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뚱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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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기 연구원 장성한
무경계
겐 윌버 지음 / 김철수 옮김
정신세계사
1. 저자에 대하여
켄 윌버는 지난 70년대 중반에 약관 24세의 나이에 집필한「의식의 스펙트럼 The Spectrum of Consciousness」이란 획기적인 저서를 통해 '스펙트럼 의식 심리학'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함으로써 트랜스퍼스널 심리학 분야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오면서 새 지평을 열었다. 그 이후 그는 지난 25년간 수많은 논문의 발표와 18권에 달하는 획기적인 저술을 통하여 트랜스퍼스널학 분야의 데카르트 또는 프로이트나 아인슈타인에 비유될 정도로 우리 시대의 대사상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윌버는 오늘날 트랜스퍼스널 분야의 포스트모던 사상가 중의 가장 중요한 한 사람으로서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명상가·영적 지도자로서 전세계의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전문가와 지식인, 그 추앙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러나 켄 윌버의 사상은 다른 나라와 달리 국내에서는 일부 전문가나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비교적 생소한 편이다. 게다가 국내외의 일부 포스트모던 사상가나 일부의 종교, 철학, 심리학 분야의 전문가들조차도 그의 사상을 자기 전문 분야의 선호 사상에 맞추어 해석학적으로 편협하게 또는 피상적으로 잘못 해석하여 적용하거나 평가하는 경우가 허다한 실정이다. 그의 사상은 지난 25년간 18권의 저서를 통해 4∼5 단계phase의 변천과정을 거치며 성숙해 왔다.
그의 저서는 어느 것을 막론하고 동서고금의 철학, 종교, 심리학, 인류학, 과학, 신과학, 신물리학, 사회학, 정치학, 경영학, 문학,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면서, 동서양의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적 전승지혜에서 나온 인간의식의 역동적인 성장 및 진화에 관한 통합적 진리관을 넓은 의미의 경험주의에 따라 심층과학적으로 명석하게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30년 이상의 명상·수련을 통한 체험과 깨달음에서 우러나온 초월적 의식세계, 궁극의 실재계, 심오한 정신세계에 대한 안내지도를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모든 저서는 그 심오한 통합 사상이 보여주듯이 단순한 포스트모던적 편향의 어떤 독특한 이론서나 사상서가 아니다. 윌버는 포스트모던적이고 영성과학적인 이론가이면서도,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깊이 없고 단조로운 '평원적(flatland)' 의식의 전일주의적/시스템적 포스트모던 사상과 신과학 사상, 극단적인 이론주의적 신패러다임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굳이 사상적 조류와 결부시켜 말하자면, 그의 세계관은 Deirdre Kramer의 '역동적 변증법주의 dynamic dialecticism' (Commons et al, 1989)와 같은 맥락이고, 사회 문화적으로 그의 사상은 인간의식의 성장진화는 단선적이 아닌 역동적인 나선형 발달과정을 거친다는 Clare Graves의 나선형 동력론 Spiral Dynamics(Beck/Cowan, 1996)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포스트모던적으로 그의 사상은 보편적 통합주의universal integralism에 따르는 통합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도 그의 사상의 어느 한 측면만을 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제도권 학문이나 포스트모던 사상들이 인간의식의 이지적mental(이성적·합리적·개인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는데 반하여 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는 인류의 전승지혜의 정수인 '영원의 철학'과 동서양의 합리적 신비주의를 받아들이는 트랜스퍼스널 사상이므로 초이지적(초이성적·초합리적·초개인적) 영역으로의 개인적/집합적 인간의식의 지속적인 진화발달의 최선단에 사상의 중심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윌버는 인간의식의 가장 심층적이고 가장 포괄적인 통합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21세기의 영성시대에 가장 적합한 위대한 선각자적인 대사상가이고 인간의식과 영성의 통합연구를 최선단에서 선도하면서 진정한 통합 비전을 추구하는 위대한 트랜스퍼스널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 생애
대 천재 사상가인 윌버는 1949년 미국의 오클라호마주에서 태어났으며, 공군장교였던 직업군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에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자라났다. 그는 매우 활달한 성격으로 스포츠와 학업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특히 물리학·화학·생물학·자연과학과 수학에 매우 뛰어났었다고 그 스스로 회고하고 있다. 듀크 대학에 입학하여 전공분야를 의학에서 생화학으로 바꾼 것도 소년시절부터 품고 있었던 자연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는 어느 날 우연히 노자의 『도덕경』을 읽게되면서 그의 생활과 사상과 정신은 급격한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도덕경으로부터 받은 감명은 청년기의 그의 세계관의 뿌리를 흔들어 놓을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후 그는 동서양의 정신적 전통·종교·신비주의에 관한 문헌과 서양 심리학·철학에 관한 서적을 열정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듀크 대학 시절에 그는 특히 선禪 사상에 심취하였고 동서양의 사상서를 모두 섭렵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명상과 선禪 수련에도 정진하였다.
