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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No Boundary):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동서고금의 통합적 접근
저자 연구 켄 윌버(Ken Wilber:
1949.01.31~ ) 미국 작가, 사상가. 1947년에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출생한 켄 윌버는 1969년에 듀크 대학교의 예비
의대에 진학했다. 그런데 곧 도덕경 등 동양 사상에 매료되어 의대를 그만두고, 네브래스카 대학으로 옮겨 다녔다. 하지만 이마저도 몇 년 뒤에 그만
두고 스스로 본인만의 커리큘럼을 만들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에 8~10시간씩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지내다가 1973년에 첫 책, <의식의 스펙트럼: The Spectrum of
Consciousness>을 완성했다. 동서양의 철학과 심리학을 통합한 위대한 글이라는
생각과 달리 그의 원고는 3년 이상 30군데가 넘는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고 한다. 읽어보니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아니
나는 <의식의 스펙트럼: The Spectrum of
Consciousness>을 읽은 게 아니라 이를 요약해서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편집한 책인 <무경계>를 읽었는데도 그렇다. 그만큼 그의 글은 일반적인 출판사의 편집자들이 읽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어려운 사상을 담아서 책으로 출판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리라 예상된다. 다행히도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존 화이트(John White)의 도움으로 1977년에 가까스로 케스트 북(Quest Book)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의식의 스펙트럼>은 인간 의식의 다양한 단계와 수준 그리고 가능성을 마치 스펙트럼과 같이 모든 대역을 보여주면서, 동양의 신비사상과 서양의 과학, 철학, 심리학, 정신분석까지 아울러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는 ‘우와 대단하다, 이렇게 쉽고 명료하게 설명할 수가…’ 라고 기뻐하며 읽었지만 읽을수록
무슨 말인지 모르겠거니와 너무 신비주의적으로 빠져서 실망했다가 다시 감탄하며 읽기를 반복했다. 사실 중간으로 갈수록 그가 정상적으로 인간 관계를 맺고 사회생활을
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도 활발한 저술 활동을 했고 결혼도 두 번이나 했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었는지 그의 사생활이 궁금해진다. 마을을 무찌르는 글귀 켄 윌버에 관하여 옮긴이의 말 머리말 15 인간을 참으로 놀라운
의식의 스펙트럼 – 물질로부터 몸, 마음, 혼(soul), 영(spirit)에
이르는 비상한 잠재력과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광대한 무지개 – 을 지니고 있다. 우리들 각자는 무지개 안의 그런 ‘수준들’ 또는 ‘색깔들’ 하나하나를
직접 경험하면서, 또한 그 스펙트럼 전체를 통과해사면서, 영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고 발달해갈 수 있다. 혼(soul)과 영(spirit)을 분리했다. 어떻게 다른걸까? 어렸을 때, 삼각형 모양의 프리즘을 햇볕에 비춰서 무지개 빛을 보며 감탄했게 기억난다. 그
때는 그런 빛만 봐도 감탄하고 놀라워했었는데……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현재의 나는 웬만해서는 감탄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너무 심하게 갖고 있나보다. 16 더 나아가 그 방법들이
잘 ‘조화되어’ 적용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지개 내부에 잇는 모든 색깔을 – 전체 스펙트럼 안의 모든 의식
수준을 – 자각하도록 함으로써 소위 ‘깨달음’, ‘해탈’, 또는 ‘위대한
해방’이라 불리는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이르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초판(1979) 머리말 1.
서론: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26 이토록 장엄하고
영감 어린 경험의 가장 매혹적인 측면은 – 우리는 바로 이 측면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 그 안에서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자신과 온 우주가, 높든 낮든
신성하든 세속적이든, 모든 세계와 근본적으로 하나라고 느낀다는 점이다.
이때의 ‘자기 정체감(正體感)’은 몸과 마음이라는 협소하 한계를 훨씬 넘어 확장되며, 우주 전체를
감싸 안는다. 버크가 이러한 자각상태를 ‘우주의식’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이것을 ‘지고의 본성’이라고 부른다. ‘지고(至高)’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모든 것(the
All)을 포괄하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26 거리의 길들도, 교회도, 사람들도 내 것이었다. 하늘이, 해와 달과 별들이,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이었다. 나만이 그것을 보고 즐기는 유일한 존재였다. 나는 어떤 사회적 통념도, 어떤 속박도, 어떤 구분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든 통념과 구분조차도 내
것이었다. 나는 그 모든 보물의 주인이자, 보물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나는 온갖 소란 속에서 타락했고, 이 세상의 더러운 욕망을 배웠었다. 하지만 이제는 배운 것을 모두
버리고, 다시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좋을 만한 본래의 어린이로 돌아가리라. 27 이런 ‘지고의 본성’ 경험이 워낙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기 때문에, 인류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교리를 세우고 거기에 ‘영원의 철학’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힌두교,
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를 포함한 거의 모든 주요 종교의 중심에 이런 유형의
경험과 지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대단히 많다. 따라서 ‘종교들의
초월적 통합’ 또는 ‘궁극적 진리에 관한 합의’라는 우리의 주제는 충분한 정당성을 갖추고 있다. 20여년전에 이와 비슷한 생각이 처음 들었을 때, 동료 주일학교
교사는 내가 믿음이 약해서 이상한 생각을 한다며 걱정해 주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겠다고 했는데…… 기도가 통했는지 이후로 나는 이런 비교, 통합적 종교에 관한 생각을
잊어버렸다. 27 “나는 누구인가?” – 아마도 문명의 여명기부터 인류를 괴롭혀왔을 이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에게 가장 성가신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 세속적인 것부터 신성한 것까지, 단순한 것부터 복잡한
것까지, 낭만적인 것부터 과학적인 것까지, 개인적인 것부터
정치적인 것까지, 실로 모든 범위에서 무수한 답이 제시되어 왔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답들을 일일이 검토하는 대신에, “나는 누구인가? 진정한 나(Self)는 무엇인가?
나의 근본적인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매우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그러게. 도대체 내가 누구길래, 지금까지도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히고, 아주 가끔 나를 즐겁게 하고, 오늘도 이렇게 잠 못자게 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누구인지 정말 알아야 하나 싶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정말 알아야하는지, 알면 뭐가 좋은지에 대한 해답만이라도 구하고 싶다. 29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단지 그 선 안쪽에 있는 것을 묘사하면서 답한다. 소위
‘정체성의 위기’란, 그
선을 어디에 어떻게 그을지 결정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요컨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당신은
어디에 경계를 설정했는가?”라는 의미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모든 답은 정확히 ‘나인 것’과 ‘내가 아닌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기본적인 절차에서 비롯한다. 전반적인 경계선이 그어진 후에 나오는 답은 과학적, 신학적, 경제적으로 대단히 복잡할 수도 잇고 무척 단순하거나 모호할
수도 있다. 어쨌든 가능한 모든 답은 처음 그은 경계선에 달려 있다.
