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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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작가가 내게 묻는다
실크로드의 중심, 카쉬카르. “꼭 파키스탄에 가야 해요?”라는 남자의 눈을 뿌리치고 나는 파키스탄으로 떠났다. 후에 나의 남편이 된 그는 며칠 후 그 곳에서 <가시고기>의 작가 조창인을 만난다. 2007년의 일이었다. 2008년, 그는 베트남 여행 중에 또 한번 조창인 작가를 만난다. 역마살 가진 이들은 이렇게 길 위에서 두 번의 ‘우연’을 거쳐 ‘인연’을 맺었다. 2009년 결혼으로 나는 남편을 통해 조창인 작가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고 일과 육아로 바쁘던 중 한숨 돌리게 된 2015년 5월의 어느 날, 5년 만에 조창인 작가가 생각나서 메일을 보냈다. 회신은 11개월이 지난 2016년 4월에 왔다. 작가는 그 때 처음으로 메일함을 열었다고 하니 세상과의 자유로운 열고 닫음이 놀라운 대목이다. 시간이 또 흘러 얼마 전 남편과 함께 청주에 있는 작가의 집필실에 들렀다. 이 분을 만날 때면 시공간의 넘나듦이 자유로운 느낌이다. 2009년 이후 8년 만의 대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낯설지 않았다.
작가는 2명의 후배작가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집필공간에는 다양한 책들과 더불어 부탄가스와 소주병이 담긴 대야가 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작가는 벽 한 칸에 여러 종류의 - 사실 내 눈에는 비슷비슷한 - 배낭을 걸어 놓고 있었다. 길을 떠나기 전 ‘이번엔 어떤 놈을 짊어 맬까’하며 배낭을 고르고 있는 작가의 뒷모습을 상상하니 정말이지 부럽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개소리와 닭소리에 섞여 흐른다. 작가의 마당에서는 개와 닭이 어울려 놀고 있었다. 커피를 좋아한다는 작가는 직접 커피를 볶고 갈아 내려 주었다. 도대체 안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의 잡다한 취미를 넓고도 깊게 가졌다
“취미가 정말 다양하신 거 같아요.”
“제가 여기까지밖에 못온 것은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입니다.”
‘여기까지밖에’라니! 가시고기 250만부, 등대지기 140만부의 작가가 할 말인가. 그 대목에서 여러 번 웃으며 수다를 이어갔다. 커피 그라인더의 종류도 다양했으나 그 위에 쌓인 자욱한 먼지에서 괜한 웃음이 났다. 이국에서 온 우아한 커피 그라인더 위에 쌓인 먼지는 ‘개 짖는 소리에 섞인 음악소리’처럼 어울리지 않는 가운데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의 ‘작가같지 않은 외모’처럼 말이다.
“먼지 좀 봐. 거미줄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네요” 라고 하는 순간, 천장에서 거미줄을 발견했다. 책, 배낭, 커피 그라인더, 음원(10 테라를 소유하고 있다 한다) 등 그의 수집벽 역시 글쓰기의 재료가 되는 것일까. 침대 한 구석에 소설 구상용 마인드 맵이 눈에 들어온다. 대략 보니 몽골이 배경이다. 베스트셀러 작가 앞에서 감히 느낄 감정은 아니지만 좌절감과 부러움을 느낀다.
나는 1999년 몽골에서 돌아오자마자 곧장 제주도를 간 적이 있다. 몽골의 잔상이 남아 있던 터라 제주도의 항몽유적지에서 몽골장수와 사랑에 빠진 고려 여인이 떠올랐다. 나중에 이 주제로 소설을 써야지 했는데 곧 이인화의 <려인(麗人)>이 2000년에 나왔다. 같은 곳을 가고 같은 상상을 해도 이걸 이야기로 풀어내는 창작자로서의 작가에 대한 동경과 좌절을 나는 그 책에서 느꼈다. ‘유목민’이라는 단어와 초원과 대륙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언제나 향수와 영감을 주면서도 나는 나의 세상을 창조하진 못했다. 그것이 작가와 범인 또는 작가와 독자의 차이일 것이다. 나는 독자에만 머물러야 할까.
조창인 작가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분명 역마살이 있다. 동시에 그만의 동굴로 들어가 글이라는 결과물을 토해낸다. 그는 떠돌 때 떠돌더라도 작가는 반드시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순간 칼 융이 생각났다. 칼 융은 어떤 면에서는 남이 가지 않는 내면 깊숙한 곳까지 방랑한 ‘내면의 유목민’이다. 하지만 그는 ‘가족’과 ‘직업’이라는 평형추 덕에 ‘내면의 무의식’에서 다시 ‘현실의 의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직업으로서의 글쓰기와 부양대상으로서의 가족, 그리고 체험과 깨달음을 주는 여행은 작가의 삶에서 그렇게 선순환을 이루고 있었다.
수더분하고 넉넉한 마음씨 좋은 삼촌 같은 외모의 작가는 뜻 밖에도 외로운 개인사를 가지고 있었다. 성장과정 속 아버지의 부재라는 그의 개인사는 부성애를 이야기 하는 <가시고기>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작가는 <가시고기>의 성공 이후 욕망이 사라졌다고 했다. 욕망과 더불어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도 사라졌다고 한다. 욕망과 채찍질이 사라진 자리에는 그저 그런 글들만 남아 있었다. 의미 없는 책의 인쇄로 ‘헛되이 죽어가는 나무 한 그루’가 떠오른 작가는 무려 1200장에 이르는 글을 모두 폐기했다고 한다. 수집벽이 있어 다른 것은 그렇게도 모으는 작가가 스스로 쓴 글은 과감하게 찢어 버린다니 의외였고 놀라왔다.
“한 문장이라도 아까워하면 안되죠. 헛되이 죽어가는 나무 한 그루를 생각해야죠. 저는 버리는 거 전문입니다.”
닮은 글들을 생산하게 되자 ‘가시고기, 그 후’에 대한 고민을 안할 수 없었다 한다. 그저 그런 닮은 글들만 쓰게 되는 이유가 무얼까 고심하던 중 ‘세상으로 나가 소통하라’는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 전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의 세상으로의 여행인 셈이었다. 공동체와의 접속을 통해 글쓰기의 재미와 의미를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글을 쓰는 능력’과 더불어 ‘다음 글을 쓰는 동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지금의 나에게 매우 필요한 말이었다.
“저도 소설을 쓰고 싶어요”
“내면의 고통이 있어야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리아씨는 내면의 고통이 없어 보이는데요? 설령 고통이 있었다 해도 창작자에게는 고통여부보다 ‘통감(痛感)’의 민감함 여부가 더 중요합니다.”
아! 통감(痛感)이라니!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딴에는 여러 시련과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했지만 개인적 고통의 경험에서 딱히 의미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던 거 같다. 고통을 극복하려면 오히려 고통에 둔감해야 한다고 생각한 면도 있다. 일단 내 고통에 민감해야 타인에 대한 공감을 이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형추와 함께 돌아갈 뿌리를 잊지 않는 유목민, 통감에 민감한 사람이 되어 나도 저자를 넘어 작가가, 작가를 넘어 창작자가 될 그 날을 꿈꿔본다. 길 위의 작가가 내게 묻는다. 돌아갈 데가 있느냐고, 아픔을 느껴봤냐고.
먼저, '느껴'보자. 아픔을. 절절하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