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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3일 23시 39분 등록

무경계



켄 웰버 지음/ 김철수 옮김/ 정신세계사 출판




저자연구


1. 생애


 
대 천재 사상가인 윌버는 1949년 미국의 오클라호마주에서 태어났으며, 공군장교였던 직업군인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에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자라났다. 그는 매우 활달한 성격으로 스포츠와 학업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특히 물리학·화학·생물학·자연과학과 수학에 매우 뛰어났었다고 그 스스로 회고하고 있다. 듀크 대학에 입학하여 전공분야를 의학에서 생화학으로 바꾼 것도 소년시절부터 품고 있었던 자연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는 어느 날 우연히 노자의 『도덕경』을 읽게 되면서 그의 생활과 사상과 정신은 급격한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도덕경으로부터 받은 감명은 청년기의 그의 세계관의 뿌리를 흔들어 놓을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후 그는 동서양의 정신적 전통·종교·신비주의에 관한 문헌과 서양 심리학·철학에 관한 서적을 열정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듀크 대학 시절에 그는 특히 선禪 사상에 심취하였고 동서양의 사상서를 모두 섭렵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명상과 선禪 수련에도 정진하였다.

 

그는 곧 듀크대를 그만두고 부친이 근무하던 네브라스카로 돌아가서 월남전에 징집될 것이 두려워 네브라스카 대학에 등록하였다. 거기서도 대학원에 들어갈 때까지 생화학과 생물리학을 전공하는 한편, 도교·불교·힌두의 베단타 사상을 비롯한 각종 동양사상, 서양 신비주의 문헌, 심리학 각 학파의 문헌, 동서양의 철학·영성 관련 문헌 등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였다고 한다. 윌버는 그 자신의 기존 세계관의 두꺼운 껍질을 깨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케슈탈트요법과 참선수행의 체험을 통해 극복하고서 영적으로 깨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곧 당시의 행동주의 심리학·정신분석·실존/게슈탈트 심리학의 혼란뿐 아니라, 초기의 초개인 심리학에서도 동양종교나 초의식에 관한 이론들이 난립된 상태를 목격하고는, 이와 같이 혼란의 와중에 있는 모순된 심리학의 학설이나 교의를 통합, 정리해보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대학원에서 생화학박사과정을 그만두고, 그 해에 결혼을 한 후에 대학을 떠나 그가 24세이던 1973년 겨울, 3개월만에 그의 최초의 저서『의식의 스펙트럼』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당시 아직도 체계가 서있지 않던 소위 제4심리학이라는 초기 초개인심리학의 이론적 기틀을 제공할 정도로 초개인심리학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를 하룻밤만에 초개인심리학 분야의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책은 3년간 20여개 출판사에 의해 출판을 거절당하는 수모와 우여곡절 끝에 'Quest Book' 출판사에 의해 발간되었던 것이다.

 

그 후 수년간 윌버는 엄청난 독서와 집필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이 기간에 그는 시간제로 노동일을 하면서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매월 일정기간 수련원에 들어가 수련하는 것 외에 매일 여러 시간의 명상과 함께 자신의 참선수행을 심화시켰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최초의 저서 『의식의 스펙트럼』의 접근방법을 훨씬 더 발전시키는 일련의 논문과 책들을 잇달아 신속하게 내놓았다.


 
한편, 윌버의 개인적 삶을 보면 20대 초부터 명상·참선, 연구·저술로 일관된 영적 구루와도 같은 삶을 살았으나 그의 결혼생활만은 시련을 겪었다. 그의 첫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1981년에 파경에 이르러 원만하게 헤어졌다고 한다. 1983년에는 그를 숭배하며 흠모하던 시인/작가인 Treya Killam을 만나 서로 사랑한 후 결혼하였으나, 결혼 후 열흘 남짓한 시기에 그의 아내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 후 5년 남짓한 기간동안 아내의 병치료를 위해 아내와 함께 끊임없이 여행하면서 전업적인 가족 "부양자" 노릇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헌신적인 병수발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는 1989년에 사망하였다. 그들이 함께 한 삶에 대한 아주 감동적이고 눈물겨운 이야기는 윌버 자신의 고백과 그의 아내의 명상일기를 바탕으로 한 『우아함과 용기Grace and Grit}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슬픔에 잠긴 기간과 이 책의 집필이 끝난 후 윌버는 아내와 말년의 수년간을 함께 살았던 콜로라도 볼더Boulder로 돌아와 강도 높은 연구와 저술과 명상의 생활로 다시 돌아갔다. 결혼생활 이후에 결여되어 있던 것으로 보이는 '신들린 듯한 정신'과 영감은 명백하게 회복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그의 사상을 더욱 심오하고 광범위하게 발전시킨 '온우주론 Kosmology'의 삼부작을 집필하면서 그 외에도 더욱 성숙해진 철학·심리학·종교·문화·사회·예술사상을 담은, 다음에 소개할 5권의 주옥같은 저서들을 지난 5년 사이에 집필하였다. 그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그의 사상에 관한 질문·토론에 답하거나 멧세지를 전해주면서 명상과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2.
업적