~ 경계선의 가장 혁명적인 재작도(再作圖) 또는 변경은 ‘지고의 본성’ 체험에서
일어난다. 그 지점에서는 내 정체성의 경계가 온 우주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경계선이 전부 없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 자신을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와 동일시한다면, 그곳엔 더 이상 안팎이 없으므로 그 어디에도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 31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동차나 집 또는 다른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몸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몸은 ‘나’라기보다는 ‘나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의
것’은 정의상 ‘나/나
아님’의 경계선 ‘밖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나’라는 유기체 속에서도 특정 부분을 좀더 친밀하게 느끼며 강하게 그것과 동일시한다. ‘진정한 나’로 느껴지는 그 부분을 우리는 흔히 마음(mind), 정신(psyche), 에고(ego), 성격(personality)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33 이처럼 정신영역
중에서도 일부(페르소나)하고만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면, 자연히 그는 ‘내가 아닌’ 그
나머지 영역은 실제로 이질적이고 이상하고 두려운 대상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도한 그는 스스로 원치 않는
그 영역(그림자, shadow)을 의식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한
시도로써 자신의 영혼을 재작도(再作圖)하려 든다. 많든 적든, 이제 그는 자신의 마음 전체가 아니라 ‘마음의 일부’가 되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것이 또 하나의 보편적인 경계선이다. 35 ‘나/나 아님’의 경계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한 사람에게 가용한 ‘정체성 수준’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 수준들은 그저 이론적인 가설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검증해볼 수 있는 관찰가능한 실재이다. 그리고 이렇듯 서로 다른 수준들을 감안할 때, ‘의식’이라는 현상 – 익숙하지만
여전히 신비한 – 은 마치 수많은 정체성 수준 또는 대역(帶域)으로 구성된 무지개 모양의 스펙트럼처럼 보인다. 37 가장 아래의 합일의식
수준에서, 그는 자신이 유기체 차원을 넘어서서 우주 그 자체와 하나라고 느낀다. 다음 수준에서, 즉 스펙트럼을
올라가면, 그는 자신이 우주 전체와 일체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유기체일 뿐이라고 느낀다. 그의 정체감은 ‘전체 우주’로부터
그 우주의 일부인 ‘하나의 유기체’로 변경되고 좁혀진다. 그 다음 수준에서, 그의
정체성은 한 번 더 축소된다. 그는 이제 유기체의 일부인 마음(에고, 자아)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스펙트럼의 마지막 수준에 이르면,
그는 자신의 마음에서 원치 않는 측면인 ‘그림자’는
소외시키고 억압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 나머지 측면으로만 더욱 한정시킨다. 이제 그는 자기 정신의
일부, 즉 우리가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것하고만 자신을 동일시 한다. 꼭 이런 단계별로만
자신을 인식한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고 몸을 자신이라고 동일시하지만 그림자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영역에 속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지 조금 더 읽어 보자. 38 그러나 군사전문가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듯이, ‘경계선’은 잠재적인 ‘전선(戰線)’이기도 하다. 하나의 경계선은 두 개의 대립된 영토, 전투 가능성이 있는 두 진영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 이런 전선은 페르소나 수준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수준에서 자신의 정신적 측면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게 되므로, ‘페르소나로서의
자신’ 대(對) ‘환경과 몸과 정신
내부의 원치 않는 부분들’ 사이에서 전선이 생겨난다. 중요한 점은, 자신의
영혼에 경계선을 그음과 동시에 영혼의 전쟁터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정체성 경계는 자신의 어떤 측면들을
‘나 아님’으로 여기게 될지를 결정 짓는다. 따라서 스펙트럼의 각 수준에 따라 세계의 서로 다른 측면들이 소외되어 이질적인 대상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는 우주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이방인’으로 여긴다. 39 자신의 내면을 깊숙한
곳까지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은 다양한 심리학 체계와 종교 체계를 마주하면서, 도무지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어리둥절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심리학과 종교의 주요
학파들을 주의 깊게 연구한다 할지라도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상태로 끝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그 다양한 학파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명백히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불교에서는 자아를 잊으라고, 초월하라고, 혹은 자아의 정체를 꿰뚫어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자아를 강화하고, 공고히 하고, 확립시키는 일을 돕는다.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40 다양한 심리학파와
종교사상들이 한 인간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수준에서 상보적으로 접근하고 있었음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또한 스펙트럼의 주요 대역 중 어떤 수준에 뚜렷한 목표를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심리학과 종교라는 방대한 분야를 대여섯 집단으로 크게 나눠볼 수도 있게 된다. 43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지평(地坪)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 있어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스펙트럼 상의 ‘하강’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 스펙트럼에서 하나의 수준을 하강할 경우, 실제로는 자신의 영혼을 재작도하여 그만큼의 영역을 확장시킨 것이다. 따라서
자기 성장이란 재분배, 재구역화, 재작도이며, 자기 자신의 좀더 깊고 넓은 수준을 인식하고 포괄해가는 풍요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
그것의 절반 (Half of It) 45 왜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것이 한 쌍의 대극 중 어느 한 쪽인 것일까? 왜 모든 결정은 대극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왜 모든 욕망은 대극에 기초해 있는 것일까?
2장은 1장에 비해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극이란게 내가 한동안 고민했던 양극과 비슷한 개념인 듯하다. 좀
더 좋은 답을 찾을 것도 같은 기대가 된다. 47 늙은 고양이는 죽음이
임박했다고 해서 공포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숲으로 들어가서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
죽음을 맞을 뿐이다. 병든 울새는 버드나무 가지에 편안히 앉아 황혼을 바라본다. 그러다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조용히 땅에 뻘어진다. 인간이 맞이하는 죽음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가. 가끔 아주 덕이
높은 고승이 (자살이 아닌 자연사로) 스스로 죽음을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스콧 니어링의 경우 죽을 때를 알게 되자 스스로 음식물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고 너무도 특별한 경우라 마치 전설같기도 하고 영웅담처럼도 들리는 이야기
들이다. 그런데 동물들은 원래 그렇게 죽음을 맞는다고 한다. 죽음에
관해서만은 동물들이 인간보다 더 높은 도를 깨달은 것 같다. 52 아담이 배운 당혹스러운
사실은 모든 경계선은 또한 잠정적인 전선(戰線)이라는 점, 따라서 하나의 경계를 긋는 것은 곧 스스로 갈등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죽음에 대항하는 삶, 고통에 대항하는 쾌락, 악에
대항하는 선의 괴로운 투쟁 등이 더욱 그러했다. 너무 늦게 알게 되었지만, 아담이 배운 것은 “어디에 선을 그을 것인가?”는 실제로 “어디서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를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52 쾌락에 집착하면
할수록 어쩔 수 없이 고통은 더 두려운 것이 된다. 선을 추구하면 할수록 악에 대한 강박관념은 더욱더
강해진다. 성공을 추구하면 할수록 실패를 더욱더 걱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삶에 집착할수록 죽음은 더 두려운 것이 된다. 무언가에 가치를 두면
둘수록 그것의 상실이 두려워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 대부분은 경계로부터 비롯된, 경계가 만들어낸 문제라는 것이다. 53 대립하는 것을 분리시켜놓고
긍정적인 반쪽에만 집착하고 달려드는 식의 목표는 진보적이니 서구문명 – 종교, 과학, 의학, 산업 –의 독특한 특징처럼 보인다. 결국 진보란 단순히 부정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긍정적인 것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의학과 농업의 명백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수세기에 걸쳐 긍정적인 것은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해온 결과로서 인류가 더 행복하고, 더 만족스럽고, 더 평화롭게 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는 그와 정반대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훨씬 더 많다. 오늘날은
불안의 시대, <미래의 충격>의 시대, 역병처럼 유행하는 욕구불만과 소외의 시대, 풍요롭지만 또한 권태롭고
무의미한 시대이다. 54 진보와 불행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인 것처럼 보인다. ‘진보’를 향햔 충동 자체가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을 함축하고 잇기 때문에, 진보를 추구하면 할수록 실은 더 많은 불만을 느끼게 된다. 진보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우리 문명은 사실상 욕구불만을 제도화시켜 놓았다. 긍정적인 것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을 제거하려는 과정에서, 긍정이란 부정에 기초해서만 규정된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해버린 것이다. 많은 부모들이
내 아기에게는 좋은 것만 예쁜 것만 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임신했을 때부터 이미 태교를 한다고 나쁜
것, 못 생긴 것은 보여 주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경제적으로 가능한 한도에서 가장 좋은 것, 최고의 것을 해주려하고, 나쁜 것, 더러운 것들은 보여주지도, 알려주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 아이가 커갈수록 가능하지도 않고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도 않는데……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55 모든 대극은 암묵적인
동일성을 공유하고 있다. 양극의 차이점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그
양극들은 어느 쪽도 다른 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서로 완전하게 분리될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에 ‘밖
없는 안’, ‘아래 없는 위’, ‘패배 없는 승리’, ‘고통 없는 쾌락’, ‘죽음 없는 생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58 우리가 ‘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어두운 배경 위로 부각된 밝은 형상이다. 깜깜한 밤중에 하늘을 보고 밝게 빛나는 별을 지각할 때 내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 – 내 눈이 실제로 받아들인 것 – 은 분리된 별이 아니라 ‘시야 전체’ 또는 ‘밝은
별 + 어두운 배경’이라는 게슈탈트(전체장 entire field)이다.
