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낙조
- 조회 수 2611
- 댓글 수 3
- 추천 수 0
이제 이 만큼 쯤 왔으니,
고백하나 하고 계속 하렵니다.
이 집에서 쓰고 있는 글 중에
" 우리는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습니다. "
이러한 발상을 하신 분들에게
진심을 담은 마음으로 경의를 표 합니다.
저 먹고 살기 바쁜 세상에
이러한 생각을 하신 것을 보고는
숙연해지는 마음을 갖게 되었답니다.
내가 여기에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은
나도 해냈으니,
나 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신분들은
나 보다 더 잘 될거라는 생각을 갖고 글을 드리는 검니다.
I can do it !
You can do better than me. !
이 메세지를 전하고 싶은 검니다.
***
저는 68세에 직장을 떠날 때에는
년봉이 180,000 불 이였답니다.
몇달만 더 견디었다면,
년봉 220,000 불은 되었을 검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함으로서
많은 분들에게
더 큰 동기부여를 드리고 싶은 생각입니다.
이게 나의 진심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Share 하고 싶은 거지요.
***
앞 이야기에서 계속.
굳이 우리말로 하자면,
인사과 과장 하고 면담을 하였다.
일단은 년봉 24,000 불 부터 시작을 하잔다.
두 말 하지 않고 나는 싸인을 했다.
내가 직업을 갖기 원한 것은
마누라의 등쌀(?)에 못이긴 바보 남편이였기에
집에서 쫒겨나는 심정으로
직업을 갖게 된 것이다.
마누라 왈. 남자가 빈둥거리지 말고, 어디가서 한달에
1,000 불이라도 벌어 오란다.
바보 남편이 마누라 이야기 하면 더 바보가 되는 거지만,
당시에 마누라는 나이 육십에
컴퓨터 칩 디자이너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이게 시간당 80불을 받는 직업이였다.
아무튼 잠깐은 마누라 덕에 좀 편하게 살려고 했는데
그 마저 나에겐 그런 복도 없다.
복 없는 걸로 치면,
나 보다 좀 못 생긴 엄용수도 마누라를 세번이나
갈아 치웠는데, 난 마누라 하나 가지고 ...
주야 장창 파 먹고 있으니, ㅠㅠㅠ
아무튼
열심히 일을 했다.
마케팅이건 세일이건 그들이 해 오던 것을
열심히 보고 배우고, 연구를 했다.
2% 부족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들이 하고 있는 것에서
단 1% 만 다르게 하자는 생각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 했다.
이 회사는 세계 각국에 있는 직원 수가
2만 5천명 정도 이다.
내가 발을 들여 논 이곳의 이 회사에는
한국인은 나 하나였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했다고 하면,
나는 이 회사를 발견 한 거라고 늘 큰 소릴 치고 다녔다.
회사 내에서 말이다.
그러니, 날 좋아 할 백인 직원들의 수는 많지가 않았다.
늘 뒤에서 수근 수근.
정확히 싸인을 하고 두 달 만 만에
다시 인사과 과장이랑 만났다.
나 더러 Manager 하란다.
그리곤 년봉이 48,000 불이 된다는 거다.
그리고 성과급이 더 붙게 된단다.
내가 그 만큼 벌어 주니 나를 다시 우대 한다고 생각을 했다.
Manager가 되고 보니
나에겐 너무나 벅찬 거 였다.
내가 직원들을 뽑고 재정비 하게 되여
나의 부서엔 내 밑에 13명이 있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컴퓨터를 다루어야 하는 일이 점점 늘어 났다.
나의 바로 위 상사는
나의 딸 보다 몇살이 어린 백인 여자 였었다.
유 씨 버클리에서 경제학 석사를 한 여자인데,
하루는 나를 부르더니 얼굴이 벌게 가지고 나를 야단 치는 것이였다.
뭔소린지도 모르고,
눈 만 멍뚱 멀뚱 !
다음에 계속
댓글
3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VR Le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