 
이 시대의 트랜스퍼스널학 분야를 대표하는 대사상가로서의 윌버의 위대한 업적은 지난 25년간 그가 발표한 수많은 논문과 18권의 저서(8권의 전집)에 잘 수록되어 있다. 윌버의 수많은 논문과 발간된 책의 일부는 처음에는 그가 수년간 편집자로 일했던 『Revision』학술지에 발표되었다. 1979년에서 1984년 사이에 윌버는 그의 통합적 모형을 논리정연하게 전개하는 여러 권의 책과 수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 주요 저서로는, 개인적 성장발달에 관한 『무경계 No Boundary - 개인적 성장에 대한 동서양의 접근방법』(1979/1985, Shambhala), 『아트만 투사 The Atman Project - 인간발달의 트랜스퍼스널 관점』(1980, Quest Books), 집합적 인간의 인류학적·사회 문화적 진화발달에 관한 『에덴으로부터 일어나서 Up from Eden - 인간진화에 대한 트랜스퍼스널 관점』(1981/1996, Shambhala), 과학의 인식론과 과학철학 그리고 그의 신과학사상에 관한 세 권의 주요 저서인,『홀로그래프적 패러다임과 그 외의 모순들 The Holographic Paradigm and Other Paradoxes - 과학의 주도적 첨단이론의 탐구』(1982, Shambhala), 『육안·심안·영안 Eye to Eye -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1983/1984/1990, Shambhala), 『양자적 질문 Quantum Questions : 세계의 위대한 물리학자들의 신비주의적 저술』(1984, Shambhala), 종교의 심리학·사회학에 관한 『세속화된 신 A Sociable God(1982), 정신병리와 정신치료에 관한 다양한 트랜스퍼스널 이론을 소개하는 『의식의 변용 Transformation of Consciousness - 발달에 관한 전통적 및 정관/명상적 조망』(1984/1986, Shambhala) 등을 꼽을 수 있다.


 
사별한 그의 아내의 병간호로 인한 시련과 공백기가 끝난 후 수년간의 집필을 위한 칩거 끝에, 1995년에는 『의식의 스펙트럼』에 이은 1984년까지의 일련의 초기 저술에 담긴 '전스펙트럼적 모형들'을 더욱 심오하고 광범위하게 발전시켜 그 스스로 그의 최초의 '성숙한' 업적으로 평가하는 온우주론Kosmology의 삼부작 중의 제1부에 해당하는 『성·생태·영성 Sex, Ecology, Spirituality - 진화의 영 Spirit of Evolution(1995, Shambhala)을 발표하였다. 일년 뒤인 1996년에는 난해한 이 책을 일반 독자들을 위해 대담형식으로 보다 쉽게 축약한 후 적절하게 부드러운 제목을 달아서 『만물의 역사 A Brief History of Everything(1996, Shambhala)로 내놓았다. 그의 초기 저술에서 나오는 기본 주제의 대부분이 이 두 권의 책 속에 담겨져 있다. 이 책들 속에서 그는 초기 저술에서 심층적으로 다루지 않은 통합적 모형의 거대 담론을 수많은 개념적 혁신과 더불어 보다 심층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 두 책에는 일반 시스템 이론, 진화적 이론, 페미니즘, 생태학적 사고, 근대성과 포스트모던 사상에 대한 철학적 연구 등이 내포되어 있다.


  90
년대 후반으로 오면서 윌버는 지난해인 2000년도까지 학문의 대가로서 보다 성숙한 위치에서 온우주론의 삼부작의 작업을 계속하면서 원숙한 사상이 녹아있는 5권의 책을 더 내놓고 있다. 먼저 그는『영의 눈 Eye of Spirit - 약간은 미친 세계에 대한 통합적 비전』(1997, Shambhala)에 그간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통합적 접근의 본성을 탐구하는 발표 논문을 한데 모아 놓은 심리학, 철학, 인지과학과 의식연구, 인류학, 예술, 문학이론 등을 포함시키고 있다. 보다 최근에 그는 참과학과 참종교에 대한 심층적, 통합적 홀리스틱 사상을 쉽고 체계적으로 다룬 『감각과 영혼의 만남 The Marriage of Sense and Soul - 과학과 종교의 통합』(1998, Random House/조효남 옮김, 2000, 범양사출판부)을 출간하였는데, 이는 발제자에 의해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작년 2000년에는 인간의식의 성장 발달의 상이한 스펙트럼의 파동/수준에 따른 다양한 발달사조/조류/계통의 사상들에서의 의식/자기/정신과 심리학/테라피에 관한 통합적 비전을 제시하는, 소위 온수준 all-level·온상한 all-quadrant·온계통 all-line적인 통합 패러다임을 체계화시킨 『통합심리학 Integral Psychology(2000, Shambhala), 그리고 양자물리학의 슈퍼스트링 이론의 궁극적 통일모형인 '모든 것의 이론 T.O.E(Theory of Everything)'의 개념을 확장하여 알려진 온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부를 포섭하는 통합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경영·정치·의학·과학·영성을 위한 통합 비전을 제시하는『모든 것의 이론 A Theory of Everything - 경영·정치·과학·영성을 위한 통합적 비전』(2000, Shambhala)을 내놓고 있다. 그 외에도 최근에는 윌버사상의 본질을 여러 저서에서 조금씩 발췌하여 발간한 『켄 윌버사상의 본질 The Essential Ken Wilber(1999, Shambhala)과 그의 일기형태의 명상록『일미一味 One Taste(1999, Shambhala)가 나옴으로써 켄 윌버사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되고 있다.

