사
카르마
417. 내가 석판에 족보를 새길 때 조상과 이어져 있는 숙명적인 연대성이 뚜렷이 인식되었다. 나는 부모나 조부모, 그리고 더 먼 조상들이 완성하지 못하거나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놓은 일들과 문제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강하게 느낀다.
417. 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넘겨진 비개인적인 카르마가 가족에게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나는 조상들에게 숙명적으로 던져졌으나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하는 물음에 내가 대답해야 하며, 지나간 세대가 완성하지 못한 채 남긴 것을 내가 완성하거나 계승해야만 할 것같이 늘 여겨진다.
업보라는게 서양에서도 이런 식으로 느끼고 있다.
418. 조금이라도 자기반성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는 처음에는 인격의 이분화를 당연히 나 개인의 문제이며 책임으로 여겼다. 파우스트가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고 나에게 구원과도 같은 말을 하긴 했지만, 그런 이분성의 원인을 규명해주지는 않았다.
419. 나의 조부 융이 괴테의 사생아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짜증스러운 소문이 <파우스트>에 대한 나의 유별난 반응을 뒷받침해주고 설명하는 것같이 여겨질 정도였으니, 그만큼 그것이 나에게 먹혀든 셈이다. 나는 환생을 믿지는 않았지만 인도사람들이 카르마라고 부르는 개념은 본능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419. 나는 미래가 장기적인 전망으로 미리 무의식적으로 준비되며, 그리하여 투시력을 가진 사람은 훨씬 이전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맞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지금도 일반인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나도 이런 식으로 투시력을 가졌으면 좋겠구만. 너무 깜깜하다. 꿈으로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다.
420. 무엇보다 내 마음을 가장 깊이 움직인 것은 선과 악, 정신과 물질, 빛과 어둠의 대극문제였다.
420. 메피스트펠레스는 그의 부정적인 본성에도 불구하고, 자살 직전까지 간 의기소침한 학자와는 대조적으로 참된 생명의 혼을 나타내고 있다. 나 자신의 내적인 대극이 여기에 극화되어 있었다.
420. 둘로 나뉘어져 있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합해져 나 자신 속으로 들어와 하나의 사람이 되었고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420.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421. 우리의 정신이 필요로 하는 바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중세와 고대, 원시시대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우리는 발전의 분류로 휘말려들어가 거친 폭력으로 미래를 향해 밀려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의 뿌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421. 옛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이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고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 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밝은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고 지금의 현실은 직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현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사는 것이 나를 찾는 길일 것이다.
421.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큰 자유에 대한 희망은 국가에 대한 예속의 증대로 사그라들고 만다. 가장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끔직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422. 앞을 향한 개혁, 즉 새로운 방법 또는 ‘묘안’을 통한 개혁은 지금 당장은 확실하겠지만 길게 볼 때는 의심스러우며 어떤 경우에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즐거움,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대부분 실재의 허울 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게서 나온다.”
단적인 예로 컴퓨터가 나와서 우리의 업무환경이 좋아졌나? 보는 사람은 편하다. 그러나 만드는 사람은 예전에 연필로 그려가서 설명하면 될 것을 그것에 몇 곱절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서 기껏 5분 설명한다. 참 아이러니다. 그래도 어쩌랴. 이미 대세인데. 계속 이런 식일 것이다. 반면에 여자들에게 집안일들은 훨씬 시간과 노력을 덜 투자한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423. 우리 조상의 세계가 우리의 삶에 근원적인 즐거움으로 참여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의 삶을 뒤집어 놓고 있는지, 혐오감으로 외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어둠속에 남게 된다.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427. 드디어 나는 자주 동경해오던 곳에 있게 되었다. 즉 유럽이 아닌 나라, 유럽말을 쓰지 않고 기독교의 전제조건이 지배하지 않으며, 다른 종족이 살고 다른 역사적 전통과 세계관이 군중의 얼굴에 각인되어 있는 곳 말이다.
괜찮은 생각이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완전히 다른 곳을 가보는 것.
428. 유럽인이 동양의 태연함과 냉담이라고 간주해온 것은 내가 보기에 가면처럼 여겨졌다. 그 가면 뒤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초조함과 마음의 동요가 있음을 감지했다.