그는 곧 듀크대를 그만두고 부친이 근무하던 네브라스카로 돌아가서 월남전에 징집될 것이 두려워 네브라스카 대학에 등록하였다. 거기서도 대학원에 들어갈 때까지 생화학과 생물리학을 전공하는 한편, 도교·불교·힌두의 베단타 사상을 비롯한 각종 동양사상, 서양 신비주의 문헌, 심리학 각 학파의 문헌, 동서양의 철학·영성 관련 문헌 등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였다고 한다. 윌버는 그 자신의 기존 세계관의 두꺼운 껍질을 깨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케슈탈트요법과 참선수행의 체험을 통해 극복하고서 영적으로 깨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곧 당시의 행동주의 심리학·정신분석·실존/게슈탈트 심리학의 혼란뿐 아니라, 초기의 초개인심리학에서도 동양종교나 초의식에 관한 이론들이 난립된 상태를 목격하고는, 이와 같이 혼란의 와중에 있는 모순된 심리학의 학설이나 교의를 통합, 정리해보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대학원에서 생화학박사과정을 그만두고, 그 해에 결혼을 한 후에 대학을 떠나 그가 24세이던 1973년 겨울, 3개월만에 그의 최초의 저서『의식의 스펙트럼』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당시 아직도 체계가 서있지 않던 소위 제4심리학이라는 초기 초개인심리학의 이론적 기틀을 제공할 정도로 초개인심리학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를 하룻밤만에 초개인심리학 분야의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3년간 20여개 출판사에 의해 출판을 거절당하는 수모와 우여곡절 끝에 'Quest Book' 출판사에 의해 발간되었던 것이다.
그 후 수년간 윌버는 엄청난 독서와 집필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이 기간에 그는 시간제로 노동일을 하면서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매월 일정기간 수련원에 들어가 수련하는 것 외에 매일 여러 시간의 명상과 함께 자신의 참선수행을 심화시켰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최초의 저서 『의식의 스펙트럼』의 접근방법을 훨씬 더 발전시키는 일련의 논문과 책들을 잇달아 신속하게 내놓았다.
한편, 윌버의 개인적 삶을 보면 20대 초부터 명상·참선, 연구·저술로 일관된 영적 구루와도 같은 삶을 살았으나 그의 결혼생활만은 시련을 겪었다. 그의 첫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1981년에 파경에 이르러 원만하게 헤어졌다고 한다. 1983년에는 그를 숭배하며 흠모하던 시인/작가인 Treya Killam을 만나 서로 사랑한 후 결혼하였으나, 결혼 후 열흘 남짓한 시기에 그의 아내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 후 5년 남짓한 기간동안 아내의 병치료를 위해 아내와 함께 끊임없이 여행하면서 전업적인 가족 "부양자" 노릇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헌신적인 병수발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는 1989년에 사망하였다. 그들이 함께 한 삶에 대한 아주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이야기는 윌버 자신의 고백과 그의 아내의 명상일기를 바탕으로 한 『우아함과 용기Grace and Grit}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슬픔에 잠긴 기간과 이 책의 집필이 끝난 후 윌버는 아내와 말년의 수년간을 함께 살았던 콜로라도 볼더Boulder로 돌아와 강도 높은 연구와 저술과 명상의 생활로 다시 돌아갔다. 결혼생활 이후에 결여되어 있던 것으로 보이는 '신들린 듯한 정신'과 영감은 명백하게 회복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그의 사상을 더욱 심오하고 광범위하게 발전시킨 '온우주론 Kosmology'의 삼부작을 집필하면서 그 외에도 더욱 성숙해진 철학·심리학·종교·문화·사회·예술… 사상을 담은, 다음에 소개할 5권의 주옥같은 저서들을 지난 5년 사이에 집필하였다. 그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그의 사상에 관한 질문·토론에 답하거나 멧세지를 전해주면서 명상과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업적
이 시대의 트랜스퍼스널학 분야를 대표하는 대사상가로서의 윌버의 위대한 업적은 지난 25년간 그가 발표한 수많은 논문과 18권의 저서(8권의 전집)에 잘 수록되어 있다. 윌버의 수많은 논문과 발간된 책의 일부는 처음에는 그가 수년간 편집자로 일했던 『Revision』학술지에 발표되었다. 1979년에서 1984년 사이에 윌버는 그의 통합적 모형을 논리정연하게 전개하는 여러 권의 책과 수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 주요 저서로는, 개인적 성장발달에 관한 『무경계 No Boundary - 개인적 성장에 대한 동서양의 접근방법』(1979/1985, Shambhala), 『아트만 투사 The Atman Project - 인간발달의 트랜스퍼스널 관점』(1980, Quest Books), 집합적 인간의 인류학적·사회 문화적 진화발달에 관한 『에덴으로부터 일어나서 Up from Eden - 인간진화에 대한 트랜스퍼스널 관점』(1981/1996, Shambhala), 과학의 인식론과 과학철학 그리고 그의 신과학사상에 관한 세 권의 주요 저서인,『홀로그래프적 패러다임과 그 외의 모순들 The Holographic Paradigm and Other Paradoxes - 과학의 주도적 첨단이론의 탐구』(1982, Shambhala), 『육안·심안·영안 Eye to Eye -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1983/1984/1990, Shambhala), 『양자적 질문 Quantum Questions : 세계의 위대한 물리학자들의 신비주의적 저술』(1984, Shambhala), 종교의 심리학·사회학에 관한 『세속화된 신 A Sociable God』(1982), 정신병리와 정신치료에 관한 다양한 트랜스퍼스널 이론을 소개하는 『의식의 변용 Transformation of Consciousness - 발달에 관한 전통적 및 정관/명상적 조망』(1984/1986, Shambhala) 등을 꼽을 수 있다.
사별한 그의 아내의 병간호로 인한 시련과 공백기가 끝난 후 수년간의 집필을 위한 칩거 끝에, 1995년에는 『의식의 스펙트럼』에 이은 1984년까지의 일련의 초기 저술에 담긴 '전스펙트럼적 모형들'을 더욱 심오하고 광범위하게 발전시켜 그 스스로 그의 최초의 '성숙한' 업적으로 평가하는 온우주론Kosmology의 삼부작 중의 제1부에 해당하는 『성·생태·영성 Sex, Ecology, Spirituality - 진화의 영 Spirit of Evolution』(1995, Shambhala)을 발표하였다. 일년 뒤인 1996년에는 난해한 이 책을 일반 독자들을 위해 대담형식으로 보다 쉽게 축약한 후 적절하게 부드러운 제목을 달아서 『만물의 역사 A Brief History of Everything』(1996, Shambhala)로 내놓았다. 그의 초기 저술에서 나오는 기본 주제의 대부분이 이 두 권의 책 속에 담겨져 있다. 이 책들 속에서 그는 초기 저술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지 않은 통합적 모형의 거대 담론을 수많은 개념적 혁신과 더불어 보다 심층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 두 책에는 일반 시스템 이론, 진화적 이론, 페미니즘, 생태학적 사고, 근대성과 포스트모던 사상에 대한 철학적 연구 등이 내포되어 있다.