 

한편 1995년에는 '미국 종교 한림원'에서 켄 윌버의 사상과 업적을 조사하기 위한 대규모의 분과 토론회가 있었는데, 이는 최초로 윌버사상에 대한 공개 학술토론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어서 1997년에는 그의 사상을 조명하기 위한 학술대회인 『켄 윌버와 트랜스퍼스널 연구의 미래 Ken Wilber and the Future of Transpersonal Inquiry』가 개최되었을 때 전세계에서 참가한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전문가들로 대회장이 넘쳤다. 이 학술대회에 이어 윌버사상을 재조명하고 비판한 트랜스퍼스널 분야의 여러 학자들의 논문과 그의 답변을 수록한 『대화속의 켄 윌버 Ken Wilber in Dialogue(Donald Rothberg/Sean Kelly, 1998, Quests Books)가 출판됨으로써 윌버사상을 트랜스퍼스널 분야의 다른 연구 맥락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고 있다.

- 조효남 글 중 발췌

 


마음을 무찔러 온 글귀

 

P29

우리는 이것저것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나는 이것이지 저것은 아니다라고 느낀다. 즉 정체성이란 자신을 이것과 동일시하고, ‘저것과는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나인 것내가 아닌 것사이에 경계선을 긋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단지 그 선 안쪽에 있는 것을 묘사하면서 답한다. 소위 정체성의 위기, 그 선을 어디에 어떻게 그을지 결정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요컨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당신은 어디에 경계를 설정했는가?”라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 나를 결정 짓는 것은 내가 아닌 것과의 경계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경계를 그으려면 정말 나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인 것 같다.

 

P30

그 중 사람들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가장 공통된 경계선은 유기체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피부 경계선이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나 아님의 경계선일 것이다.

 

기분이 묘하다. 들어보니 정말 그렇네 싶으면서도 피부를 경계로 나와 외부를 경계 짓는다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건 그냥 당연한 외부 환경이었다. 내 몸이 아닌 외부환경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P31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동차나 집 또는 다른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몸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몸은 라기 보다는 나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의 것은 정의상 /나 아님의 경계선 밖에놓여 있는 것이다.

신기한 이야기이다. 맞는 듯 하면서도 또 아닌 듯 한 이야기이다. 정말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자신의 뇌를 컴퓨터에 심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주변에선 그 컴퓨터를 정말 그의 환생, 대치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란 내 육체, 내 겉 모습과는 상관없는 존재인가?

 

P37

가장 아래의 합일의식 수준에서, 그는 자신이 유기체 차원을 넘어서서 우주 그 자체와 하나라고 느낀다.

어떤 의식의 수준일까? 도무지 상상이 안된다.

 

P37

이런 식으로 우주로부터 유기체라는 우주의 일부로, 유기체로부터 에고라고 하는 유기체의 일부로, 에고로부터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에고의 일부로 축소해가는 것이 의식 스펙트럼의 주요 대역들이다. 스펙트럼의 수준이 순차적으로 올라감에 따라, 나의 밖에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측면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유기체 수준에서는 환경이 정체성 경계밖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즉 외부의 이질적 대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르소나 수준에 이르면, 환경과 더불어 몸과 마음의 몇몇 측면들까지 외부의 이질적 대상으로 보이게 된다.

 

P43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지평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 있어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스펙트럼 상의 하강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P45

삶에 왜 대극이 생겨나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왜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것이 한쌍의 대극 중 어느 한쪽인 것일까? 왜 모든 결정은 대극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왜 모든 욕망은 대극에 기초해 있는 것일까?

글쎄 정말로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잘 듣고 보니 정말 어둠이 있어서 빛이 있고 낮음이 있어서 높음이 보이고 짧은 것이 있어서 긴 것이 보인다.

 

P46

자연은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다.”고 소로우는 말한 바 있다. 자연은 옮음과 그름이란 대극을 알지못하며, 따라서 인간이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자체가 자연의 오류는 아닐까?란 생각을 해 본다.

 

P47

대자연이 생각보다 휠씬 더 현명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야 막 깨닫기 시작했다.

 

P48

나는 대자연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휠씬 더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상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자연은 인간의 두뇌, 즉 우리가 우주에서 가장 지적인 도구 중 하나라고 스스로 우쭐대는 두뇌 또한 만들어냈다.

글쎄 인간의 두뇌란 자연의 오류, 어떻게 보면 대 자연의 큰 흐름을 긴장 속에 있게 하는 하나의 오류프로그램이 아닐까? 땅을 뒤집어야 하고 물을 한번 휘 젓는 것처럼 말이다.

 

P49

다시 말해, 아담이 착수한 위대한 과업은 정신적 또는 상징적인 구분선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P50 

작은 일부터 중대한 위기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선택부터 커다란 결단에 이르기까지, 가벼운 호감부터 불타는 열정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전부 경계를 설정하는 과정이다.

알 듯 말 듯한 이야기이다. 맞는 이야기 같으면서 모호하다. 그래서?

P50

한마디로, 경계를 긋는 순간 대극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극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곧 경계선 긋기과정이기 때문인 것이다.

