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정욱
- 조회 수 2240
- 댓글 수 0
- 추천 수 0
지난 주말 토요일의 일이었다. 갑작스레 고장 난 컴퓨터를 어찌하지 못하고
결국 새 노트북을 사기로 마음 먹었다. 아내와 함께 한 대형 마트 내 전자제품 가게로 향했다. 미리 생각해 둔 모델이 있었기에 물건을 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마트에 들리기 전에 오랜만에 세차도 하기로 했다. 여러모로 기분
좋은 주말 오후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창원대로를
따라 마트로 향하는 길 곳곳에 녹색 조끼를 입은 경찰들의 모습이 더러 보였던 것이다. 무슨 행사라도
하나 싶었다. 창원대로에서 시청 방향으로 차를 돌리면 왕복 8차선이
나오는데 그 대로가 끝나는 지점에 마트가 있었다. 그 큰 길 한 가운데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도무지 신호가
바뀌지 않았다. 얼마 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며 대로를 횡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태극기 집회 사람들이었다.
당혹스러웠다. 집회라는 것이 서울 그것도 광화문이 아닌 주말 오후 한참
시간에 창원에서 태극기 집회라니. 대부분 고령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좀 더 젊은 사람들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더러 한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은
플랜카드와 태극기를 저마다 손에 들고 있었다. 집회 행렬은 생각보다 길었다. 바로 눈 앞에 마트가 보이는데 차가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자극적인
그들의 주장보다 그들이 내 앞 길을 막고 있다는 사실이 더 불편했던 찰나 경찰 수십 명이 어디론가 우르르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차에 타고 있던 일부 시민들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 시비가 붙은 것이었다. 경찰들은
그들을 갈라 놓았고 집회 참가자들의 시위는 잠시나마 더 격렬해졌다. 어쩔 수 없었다. 격한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우리도 먼 길을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평소라면 15분이면 도착 할 곳을 거의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도착했다. 새 노트북을 사고 점원이 새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동안 짬을 내 마트 식당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옆 자리에는 초로의 노부부가 다정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화가
많지는 않았지만 티 나지 않게 할아버지를 배려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그들의 짐들
가운데 나는 하얀 깃대 두 개를 보았다. 태극기였다. 잘
말아서 가방 안에 넣어둔 태극기 위로 옷을 덮어 가렸지만 나는 분명 보았다. 깃대 손잡이 부분만 머쓱하게
살짝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집회를 마친 노부부가 허기를 달래러 마트에 들린 것 같았다. 나는 생각에 빠졌다. 무엇이 그들을 그 추운 겨울 날 거리로 나서게
했을까?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던 그들의 모습과 지금 내 옆에서 조용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 사이의 간극을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지금 긴 겨울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 여전히 봄은 오지
않은 듯 하다. 지난 겨울 한 집에 사는 자식들은 촛불집회에서, 그
부모들은 태극기 집회에서 추위에 떨었다. 그리고 그들은 집에 돌아와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화가 사라진 그 곳에는 공허한 고함소리만 가득하다. 나는 하나의 목소리가 사회 전체를 뒤덮는
것이 두렵다. 태극기 집회든 촛불 집회든 추운 겨울 우리가 거리로 나온 이유를 우리는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현재 또는 미래의
내 아이, 내 손주에게도 차분히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나서 내 아이, 내 손주가 하는 이야기에도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다면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장하라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태극기 집회 하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느꼈던 조롱과 비웃음을 떠올리며, 나는 과연 그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돌이켜 보았다. 말하는 것 보다 듣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다르지 않다. 우리의
과제다. 둘 모두의 역할을 우리가 해낼 때 보다 더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5212 |
[33] 시련(11) 자장면 한 그릇의 기억 ![]() | 앤 | 2009.01.12 | 205 |
5211 |
[36] 시련12. 잘못 꿴 인연 ![]() | 지희 | 2009.01.20 | 209 |
5210 |
[38] 시련 14. 당신이 사랑을 고백하는 그 사람. ![]() | 지희 | 2009.02.10 | 258 |
5209 |
[32] 시련 10. 용맹한 투사 같은 당신 ![]() | 앤 | 2008.12.29 | 283 |
5208 |
[37] 시련. 13. 다시 만날 이름 아빠 ![]() | 앤 | 2009.01.27 | 283 |
5207 |
[28] 시련(7)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 | 지희 | 2008.11.17 | 330 |
5206 | 칼럼 #18 스프레이 락카 사건 (정승훈) [4] | 정승훈 | 2017.09.09 | 1740 |
5205 | 마흔, 유혹할 수 없는 나이 [7] | 모닝 | 2017.04.16 | 1752 |
5204 | [칼럼3] 편지, 그 아련한 기억들(정승훈) [1] | 오늘 후회없이 | 2017.04.29 | 1793 |
5203 | 9월 오프모임 후기_느리게 걷기 [1] | 뚱냥이 | 2017.09.24 | 1838 |
5202 |
우리의 삶이 길을 걷는 여정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 | 송의섭 | 2017.12.25 | 1860 |
5201 | 2. 가장 비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 아난다 | 2018.03.05 | 1863 |
5200 |
7. 사랑스런 나의 영웅 ![]() | 해피맘CEO | 2018.04.23 | 1878 |
5199 | 11월 오프수업 후기: 돌아온 뚱냥 외 [1] | 보따리아 | 2017.11.19 | 1879 |
5198 | 칼럼 #27)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법 (윤정욱) [1] | 윤정욱 | 2017.12.04 | 1889 |
5197 | #16. 김기덕과 그림자 [4] | 땟쑤나무 | 2013.09.02 | 1895 |
5196 | 걷기와 맑은 날씨 [2] | 희동이 | 2020.07.05 | 1895 |
5195 | 나의 신화_찰나#5-1 | 찰나 | 2014.05.11 | 1896 |
5194 | #14 화려하지 않은 고백(이정학) [2] | 모닝 | 2017.08.07 | 1897 |
5193 | #15 등교_정수일 [10] | 정수일 | 2014.07.20 | 18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