90년대 후반으로 오면서 윌버는 지난해인 2000년도까지 학문의 대가로서 보다 성숙한 위치에서 온우주론의 삼부작의 작업을 계속하면서 원숙한 사상이 녹아있는 5권의 책을 더 내놓고 있다. 먼저 그는『영의 눈 Eye of Spirit - 약간은 미친 세계에 대한 통합적 비전』(1997, Shambhala)에 그간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통합적 접근의 본성을 탐구하는 발표 논문을 한데 모아 놓은 심리학, 철학, 인지과학과 의식연구, 인류학, 예술, 문학이론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 보다 최근에 그는 참과학과 참종교에 대한 심층적, 통합적 홀리스틱 사상을 쉽고 체계적으로 다룬 『감각과 영혼의 만남 The Marriage of Sense and Soul - 과학과 종교의 통합』(1998, Random House/조효남 옮김, 2000, 범양사출판부)을 출간하였는데, 이는 발제자에 의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작년 2000년에는 인간의식의 성장 발달의 상이한 스펙트럼의 파동/수준에 따른 다양한 발달사조/조류/계통의 사상들에서의 의식/자기/정신과 심리학/테라피에 관한 통합적 비전을 제시하는, 소위 온수준 all-level·온상한 all-quadrant·온계통 all-line적인 통합 패러다임을 체계화시킨 『통합심리학 Integral Psychology』(2000, Shambhala), 그리고 양자물리학의 슈퍼스트링 이론의 궁극적 통일모형인 '모든 것의 이론 T.O.E(Theory of Everything)'의 개념을 확장하여 알려진 온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부를 포섭하는 통합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경영·정치·의학·과학·영성…을 위한 통합 비전을 제시하는『모든 것의 이론 A Theory of Everything - 경영·정치·과학·영성을 위한 통합적 비전』(2000, Shambhala)을 내놓고 있다. 그 외에도 최근에는 윌버사상의 본질을 여러 저서에서 조금씩 발췌하여 발간한 『켄 윌버사상의 본질 The Essential Ken Wilber』(1999, Shambhala)과 그의 일기형태의 명상록『일미一味 One Taste』(1999, Shambhala)가 나옴으로써 켄 윌버사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되고 있다.
한편 1995년에는 '미국 종교 한림원'에서 켄 윌버의 사상과 업적을 조사하기 위한 대규모의 분과 토론회가 있었는데, 이는 최초로 윌버사상에 대한 공개 학술토론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어서 1997년에는 그의 사상을 조명하기 위한 학술대회인 『켄 윌버와 트랜스퍼스널 연구의 미래 Ken Wilber and the Future of Transpersonal Inquiry』가 개최되었을 때 전세계에서 참가한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전문가들로 대회장이 넘쳤다. 이 학술대회에 이어 윌버사상을 재조명하고 비판한 트랜스퍼스널 분야의 여러 학자들의 논문과 그의 답변을 수록한 『대화속의 켄 윌버 Ken Wilber in Dialogue』(Donald Rothberg/Sean Kelly, 1998, Quests Books)가 출판됨으로써 윌버사상을 트랜스퍼스널 분야의 다른 연구 맥락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 동서양의 진정한 만남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윌버의 사상은 동서양의 전통종교와 철학의 공통된 전승지혜에서 나온 사상인 '존재의 대사슬'에 대한 '영원의 철학'에 바탕을 둔 홀라키적 '온우주론'에 따른 세계관이며 진리관이다. 이 온우주 Komos의 모든 존재와 의식의 창발과 진화의 동인動因이며 주체인 '활동하는 정신'은 헤겔의 용어이다. 그러나 헤겔의 관념론적 의미와는 달리 윌버의 '절대정신'은 초기에는 힌두의 베단타 철학의 아트만과 상주 불변의 절대존재로서의 브라흐만사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난 20여년간 그의 사상이 성숙해지면서 점차 그 의미가 보다 포괄적으로 대승불교의 진여자성·공空·화엄사상쪽으로 그 축이 옮겨가고 있다. 따라서 윌버의 핵심사상은, 서양의 신플라톤주의, 신헤겔주의 관념론, 과정철학, 발달심리학, 포스트모던사상등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편 동양의 베단타사상과 대승 불교사상에 기반으로 하여 이를 서양의 신비주의와 함께 서양문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온우주론의 핵심개념인 절대정신은 비록 관념론적인 용어이지만 힌두 베단타의 아트만·브라흐만, 불교의 공·진여자성에 대응하고, 나아가 '활동하는 정신'으로서의 절대정신, 진화/퇴화의 사상은 연기적 법계의 카르마에 의한 윤회의 주체인 아라야식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다차원적 세계의 계층간의 비대등한 상호침투(투영)와 계층내의 대등한 상호침투는 화엄의 사법계四法界(事法界·理法界·理事無 法界·事事無 法界)의 다즉일·일즉다 多卽一 一卽多, 상즉·상입相卽·相入, 상의상관 相依相關의 연기적 세계관과 회통한다.