 

P53

우리는 한 쌍의 대극이 있다면 부정적이고 윈치 않는 한쪽을 근절시킬 때라야 비로소 삶을 완벽하게 즐길 수 있게 된다고 상상한다. 만일 고통, , 죽음, 고뇌, 질병을 정복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선, 생명, 기쁨, 건강이 충만할 수 있다면 물론 그것은 정말로 좋은 삶일 것이다.

 

P53

대립하는 것을 분리 시켜 놓고 긍정적인 반쪽에만 집착하고 달려드는 식의 목표는 진보적인 서구문명 종교, 과학, 의학, 산업 의 독특한 특징처럼 보인다. 결국 진보란 단순히 부정적인 것에서 멀어지고긍정적인 것을 향해 다가가는것이 되었다. 그러나 의학과 농업의 명백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수세기에 걸쳐 긍정적인 것은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해온 결과로서 인류가 더 행복하고, 더 만족스럽고, 더 평화롭게 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휠씬 더 많다. 오늘날은 불안의 시대, <미래의 충격>의 시대, 역병처럼 유행하는 욕구불만과 소외의 시대, 풍요롭지만 또한 권태롭고 무의미한 시대이다.

대극 중 하나만 흔히 우리가 긍정적이란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만 모아둔다면 과연 그것이 행복한 상황일까? 갑자기 궁금해 진다. 그럼 천국은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파라다이스일까? 아마도 무료하고 권태로운 생활이 되고, 아니 그렇게 된다면 다시 또 다른 대극이 생겨나지는 않을까?


P54

그보다 중요한 점은 밤이 없이는 낮도 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부정적인 것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동시에 긍정적인 것을 즐길 가능성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은 반대적인, 대극적인 것이 있기에 그 효과?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P57

대극의 일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전적으로 분리되고 화해 불가능한 반대극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폰 베르타란피의 말을 빌리자면 본래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의 상보적 측면들인 것이다.  


P59

대립하는 양극을 떼놓으려고 애쓰면서 소위 고통 없는 쾌락, 죽음 없는 생명, 악 없는 선 따위의 긍정적이라고 판단한 것들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실체가 없는 유령을 쫓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것은 골 없는 마루, 파는 자 없는 사는 자, 오른쪽 없는 왼쪽, 출구 없는 입구만의 세계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가 너무나 고상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환상이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립되지 않는 난센스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대극, 결국 반대적인 것, 반대편이란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럴 듯 하면서도 잘 모르겠다.


P60
분리된 대극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하는 것은 경계 그 자체라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쉽게 말하면, “궁극의 실재는 대극이 합일된 상태이다.”라는 말은 실제로는 궁극의 실재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그 어디에도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P61

동일한 선이 볼록면을 또한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도가의 현자 노자가 모든 대극은 상호적으로 동시에 발생한다고 말했을 때 의미한 바로 그것이다. 오목면과 볼록면의 예와 같이 대극물은 함께 생겨난다.

 

P61

선은 경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또는 논리적인 것이든, 하나의 선은 그저 나누고 구분 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묶고 결합시킨다. 반면에 경계는 순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P66

존재의 조건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P67

다만 행복이 진보에 달려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경계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볼 때, 우리는 지금 여기,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보았던 우주, 곧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 양극의 조화, 음과 양의 화음, 진동하는 우리 존재의 즐거운 유희를 목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양극은 실은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불화는 조화로 녹아들고, 투쟁은 춤이 되며, 오랜 숙적은 연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주의 절반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과 친구가 된 자리에 있게 된다.

경계는 단지 환상일 뿐이라는 생각, 경계 자체가 대극을 만들어 내지만 실은 이는 하나라는 것 알 것 같으면서도 완벽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P69

궁극의 형이상학적 비밀을 감히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우주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 경계는 실재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를 작도하고 편집한 방식의 산물 즉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영토를 지도화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둘을 혼동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가 된다.

 

P71

수를 세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전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계 위에 세워진 또 다른 경계, 즉 메타 경계였다. 메타 경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P73

그러나 17세기 무렵 교회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인류는 자연계의 다양한 형태와 작용을 주의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와 케플러라는 천재가 무대에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이 두명의 물리학자가 이루어낸 혁명적인 위업은 바로 측정이었다. 측정이란 대단히 세련된 계산의 일종이다. 그렇게 해서 아담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은 경계 위에다가 드디어 케플러와 갈릴레오가 메타 경계를 그었던 것이다.


P77

양자혁명이 어째서 그토록 엄청난 대격변이었는지를 이해하려면, 20세기가 시작될 무렵까지 과학세계는 대략 150여 년에 걸쳐 놀라운 성공을 향유해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수법이 너무나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연의 모든 것이 이런 법칙에 지배된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우주를, 서로 분리된 사물들이 맹목적으로 부딪치고 충돌하면서 당구공처럼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뉴턴의 당구대처럼 보았다. 그리고 입자물리학의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할 때 역시 양자, 중성자, 전자에도 당연히 기존의 뉴턴의 법칙이나 그와 유사한 법칙들 모두가 그대로 적용되리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충격은 어느 날 장갑을 벗으면서 거기에 손이 있기를 기대했지만 가재의 앞발을 본 것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적절하게 잘 이해가 되는 비유이다. 딱 와 닿는다.

