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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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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24일 21시 01분 등록
‘탁’

힘주어 책장을 덮었다. 눈을 감고 가슴이 터지듯 숨을 들이마셨다. 폐포 속의 묵직한 공기가 가슴을 눌러 응어리가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저며와 도중에 ‘탁’하고 몇번이고 책을 덮고 울컥해야 했다. 2주전 막내 오윤이 소설 ‘태백산맥’을 읽을 때 가슴이 아파 책을 계속해서 못읽겠다고 했던,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훔치고 책을 덮고 나니 속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울렸다.

‘무엇이 이리도 나를 안타깝게 하는가? 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인가?’

한 주동안 김구 선생이 내 곁에 있었다. 왼쪽에서, 그리고 오른쪽에서 나를 바라보며 걷고 있었고, 머리 꼭지에서, 때로는 가슴 속에서 나를 응시하며 서 있었다. 그 눈은 ‘승오군, 자네는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라고 묻는 듯 했다. 부끄러운 동행이었다. 그러다 책의 마지막 글인 ‘나의 소원’을 읽었다. 나를 아주 작게 만드는 글이었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는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인류가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에게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다. 최고의 문화를 건설하는 사명을 달성한 민족은 한마디로 말하면 국민 모두를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데 있다. 대한 사람이라면 간 데마다 신용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한다.”


그의 이야기가 가슴을 요동치게 만든다. 그가 평생을 두고 진실로 원했던 것은 대한의 자주 독립, 대한 사람 모두가 배우고 깨어서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계가 모두 대한의 사람 문화를 사모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백범의 박애정신에 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내 첫번째 안타까움은 스스로만 바라보고 있는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깊숙히 들여다보니 나를 더욱 안타깝게 한 것은 그의 가족이었다. 백범은 독립운동에 전념하느라 가족과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아내와 결혼하여 첫 딸을 얻었으나 곧 사망하였고, 이후 두 딸을 두었으나 감옥을 드나드는 사이에 모두 잃었다. 게다가 큰아들 인(仁)이 태어난 지 석 달만에 상하이 망명길에 올랐으니, 가족 사이의 단란한 시간은 거의 없었다. 부인의 투병생활에도 일제의 감시 때문에 부인의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하였다. 그는 충효를 으뜸으로 여기고 큰 뜻을 품은 선비의 기개를 갖고 있었지만 처자식에게는 차마 눈길을 줄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얼마전 보았던 영화 <묵공>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는 피와 혼돈의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둔 조나라가 10만 대군을 일으켜 약소국인 양나라를 치려는 데서 시작한다. 양나라의 성 안에는 겨우 4천명의 병력이 있을 뿐이었다. 양나라 군주는 방어전투를 지원해준다는 묵가(墨家)의 존재를 소문으로 알고 지원군을 요청한다.

묵가는 묵자(墨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학파였다. 그는 어버이처럼 가까운 이부터 사랑한 뒤 이를 넓혀나가라고 가르친 공자의 인(仁)을 ‘차별적인 사랑’(別愛)이라고 비판했고,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두루 사랑하라”는 겸애(兼愛)를 핵심으로 가르쳤다. 이러한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며 민중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특히 당시에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주었던 전쟁터에서 더욱 빛을 발휘했다. 반전 평화주의자로서 조직력을 바탕으로 모두 병술을 연마했던 묵가는 침략적인 전쟁을 부정하고 ‘방어를 위한 전쟁’을 하는 약소국들을 돌아다니며 아무런 대가없이 그들을 도왔다.

며칠 뒤 양나라 성에 도착한 묵가군은 검은 누더기를 걸친 ‘혁리’란 이름의 활동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처음에 그는 짚을 깐 마구간의 구유를 숙소로 얻을 정도로 멸시당했지만, 양나라 백성들의 저항의식을 일깨우고 군주와 군사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항전 대열을 갖춰 결국 성을 보호해낸다.

그러나 혁리는 그를 사모하는 여성지휘관 ‘일열’ 때문에 딜레마에 빠진다. 혁리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묵자집단의 전형적인 활동가다. 그는 어느 누구의 보답도 받지 않고, 재물을 탐내지도 않는다. 일열은 모범생활 사나이 혁리에게 애원하듯 말한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것이 옳건 그르건, 당신 곁에 있는 거에요”


“묵가는 언제나 사랑하라, 사랑하라.. 당신은 아나요? 진정 (사랑을) 아시나요?”
그녀는 홀로 사모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실어, 속삭이듯이 노래를 불렀다.

묵가에서 혁리는 사해동포를 사랑하라는 ‘겸애’에 대해서만 배웠다. 그러나 진정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가?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 해서 더 큰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박애주의와 개인의 사랑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백범도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살아왔으리라 믿는다. 민족과 가족, 소명과 사랑, 목적과 명분을 조화롭고 균형있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그가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게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선택해야 했던 그의 고충을 감히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진정으로 묻고 싶은 것은 이러한 딜레마의 가운데서 ‘균형과 조화’가 아닌 때로 ‘선택과 포기’를 해야할 때가 있지나 않은가 하는 안타까운 질문이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허나 그가 가족에게 소홀했다 하여, 누가 백범의 삶이 반쪽짜리 인생이라 말하겠는가.