윌버의 온우주의 홀라키적 창발과 진화의 세계관에서 절대 정신의 유일자로의 상승과 다자로의 하강의 원리, 즉 아트만 투사Atman Project로 인한 진화와 퇴화에서 아트만 목적인Atman telos(Eros)에 의한 진화와 아트만 수축 회피Atman constriction/ avoidance에 의한 퇴화의 끊임없는 싸이클 운동도 동양의 음양사상과 어느 정도는 회통한다. 예컨대, 유가의 理氣二元論이나 도가의 氣一元論 사상과는 다른 것이지만 절대정신(절대영)은 무극과 태극의 속성을 모두 가진 것으로서 진화와 퇴화의 추동력은 一氣인 태극에 의해, 상승/하강은 음양의 원리(陰陽五行, 五運六氣)에 의해 보다 더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다. 윌버는「육안·심안·영안」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카르마(업력)에 의한 인과응보를 생명윤회의 원리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에 비록 연기적 윤회사상을 그의 온우주론에서 연기적 세계의 역동적 원리를 밝히는데 사용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윌버는 '활동하는 정신'에 의해 불상부단 不常不斷으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자기창조와 자기변화하는 온우주의 상승·하강, 진화·퇴화(성주괴공/생주이멸)의 영원한 과정을 구사론의 緣起 윤회관과 화엄의 법계 연기관의 관점에서 그대로 받아드리고 있고, 또한 그의 사상이 동양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세계관은 베단타사상은 물론이고 소승불교의 연기적 윤회관, 대승불교의 중도공관, 화엄의 일승법계적 법신불사상과 완전히 회통하는 사상이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절대정신(절대영)'Spirit을 비록 그 함의는 약간씩 다르지만 절대정신/우주심/우주의식/하느님/유일자/절대자…같은 모든 서양의 궁극의 실재의 개념으로부터 힌두의 아트만·브라흐만, 불교의 공·진여자성·도교의 도·무극 등에 이르기까지 회통하게 사용함으로써, 그의 '절대정신'은 동서양의 절대존재/궁극적 실재에 대한 모든 개념을 무차별하게 사용한다고 비난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궁극의 실재'를 나타내고 한다는 의미에서 이들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식의 초개인적 상위 영역으로의 진화발달은 초논리/자아초월/초언어적인 의식의 변용에 의해서만 수직적 트랜스trans가 가능하고 모든 진리는 합리적 논리적 사고의 대상이 아닌 中論의 중도공관적 방식으로 접근해야하고 비이원적 궁극의 실재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불립문자不立文字적인 세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의 개관을 통해 비교 고찰한 윌버의 세계관/진리관은, 실로 동서양의 모든 사상이 상보적으로 진정으로 만나는 영원의 철학적 진정한 통합 사상임을 새삼 확인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Ken Wilber 사상의 본질" 학술연구자료 발췌 (몸학 기독교 연구소)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서론 : 나는 누구인가?
P26. T. 트래헌
지금까지 나는 온갖 소란 속에서 타락했고, 이 세상의 더러운 욕망을 배웠었다. 하지만 이제는 배운 것을 모두 버리고, 다시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좋을 만한 본래의 어린이로 돌아가리라.
→ 신영복 선생님 등 대가들은 모두 환동을 최고의 경지로 치는구나…
P27. 이와 같은 유형의 자각, 즉 ‘합일의식’ 또는 ‘지곳의 본성’이야말로 모든 지각 있는 존재의 본질이자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를 한계짓고 여러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P28. 어떤 사람이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었고 당신은 그 물음에 대해 조리 있고 정직하고 가능한 한 상세하게 답하고자 한다.
→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나는 내 삶 모든 순간, 모든 찰나의 총합이라 말하고 싶다.
P28. 하지만 정체성이 확립되는 그 모든 과정의 바탕에는 좀더 기본적인 절차가 하나 존재한다. 즉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고 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나’를 묘사하거나, 설명하거나, 또는 내적으로 느낄 때마다 당신은 -자각하든 못하든 간에- 마음속에 있는 내적 경험의 세계에다가 일종의 정신적인 선이나 경계를 긋는다. 그런 다음 그 경계의 ‘안쪽에’ 있는 모든 것을 ‘나’라고 느끼거나 ‘나’라고 부른다. 반면에 그 경계 ‘밖에’ 있ㄴ는 모든 것을 ‘내가 아닌 것’으로 느낀다. 다시 말해, 당신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그 경계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달려 있다.
P29. 이 경계선에 관해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이 쉽게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계선은 다시 그어질 수 있다. 내 영혼의 지도를 다시 그림으로써 우리는 이전에는 미처 가능하다거나, 얻을 수 있다거나, 바람직하다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그 새로운 영역 속에서 발견하곤 한다.
P30. 피부경계선의 안쪽에 있는 것은 모두 ‘나’이며, 그 밖에 있는 것은 모두 ‘내가 아니다’ 피부경계선 밖에 있는 것들 중에도 ‘나의 것’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기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나’는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나의 차, ‘나의’ 직업, ‘나의’ 집, ‘나의’ 가족을 인식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피부 안쪽에 있는 것들과는 사뭇 다르게 취급된다.
P31. “당신은 자신이 ‘몸’이라고 느끼는가, 아니면 몸을 ‘갖고 있다’고 느끼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동차나 집 또는 다른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몸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몸은 ‘나’라기보다는 ‘나의 것’처럼 보인다.
P31. ‘진정한 나’로 느껴지는 그 부분을 우리는 흔히 마음, 정신, 에고, 성격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P33. 다양한 이유로 인해 그는 곧 마음의 일부분을 ‘내가 아닌 것’이라고 부정하게 된다. 심리학 전문용어로 말하면, 그는 자기 정신의 내용들 중 어떤 것을 소외, 억압, 누리, 투사하기 시작한다. 즉 ‘나/나 아님’의 경계를 에고의 경향성 중 일부분에만 국한시킴으로써 동일시 영역을 더욱 좁힌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번 더 협소해진 자아상을 우리는 페르소나 라고 부를 텐데, 그 의미는 이야기를 진행해감에 따라 점차 분명해질 것이다.