밝은 별과 어두운 배경 사이의 대비가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어느 하나가 없으면
다른 것도 절대로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와 똑같이, 고통과
관련짓지 않고는 결코 쾌락을 인식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아주 편안하고 즐겁다고 느끼더라도, 불편함과 고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결코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쾌락과 고통이 번갈아 교차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쾌락과 고통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둘의 상호대비와 교차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59 세계를 분리된 대극으로
볼 때 삶이 왜 그토록 불만스러운 것이 되는지, 왜 진보가 성장이 아니라 암적인 것이 되는지를 이젠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립하는 양극을 떼놓으려고 애쓰면서 소위 고통 없는 쾌락, 죽음 없는 생명, 악 없는 선 따위의 ‘긍정적이라고 판단한 것들’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실체가 없는 유령을 쫓는 꼴이 되고 만다. 60 육지와 바다 사이의
해안선과 같은 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단순히 육지와 물의 ‘분리’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앨런 왓츠(Alan
Watts)가 자주 지적했던 것처럼, 소위 ‘나누는’ 선들은 동시에 육지와 물이 ‘만나는’ 지점을 나타낸다. 즉, 그
선들은 ‘나누고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똑같이 ‘결합하고 통일시킨다’. 그렇다면 그런 선은 경계라 부를 수 없다. ~ 그러니 요점은
선은 양극을 구분 지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결합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진정한’ 선과 면의 본질이자 기능이기도 하다. 신선한 관점이다. 구분하는 경계이지만 결합하고 통일시키는 선. 자연만이 아니라 왠지
사람도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64 전 세계의 모든
신비전승(神秘傳承)에서는 대극의 환상을 꿰뚫어본 사람을 ‘해탈한
자’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는 ‘양극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양극의
싸움에 따르는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문제와 갈등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평화를 찾기
위해 대극의 한쪽을 조작하지 않고 그 둘을 초월해 넘어간다. 선악 중의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둘 다를
넘어선다. 그는 죽음에 대항하는 삶이 아니라 그 둘을 초월하는 자각의 중심이 된다. 대극을 분리시켜놓고 긍정적인 쪽으로의 진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초월하면서 감싸 안는 하나의 토대를 발견해냄으로써 대극을, 긍정과 부정 모두를 통합시키고 조화되게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65 얻고자 함 없이
그저 스스로 오는 것에 만족하고, 양극을 초월하여 시기심으로부터 해방된 자, 성공이나 실패에
집착하지 않는 자, 그는 행위 속에서도 속박되지 않는다. 갈망하지도 않고
혐오하지도 않는 그를 일컬어, 영원히 자유롭다고 한다. 양극을 초월한 자는 갈등에서 쉽게 풀려나기 때문이다. 65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밖처럼, 밖을 안처럼, 위는 아래처럼 만들 때,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 때, 너희는 그 왕국에 들어가리라.” 66 빛과 그림자, 긴 것과 짧은 것, 검은 것과 흰 것, 이와 같은 것들이 서로 별개로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릇된 것이다. 그것들은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다만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일 뿐이며, 실재가 아니라 관계성을 말하는 단어들이다. 존재의 조건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67 양극이 실은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불화는 조화로 녹아들고, 투쟁은 춤이
되며, 오랜 숙적은 연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주의
절반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과 친구가 된 자리에 있게 된다. 더 이상 나의
성향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겠구나. 원래 그런, 우주의
법칙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면 되겠다. 나 득도한건가..?? 1.
무경계 영토 (No-Boundary Territory) 69 궁극의 형이상학적
비밀을 감히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우주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 경계는 실재(實在)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를 작도하고 편집한 방식의 산물, 즉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영토를 지도화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둘을 혼동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가 된다. 74 아담은 별들에 이름을
지어줄 수 있었고, 피타고라스는 별들을 셀 수 있었지만, 뉴턴은
별들의 무게를 잴 수 있었으니 그 상황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그냥 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선에서 멈추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75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이런 지식과 힘, 통제력은 그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경계는 언제나 양날의 칼이며, 그 칼로 잘라낸 자연의 열매는 필연적으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얻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해내야만 했다. 79 원자 이하의 소립자들은
아무런 경계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는 메타 경계도, 측정도 있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어떤 정교한 메타–메타 경계와 ‘법칙들’도 있을 수 없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단일한 전자의 운동을 지배하는 어떤 법칙도, 어떤 메타–메타
지도도 갖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단일한 전자는 애당초
경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경계가 없다면 메타 경계도 메타–메타 경계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드디어 길을 잃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80 물리학자 에딩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과학이 가장 멀리 발전해간 곳에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끌어낸 것은 결국 우리가 자연에 부여했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미지의 해변에서
이상한 발자국 하나를 발견했고, 그 발자국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심오한 이론들을 하나씩 차례로 개발해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발자국을 만든 존재를 재구성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보라! 그 발자국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사실 새로운 법칙이나
과학적 발견 등을 배울 때, 이런 느낌이 들 때가 많았었다. 83 서양과학이 이 문제를
우연히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동양인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동양인들이 한 번도 경계라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계가 그들의 머릿속을 독점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과자연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멀리 동떨어진 적이 없었다. 동양인들에겐, 인간이 만든 경계투성이 지도 밑에 잠복해 잇는 전체성을 시사하는 오직 하나의 길(way), 도(道), 법(Dharma)만이 있었다. 실재가 비이원적이고,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동양인은 모든 경계가 환상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지도와 영토, 경계와 실재, 상징과 사실, 이름과 이름 붙여진 것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88 요컨대, 실재가 무경계라는 사실이 드러난 때 곧 모든 갈등이 환상이라는 사실도 밝혀진다. 이런 궁극적인 지혜를 열반(nirvana), 해탈(moksha), 해방(release), 깨달음(enlightenment)이라고 부르며, 이 이해가 곧 양극으로부터의
해방, 분리라는 마법으로부터의 해방, 내 안의 거짓 정체성이란
사슬로부터의 해방이다. 이 점을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통상 ‘합일 의식’이라고 불리는 무경계 자각을 탐구할 준비가
된 셈이다. 2.