 

P78
한마디로 그것이 경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분명한 경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측정할 방법조차 없다. 이런 사실이 물리학자들에겐 극도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과학적 측정, 수량화, 메타 경계라는 상투적인 도구가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궁극적 실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완전하게 측정될 수 없다는 사실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 불리며, 그것은 고전물리학을 내리친 마지막 치명타였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그것을 딱딱한 틀의 붕괴라고 불렀다. 낡은 경계들이 붕괴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질서란 무엇일까? 그것을 측정한다는 불가능한 것일까? 불 규칙성 속에서도 큰 틀에서의 규칙과 질서가 있지는 않을까? 이 또한 너무나 상투적인 생각인 것인가?

P82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나는 모든 것이다.”라고 불교에선 말한다. 이 말은 현대물리학자가 설명하는 소립자에 대한 오늘날의 견해를 들어보기 전까지는 대단히 신비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P89

합일의식이란, 진정한 실재에는 경계가 없다는 단순한 자각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데는 어떤 비밀장치도 필요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어떤 신앙심도, 어떤 신비주의 전문용어도, 어떤 위험한 비술도 필요치 않다. 만일 실재가 정말로 경계 없는 상태라면 -이를 부정한다면 상대성이론, 생태과학, 유기체 철학 및 동양의 지혜에 등을 돌리는 꼴이 된다. – 합일의식이란 바로 그것을 깨닫는 자연스러운 자각상태이다. 한 마디로 합일의식이 곧 무경계 자각이다.

지금까지 앞에서의 이야기를 쭈욱 들어보면서 여기까지 왔다. 과연 합일의식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것이 동양의 지혜에 등을 돌리는 것인가?

 

P92

지금 이 책을 일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진정 최초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합일의식을 가로막고 있는 실질적인 장애란 존재하지 않는다.

 

P94

합일의식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은 스스로를 고립된 개체로 느끼는 감각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분리된 나를 아무리 해도 찾아낼 수 없다면 그 자체가 합일의식을 감지하는 일이 된다. 불교의 위대한 현자 파드마삼바바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나 자신을 아무리 찾아도 찾아낼 수 없을 때 거기에서 찾음의 목적은 달성된다. 또한 찾음 자체도 끝난다.”

나와 세상에 경계가 있다는 너무나 명백한 생각 자체가 합일의식이 이해가 안되게끔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P101

분리된 나란 없다는 통찰이야말로 모든 시대의 신비가와 현자들이 단언해온 것이며, ‘영원의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런 통찰을 예증할 수 있는 수많은 인용문이 있지만, 부처의 유명한 일설은 진정 그 모든 것을 말해준다.

고통이 있을 뿐, 고통받는 자는 없다.

행위가 있을 뿐, 행위하는 자는 없다.

열반이 있을 뿐, 열반을 구하는 자는 없다.

길이 있을 뿐, 그 길을 가는 자는 없다.

 

P103

신비가들은 예외없이 천국은 그대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는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잠재된 그것 모든 존재의 진정한 본성 을 발견할 때까지 당신의 영혼을 깊숙이 탐구해가라는 뜻이다.

천국과 나는 결국 하나란 뜻일까? 그렇다면 천국은 이미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P108

하지만 우리는 몸, 마음, 성격 등을 진정한 나라고 상상하면서 그것들과 자신을 동일시 한다. 그러고 그저 환상에 불과한 그것들을 방어하고, 보호하고, 연장시키려고 애쓰면서 전 생애를 소비해버린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P109

내가 고립되고 피부로 둘러싸인 이 유기체를 휠씬 넘어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나는 나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간다.

 

P114

왜냐하면 영원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에 대한 자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전적으로 시간밖에 존재하는 자각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순간이란 과거도 미래도, 이전도 이후도 어제도 내일도, 탄생도 죽음도 알지 못하는 무시간적인 순간이다.

 

P115

신비가는 현재순간에 완전히 몰입한 경험 속에서는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현재순간을 잘 검토해보면, 분명 그 안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순간은 곧 무시간의 순간이며, 무시간의 순간은 과거도 미래도 모르고, 이전도 이후도 모르며, 어제도 내일도 모르는 영원한 순간이다. 따라서 이런 현재순간으로 깊숙이 발을 내딛는 것이 곧 영원으로 뛰어드는 것이고, 거울을 통과해 불생불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정말 우리 인생에서 어떤 순간은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시간이 정지된 듯한 경험을 하곤 한다. 그 순간만은 시간이 이대로 정지된 상태로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순간도 곧 지나가고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P117

영원은 언제나 이미 지금인 것이다. 현재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거기에 또 다른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P128

왜냐하면 그 둘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말한 것처럼 영원한 지금이 하나의 의식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영원한 현재가 곧 합일의식이다.

 

P132

우리는 그것을 근원적 경계라고 불렀다. 이 근원적 경계는 보는자와 보여진 대상, 아는 자와 알려진 대상, 즉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이다. 일단 이 근원적 경계가 발생하면 어쩔 수 없이 연쇄적인 결과들이 뒤를 잇게 된다.