428. 내가 무어인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 땅에서는 특이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것은 땅이 피를 빨아들였을 때와 같은 피비린내였다. 우선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은, 이 지방은 이미 3대 문명이 거쳐갔다는 것이었다. 카르타고 문명과 로마문명, 기독교문명이 그것이었다.
430. 유럽인은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다른 사람이라고 확신하지만, 그들이 그 기간에 어떤 존재가 되어버렸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시계라는 것은 소위 중세 이래로 시간과 그 동의어인 진보가 유럽인에게 슬며시 들어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들로부터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시계라는 것은 소위 중세 이래로 시간과 그 동의어인 진보가 유럽인에게 슬며시 들어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그들로부터 빼앗아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433. 아무튼 우리는 어느정도 의지와 숙고된 의도에 따라 자의적으로 행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강렬함이다.
434. 나는 늘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나 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무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꿈의 형태 이외로는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었다.
437. 발전에 대한 맹신은 그것이 우리의 의식을 과거로 멀리 떼어놓을수록 더욱더 유치한 미래의 꿈에 매달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어린이답다는 것은 다른 한편 그 순진성과 무의식성 덕분에 훨씬 완벽한 ‘자기’의 이미지, 즉 꾸밈없는 개성을 갖춘 전인격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노자도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439. 우리는 그것을 의식 속에 붙잡고,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 것인가, 잊혀진 것을 회복할 것인가, 두 가지 가능성을 두고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그것이 충분한 이유 없이 다시 그러한 발언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441. 비평의 수단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대상의 외부에 관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 관점은 특히 그 성격상 어떤 다른 학문분야보다도 훨씬 주관적인 경향을 가진 심리학적 사항들에 아주 유용하다. 예컨대 우리나라를 밖에서 볼 기회를 한 번도 갖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나라의 특성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밖에서 본다는 것은 다른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는 말이다
441. 내가 유럽인으로서 어떤 면이 이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가를 알면 우리의 가장 큰 문제인 유럽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나는 군인이었다. 내가 민간인의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가를 알면 군인인 나의 가장 큰 문제점을 이해할수 있을까? 1년차다. 나는 제법 잘 어울리고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
442. 내가 얼마나 백인 문화의식 속에 갇혀 있거나 사로 잡혀 있는가를 깨달았다.
443. 나는 그에게 왜 백인이 모두 넋이 나간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는 오래 생각에 잠겼다.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가 진정한 백인의 모습을 나에게 묘사해 준 셈이다. ..... 이 인디언은 우리의 아픈 데를 찔렀으며 우리가 눈을 멀어 보지 못하는 부분을 거늗렸다.
심장에서 생각을 한다는 것이 말이 그렇지 진짜 가능한 것인가. 결국 뇌에서 시작하지 않나. 이 의견에는 동의를 못하겠다. 가슴으로 말하라는 말이 아마 이런 뜻일 것이다. 인디언들은 하나같이 철학자이상이다. 그들은 융보다 정규교육도 받지 못하고 책도 못 읽었는데 이런 통찰을 가지고 있다. 역시 책만이 답은 아닌듯
447. 종교적인 내용을 이야기할 때 인디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일상생활에서 인디언은 거의 감정표현이 없는 침착성을 유지할 정도로 엄격한 자기통제와 위엄을 보인다. 그러나 그가 비밀 의식에 관한 것들을 말할 때는 숨길수가 없는 놀라운 감동이 그를 사로잡았다.
451.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우리가 온갖 유럽의 합리주의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우리 자신을, 한쪽은 넓은 대륙의 초원으로 다른 한쪽은 잔잔한 바다로 기울어지는 저 고적한 고원의 맑은 공기 속으로 옮겨놓을 때,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세계의식성을 버리고 그 대신 그 너머에 놓여 있는 세계 무의식성과 더불어 끝이 없는 듯이 보이는 지평을 확보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견해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451. 산의 신성, 야훼의 시나이산 계시, 엥가딘산에서 받은 니체의 영감들은 모두 같은 맥락인 셈이다.
452.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 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457. 연금술에서는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 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인간인 내가 보이지 않게 창조행위를 하고 있는 그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인 실재로 완성되도록 해주었다.
