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윤정욱
  • 조회 수 981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18년 1월 22일 05시 53분 등록

가까운 이웃사촌이 멀리 사는 친척 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이웃이든 친척이든 왕래가 잦고 자주 얼굴을 봐야 정이 쌓인다는 말이다. 나의 고향은 경북 청송이다. 아버지의 고향 역시 이곳 청송이다. 청송에는 학교가 많지 않았다. 초등학교가 하나, 중고등학교가 역시 하나였다. 그마저도 같은 건물을 사용했다. 그만큼 시골이었다. 내가 열 살이 되었을 무렵 부모님은 아이들을 이런 시골에서 키울 수 없다는 명분과 고향 땅을 떠나야 한다는 속마음을 합해 이사를 결정 하셨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안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안동에는 먼저 터를 잡고 가까운 친척이 있었다. 이모였다.

 

이모는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항상 밝은 얼굴로 나를 볼 때면 항상 욱이라~”하고 불러주시던 그 목소리가 좋았다. 나는 이모가 좋았다. 처음으로 타지살이를 결정한 부모님이 이모 댁 근처의 아파트를 구한 것도 이모의 공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96년 새 아파트에 입주를 한 우리 가족은 참 바쁘게 살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안동에서 청송으로 왕복 2시간 거리를 매일 차로 출퇴근을 하셨고, 할 수 있는 것이 장사 밖에 없었던 어머니는 붕어빵, 야채, 족발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억척스럽게 돈을 버셨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들은 대학 생활과 고등학교 생활을 기숙사에서 했다. 초등학생은 나는 방과 후, 중학생이었던 셋째 누나가 집에 올 때까지 혼자일 때가 많았다. 당시 나를 자주 챙겨주었던 사람이 바로 이모였다.

 

당시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언덕 위에 있었다. 그리고 이모는 그 언덕 아래 초입에서 떡볶이와 오뎅을 파셨다. 떡볶이는 떡, 오뎅 구분 없이 한 개에 오십 원 이었고, 천 원이면 배 부르게 담아 주셨다. 짓궂은 아이들은 오십 원을 내고 떡 하나를 집어 먹고는 수 많은 아이들 틈새에서 뻘겋게 양념이 밴 양배추만 계속 집어 먹기도 했었다. 그런 아이가 있어도 이모는 다그치지 않으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스승의 날이 되면 아이들이 등교를 하며 부모님이 챙겨 준 선물을 하나씩 들고 와 교탁 위에 올려 두기도 했었다. 물론 우리 집은 예외였다. 두 분 모두 출근 준비에 장사 준비에 너무 바쁘셨기 때문이다. 스승의 날 선물은 물론 나의 학습장에 적힌 준비물 목록을 제대로 볼 여유도 없으셨다. 선물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나는 얼떨결에 집을 나왔고, 학교를 가는 내내 마음을 불안했다. 고민 끝에 나는 이모 집에 들려 주무시고 있던 이모를 깨웠다. 사정을 들은 이모는 웃으며 별 말 없이 오 천원을 쥐어 주셨다. 그 돈으로 나는 갈색 체크무늬 손수건 하나를 사서 학교에 갔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교탁 위에 손수건을 올려 두었다. 나는 안도했다. 다른 친구들이 올려 둔 선물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빈 손이 아니었다는 안도감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 뒤로 하교 길에 이모에게 감사 인사를 제대로 했는지, 그 오 천원을 나중에 돌려드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때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아마 제대로 인사를 하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만 한다.

 

우리 어머니 보다 강한 여성이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 이모가 아닐까 한다. 조카가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서 장사를 하고, 운동회 날에는 학교 운동장에서 콘 아이스크림을 팔면서도 항상 얼굴 가득 미소가 가득했던 이모가 무너졌던 날이 있었다. 갑작스레 이모부가 돌아가신 것이다. 항상 술과 담배를 즐겨 했던 이모부는 어린 내가 보기에도 항상 안색이 어두웠다. 암이었다고 한다. 이모가 많이 우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이모는 얼마 안가 다시 힘을 내셨던 것 같다. 사촌 누나 둘 모두가 결혼을 했고 곧 손주도 얻었다. 막내 사촌 형도 현장에서 기술자로 힘든 일을 시작했지만 어엿한 일자리를 구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체격이 좋았던 사촌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 후 긴 방황의 시간을 지나 한 때 조직폭력배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험악해 보이기는 했지만, 어린 나와 살갑게 놀아주던 형의 모습과는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떼인 돈(?)을 받으러 다니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사촌 형은 그 무리들과의 인연을 정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모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촌 형은 그 날 정말 이러다 사람이 죽겠다 싶을 만큼 그 사람들에게 맞았다고 한다.