 

P133

왜 근원적 경계가 생겨나는가? 라는 물음은 실제로 근원적 경계 이전에는 무엇이 존재했는가에 관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원적 경계가 세워지기 이전에 선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아무것도 그것을 야기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그것을 만들어내거나 존재로 끌어들일지 않았다. 만일 근원적 경계에 어떤 원인이 있었다면, 그 원인 자체가 새로운 근원적 경계일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최초의 원인이 어떤 원인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최초의원인일 수 없다.  

 

P143
켄타우스는 말을 조종하는 기수가 아니라 말과 한몸인 기수이다. 육체와 떨어져 나와 육체를 조종하는 정신이 아니라 스스로 통제하고 스스로 관리하는 심신의 통일체이다.

P144
이런 정적인 불멸성을 추구하면서, 그는 하나의 관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자아라고 불리는 지적인 추상물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신체와 함께 살지 않으려고 한다. 신체는 부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자신에 대한 하나의 그림, 죽음에 대한 어떤 참된 관계도 무시된 하나의 그림인 자아로서만 살게 된다.

 

P149

스펙트럼 상의 하강과 발견의 태동은 삶에 대한 불만이 의식되는 순간 시작된다. 대부분의 전문적인 의견과는 반대로, 삶에 대한 극심한 불만은 정신질환의 신호가 아니다. 잘못된 사회적응의 지표도 아니며 인격장애 역시 아니다. 왜냐하면 삶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 내부에 감춰져 있는 것은 흔히 엄청난 무게의 사회적 위선에 매몰되어 있는 특별한 지성, 성장하는 지성의 싹이기 때문이다.

불만과 결핍은 또 하나의 동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뭔가 부족함을 느끼기에 인간은 탐구하게되고 고민하게 되면 그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게 되는 것 같다.

 

P153

다양한 치료기법들은 실은 영혼의 각기 다른 층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달라 보일 뿐이라는 점을알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다양한 영혼의사들이 의식의 서로 다른 수준을 각자 타당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특정 수준에 관한 특정 영혼의사의 의견에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위 주장을 들으니 정신적 분석에 대한 이론과 방법론에 대한 차이에 대해서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P155

페르소나란 다소간 부정확하고 허약해진 자기상을 일컫는다. 페르소나는 분노, 자기주장, 성적 충동, 환희, 적대감, 용기, 공격성, 충동, 흥미 등과 같은 자신의 특정한 성향을 스스로 부정할 때 만들어 진다.

그런데 보통 페르소나란 자기가 실천하지 못하는 자기만의 이상향을 일컫는 것 같기도 하다. 다양한 의미로 페르소나란 단어가 쓰이지 않나 싶다.

 

P160
페르소나 수준의 치료사들은 지속적으로 압력을 느끼는 사람은 그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동인과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만일 동인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가 그 일에 그다지 신경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맞는 말인 거 같다. 본인의 욕구가 없다면 정말 압력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본인의 욕구와 압박을 다른 식으로 핑계를 대거나 이르지 못하는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P161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데 이처럼 강한 저항감을 갖고 있다.

 

P162

마녀사냥은 우리가 우리 내면의 어떤 특징이나 성향 악마적이고, 극악무도하고, 비열하고, 또는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 시작된다. 실제로 이런 성향과 특징은 모종의 도착증, 비열함 또는 악당근성처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불합리한 것일 경우가 많다.

 

P163

이런 마녀사냥은 때로 잔혹한 양상을 띤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살렘의 마녀재판, 흑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KKK단 그 모든 사례에서, 피해자를 증오하는 가해자의 지독한 야만적 광포성이야말로 가해자 자신의 성향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음에 주목하기 바란다.

인간의 광폭성을 띠는 것은 결국 자기 안의 폭력성, 그림자가 어떤 회피할 대상과 만날 때 발생하게 되는 것 같다.

 

P164

우리가 끔찍이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우리의 일면을 그들이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혐오하는 것이다.

 

P165

보고 또 보다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너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실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P168

따라서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내려고 노력해도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순 없다. 그 자리가 빈 공간, 공백, 구멍으로 그냥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내 안의 어떤 측면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고통스러운 증상이 그 자리를 메운다.

나의 그림자를 받아 드리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마주하기 싫은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 그대로 행동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때는 정말 마음이 묘하다.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하고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내 그림자가 아이들에게 투사되어서 일까?

 

P169

페르소나 수준에서 치료의 첫 단계는 증상들을 받아들이고 여유를 갖는 것이며, 지금까지 혐오해왔던 증상의 불쾌감과 친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의식적으로 증상과 접촉 해야 하고, 가능한 한 마음을 크게 열고 증상을 수용해야 한다.

 

P171

그 증상을 원래의 올바른 형태로 되돌려 변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나는 해야만 해나는 하고 싶어가 된다. , ‘변환이 치료의 열쇠이다. 예컨대, 압박감을 없애기 위해 동인을 만들어낼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있지도 않은 동인을 느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P172

증상은 투사된 성향을 확실하게 지적해주는 결코 오류 없는 신호로서, 우리는 증상을 통해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 그림자를 통해 성장하고 경계를 확장해가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하고 수용가능한 자기상으로 하강해가는 길, 한마디로 페르소나 수준에서 자아 수준으로 하강해가는 길이다. 그것은 페르소나+그림자=자아라는 공식만큼이나 아주 단순한 것이다.