457. 인간은 창조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 세계를 비로소 객관적 실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세계창조자인 것이다. 객관적 실재가 되지 않은 상태라면 그 짐승들은 소리를 들려주지도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하면서 묵묵히 먹고, 새끼를 배고, 죽고, 머리를 끄덕이며 수억만년이 지나도록 비존재의 저 깊은 밤 속에서 정처없이 돌아다닐 것이다.
459. 이곳에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 맨 위에 있고, 그리하여 의지와 의도가 아니라 신비한 섭리가 맨 위에 있는 것이었다.
464. 우리 세명의 남자가 그렇게 모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 이것으로 충분히 무의식 혹은 숙명의 배열이 이루어졌다. 삼위일체의 원형이 드러났고, 이러한 원형의 역사에서 언제나 반복하여 나타나듯이, 그것은 네 번째를 불러들였다.
470. 현대사회에서 동성애가 맡은 역할은 대단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모성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일부는 자연의 합목적적 현상(번식의 저지)이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489. 내가 인도에서 주로 몰두한 것은 악의 심리학적 성질에 관한 물음이었다. 이 문제가 어떻게 인도의 정신생활에 의해 통합되는가 하는 것은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490. 기독교인은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에 빠진다. 이에 반하여 인도인은 선과 악의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거나, 명상이나 요가로써 이러한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491. 나에게는 해방이란 것이 없다.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고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가능한 법이다
491.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495. 나는 부처의 삶을 개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장한 ‘자기’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부처에게 ‘자기’는 모든 신을 넘어서, 특히 인간실존과 세계의 정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 자체의 측면뿐 아니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인식도 함께 포괄하고 있다.
495.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뜻에서 그러하다.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 테면 이성적 통찰로서,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법으로 나간다.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509. 나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처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516.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다. 나에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나(Ich: '자아’라는 용어로도 쓰임)‘라고 말이다. ’나‘는 이를테면 남아 있는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나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참으로 나라는 절실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나(자아)’는 성취된 것과 지금까지 있었던 것의 그와 같은 묶음이다‘이런 체험은 나에게 극도의 결핍감을 안겨주면서도 동시에 커다란 만족을 주었다. 내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516. 나는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즉, 나는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말살되고 빼앗기거나 약탈당했다는 느낌이 지배적이기도 했으나, 한 순간 그런 느낌도 스러지고 말았다. 모든 것이 지나간 듯이 여겨졌다. 하나의 기정사실만 남았다. 이전의 일들과 다시 어떤 연관도 맺지 않고 말이다. 어떤 것이 떨어져나갔다거나 빼앗겼다는 아쉬움은 이제 없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나라고 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오직 그것만을 가지고 있었다.
융합의 신비
524. 그때 나는 왜 사람들이 공간을 채우는 신성한 영의 ‘향기’에 관해 말하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말할 수 없이 신성한 영이 그 방에 있었다. 그 현상을 설명한 것이 <융합의 신비>였다.
525.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표현을 꺼려한다. 하지만 나는 그 체험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하나인 무시간적 상태의 지복이라고밖에 달리 일컬을 말이 없다.
527.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528. 나는 또한 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온갖 평가를 뛰어넘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옳으냐 그르냐 하는 범주는 항시 존재하지만 그것은 구속력이 없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존재가 주관적인 평가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가 또한 존재하는 생각으로서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도 전체성의 현상에 함께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532.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지식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535.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 것인가? 나의 가설은 무의식이 이를테면 꿈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암시의 도움으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한 해답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수긍이 가는 이런 회의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고찰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알 수 없는 경우에 우리는 그것을 지적인 문제로 다루는 것을 단념해야 한다. 나는 어떠한 이유로 우주만물이 생겨났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 문제를 학문적이거나 지적인 문제에세 제외시켜야만 한다. 하지만 거기에 관한 어떤 관념이, 예를 들어 꿈이나 신화적인 전승을 통해 나에게 제공된다면 나는 그것들을 기록해둘 것이다. 심지어 그것으로 하나의 견해를 짜내려고 시도할 것이 분명하다. 비록 그 견해가 언제나 하나의 가설로 남고, 그것이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536.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좁은 한계에 매여 있도록 하며, 오직 이미 알고 있는 범위안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 마치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범위를 알고 있기나 한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무의식은 우리에게 뭔가를 알려주거나 영상으로 암시하면서 하나의 기회를 준다. 무의식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때때로 전해줄 수 있다. 동시성현상과 예언적인 꿈, 예감들을 생각해보라.