무경계 자각 (No-Boundary Awareness) 90 우리가 구축한 모든
경계 중에서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야말로 우리가 지워버리기를 가장 꺼리는 경계이며, 우리가 최초로 그은 경계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경계이다. 우리는 그 경계를 강화하고 방어하여 안정되고 안전한 것으로 만드는 데 오랜 세월을 투자해왔다. 이 경계야말로 우리에게 ‘분리된 나’라는 존재감을 부여하는 바로 그것이며, 우리가 늙어 추억만을 간직한
채 무(無)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마지막으로 포기하게 될 바로 그것이다. 곧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그은 최초의 경계이자 우리가 제거할 마지막 경계이다. 이 경계야말로 우리가 만들어 세운 모든 경계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최초의 것이다. 93 환상을 뿌리째 뽑아
근절시킬 수는 없다. 환상 그 자체를 이해하고 꿰뚫어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요가, 정신집중, 기도, 의식(儀式), 찬송, 단식과 같은 꽤 공이 드는 활동을 통해 최초의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캄브라이의 대주교 페넬롱은 “’환상을
피하려는 시도’만큼 위험한 환상도 없다”고 말했다. 97 “사원의 종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거기엔 종도 없고 나도 없었다. 단지
종소리만 있을 뿐.” 관세음보살의 깨달음도 그런 실험을 통해서였다고 전해진다. 듣는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듣는다고 하는 흐름 자체 이외에는
‘분리된 나’ 또는 ‘듣는
자’가 따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99 당신은 언제나 자신을
‘경험과 분리된 경험자’라고 상상해왔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찾으려는 순간, 그것은 경험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
점에 대해 앨런 왓츠(Alan Watt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지 경험만이 존재한다. 경험을
경험하는 누군가란 없다. 우리는 듣기를 듣거나, 보기를 보거나, 냄새 맡기를 냄새 맡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낌을 느끼거나, 생각을
생각하거나, 감각을 감각하지 않는다. ‘나는 기분이 좋다’라는 말은 현재 기분이 좋다는 의미이다. 그 말은 ‘나’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있고,
‘느낌’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분리된 것이 있어서, 그
둘을 하나로 모을 경우 이 ‘나’가 좋은 기분을 ‘느낀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의
느낌 이외엔 어떤 느낌도 없다. 그때 당시 어떤 느낌이 현존하든 그것이 곧 ‘나’이다. 현재 느낌과
동떨어진 ‘나’를 찾아낸 사람, ‘나’와 동떨어진 어떤 느낌을 찾아낸 사람은 세상에 없다. 결국 이 말은 단지 그 둘이 똑같다는 사실만을 알려줄 뿐이다.” 이렇게 어렵지
않은 내용일 것 같은데… 왠지 말로 풀다보니까 괜히 어려워진 게 아닐까 하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100 ‘나’는 곧 ‘나의 경험’이고, 또한 ‘내가 경험한 세계’이기도
하다. 내가 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새를 보는
경험 그것이다. ~ 이런 사실은 ‘느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 말은, 당신이 깨닫고
잇든 아니든, 지금 이 순간의 의식상태가 곧 합일의식이라는 의미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이미’ 우주이며, ‘이미’ 현재 경험의 총체이다. 당신의
현재 상태는 언제나 합일의식이다. 합일의식의 주된 장애무로 보이는 ‘분리된
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없애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다. 그것을 찾아내려 한다 해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찾아내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합일의식에
대한 확인이다. 바꿔 말하면, ‘나’를 찾더라도 발견할 수 없을 때, 당신은 일시적으로나마 진정한 실재인
합일의식을 자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처음엔 괴이하게 들리겠지만, ‘분리된 나’란 없다는 통찰이야말로 모든 시대의 신비가와 현자들이
단언해온 것이며, ‘영원의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101 고통이 있을 뿐, 고통받는 자는 없다. 행위가 있을 뿐, 행위하는
자는 없다. 열반이 있을 뿐, 열반을
구하는 자는 없다. 길이 있을 뿐, 그 길을
가는 자는 없다. ~ ‘내가 곧 우주’임을 깨달을 때 내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외부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우주의 밖엔 충돌을 일으킬 아무것도
없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이해는 무엇보다 ‘고통받을 수 있는 나’가 존재한다는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에
곧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같다는 말이다. 확실하다. 길을 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런 책은 이해하면서 읽는 게 아닐 것 같은데… 이해가 안 되니까, 안 읽힌다. 102 당신은 왜 불행한가? 당신의 생각과 행동의 99.9퍼센트가
당신 자신을 위해 이루어지지만, 실은 그 ‘당신’이 허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102 “그대는 언제나
전체로서 오직 자유, 해방, 광명만을 알고 있는 존재이다. 오직 전체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고뇌, 고통, 죽음뿐인 부분의 운명을 벗어나는 길이다.” ~ 부분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전체로 하강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정체는
언제나 지고의 본성임을 알게 된다. 언제나 현존하고 있는 무경계 자각의 빛 속에서는 한때 ‘내면의 고립된 나’라고 상상했던 그것이 저 밖의 우주와 하나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당신이다. 어디를 둘러보든 그 모든 곳에 당신의
본래면목만이 있을 뿐이다. 109 탐구를 더 밀어붙이면, 의식 속에서 공중제비와도 같은 묘한 전환이 일어난다. 이런 반응을
<능가경>에선 ‘의식
최심층부로의 전회(전회)’라고 부른다. 내가 ‘절대적인 보는 자’를
찾으면 찾을수록,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발견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더욱 명백해진다.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발견해낼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것이 실은 ‘모든
대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자’를 느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곧 ‘느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하는 자’를 경험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곧 ‘경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자’를 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 한 나’를 찾아내기 위해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발견되는 것은 오직 ‘있는 그대로의 세계’뿐이다. 110 내면의 ‘진정한 나’가 실제로는 외부의 현실과 하나이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 안쪽과 바깥쪽은 둘이 아니며 또한 언제나 비(非)이원적이다. 거기엔 어떤 근원적인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가 곧 나의 몸이며, 보고 있는 내가 곧 보여지는 대상이다. ‘진정한 나’는 안에도 밖에도 살고 있지 않다. 주체와 객체는 둘이 아니기 때문에, 신비가들은 실재에 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하지만 그것은 다만 외관상으로만 모순되는 듯 보일 뿐이다. 정말로 깨달았을까? 이 글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면서 읽는 사람들은 대단하다. 아니 이
글을 쓴 사람이야말로 대단하다. 정말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썼다면…… 3.