 

몇 해가 더 지났다. 불행은 항상 꼬리를 물고 찾아오는가 보다. 불편한 몸으로 지방 출장을 다니며 전기 일을 하던 사촌 형이 작업 도중 감전을 당한 것이다. 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고, 전신에 깁스를 한 채 누워있는 형을 보고 나는 말을 잊어버렸다. 이모의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한 형은 재활에 최선을 다했다. 정말 치열한 노력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로 혼자서 조금씩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형은 창원에서 첫 직장을 구한 나를 대견해 하며 어느 날엔가는 용돈으로 쓰라며 십 만원을 건네 주었다. 그런 형의 모습을 보는 이모도 흐뭇해 보여 좋았다. 그런데 형이 그 긴 재활의 시간 동안 너무 힘들었던 탓일까. 내가 아는 누구 보다 강했던 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심해진 병세를 더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낸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 이후로 이모는 잠시 손주가 찾아 올 때 말고는 집에 불을 켜지 않고 혼자서 조용히 보내신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명절이면 곧잘 이모를 집으로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사양하시는 경우가 많다. 어제는 신혼 여행을 마치고 처음 본가로 인사를 드리러 안동에 갔다. 인사를 마치고 창원으로 내려오기 전에 이모 댁에 들렸다. 새해 인사를 드리면서 집 사람과 함께 큰 절을 했다. 뿌듯해 하시는 이모를 보니 나도 뿌듯했다.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으로 큰 소리로 다시 인사를 드리며 말했다.

 

이모 저희 갈께요. 이모 사랑해요~”

 

수줍은 듯 웃으며 손을 흔드시는 이모와 그 옆에 환한 얼굴로 서 계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오늘처럼 이모가 환히 웃으시는 날이 더 많았으면 한다. 손수건 한 장으로 진 마음의 빚 때문만은 아니다. 이모는 내게 참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올 해 구정이 오면 한 번 더 찾아 뵙고, 함께 식사도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손수건 이야기도 넌지시 꺼내보려고 한다. 미리 준비한 작은 선물과 함께 말이다.

IP *.39.150.234

프로필 이미지
2018.01.22 22:06:47 *.44.153.208

자꾸 눈물이 나네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32 어떻게 리더가 될 것인가? [2] 송의섭 2018.01.08 948
331 <뚱냥이칼럼 #29> 게이미피케이션을 활용하여 내 삶의 게이머 되기 [2] 뚱냥이 2018.01.08 980
330 #31 나의 이야기는 오늘부터 시작된다_이수정 [2] 알로하 2018.01.08 953
329 1월 오프수업 후기(정승훈) [3] 정승훈 2018.01.14 957
328 우리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6] 보따리아 2018.01.15 983
327 1월 오프수업 후기 (윤정욱)_마지막 수업 [3] 윤정욱 2018.01.16 959
326 마지막 수업(김기상) [4] ggumdream 2018.01.16 952
325 1월 오프수업 후기 - 우린 또 어디선가 마주칠 것이다. [4] 모닝 2018.01.16 982
324 1월 오프수업 후기 - 셀프 인터뷰 file [1] 송의섭 2018.01.16 963
323 1월 오프 수업 후기: 시지프스의 꿈_이수정 [3] 알로하 2018.01.16 960
322 무대 뒷편에 있는 느낌이 드는 그대에게-믿음의 괘 <풍택중부> file 보따리아 2018.01.20 1883
321 칼럼 #32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 불안해요 (정승훈) file 정승훈 2018.01.21 952
320 # 다시 찾은 제주에서 모닝 2018.01.21 976
» 칼럼 #31 우리 이모 (윤정욱) [1] 윤정욱 2018.01.22 981
318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file [1] 송의섭 2018.01.22 1025
317 #31.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1] ggumdream 2018.01.22 955
316 칼럼 #32 혹, 내 아이가 피해자는 아닐까? (정승훈) file 정승훈 2018.01.28 963
315 # 나는 방송국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 (이정학) 모닝 2018.01.28 951
314 작가라면 관찰의 괘, <풍지관> 보따리아 2018.01.29 1490
313 #32 태극기 집회를 만나고 (윤정욱) 윤정욱 2018.01.29 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