541. 회피할 수 없는 질문자가 그에게 다가오고 그는 이에 답해야 한다. 그가 죽음에 관한 신화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은 그가 들어갈 어두운 구덩이 외에는 아무것도 그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화는 그의 눈앞에 다른 이미지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것은 유익을 주며 정신을 풍성하게 하는 사후세계 삶의 이미지들이다. 그가 이 이미지들을 믿거나 약간만 선회하더라도 그것들을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무(無)’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두 사람 다 불확실성 속에 있다. 그런데 전자는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고 있고, 후자는 본능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현저한 차이이며 후자에게 이로운 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543. 무의식의 형상들도 ‘정보를 잘 받지 못한다’. 그래서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의식과의 접촉이나 인간을 필요로 한다.
546. 죽은 자의 혼령들도 그들이 죽은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던 것만 알고 그 외에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앎에 참여하기 위해 인생 속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애쓴다
551. 신화는 피할수도 면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 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알으로 영원 속의 삶,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오직 우리가 무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확충하여 진술할 수 있는 기회를 줄때에만, 앞에서 수를 에로 들어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이해의 범위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측면이 우리에게 지각된다. 이러한 과정은 성공적인 꿈 분석이 이루어질 적마다 확실한 방법으로 항상 반복된다. 그러므로 꿈의 진술과 관련하여 교조적인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해석의 획일화’가 눈에 띄는 즉시 우리는 그 해석이 교조적이며 따라서 비생산적임을 알게 된다.
558. 신화적 상상에서 중간세계가 없다면 정신은 교조주의에 갇혀 경직될 위험성이 있다. 또한 반대로 신화적인 내용을 고려하는 것이 피암시적인 약한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는 예감을 인식으로 여기고 환상을 실체화할 위험이 있다.
단일성과 무한성
560. 서양인으로서는 정적이기만한 세계의 무의미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의미를 전제해야 한다. 동양인은 이런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이 그 전제를 구현 한다.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다.
561. 내가 죽으면 나의 한 일들이 따라올 것이다. 나는 내가 한 일을 함께 가지고 갈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중요한 문제는 내가 생의 마지막에 빈 손으로 서 있지 않는 것이다.
562.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은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572. 인간의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573.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만년의 사상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580. 선과 악(또는 불완전함)이 상대적이라고 해서 선악이라는 범주가 가치가 없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도덕적 판단은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며 특유한 심리적결과가 뒤따른다. 다른 데서 내가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행해지거나 의도되거나 생각되는 온갖 잘못은 세계가 우리를 위해 돌아가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 마음을 응징할 것이다.
581. 윤리적 결단이 요구한다면, 버릇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도덕적인 선이라고 알려진 것을 경우에 따라 피하고 악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선악의 대극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방성에 대하여 우리는 도덕적 형태를 갖춘 인도철학의 ‘네티 네티(neti-neti : '아니다 아니다’라는 뜻으로 부정의 부정, 즉 부정을 통한 긍정을 시사하는 말이다. 우파니샤드철학 이래 ‘절대’는 ‘네티 네티’에 의해서만 인식된다고 한다-옮긴이)’의 모본을 가지고 있다. 이로써 윤리규범은 경우에 따라 불가피하게 지양(止揚)되고, 윤리적 결단은 개인의 판단에 맡겨진다. 이런 생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심리학 이전 시대에도 이미 ‘의무의 충돌’이라는 말로 늘 제기되었던 내용이다.
584. 신화가 생동하지 않고 더 이상 발전하지 않으면 신화는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신화는 벙어리가 되었고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 잘못은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신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런 방면의 온갖 시도를 억압한 우리 자신에게 있다.
596. 통찰이 생기지 않는다면 사색은 의미가 없다. 사색은 예컨대 물병자리 시대의 경우처럼 객관적 자료가 있는 곳에서만 의미가 있다.