P35. ‘나/나 아님’의 경계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한 사람에게 가용한 ‘정체성 수준’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 수준들은 그저 이론적인 가설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검증해 볼 수 있는 관찰가능한 실재이다. 그리고 이렇슫 서로 다른 수준들을 감안할 때, ‘의식’이라는 현상은 마치 수많은 정체성 수준 또는 대역으로 구성된 무지개 모양의 스펙트럼처럼 보인다.
P37. 스펙트럼의 수준이 순차적으로 올라감에 따라, 나의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측면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유기체 수준에서는 ‘환경’이 정체성 경계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 즉 외부의 이질적 대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르소나 수준에 이르면, 환경과 더불어 ‘몸과 마음의 몇몇 측면들’까지 외부의 이질적 대상으로 보이게 된다.
P38. 중요한 점은, 자신의 영혼에 경계선을 그음과 동시에 영혼의 전쟁터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정체성 경계는 자신의 어떤 측면들을 ‘나 아님’으로 여기에 될지를 결정짓는다. 따라서 스펙트럼의 각 수준에 따라 세계의 서로 다른 측면들이 소외되어 이질적인 대상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는 우주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이방인’으로 여긴다.
→ 다른 측면을 생각하기 전에, 내 안에서 ‘나’와 ‘나’가 싸우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물론 선택의 문제이고 ‘결정’의 문제이지만 내 안에서도 많은 다툼이 발생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선택에서 제외된 ‘나’는 ‘내가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일은 만약 ‘선택’된 내가 잘못되거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때, 선택된 ‘나’를 내가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희한한 일이 발생한다. 직접 경험해 본 결과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었다. 그리고 내가 아닌 나에서 도망쳐 나오려고 발버둥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해 보지 않았을까?
P43.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지평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 있어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스펙트럼 상의 ‘하강’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P43. 스펙트럼에서 하나의 수준을 하강할 경우, 실제로는 자신의 영혼을 재작도하여 그만큼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이다. 따라서 자기 성장이란 재분배, 재구역화, 재작도이며, 자기 자신의 좀더 깊고 넓은 수준을 인식하고 포괄해가는 풍요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2. 그것의 절반
P46. 자연은 진실한 개구리와 거짓 개구리를 키우지 않을 뿐더러, 도덕적인 나무와 부도덕한 나무, 옳은 바다와 잘못된 바다 같은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P46. 그렇기 때문에 자연은 온갖 종류의 것들을 만들어내는 일을 즐기고 있다. “자연은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다”고 소로우는 말한 바 있다. 자연은 옳음과 그름이란 대극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이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49. 결정한다는 것은 선택할 것과 선택하지 않을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쾌락적인 것과 고통스러운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둘 중에서 쾌락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어떤 관념을 주장한다는 것은 진실이라고 느낀 개념과 진실이 아니라고 느낀 개념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이다.
→ 호오~선택과 결정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은 쾌락과 고통스러운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야근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는 결정 앞에 서있다고 가정하면, 야근을 하는 것은 고통이다. 물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야근을 해서 자신의 일을 끝내고 난 후의 상쾌함. 잘 했던 못했던 쨌든 상사의 넘어감, 혹은 인정, 혹은 칭찬이라는 쾌락, 이어지는 월급이라는 쾌락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냐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부수적으로 찾아오는 것 혹은 자신의 욕망이 아닌 수동적인 것이기에, 이런 경우는 고통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고통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바꾸자면 나에게 주어진 역할 혹은 책임감이라고 표현하면 좋을 것 같다.
P50. 그러나 안 대 밖이란 대극은 우리가 동그란 경계를 그릴 때까지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던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즉, 한 쌍의 대극을 만들어낸 것은 경계선 그 자체이다. 한 마디로, 경계를 긋는 순간 대극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극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곧 ‘경계선 긋기’ 과정이기 때문인 것이다.
P52. 쾌락에 집착하면 할수록 어쩔 수 없이 고통은 더 두려운 것이 된다. 선을 추구하면 할수록 악에 대한 강박관념은 더욱더 강해진다.(중략) 그런데 지금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기울인 노력은 대극 중 어느 하나를 근절시키려는 틀에 박힌 시도였다.
P53. 결국 진보란 단순히 부정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긍정적인 것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의학과 농업의 명백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수세기에 걸쳐 긍정적인 것은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해온 결과로서 인류가 더 행복하고, 더 만족스럽고, 더 평화롭게 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P54. 물론 서로 대립하는 것들은 밤과 낮마큼이나 사뭇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점은 밤이 없이는 낮도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부정적인 것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동시에 긍정적인 것을 즐길 가능성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진보라는 모험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의 실패는 더욱 두드러진 것이 되고, 그렇게 해서 총체적인 욕구불만은 훨씬 극심해진다.
→ 서양판 도덕경인가?
P57. ‘대극의 일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전적으로 분리되고 화해불가능한 반대극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본래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의 ‘상보적 측면들’인 것이다.
P59. 이와 똑같이, 고통과 관련짓지 않고는 결코 쾌락을 인식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아주 편안하고 즐겁다고 느끼더라도, 불편함과 고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결코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쾌락과 고통이 번갈아 교차하는 거처럼 생각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쾌락과 고통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둘의 상호대비와 교차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P61. 중요한 점은, 우리가 자연속에서 발견한 모든 선은 단지 대극을 구분 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눌 수 없는 일체로서 둘을 함께 묶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은 경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또는 논리적인 것이든, 하나의 선은 그저 나누고 구분 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묶고 결합시킨다.