 

P179

우리는 투사된 그림자와 만나고 그것을 재 소유함으로써 빈약한 페르소나로부터 건전한 자아로 정체감을 확장 시킬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페르소나와 그림자 사이의 경계를 해체하고 분열을 치유하면, 더욱 크고 안정된 자기 정체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비좁은 아파트에서 안락한 단독주택으로 이사 간 것과 흡사하다.

궁금해 진다. 자아의 확장을 통한 자기 정체감을 발견한 다는 것이 어떤 것 인지. 내 페르소나, 투사된 나의 그림자를 하나 하나 잘 살펴보아야 겠다.

 

P180

나는 더 이상 신체와 더불어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체 위에서살아간다. 나는 이 위에 있고 신체는 저 아래 있으며, 나는 저 아래에 있는 신체와 기본적으로 편안한 관계에 있지 않다. 나의 의식은 거의 전적으로머리의식이다. , 나는 내 머리이고, 나는 내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 내 신체는 나의 소유물, 가 아니라 나의 것으로 전락했다. 한마디로, 신체는 그림자가 그랬던 것과 아주 똑 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대상 또는 하나의 투사물이 된다.

나란 무엇일까?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든다. 나는 내 몸일까? 내 생각? 그럼 생각이란 무엇인가?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 뇌 속에 존재하는 것인가? 정말 나란 어떤 것일까?

 

P186

처음에 신체와의 결합을 시도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담요나 매트 위에 팔다리를 쭉 편 채 위를 향해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깊고 편안하게 숨을 쉬면서 신체의 느낌을 탐색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느끼려고 노력할필요는 없다. 느낌을 강요하지 말고, 단지 신체를 통해 주의가 흐르도록 자유롭게 놓아둔 채 신체의 다양한 부위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느낌이 있는지만 알아차린다.

흥미롭다. 정말 이렇게 신체 곳곳의 흐름을 내가 느낄 수 있게 될까?

 

P197

만일 전형적인 만성적 블록이 있을 경우,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매일 15분 정도의 훈련을 한 달 이상 계속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섬세한 알아차림이 전혀 방해받지 않고 그 부위를 통해 완전히 무한정 흐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블록은 해소된다.

 

P199

켄타우로스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정신-신체적 유기체 내부 전체에 심리적, 신체적 건강이 이미 순환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에너지란 영원한 기쁨이며 그것은 신체에서 온다고 블레이크는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외족 보상이나 약속에 의존하지 않는 기쁨이기도 하다. 이 기쁨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이며, 이 현재순간에도 아무 대가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P202

켄타우로스적인 삶의 의미, 즉 근본적인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바로 삶 자체의 과정이 이 기쁨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의미는 외적인 행위나 소유에서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빛을 발하는 내적인 흐름에서 발견된다. 또한 세계로, 친구에게로, 인류 전체로, 그리고 무한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이런 흐름을 발산시키고 관계 맺는가운데 발견된다.

 

 

P207

켄타우로스 수준을 떠나 초개아 대역으로 이동해감에 따라, 이제 우리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친숙한 상식적 지침을 뒤에 남겨놓게 된다. 저너머의 세계이자 저 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때문이다.

 

P209

프로이트는 융을 그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왕관을 물려받을 왕세자로 지명했지만, 융은 10년도 안 돼 학문상의 불화로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말았다. 이 유명한 결별 이후, 위대한 두 사람은 두 번 다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상호 양립 불가능한 기반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학문적 불화로 다시 만나지 않을 정도로 틀어진 걸 보면 그만큼 각각의 학문적 주장이 너무나 상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이론들과 실천은 조금 다른 것 같다. 굳이 학문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원수가 될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다.

 

P210

융은 이런 저런 궁리 끝에, 이런 바탕의 신화적 주제들은 모든 인류 구성원 사이에 물려져 내려오는 생득적 구조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원시적인 심상들, 융이 말하는 원형은 전 인류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것들은 한 사람의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초개아적이고 집단적이고 초월적인 것이다.

 

P210

인간의 뇌 자체는 수백만년이란 세월의 산물이다. 인간의 손이 물건을 잡기 위해 특수한 방식으로 진화한 것처럼 뇌는 방대한 시간에 걸쳐서 필연적으로, 실재를 지각하고 파악하는 어떤 기본적인 그런 의미에서 신화적방식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우리가 뇌를 사용하는 방식 역시 문화적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교육을 통해서 뇌를 어떻게 써야 하는 지를 배우는 것 같다. 이는 인류가 그 동안 축척 되어온 방식으로 사용하게 끔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닐까? 란 생각을 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뇌를 쓰는 인류가 나타날 수도 있지는 않을까? 그러니까 예를 들면 컴퓨터의 하드웨어적인 환경은 다 똑같다. 그런데 어떤 운영체계를 가지고 쓰느냐에 따라서 윈도우용 PC가 되기도 하고 맥용 PC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일이 정말 우리에게도 가능하지 않을까?

 

P173

자아 밖에서 자아를 위협하고 자아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실체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곧 어떤 알 수 없는 자아보다 큰 것으로 무의식의 그림자, 그것도 원형적 그림자일 가능성이 있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자아의식의 공동화와 자아 환계 경계의 와해와 더불어 무의식의 원형적 세력의 상대적인 강화로서 자아의 자율성이 무의식의 세력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는 비극을 겪고 있다.