무경계 순간 (The No-Boundary Moment) 114 하지만 신비가는
‘영원’이란 철학적 견해도,
종교적 교리도, 이룰 수 없는 이상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차라리 영원은 너무나 단순한, 너무나 명백한, 그저
있는 그대로의 너무나 간단한 것이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눈을 번쩍 떠서 생생하게 ‘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황벽선사는 “그것은
바로 네 눈앞에 있다!”고 시종일관 강조했다. 115 신비가는 ‘현재순간(present moment)’에 완전히 몰입한 경험 속에서는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현재순간’을 잘
검토해보면, 분명 그 안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순간은
곧 무시간의 순간이며, 무시간의 순간을 과거도 미래도 모르고, 이전도
이후도 모르며, 어제도 내일도 모르는 영원한 순간이다. 따라서
이런 현재순간으로 깊숙이 발을 내딛는 것이 곧 영원으로 뛰어드는 것이고, 거울을 통과해 불생불사(不生不死)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117 영원이란 현재의
본질이자 무시간적 순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신비가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 즉 ‘과거와 미래라는 양극 너머’로
이끌어주는 위대한 해방은 지금 외에는 언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영원이란 내일
발견되는 것도, 5분 후에 발견되는 것도, 2초 이내에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영원은 ‘언제나 이미 지금(always already NOW)’인 것이다. 현재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거기에 또 다른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캠벨, 구본형, 켄 윌버…… 많이
읽고 사색하고, 자아 탐구에 애쓰다 보면 시간에 대해서도 탐구하게 되나 보다. 세 분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대해서 비슷한 말을 했다. 과거와
미래는 결국 하나라고. 나는 언제쯤 이런 것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까?
언젠가 깨닫게 된다면 이미 깨달은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 모르겠는 걸 보면 영원히
모르겠는건가?? 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어제에 살면서 끊임없이
내일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라는 고통스러운 사슬에 묶이고, 있지도 않은 유령을 불러내어 스스로를 속박한다. 118 무시간적 순간
속에 살지 못하는 무능력과 영원의 기쁨 속에 잠기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우리는 현재순간의 무기력한
대용품인 ‘시간의 약속’ – 지금 갖지 못한 것을 미래엔
갖게 되리라는 – 을 계속 추구한다. 어려운 표현이지만
결국 현재를 살라는 말 아닌가?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이겠지. 119 죄책감이란 과거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고, 불안이란 미래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 “장미는 존재의 매 순간
완전하다... 그러나 인간은 뒤로 미루거나 기억한다. 인간은
현재에 살지 않고 과거를 비탄하거나, 자신을 둘러싼 풍요로움에 무관심한 채 습관적으로 눈을 뒤로 돌리거나
미래를 미리 보기 위해 까치발을 한다. 인간은 시간 너머 현재 속의 자연과 함께 살 때까지 행복하 수도
강해질 수도 없으리라.” 125 우리가 시간과
시간으로 인한 모든 문제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은 엄청난 환상에 불과하다. 현재만이 있을 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겉모습이야 어떻든 간에, 당신이 경험하는 것은
오로지 영원한 현재뿐이다. 역시 그렇다. 미래의 한자는 아닐 미(未)에 올 래(來), 오지 않아서 미래(未來)라고 했다. 오지 않는 시간. 정말 안 와서가 아니라, 오면 그 순간 현재가 되기 때문에 영원히 미래는 가질 수 없는 시간. 그래서
시간에 숫자를 붙였나 보다. 126 그러나 기억으로서의
과거가 언제나 현재경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뒤쪽’에
있는 경계는 무너진다. 지금 이 순간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마찬가지로, 예견으로서의 미래가 언제나 현재경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앞쪽’에 있는 경계도 사라져버린다. 앞뒤로 우리를 짓누르는 듯했던 무게 전체가 순식간에 갑자기,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더 이상 가두어진 순간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채울 만큼
확장된다. 그리하여 ‘스쳐가는 현재’가 ‘영원한 현재’로 펼쳐진다. ~ 이러한 현재, 눙크스탄스가
바로 무경계 순간이다. 기억으로서의 과거와 기대로서의 미래가 그 주변이 아니라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영원한
현재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 현재의 ‘밖’에는 어떤 과거도 어떤 미래도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 지금 이 순간 이전에 온 것도, 이 순간 이후에
올 것도 전혀 없다. 결코 그 시작을 경험할 수도 그 끝을 경험할 수도 없다. 130 따라서 모든 기억을
현재경험으로 본다는 것은 현재순간의 경계를 붕괴하는 것이며, 현재순간을 환상적 한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과거 대 미래라는 대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앞 뒤 어디에도 시간이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렇게 해서 무시간적 현재 이외에 달리 서 있을
곳이 없게 되고, 영원 이외에 달리 있을 곳이 없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는 일상적 생활이 어려울 것 같다. 아니면 깨달음 따로, 일상생활
따로의 두 개의 삶을 가져야 하나…?? 4.
경계의 생성과 전개과정 (The Growth of
Boundaries) 136 고대 도가(道家)의 한 현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옛
진인(眞人)은 생명을 사랑하거나 죽음을 미워하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생명을 받더라도 기뻐하지 않았고, 물러날 때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분들은 태연하게 왔다 태연하게 갔다. 이와 같이 그분들에겐 도(道)에 저항하려는 마음의 바람이 없었으며, 인간의
수단으로써 하늘의 뜻에 저항하려는 그 어떤 바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진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 “나는 육신에 집착하지 않으며, 알고 있다는 생각도 모두 버렸다. 스스로를 육신과 마음[즉, 심신이라는
분리된 유기체]으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나는 무한과 하나가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유기체의 죽음은 오직 배타적으로 유기체하고만 동일시하고 있는 ‘나’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136 옛 진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너무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심신을 초월하여’ 영원히 무한과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진인이야말로, 임제선사가 지적했듯이 우리의 참된 자아(True Self), 즉
합일의식이다. 137 죽음의 문제, 무(無)에 대한 공포가 나 자신을 부분이라고 상상하고
있는 나의 ‘핵심’이 되고 만다. 죽음에 대한 이런 근원적인 공포감은 ‘분리된 나’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일체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 삶과 죽음, 탄생과
사망은 단지 현재라는 무시간적 순간을 바라보는 두 가지 다른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도
부인이 암으로 투병할 때 극진히 간호하느라 저술 활동을 중단했다. 아내의 죽음을 무시간적 순간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 아닌가? 138 하지만 얄궂게도
‘분리된 나’란 본래 환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분리된 나’의 죽음 또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수피 신비가 하즈라트 이나야트 한(Hazrat Inayat Khan)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환상을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생전 두려워 떠는 것은 그 환상에 대한 인상일 뿐이다.” 139 무시간적이며 영원한
지금이란, 과거도 미래도 알지 못하는 하나의 자각이다. 영원한
지금에는 어떤 미래도, 어떤 경계도, 어떤 내일도 없다.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 앞에도 그것 뒤에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죽음의 상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미래도, 내일도, 다가올 어떤 시간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미래 없이 전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141 우리는 미래 속에서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만을 원하지 않는다. 또
다른 지금, 또 다른 지금, 그리고 또 다른 지금…… 내일, 또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을 원한다. 그렇게 해서,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지극히 짧은 현재는 우리가 그것이 끝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덧없이 재빨리 지나가 버린다! 현재가 끝나길
바라는 것은 그래야 미래의 순간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미래의 순간도 역시 다만 스쳐가기
위해 살게 될 것이다. 147 새로운 경계가
그어질 때마다 정체감은 축소되고 수축되며, 도한 좀더 좁아지고 제한되어 여유가 적어진다. 제일 먼저 환경이, 그 다음으로 신체, 그런 다음 그림자가 저 밖에 존재하는 ‘나 아닌 것’으로, 이질적인 적으로 보이게 된다.
모든 경계선은 전선이기 때문이다. 5.