P64.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문제들’ 대부분은 대극은 서로 분리될 수 있고 또 분리되어야만 하며, 고립시킬 수 있고 또 고립시켜야만 한다는 환상에 기초해 있다.
P64. 힌두 경전
얻고자 함 없이 그저 스스로 오는 것에 만족하고,
양극을 초월하여 시기심으로부터 해방된 자,
성공이나 실패에 집착하지 않는 자,
그는 행위 속에서도 속박되지 않는다.
갈망하지도 않고 혐오하지도 않는
그를 일컬어, 영원히 자유롭다고 한다.
양극을 초월한 자는
갈등에서 쉽게 풀려나기 때문이다.
P66.. 불경 <능가경>
빛과 그림자, 긴 것과 짧은 것, 검은 것과 흰 것, 이와 같은 것들이 서로 별개로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릇된 것이다. 그것들은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다만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일뿐이며, 실재가 아니라 관계성을 말하는 단어들이다. 존재의 조건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 도덕경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모두가 상보적인 관계에 있으며, 달이 차야 달이 지고, 시계추도 한쪽의 극점으로 가야 다시 내려오고 다시 반대의 극으로 가는.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이지요
▶ 3. 무경계 영토
P75.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이런 지식과 힘, 통제력은 그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경계는 언제나 양날의 칼이며, 그 칼로 잘라낸 자연의 열매는 필연적으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얻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해내야만 했다.
P83. 동양인들이 한 번도 경계라를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계가 그들의 머릿속을 독점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과 자연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멀리 동떨어진 적이 없었다. 동양인들에겐, 인간이 만든 경계투성이 지도 밑에 잠복해 있는 전체성을 시사하는 오직 하나의 길, 도, 법만이 있었다.
P85. 세계를 경계의 공으로 볼 경우, 모든 사물과 사건이-모든 대립과 마찬가지로-상호의존적이며 상호침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핵심이다. 즐거움은 고통과 관련되어 있고, 선은 악과, 삶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그것이 아닌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결합에서 나오는 것인가?
P86. 따라서 당신의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자각 속에서 어떤 분리된 사물도 경계도 없다. 실제로는 단일한 실체를 ‘본’ 적이 결코 없다. 당신은 언제나 풍요롭게 짜여진 하나의 장을 본다. 그것이 당신의 즉각적인 실재의 본질이다. 여기에 경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이 말 정말 흥미로운데?
▶ 4. 무경계 자각
P90. 우리가 늙어 추억만을 간직한 채 무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지막으로 포기하
게 될바로 그것이다. 곧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그은 최초의 경계이자 우리
가 제거할 마지막 경계이다. 이 경계야말로 우리가 만들어 세운 모든 경계 중에서 가장 근
원적인 최초의 것이다.
P94. 우리 모두는 그 ‘나’라는 느낌과 외부세계에 대한 느낌을 다르게 여긴다. 그러나 ‘나’라는 느낌과 ‘저 밖에 있는 세계’의 느낌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 두감각이 실재로는 ‘하나이자 동일한 느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지금 밖에 있는 객관적 세계라고 느끼는 그것과 내면의 주관적 나라고 느끼는 그것이 동일하다는 말이다.
→ 나 이외의 외부의 사람에게 ‘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타인. 나 바깥의 세상은 내가 아닌 세계이다. 물론 내가 속한 세계이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내 감정이 맞는 것인가? 예를 들어 길을 가는 사람을 보았을 때 나에게는 제3자, 즉 타인지만 그 순간 나는 그에게는 타인이 된다.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혹은 생각 안 할수 있고, 의식 안할 수 있지) 있는 그 사람은 모르지만 나는 사실 지나가는 사람이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물론 아무 생각을 안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그 순간 나면서 타인이 되고 그사람은 타인이면서 내가 되는데, 그 때 상대를 보고 생각을 안하든 하든 우리는 어쨌든 또 이 세계에 속한 그냥 동일한 개체라 내가 나만이 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 된다는 생각이 맞는거겠지? 무슨 말인지 주저리주저리 생각나는데로 쓰고 있는데 어쨌든 내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믿으면 되는거지 뭐
P98. 내가 한 그루의 나무를 볼 때, ‘나무’라는 하나의 경험과 ‘나무를 본다’라는 또 다른 경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단지 나무를 본다는 단일한 경험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냄새 맡는 행위’의 냄새를 맡거나, ‘맛보는 행위’의 맛을 보지 않는 것과 똑같이, 나는 ‘보는 행위’를 보지 않는다.
P98. 당신은 지금 이런 문제를 숙고하고 있는 그 ‘생각하는 자’를 발견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나는 혼란스럽다’ 라고 ‘생각하고’있는 ‘생각하는 자’가 있는가, 아니면 단지 ‘나는 혼란스럽다’라는 생각만이 있는가? 분명히 현재의 생각만이 존재한다. 만일 당신이 ‘생각하는 자’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생각의 대상’일수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라고 믿고 있는 실체가 사실은 현재 생각의 흐름 그 자체일 뿐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 엄청난 통찰이다…
P99. 이렇게 해서 세계와 떨어져 분리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피할 수 없는 결론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을 ‘경험과 분리된 경험자’라고 상상해왔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찾으려는 순간, 그것은 경험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P100. 이제 ‘나’와 ‘나의 경험’사이에 아무런 간격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으니, ‘나’와 ‘내가 경험한 세계’ 사이에도 아무 간격이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기 시작하지 않는가? ‘나’는 곧 ‘나의 경험’이고, 또한 ‘내가 경험한 세계‘이기도 하다.
→ 뭐지? 점점…? 내가 올초부터 생각해온 3가지 명제의 결론이 이 책에 있지? 내가 아까 찰나의 총합이라고 표현하고 싶다는 것이 지금 이 문장과 의미가 같은데… 나 혼자 깨달은 건가??
