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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9일 04시 28분 등록


풍지관(風地觀)괘는 주역의 20번째 괘이다. 아래에는 땅을 상징하는 곤괘(☷), 위에는 바람을 상징하는 손괘(☴)가 있다. 땅 위에 부는 바람, 때로는 땅 위엔 머무는 바람을 상상하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괘상의 이름은 볼 관()’이다.

 

땅 위에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비가 아니라 땅 위에 머무르는 또는 스치며 흘러가는 바람이다. 그 바람은 비록 땅과의 거리는 있지만 이방인의 눈으로 관찰한다. 풍지관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觀國之光 利用賓于王 관국지광 리용빈우왕

 

흔히 말하는 관광(觀光)이 바로 여기 관국지광(觀國之光)’에서 유래한다. ‘나라의 빛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왕에게서 빈객으로서 활용된다는 것이다.

 

뒤이은 글은 다음과 같다.

 

觀我生 君子 无咎 관아생 군자 무구

觀其生 君子 无咎 관기생 군자 무구

 

자신의 삶을 관찰하는(관아생, 觀我生) 군자는 허물이 없고(무구, 无咎), 남과 사물을 관찰하는(관기생, 觀其生) 군자도 허물이 없다는 뜻이다.

 

관광을 하며 여행지의 풍물을 관찰하고, 자신의 내면도 성찰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군자의 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풍지관괘를 보면 여행하는 작가, 시인, 화가에게 어울리는 괘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모두 관찰을 통해 통찰을 이끌어내어 문자와 그림에 그 흔적을 남기는 존재들이다. 볼 견()이 아니라 볼 관()임에 주목하자. ()은 그저 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은 꿰뚫어 보는 것이고, 마음을 읽는 것이다.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예순이 넘는 나이에 12,000km의 실크로드를 4년에 걸쳐 걸었다. 아내와의 사별, 은퇴, 60대라는 객관적 사실에서 보통 사람들은 상실감과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까. 사랑도 일도 젊음도 없다. 하지만 나그네는 짐이 가벼운 법. 오히려 얽매일 생활의 짐이 없는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바람과 같이 훌쩍 떠난다. 4년 간의 여행을 통해 여러 나라의 땅을 걸음으로써 각 나라의 빛(國之光)을 관찰한 것이다. 과정에서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도 관찰하고, 자신의 내면도 성찰하며 그 관찰과 성찰의 기록을 3권에 걸친 1200여 페이지에 남긴다.

 

풍지관괘가 꼭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 어머니로부터 구멍지기라는 타박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에서 시인은 노래한다. ‘나도 남 못지 않은 나그네였다고 말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내면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여행이야말로 가장 긴 여행 아닐까. 바람같이 흐르는 마음, 잡을 수 없는 마음, 요동하는 마음을 내면의 토양 위에 잠시 머물게 하자. 거리를 두고 내 마음을 관찰해보자. 풍지관 괘상을 마음 속에 그리며 박경리 시인의 <여행>을 읊조려 본다

 

<여 행> 박 경 리

 

나는 거의 여행을 하지 않았다

피치 못할 일로 외출해야 할 때도

그 전날부터 어수선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나다니기를 싫어한 나를

구멍지기라 하며 어머니는 꾸중했다

바깥 세상이 두려웠는지

낯설어서 그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도 남 못지 않은 나그네였다.

내 방식대로 진종일 대부분의 시간

혼자서 여행을 했다.

꿈속에서도 여행을 했고

서산 바라보면서도 여행을 했고

나무의 가지치기를 하면서도,

서억서억 톱질 움직이며

나무의 살갗이 찢기는 것을,

그럴 때도 여행을 했고

밭을 맬 때도

설거지를 할 때도 여행을 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혹은 배를 타고 그런 여행은 아니었지만

보다 은밀하게 내면으로 내면으로

촘촘하고 섬세했으며

다양하고 풍성했다.

 

행선지도 있었고 귀착지도 있었다.

바이칼 호수도 있었으며

밤 하늘의 별이 크다는 사하라 사막

작가이기도 했던 어떤 여자가

사막을 건너면서 신의 계시를 받아

메테르니히와 러시아 황제 사이를 오가며

신성동맹을 주선했다는 사연이 있는

그 별이 큰 사막의 밤하늘

 

히말라야의 짐진 노새와 야크의 슬픈 풍경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적인 여행이든

사라졌다간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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