페르소나 수준: 발견의 출발점 (The Persona Level: The Start of Discovery) 149 삶에 대한 극심한
불만은 ‘정신질환’의 신호가 아니다. 잘못된 사회적응의 지표도 아니며 인격장애 역시 아니다. 왜냐하면
삶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 내부에 감춰져 있는 것은 흔히 엄청난 무게의 사회적 위선에 매몰되어 있는 특별한 지성, 성장하는 지성의 싹이기 때문이다. 삶의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은 동시에 보다 심층적이고 진정한
실재로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고통은 현실에 대한 소위 표준적인 자기만족에 대한 위안을 산산조각내며,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회피해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자신과 세계를 세심하게 보고 깊이 느끼고 접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의미에서 살아 있게끔 강요하기 때문이다. 고통이야말로 ‘최초의
은총’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나는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특수한 의미에서, 고통은 거이 환희의 순간이기도 하다. 고통은 창조적인 통찰력이 탄생하는 기점이기 때문이다. 150 고통을 부정하거나
회피하거나 경멸해서도 안 되지만, 미화하거나 집착하거나 과장해서도 안 된다. 고통의 출현은 단순히 하나의 좋은 신호이다. 합일의식을 벗어난 삶이란 궁극적으로 고통스럽고, 비참하며 슬픔으로
가득 찬 것임을 알아채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고통은 거짓 경계를 알아차리는 최초의 움직임이다. 그렇기에, 올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고통은 해방을 준다. 고통은 모든 경계를 넘어선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은 병들어서가 아니라 지성적 통찰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찰의 탄생이 유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고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이다.~ 고통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고통의 한가운데서 꼼짝 못하게 된다.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허우적거리게 된다. 154 경계가 생겨날
때마다 자신의 일부분은 외부로 ‘투사’된다. 그처럼 투사된 부분은 이제 외부의, 이질적인, 저 밖에 있는, 담장 건너편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따라서 특정 경계를 구축하는 것은 특정한 투사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이제 나의 어떤 부분들은 내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반대로 하나의 투사를 재소유한다는
것은 곧 하나의 경계를 해체시키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저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투사의 대상이 실은 자신의 반영이자 자기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서 그 특정 경계를 제거한 셈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자각은 훨씬 더 확장되고, 자유롭게 개방되고, 방어하지 않게
된다. 이전의 ‘적’과
진정한 친구가 되고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전선을 제거하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영토를 확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렇게 되면 투사된 부분들이 곧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게 될 것이다. 155 페르소나란 다소간
부정확하고 허약해진 자기상을 일컫는다. 페르소나는 분노, 자기주장, 성적 충동, 환희, 적대감, 용기, 공격성, 충동, 흥미 등과 같은 자신의 특정한 성향을 스스로 부정할 때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런 성향을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런 성향은 ‘그의 것’이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그것들이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인 ‘척’할
수 있을 뿐이다. 160 현명한 사람은
– 상사, 배우자, 학교, 친구, 동료 또는 자녀로부터 – 어떤
압력을 느낄 때면 언제나 그 압력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어떤 에너지와 동인을 현재 자신이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로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나는
압력을 느낀다’를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많은 동인을 갖고
있다’로 변환시키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일단 그가 모든
압박감이 자신의 무시된 동인임을 깨닫게 되면, 그 동인을 실행으로 옮길 것인지 아니면 뒤로 미룰 것인지를
새롭게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결정하든, 그는
그 동인이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161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두 번쯤은 마녀사냥을 – 그것이 어떤 형태였든 – 보거나
듣거나 함께한 적이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너무나 기괴한 일이지만,
자기 자신의 결점에 대한 사람들의 끈질기고 맹목적인 투사에 의한 참사를 잘 보여주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마녀사냥은 투사의 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를 제공해준다. 즉, 우리가 싫어하는 다른 사람들의 일면은 단지 우리가 우리의 내면에서 은밀히 싫어하고 있는 일면일 뿐이라는 진실
말이다. 162 누구라도 어두운
측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두운 측면’이 ‘나쁜 측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누구라도 약간은 음흉한 면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좀도둑이 살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수용한다면, 그것은 사실 우리 삶에서 좋은 양념이 되어 준다. 유대전통에 의하면, 인류가
권태로움 때문에 멸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써 태초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속에 이런 변덕스러운 성향, 별나고
심술궂은 경향을 심어놓았다고 한다. 권태로움 + 숨막혀서 멸망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듯하다. 가끔 그에 대해
듣기만 해도 숨막혀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내가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고 숨이 막힐 것 같은 걸
보면 내 안의 이런 성향을 싫어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162 그러나 마녀사냥꾼은
자신은 음흉한 마음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 ~ 그는 내면에서 그런 마음에 저항하고, 그것을 부정하며 밖으로 내던지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 마침내 그 존재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면, 그는 음흉한 마음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그 음흉한 마음이 ‘다른 사람’ 안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누군가를
찾아내는 것이고, 이제 이 일이 지극히 중요한 과제가 된다. ~ 억제할
수 없는 열성으로써 자신의 그림자를 혐오하고 저항하며 또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려고 애쓰는 만큼, 그는
자신의 그림자가 투사된 상대방을 똑같은 열성으로써 경멸하게 된다. 164 마녀사냥은 다양한
양상으로 진행된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더럽고, 어리석고, 변태적이고, 부도덕하기 때문에 혐오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일치 여부는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덮어씌운 그 혐오스러운 특징을, 알든
모르든 자기 자신도 소지하고 있는 경우에만 그렇게 난리를 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끔찍이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우리의 일면을 그들이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혐오하는 것이다. 165 보고 또 보다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너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실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얼마나 끔찍했을까? 생각만 해도 싫다. 페르소나니 그림자니, 깨닫지 말고 차라리 모르고 사는 게 나을 듯싶기도 하다. 165 이런저런 일을
하는 데 엄청난 의무감을 느끼는 사람은 단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진정한 욕망을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런 사실을 (그림자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그는 정반대로 말할 것이다. 자신이 의무감을 느끼는 것은 정말로 그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진실이 아니다. 남을 돕고자 하는 욕망이 정말로 없다면 그는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신경 쓰겠는가! 그는 돕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돕고 싶어하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지만, 그 욕망을 투사하고는 ‘다른 사람들’이 그가 도와주길 원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무감이란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서 오는 부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친절함 – 그러나
인식되지는 않는 – 이 지운 짐이다. 169 페르소나 수준에서
치료의 첫 단계는 증상들을 받아들이고 여유를 갖는 것이며, 지금까지 혐오해왔던 증상의 불쾌감과 친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의식적으로 증상과 접촉해야 하고, 가능한
한 마음을 크게 열고 증상을 수용해야 한다. ~ 이전엔 온갖 방식으로 저항해왔던 이 감정들이 스스로
드러나게끔 내버려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이 감정들을 적극적으로 활성화시키기도 한다. 특정 증상에 집중하여 그것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숨 쉬도록 내버려두면서, 다만
그 증상 자체의 모습에 지속적인 자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 증상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순간, 그 증상에 숨겨져 있는 그림자
역시 상당 부분 수용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대체로 사라진다. 172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증상이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위한 좋은 기회이다. 증상은 무의식 속의 그림자를
대단히 정확하게 지적해 준다. 즉, 증상은 투사된
성향을 확실하게 지적해주는 결코 오류 없는 신호로서, 우리는 증상을 통해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 그림자를
통해 성장하고 경계를 확장해가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하고 수용가능한 자기상으로 하강해가는 길, 한마디로 페르소나 수준에서 자아 수준으로 하강해가는 길이다. 그것은
‘페르소나 + 그림자 = 자아’라는 공식만큼이나 아주 단순한 것이다. 173 그림자란 단순히
자신의 무의식 속의 대립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의식적으로 의도하거나 염원하거나 욕망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반대로 상정하는 것이 그림자와 만나는 간단한 방법이 된다. 그러면, 자신의 그림자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 단지 대극을 ‘자각’하라는 뜻이다. 누군가를 몹시 싫어한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당신의 측면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만일
열광적인 사랑에 빠져 있다면, 그다지 배려하지 못하는 당신의 측면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특정 감정이나 증상을 싫어한다면, 은밀히 그런 감정이나 증상을 즐기고
있는 자신의 그런 측면을 인식하는 것이 좋다. 1.