결국 정신병도 그림자, 내면의 나, 내 속에 나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P216

예컨대, 실제로 내 불안은 내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강해질수록 그 불안에 위협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불안이 현존해 있더라도 더 이상 그 불안에만 환심을 사려 하거나, 싸우거나, 저항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게 된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고 아니 깨달음을 얻고 싶어 진다.

 

P217

그것은 주변의 엄청난 동요이긴 하지만, ‘진정한 나는 실체 없이 소란을 피우는 표면의 파도가 범접하지 못하는 심층에 있기 때문이다.


P218

그의 새로운 정체성인 자아는 페르소나와 그림자 양쪽 모두가 협동적으로 결합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켄타우로스 수준으로의 하강에서는, 그는 정체성을 신체로 확장하는 한편, 자아와의 베타적 동일시를 떨쳐낸다. 어떤 경우이든, 새롭고 폭넓은 정체성으로 확장해갈 뿐만 아니라, 낡고 협소한 정체성을 깨뜨리기도 한다. 똑 같은 방식으로, 오직 켄타우로스와의 협소한 정체성을 서서히 버리거나 놓아줌으로써 그는 폭 넓은 초월적 나라는 정체성으로 확장해간다. 켄타우로스와의 동일시를 중단하고, 더 넓고 더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간다.

 

P219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자신이 바로 괴로움 그 자체라는 환상만 강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괴로움에서 도피하려는 노력은 그 괴로움을 영속화 시키는 이에 불과하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괴로움 자체가 아니라 그 괴로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다. 우리가 괴로움과 동일시한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곤경이다.

 

P229
바로 이것이 융의 메시지고, 또한 미대륙의 원주민, 도가,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를 막론한 모든 성인과 현자, 신비가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 “당신 영혼의 심연에는 인류의 영혼이 존재한다. 속박에서 해방으로, 마법에 걸린 상태에서 깨어남으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죽음에서 불사로 이끌어 주는 신성한 초월적 영혼 말이다.”

인류의 성인들이 우리에게 남겨 놓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이지만 이해하기란 사실 쉽지가 않은 것 같다.

P234

합일의식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 , 그것을 다른 그 무엇으로부터도 분리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깨달음은 이 순간,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선명하게 빛을 비춘다.

 

P237

우리는 진정으로 답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답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정말로 도덕경을 읽고 심취된 것이 맞는 것 같다. 흡사 도덕경을 읽는 기분이다. 묘하다. 알듯말듯 이해될 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 개념들

 

P248

자아는 지속적으로 과거와 미래를 흘끔흘끔 돌아보는 시간 위에 구축된 것이라서, 현재경험의 자각과 만나면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자아는 스쳐가는 현재에 저항한다. 그 특별한 상태와 싸우고, 호시탐탐 어제와 내일의 사고로 표류해가려고 한다. 치료사는 부드럽게 특별한 상태를 강조함으로써 이 수준의 저항, 즉 스쳐가는 즉각적 현재로부터 달아나려는 움직임을 좌절시킨다. 이런 특별한 상태가 없다면, 내담자는 자신이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결코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P258

이 저항의 내려놓음 자체가 합일의식의 열림이며 무경계 자각의 실현이다. 개인은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듯 그간 언제나 알고 있던 사실, 분리된 나로서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의 진정한 나인 전자는 결코 태어난 적이 없으며, 죽지도 않을 것이다.

내려놓음의 시작 도전해 보자!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해서

본인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처음 개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순서대로 하나 하나 상세하게 설명해 가면서 본인의 주장을 명료화 시키고 있다. 중간 중간 사례를 들어가면서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역시 어렵다. 저자가 최대한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하고는 있지만 개념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이해하기는 쉽지가 않다. 아니 이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말 내가 이걸 이해한 것일까? 란 생각이든다.  

 

3. 이 책의 장점

켄 월버는 최대한 초심자들이 본인의 사상을 이해하기 쉽도록 저술하였다. 각 단계마다 이해하기쉽도록 예시를 들어가면서 각 개념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어려운 각각의 개념들을 조심이나마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의 노력과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본인이 깨우친 진리를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주고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진심이 느껴진다.

 

4. 내가 저자라면

글쎄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생겼다. 합일의식에 다다르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을 초월하여 영원한 순간에 살게 된다면 어떤 점이 좋게 될까? 모든 진리를 깨우치게 되어 고통이 없어지고 우주와 하나 됨으로써 정말 모든 것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그런데 초월이란 말 조차 경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초월이란 무엇인가를 뛰어 넘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초개아적 단계 역시 자아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렇게 해야 경계가 없어지는 무경계에 이른다지만 그 무경계의 상태가 어떻게 나에게 다가오고 의미를 부여할 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페르소나 단계에서 나의 그림자, 투사된 나의 다른 자아를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내가 조금 더 성숙해 질 수 있다는 것이 더 현실적인 개념으로 머리 속에 들어온다. 아직 내가 경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단계 수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천재에게 그가 하는 말조차 다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어찌 내가 저자라면이란 말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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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11:03:29 *.18.187.152

이런 천재에게 그가 하는 말조차 다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어찌 내가 저자라면이란 말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

--> 와, 이거 좋은데요! 그러게요. 감히 '내가 저자라면'이라는 가정조차 할 수 없는 초인인 듯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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