▶ 5. 무경계 순간
P117. 영원은 ’언제나 이미 지금‘인 것이다. 현재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거기에 또 다른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P118. 우리의 모든 문제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의 걱정은 언제나 과거 또는 미래에 걸쳐 있다.
→ 뭐지 내 3대명제 중 생각과 생각사이에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에 대한 답변이 여기 있네? 내가 생각한 것에 관해서 글을 쓸 필요가 없네 ㅜㅜ
P118.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자체에슨 어떤 근본적인 문제도 없다. 그곳에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제를 끼고 사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다시 면밀히 살펴보라. 그러면 그것이 실제로는 어떤식으로든 과거의 죄책감이나 미래의 불안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죄책감이란 과거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고, 불안이란 미래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P122. 모든 소리가 오직 현재의 소리인 것과 똑같이, 모든 맛은 오직 현재의 맛이며, 모든 냄새도 현재의 냄새이고, 모든 광경 역시 현재의 광경이다. 당신은 과거나 미래의 어떤 것도 만지거나 보거나 느낄 수 없다. 다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자각 속에서는 어떤 과거도 미래도 없다. 즉,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1초도 안 될 만큼 아주 짧더라도, 결코 끝나지 않으며 쉼 없이 변화하는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 직적접인 자각은 모두 무시간적인 자각이다.
→ 내가 깨우친 내용이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네?;;
P124. 이와 같이 내가 아는 것은 실질적인 과거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과거에 대한 기억일 뿐이며, 그런 기억들은 오직 현재경험으로서만 존재한다.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그것은 현재의 사실이다. 따라서 어떤 시점에서 보더라도 나는 결코 실질적인 과거를 ’직접‘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 6. 경계의 생성과 전개과정
P137. 이제 막 태어난, 이제 막 존재에 참여한 것은 어떤 것이든 그 배후에 아무런 과거를 갖고 있지 않다. 바꿔 말해, 탄생이란 ’과거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막 죽은, 이제 막 존재하기를 멈춘 것에게는 그 앞에 아무런 미래도 없다. 즉, 죽음이란 ’미래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떤 과거도, 어떤 미래도 동시에 ’모두‘ 없다. 특, 탄생과 죽음은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는 하나이다.
P140. 우리는 미래를 요구하기 때문에 매 순간 기대와 미완성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매 순간을 ’스쳐 보내면서‘ 살아간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인해 진정한 눙크 스탄스, 즉 무시간적 현재는 눙크 플루엔스, 즉 그저 덧없이 질주해가는 1~2초의 현재, 스쳐 지나가는 현재로 전락한다. 우리는 매 순간이 미래의 순간으로 ’지나가기를‘ 기대한다. 언제나 상상 속 미래를 향해 달려감으로써 죽음을 ’도피하는 척‘하려고 말이다.
P164. 우리는 투사의 중요한 지표 하나를 알게 되었다. 환경(사람 또는 사물들) 속의 무언가가 우리에게 단지 ’정보‘만 주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대개 우리 자신으로부터 투사된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성가시고, 당황스럽고, 혐오스러운 물건들, 또는 역으로 매료되고, 항거할 수 없고, 마음을 사로잡는 물건들, 이런 것들이 흔한 그림자의 반영이다.
P165.
보고 또 보다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너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실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P169. 따라서 우울, 불안, 권태, 공포 등의 증상에는 어떤 투사된 감정이나 특징과 같은 그림자의 측면이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불쾌하더라도 증상을 거부하거나 혐오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증상들 자체가 해결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상과 싸우는 것은 사실 그 증상 속에 내포된 그림자와 싸우는 것이고, 이 싸움이야말로 문제를 일으킨 최초의 원인이다.
P169. 페르소나 수준에서 치료의 첫 단계는 증상들을 받아들이고 여유를 갖는 것이며, 지금까지 혐오해왔던 증상의 불쾌감과 친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의식적으로 증상과 접촉해야 하고, 가능한 한 마음을 크게 열고 증상을 수용해야 한다. 이 말은 우울, 불안, 소외감, 권태로움, 상처, 또는 당혹감 등을 스스로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전엔 온갖 방식으로 저항해왔던 이 감정들이 스스로 드러나게끔 내버려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자신에게 심적인 혹은 감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인정해야 하고 수용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감정의 문제만 아닐 것이다. 분명 물리적인 사건(Event)가 발생했기에 그런 감정들이 발생했고,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그 물리적인 사건을 직시해야 한다. 객관화 시켜야 하고 그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 사건의 주체도 나이며 그 원인도 나이며 그 결과도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해결된다. 쉽지는 않다. 아직 나도 잘 했고 잘 하고 있는지 판단이 서지를 않는다. 하지만 잘하고 있다고 믿는다. 두려움은 직시하면 그 뿐이다. 그 순간 아무것도 아닌 무가 된다.
p174. 당신은 사람이나 사건들 자체가 당신을 흥분시키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당신이 ’스스로‘ 흥분하게끔 만드는 계기를 제공할 뿐임을 깨달을 것이다. 스스로가 자신의 증상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최초로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안도감을 선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런 증상들을 원래 형태로 되돌려 ’변환‘시킴으로써 증상 만들기를 ’중단‘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 자기 자신은 느낌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 된다.
→ 오씨~ 내가 생각했던 거랑 똑같잖아~ 내가 깨달은 모든 것이 여기 있네~
▶ 8. 켄타우로스 수준
P199. 자아는 삶 속에서 행복, 쾌락 또는 일시적인 기쁨을 만들어 내려는 미혹된 시도를 한다. 현재 상황에서의 즐거움은 무언가가 본질적으로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며, 주변을 세련된 장난감과 장치들로 채움으로써 즐거움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느낌은 행복과 즐거움을 밖에서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환상을 강화시킬 뿐이다. 이 환상은 그 자체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원천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자신의 기쁨을 방해하는 바로 그것을 추구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 글쎄...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성현이 될 수 없으니까 이런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너무 종교적으로 가려는 것 아닌가?