켄타우로스 수준 (The Centaur Level) 185 우리는 존재의
심층부에 잠든 채 누워있는 대극의 일체성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 마음과 신체 사이의 경계를 용해시킬 방법을 탐구해나갈 것이다. 로웬(Lowe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분열은 신체 내부의 에너지 작용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다. 지식
자체는 표면적인 현상이며 또한 자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신체 속에서 흥분의 흐름을 느껴야 하고
그 길을 감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자아통제를 포기해야만 하고, 심층의 신체감각이 표면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87 숨을 들이쉬는
것은, 신체를 에너지와 생명력으로 충진시키면서 생기를 목을 통해 아랫배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숨을 내쉬는 것은, 이런 생기를 미묘한 쾌감과 즐거움으로 심신 전체에
걸쳐 방출하고 발산시키는 것이다. 생기를 목으로부터 배꼽 아래(단전)에 이르기까지 들이마시면서 완전한 풍선 호흡을 계속하다 보면, 내쉬는 숨이 단전으로부터 신체 구석구석 모든 곳으로 생명력이 발산되는 느낌으로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단전호흡을 하는건가? 벨리 댄스를 출 때도 특정 동작을 할 때 이런 식으로 호흡을 해야할 때가 있는데, 나는 제대로 호흡하는 게 힘들어서 정확한 표현이 안 된다. 역시
호흡만 제대로 해도 많은 것을 잘 할 수 있겠다. 189 적개심에 차서
화가 날 경우, 당신은 소리치고, 고함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는 신체활동으로써 이런 감정을 발산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근육활동이야말로 적개심 자체의 본질이다 따라서 적개심을 억제하려면, 신체적으로 이런 ‘근육의 해소활동’을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어떤’ 근육활동을
억제하기 위해선 ‘다른’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근육 간의 전쟁이 초래된다. 근육의 반은
주먹을 휘둘러 적개심을 발산하려고 하지만, 다른 반은 기를 쓰고 그런 활동을 막으려고 한다. 이것은 마치 한 발은 가속기를 밟고, 다른 발은 브레이크를 밟는
것과 같다. 이런 갈등은 결과적으로 아무런 움직임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엄청난 양의 에너지만 소모하면서
잔뜩 긴장된 교착상태로 끝나 버린다. 190 신체 안의 모든
블록, 모든 긴장이나 압박감은 기본적으로 어떤 금지된 충동이나 느낌을 ‘근육적으로’ 억제한 결과이다. 198 나아가 수의적이면서
또한 불수의적인 양쪽 모두를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을 신체나 불수의적이고 자발적인
과정 전반의 희생자라고 느끼지 않게 된다.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느끼는 것에 대해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탓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깊은
책임감이 발달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은 불수의적인
과정과 수의적인 과정 모두를 만들어내는 그 심층의 ‘근원’이지
결코 그 피해자가 아니다. 202 켄타우로스적인
삶의 의미, 즉 근본적인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바로 삶 자체의 과정이 기쁨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의미는 외적인 행위나 소유에서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빛을 발하는 내적인 흐름에서 발견된다. 또한 세계로, 친구에게로, 인류 전체로, 그리고 무한 그 자체에 이르기까지 이런 흐름을 ‘발산시키고 관계 맺는’ 가운데 발견된다. 반인반마로서 켄타우로스가
사람보다 하등한 동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반동물보다도 못한 인간이었구나. 203 삶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삶에서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무상함과 친구가
되고, 숨을 내쉴 때마다 심신 전체를 공(空) 속으로 해방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숨을 내쉴 때마다 자신을
아무 조건 없이 죽음에 내맡기는 것은 숨을 들이 쉴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 매
순간의 죽음과 무상함 앞에서 위축되는 것은 매 순간의 삶으로부터 위축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초월적인 나 (The Self in
Transcendence) 211 모든 사람의 뇌
구조는 기본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융은 누구라도 내면에 동일한 신화적 원형들을 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인류 공통의 구성원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융은
누구라도 내면에 동일한 신화적 원형들을 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인류 공통의 구성원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 원형들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융은 이 정신의 심층부를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고 명명(命名)했다. 다시 말해 집단무의식이란
개아적이거나 사적인 것이 아니라 초개인적(supra-individual), 초개아적(transpersonal), 초월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 신화적 초월성은
모든 사람의 존재 심층에 파묻혀 있으며, 이 강력한 층을 무시할 경우 가장 후회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212 ‘사적인 나’가 어떤 문제에 직면하든 ‘심층의 나’는 그것들을 초월하고, 또한 그것에 전혀 오염되지 않고 활짝 열린
상태에서 그것들을 인식한다. 처음엔 멈칫거리겠지만 계속 커져가는 확실성과 더불어, 의식 표면의 파도는 고통과 불안과 절망이란 급류에 휩쓸릴지라도 깊은 바닷속과 같이 평정을 유지하는 고요한 내적
힘의 근원을 발견하게 된다. 216 예컨대, 실제로 “내 불안은 내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이 강해질수록, 그 불안에 위협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불안이
현존해 있더라도 더 이상 그 불안에만 묶여 있지는 않기 때문에, 압도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불안에게 환심을 사려 하거나, 싸우거나, 저항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게 된다. 가장 근본적인 방식에서, 불안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철저히 수용하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허용한다. 불안이 사라져가는 것을
단지 보고 잇기 때문에, 나는 불안이 존재하든 안 하든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 그것들이 자신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면, 그 모든 것은 말끔히
떨어져 나갈 것이다. ~ 그것들이 ‘진정한 나’가 아니라면, 그것들에 동일시하거나,
매달리거나, 자기 자신을 속박하도록 허용해야할 아무런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 사적인 나 – 나의 소망, 희망, 욕구 상처 등등 – 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생사가 달린 심각한 문제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221 만일 ‘멋진 가면’을 쓰기로 결정할 경우에는, 그는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또한 일시적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억제한다.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측면들을 자신 안에서 인식할 수 있으므로 그것들을 밖으로 투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페르소나 자체는 그것이 유일한 정체성이 아닌 한, 적응을
훼방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요컨대, 페르소나 수준에서
자아 수준으로 하강할 때 해체되는 것은 그림자나 페르소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경계와 그로 인해 생긴 전쟁인 것이다. 가면을 쓰고 살아도
된다는 거구나. 그래서 켄 윌버가 이런 깨달음을 얻고도 일상적 생활도 가능했던 가 보다. 223 ‘초개아적인 나’를 근원적으로 직관하게 된 사람이라면,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진정한 나’뿐이며 그 ‘하나의
나’가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이든 육체를 초월해있는 이 ‘하나의 나’를 똑같이 직관하기
때문이다. 이 유일한 ‘진정한 나’는 마음과 몸을 말끔히 초월해 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의식 있는 존재’에게 있어 근본적으로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내적 정체감에 아무런 변화 없이 이 방 저 방을 움직여 다닐 수 있는 것과 똑같이, 다른 몸, 다른 기억, 다른 감각을 갖고 있더라도 그 ‘동일한 나’는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대상들의
주시자일 뿐 그것들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226 간단히 말해 당신의
내면에는 기억이나 생각, 마음, 몸, 경험, 환경, 느낌, 갈등, 감각, 기분과는
다른, 무언가 깊숙한 ‘나라는 느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해도 그 느낌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에 간섭받지 않는 초개아적 주시자이자 ‘초개아적 나’이다. 226 당신이 아무런
의심 없이 20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동일한 사람이라고 느낀다면 – 기억, 마음, 몸은 변했다