IP *.232.147.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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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하
2007.06.18 16:06:00 *.72.153.12
이 영화 정말 할 말 많지. 그리고 백범의 삶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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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빅
2007.06.19 13:45:48 *.218.205.7
누나 왠 삑사리? 이름 바꿨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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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6.19 14:05:25 *.114.56.245
때로는 다독거림이 채근하는것보다 더 효과적일 때가 있지요.
"옹박 너 참 대견하다. 생각은 깊이가 ( )자 이고 생김새는 ( )는 닮았구나" 이렇게 자신을 추켜 세워봐요. 내면의 옹박이 참 좋아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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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6.19 15:10:35 *.75.15.205
몰라서는 안 되지... 그것을 알아야 그가 무엇에, 왜 뜻을 두고 혈혈단신으로 나아가 왜놈의 피를 갈아마시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는가를 이해하고 느낄수 있을 테니까. 더군다나 과정이 아닌 결과 앞에서는. 왜 도와야 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도 뼛속깊이 사무치게 가져갈 수 있겠지. 네가 평소 자주 말하는 분별지와 무분별지는 이성으로 받아들여 가슴으로 녹아들게 될 것이다. 너의 특별한 냉철한 이성이 진실함만을 담을 깊이를 더해 주리라 생각해.

희석의 선택과 포기는 어떠했을까? 단순한 연애적 감정이 아닌 그의 개인사적 선택과 포기는 아니었을까?

네 생각처럼 균형과 조화의 이면 선택과 포기, 이것도 우리가 함께 생각해봐야 하는 이중성은 아닐까?

영화 <묵공> 에서 여자 주인공 열리(양핑핑?)가 이 영화에서 "가장 비중있는 의미와 할 말을 하였음"- 가장 희생적이고 가장 헌신적이었음: 왕의 위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권력의 폐단과 통치자들의 무모한 야욕에 희생재물이 되고 마는, 전체 국민을 보호하고 대표하는 진정 용기있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이 얼마간 사장되어지고 만점을 나는 애석하게 생각한다. 감독이 너무 이쁜 여자배우를 기용하여 썼다는 점-그로인해 여자 주인공의 얼굴에 시선이 흩어짐, - 열리의 갈등을 심도있게 전개하지 못하고 마치 애정행각에 사로잡혀 이념이고 뭐고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마는 자칫 무분별의 사랑의 열병에 빠져버린 가벼운 여성으로 착각의 소지가 있게 만들었다는 점, 그래서 그녀가 목청을 찢기는 진정한 외침의 소리를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용보다 가볍게 인지될 법한 미약함에 그치게 하였다는 점, 마치 오매불망 혁리에 대한 사랑만을 갈구하는 대책없는 청순가련형의 여인처럼 그 멍청한 대사 " 내가 원하는 건, 그것이 옳건 그르건, 당신 곁에 있는 거에요."하며 진실성보다는 천박해 보일 수도 있는, 스스로 옷을 벗어내리는 능동성이 오히려 묵자 혁리 만을 집중 부각시켜(유덕화) 그의 거절에 무색한 여인으로 영화를 이끌어 간점은 감독과 연출자의 한심한 전개로 인해 영화를 망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샹!) 왕 짜증의 대목이다. 게다가 시종일관 그 여인의 상기되고 마법에라도 걸린 듯한 표정은 그녀의 사상과 위치가 퇴색되고, 거리의 여자와 무엇이 다르게 연출 되었더란 말인가 의문을 갖게 된다. 여자 주인공을 인형으로 등장시켜 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 이들도 얼마든지 이지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전해 주었어야 하지 않는가. 끝내는 여 주인공을 백치 아다다로 밖에 더 남겼는가 생각하며 울분을 토한다. 에구~ 열 받쳐라.

하기는 사실 안성기의 비중이 필요이상으로 의도적으로 크게 부각되는 바람에 혁리와 열리의 비중의 심도가 오히려 감해지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도 된다. 전쟁은 남성적인 것이고 평화는 여성적인 이분법적 사고로 들어나 버렸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인류의 평화와 개인의 편협한 사랑의 대비가 되고 말았다고 해야 할까? 혁리는 결국에 열리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으로 밖에 더 연출 되었나? 그가 안고 있는 시체는 진정한 진실성의 가치로운 희생(잔다르크적인)이라기보다 한 남자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설득하지(인정받지) 못하고- 그토록 험한 희생과 헌신을 치르고도 결국에는 쓸쓸히 죽어가고야 마는 무의미한 그저 한 여자의 시체덩이에 대한 연민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가 반문해 본다.

그러니까 내밀한 연기가 되지 못하고 그저 이름 있는 배우들의 나열로 만든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면 영화를 너무 잘못 이해한 것인가?
하기는 향산의 말에 너무 심취되어 사부님께서 안성기를 좋아한다고? 왜? 하는 심사로 안성기가 언제 나오나, 무슨 대사를 하나 너무 신경쓰며 별 집중하지 못하고 보기는 했다. 왜 책 한 줄, 영화 한 장면을 보다가도 그놈의 꿈 벗 얼굴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맥을 잃게 만드는지(핑게는... 사실 요즘 그랬걸랑) 그래서 별로 느낌이 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옹박은 냉철하게 큰 관점에서 영화를 이해하며 본 것 같네.

그래도 난 이 영화가 어쩐지 남자들의 이야기에 여자가 끼어든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 꺄우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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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6.19 15:31:49 *.218.205.7
정희누나.. 네, 자신을 믿는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참 잘 안되네요. 그나저나 어떻게 제 성격을 글 하나로 읽을 수 있죠?

써니누나.. 어째 댓글이 본문보다 더 긴것 같아요? ㅋㅋ 하튼 대단해요. 그나저나 여자 주인공이 이뻐서 별로였다니, 난 좋기만 하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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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7.06.21 02:35:55 *.102.145.181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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