P202. 삶 속에서 자아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삶 속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고, 어느 시점까지 그것은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자아를 넘어선 곳에는 그런 종류의 의미를 넘어선 무엇이 있다. 행위는 감소하고 존재가 증가하는 그런 의미 말이다. 커밍스가 말한 것처럼, “존재할 수 있거든, 단지 존재하라.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원기를 내서 다른 사람들의 일에 끼어들고 스스로 지쳐 쓰러질 때가지 이런저런 일을 참견하면서 계속 그렇게 살아가라.”
p202. 켄타우로스적인 삶의 의미, 즉 근본적인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바로 삶 자체의 과정이 기쁨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의미는 외적인 행위나 소유에서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빛을 발하는 내적인 흐름에서 발견된다. 또한 세계로, 친구에게로, 인류 전체로, 그리고 무한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이런 흐름을 ’반산시키고 관계 맺는‘ 가운데 발견된다.
삶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삶에서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무상함과 친구가 되고, 슴을 내 쉴때마다 심신 전체를 공 속으로 해방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숨을 내쉴 때마다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죽음에 내맡기는 것은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매 순간의 죽음과 무상함 앞에서 위축되는 것은 매 순간의 삶으로부터 위축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 무슨 의미인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되는 지 안다. 나도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하지만 정말 90프로이상의 사람들은 뜬구름 잡는 소리네 라고 말할 수 있는 생각이다;;
▶ 9. 초월적인 나
p216. 우리는 ’모든 정신적, 감정적, 육체적인 대상과 탈동일시함으로써, 즉 그 모든 것을 초월함으로써 이 초개아적 주시자를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실제로 “내 불안은 내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강해질수록, 그 불안에 위협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불안이 현존해 있더라도 더 이상 그 불안에만 묶여 있지는 않기 때문에, 압도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P219.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자신이 바로 괴로움 그 자체라는 환상만 강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괴로움에서 도피하려는 노력은 그 괴로움을 영속화시키는 일에 불과하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괴로움 자체가 아니라 그 괴로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동일시한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곤경이다.
→ 사실 종교책이라도 믿을 정도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좋다. 이 부분은 불경에 기반을 두고 깨달은 것 같다. 아팠던 사람에게 굉장히 유용할 것 같다.
P227.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냐, 난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 없으니까, 그건 나였을 리가 없어.” 그러나 이말은 ‘나’를 기억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우리는 방금 나란 느낌은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주시자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게다가 지난 달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조차 기억할 수 없더라고, 나는 여전히 나이다.
P228. 당신은 ‘초월적 나’를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무슨 수를 써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의 눈은 자신의 누 자체를 볼 수 있는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자신의 기억, 마음, 감정, 사고와의 잘모된 동일시를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깨는 일뿐이다. 이런 파기에는 초인적인 노력이나 이론적인 이해 같은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이라곤 ‘당신이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보는 자일 수없다’는 단 한가지 이해뿐이다.
P228. 당신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진정한 나, 아는 나, 내면의 나가 아니다. 그것은 지각될 수도, 정의될 수도 없다. 어떤 식으로든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속박이란 보는 자를 ‘보여질 수 있는’ 것들과 동일시한 데서 비롯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해방은 이런 잘못의 단순한 역전에서부터 시작한다.
▶ 10. 궁극의 의식상태
P235. 그렇지만 합일의식은 특정한 파도라기보다는 ‘물’ 그 자체에 가깝다. 물과 파도 사이에는 어떤 경계도, 어떤 차이도, 어떤 분리도 없다. 즉, 어떤 파도도 다른 파도보다 더 축축하지 않다는 점에서 물은 ‘모든’파도에 동등하게 존재한다.
p236. 우리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요함을 유지하지 못한다. 언제나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답으로부터 ‘달아난다.’ 늘 저 너머만 바라보고 있으면 현재 상황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추구, 우리 자신의 욕망, 그것이 발견을 앞질러 방해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찾고 있는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언제나 바로 이 ‘현재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현재경험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답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답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p260. 현재경험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내려는 동기도 갖지 않게 된다. 세계와 나는 두 개의 별개의 체험이 아니라, 단일한 경험으로 되돌아온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파도뿐이며, 그 파도는 모든 곳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파도 옮겨타기를 하지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으면, 더 이상 경험이 우리를 스쳐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현재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혀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작도 없을 뿐만 아니라 끝도 없으며, 앞에도 뒤에도 아무럿도 없다. 기억으로서의 과거와 기대로서의 미래 둘 다가 다만 현재의 사실로 보일 때, 이 현재를 가로막는 얇은 판은 붕괴한다. ‘이 순간을 둘러싸고’ 있는 경계들이 ‘이 순간으로’ 녹아들고, 달리 갈 곳 없는 이 순간만이 남는다.
3. 내가 저자라면
★ 목차/구성에 대하여
★ 이 책의 장점
동양사상, 동양철학을 상당히 좋아하는 나로써는 켄 윌버라는 사상가가 굉장히 흥미롭다. 마치 서양인들에게 동양의 사상을 받아들여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부분을 알 수 있다고 소개하는 하는 것 같다.
★ 보완점 / 저자의 눈으로
너무나 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상당히 복잡하다. 물론 굉장히 쉽게 설명을 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설명을 쉽게 한다고 해도 어린아이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상당히 어려운 내용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주장하려다 보니 자칫 심한 반발 혹은 비판에 부딪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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