하더라도 ‘나라는 느낌’의 측면에서 – 마찬가지로 200년 전에도 그것과 ‘동일한 나’가 있었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 만일 그 느낌이 기억이나 마음, 몸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20년 전이나 200년 전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 “당신이 ‘자신의 것’이라고
부르는 한 덩어리의 지식과 느낌과 선택이 그다지 머지않은 과거 어느 순간에 무로부터 갑자기 출현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차라리 이 지식과 느낌 그리고 선택은 본질적으로 영원하며 불변인 것이고 모든 사람, 아니 모든 감각 있는 존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 수천 년에 걸쳐 남자들은 고생하고 분투하며
가족을 부양해왔으며, 여자들은 산고를 겪으며 아이를 낳았다. ~ 그가
느낀 고통과 순간의 기쁨도 당신의 느낌과 똑같았을 것이다. 그가 다른 사람이었을까? 그가 바로 당신 자신은 아니었을까?” 228 당신은 ‘초월적 나’를 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무슨 수를 써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의 눈은 자신의 눈
자체를 볼 수 있는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자신의 기억, 마음, 몸, 감정, 사고와의
잘못된 동일시를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깨는 일뿐이다. 이런 파기에는 초인적인 노력이나 이론적인 이해
같은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이라곤 ‘당신이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보는 자일 수 없다’는 단 한 가지 이해뿐이다. 229 ‘초월적 나’는 모든 전통에서 신성(神性)의 빛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원리적으로 ‘초월적 나’는 – 당신이 신을 어떻게 인식하든 – 신과 동일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궁극적, 근본적으로는 심오한 곳에서 오직 신만이 당신의 눈을 통해 보고, 당신의
귀를 통해 듣고, 당신의 혀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생 클레망(St. Clement)이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
즉 “당신 영혼의 심연에는
인류의 영혼이 존재한다. 속박에서 해방으로, 마법에 걸린
상태에서 깨어남으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죽음에서 불사로
이끌어주는 신성한 초월적 영혼 말이다.” 10. 궁극의
의식상태 ((The Ultimate State of Consciousness) 233 합일의식은 무시간적
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할 방법은 분명히 없다. 이미 그런 것에
새삼 ‘도달할’ 방법이 달리 있을 리 없다. 따라서 라마나가 시사한 것처럼, 합일의식에 이르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궁극의 진실이라고 선언하다. 무슨 허무 개그
같다. 235 합일의식을 찾아다니는
것은 물을 찾아 경험의 파도를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과 같다. 길도 없고 성취도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위대한 선사 하쿠인은 유사한 비유를 마음속에 품고 다음과 같은 글을 쓴 것처럼 보인다. 진리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중생은 그것을 먼 곳에서
찾는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비유컨대 물 한가운데 있으면서 목마르다고 애원하며 울부짖는 사람과
같다. 240 좌선을 하든 안
하든,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 불성이 있기에 수행 시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본래 불성이 있다면, 우리가 좌선을 하는 이유는
우리도 부처님처럼 행동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길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앉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선수행이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엄밀히 말해, 인간에게는 이 수행 이외에 또 다른 수행은 없다. 이런 삶의 방식
이외에 또 다른 삶의 방식이란 없다. 250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작용하는 다른 모든 저항과 마찬가지로, 근원적 저항은 당신에게 우연히 일어난 어떤 것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것도 아니고, 당신의 동의 없이 저절로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근원적 저항은 당신이 부지불식간에 스스로 하고 있는 현재의 활동이다. 합일의식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이 원초의 활동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지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대한 ‘총체적 망설임’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
이 현재에서 당신이 보지 않으려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253 사실상 이 ‘달아남’이 시간을 창조해낸다. 무시간적인
현재경험으로부터 달아나기 때문에(또는 달아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경험 자체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영원하고 총체적인 현재에 대한
우리의 저항으로 인해, 그것은 그저 ‘스쳐가는’ 현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게 해서 경험들이 하나씩 직선적으로 우리
곁을 스쳐가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현재로부터 도피하면서 그 경험들로
빠르게 달려가기 때문일 뿐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것이
곧 죽음에 대한 공포, 아무런 미래도 갖지 못하는 데 대한 두려움,
‘더 이상 달아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다) 259 그러나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의 저항, 외면, 달아남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는 시점이 오면, 내맡김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게 된다. 이 ‘내맡김’은 노력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 어떤 시도도 전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양쪽의 노력 모두가 단지 새로운 달아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합일상태는
언제나 기존의 사실이어서, 그가 하거나 하지 않는 짓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내맡김이 일어난다. 저항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저항의 해소이며, 또한
그 이전에 잇는 합일상태의 자각이다. 261 모든 것이 이미
영원히 올바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자 애써온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브라만 ‘이외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브라만에 대한 근원적인 저항처럼 보였던 것조차 실제로는 브라만의 움직임이었다. 지금(Now) 이외에 다른 시간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결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의 최초의 ‘달아남’처럼 보였던 것도 실은 ‘지금의’ 원초적 움직임이었다. 본증묘수, 본래의
깨달음이 곧 영묘한 수행이다. 영원한 지금이 바로 그 움직임이다. 대양의
파도는 조약돌과 조개껍데기를 적시면서 자유롭게 해변을 넘나든다. 그래서 정말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가? 다시 한 번 내가 책을 헛 읽었구나라는 자괴감이 든다. 한편의 길고 어려운 허무 개그를 본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서부터
잘못 읽은 걸까…?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해서 의식의 스펙트럼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이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 순서대로 잘 전개되었다고 본다. 다만 마지막 부분에 있는 ‘켄 윌버의 사상’을 머리말 부분에 놓았더라면 책을 이해하는데 좀 더 도움이 됐을 것 같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쉽게 써야한다는 데 너무 사로잡혀서인지,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부분이
여러 번 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더 어렵고 읽기 싫어진다. 과감히
생략하고 그냥 한번만 썼더라면 지루함이 덜하고 더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다. 3.
이 책의 장점 각 부분을 좀 더 깊게 이해하고 싶은 독자를 위해 추천 도서를 제시한 것이 좋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런 책을 안 썼을 것 같다. 저자도 서론 부분에서 경계가 너무도 명확한
언어로 무경계를 쓰는 것의 불완전함과 위험에 대해서 언급했다. 언어로 풀어서 쓰려다 보니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전달이 안 됨은 물론 ‘정말 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하는건가?’라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본인이 깨달은 것이 너무 대단해서 혼자만
갖고 있을 수 없어서 책을 썼겠지만 오히려 너무 신비주의적, 또는 허무주의적으로 풀어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해를
못하면서 읽다보니 내가 저자라면도 중언부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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