597.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면 ‘신’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종의 ‘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601. 그럴듯한 비밀의 필요성은 원시단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동의 비밀은 결속을 위한 시멘트 역할을 해준다. 사회적인 단계에서 비밀은 개별 인격들의 결속 부족을 효과적으로 보상하는 데 의미가 있다. 개별 인격은 타인과의 근원적이고 무의식적인 동일성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감으로써 반복해서 분열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개성을 의식하는 개체가 되려는 목표에 이른다는 것은 거의 가망이 없는 오랜 수련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통과의례를 거친 우수한 개체들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공동체 역시 사회적으로 분화된 정체성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무의식적인 정체성에 의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604. 동시에 두 가지를 다 하려는 사람, 즉 개인적인 목표를 따르면서도 집단성에 보조를 맞추려는 자는 누구나 신경증적인 사람이 된다.
617. 원형적 진술들은 본능의 전제조건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 진술들은 이성적으로 논증된 것도 아니고 이성적인 반론으로 제거될 수도 없다. 그것들은 예전부터 세계상의 일부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세계상이란 레비 부륄이 절절하게 명명한 대로 ‘집단표상’인 것이다. 확실히 자아와 그의 의지가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아가 하고자 하는 것은 대개 자기도 모르는 방식으로, 원형적 과정을 실제적으로 고려하면 종교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다. 종교가 심리학적인 관찰방식을 감당하는 한에서 말이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620. 우리는 소위 가장 깊은 뜻에서 우주 창조의 근원인 ‘사랑’의 희생제물이거나 수단과 도구다. 내가 사랑이라는 말을 따옴표 속에 넣은 것은 그 말이 단지 열망, 선호, 총애, 소원 등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고 개체보다 우월한 전체, 하나인 것, 나눌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부분으로서의 인간은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는 전체에 압도당하고 있다. 그는 찬성하거나 분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는 그 속에 갇혀 있고 에워싸여 있다. 언제나 그는 거기에 좌우되며 그것에 기인하고 있다.
회고
비밀로 가득 찬 세계
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625.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627. 정말이지 나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창피스럽게도 어떤 힘이 우리 심장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를 정말 사랑한다. 그것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 순간이다. 나 자신이 희생 제물이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데몬이 사람이 빠져나가도록 해주면서 그와 함께 복된 모순을 가져다준다.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628.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일어난 것들은 그야말로 기대 밖의 일들이었다.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629.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는 거칠고 잔혹하며 동시에 신성한 아름다운을 지니고 있다.
630.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편집자의 말
635.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수(精髓)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642. ‘자서전’은 내가 연구하고 노력하여 얻은 빛에 비추어 살펴본 나의 생애입니다. 이 둘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상을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나의 생애는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글로 써온 내용의 정수이며 그 반대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존재하느냐와 내가 어떻게 글을 쓰느냐 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노력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자서전’은 단지 소문자 아이(i)의 윗점, 즉 전체를 완성하는 최후의 한 점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3. 내가 저자라면
보완이 필요한점(독자의 눈으로- 이런 내용은 아쉬웠다, 이런 부분은 이해가 안됐다 등 등)
너무 난해하다. 이해할 듯 하면서도 이해가 어려웠다. 자서전인만큼 더 쉬웠으면 좋으련만 내 능력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것이 번역의 문제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는 판단을 못하겠지만 나라면 지금의 표현보다는 훨씬 더 쉽게 재미있게 썼을 것이다.
그의 가족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당연히 융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그의 이론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가 주된 내용이지만 그는 결혼도 했고 자녀들도 있었다. 그들에 대한 언급이 어느 정도 있었으면 쉬어가는 부분으로 좋았을 것이다. 편집자의 말에도 있었지만 애써 말할 가치가 없었다고 하지만 우리 독자는 융의 인간적인 면은 한토막은 원할 것이다.
그는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라고 얘기했다. 나같은 보통 사람에게도 무의식과 대면할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본다. 꿈을 꾸는 방법에서부터 먼저 시작해보면 좋겠다. 자서전이니까. 좀 그렇긴 하지만.
이 책의 장점(독자의 눈으로-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 등)
융의 이론인 분석심리학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자랐으며,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어떤 시대를 살았으며, 어떤 고민과 생각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의 이론이 어떻게 정립되었으며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저자의 눈으로- 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아무리 자서전이지만 독자를 위해 좀 더 평이하게 쉽게 썼으면 좋겠다. 그리고 용어에 대한 정의나 번역가의 해석도 넣었으면 나 같은 독자들의 궁금증이 많이 해소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