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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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토요일의 일이었다. 갑작스레 고장 난 컴퓨터를 어찌하지 못하고
결국 새 노트북을 사기로 마음 먹었다. 아내와 함께 한 대형 마트 내 전자제품 가게로 향했다. 미리 생각해 둔 모델이 있었기에 물건을 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았다. 마트에 들리기 전에 오랜만에 세차도 하기로 했다. 여러모로 기분
좋은 주말 오후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창원대로를
따라 마트로 향하는 길 곳곳에 녹색 조끼를 입은 경찰들의 모습이 더러 보였던 것이다. 무슨 행사라도
하나 싶었다. 창원대로에서 시청 방향으로 차를 돌리면 왕복 8차선이
나오는데 그 대로가 끝나는 지점에 마트가 있었다. 그 큰 길 한 가운데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도무지 신호가
바뀌지 않았다. 얼마 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며 대로를 횡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태극기 집회 사람들이었다.
당혹스러웠다. 집회라는 것이 서울 그것도 광화문이 아닌 주말 오후 한참
시간에 창원에서 태극기 집회라니. 대부분 고령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좀 더 젊은 사람들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더러 한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은
플랜카드와 태극기를 저마다 손에 들고 있었다. 집회 행렬은 생각보다 길었다. 바로 눈 앞에 마트가 보이는데 차가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자극적인
그들의 주장보다 그들이 내 앞 길을 막고 있다는 사실이 더 불편했던 찰나 경찰 수십 명이 어디론가 우르르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차에 타고 있던 일부 시민들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 시비가 붙은 것이었다. 경찰들은
그들을 갈라 놓았고 집회 참가자들의 시위는 잠시나마 더 격렬해졌다. 어쩔 수 없었다. 격한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우리도 먼 길을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평소라면 15분이면 도착 할 곳을 거의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도착했다. 새 노트북을 사고 점원이 새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동안 짬을 내 마트 식당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옆 자리에는 초로의 노부부가 다정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대화가
많지는 않았지만 티 나지 않게 할아버지를 배려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그들의 짐들
가운데 나는 하얀 깃대 두 개를 보았다. 태극기였다. 잘
말아서 가방 안에 넣어둔 태극기 위로 옷을 덮어 가렸지만 나는 분명 보았다. 깃대 손잡이 부분만 머쓱하게
살짝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집회를 마친 노부부가 허기를 달래러 마트에 들린 것 같았다. 나는 생각에 빠졌다. 무엇이 그들을 그 추운 겨울 날 거리로 나서게
했을까?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던 그들의 모습과 지금 내 옆에서 조용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 사이의 간극을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지금 긴 겨울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 여전히 봄은 오지
않은 듯 하다. 지난 겨울 한 집에 사는 자식들은 촛불집회에서, 그
부모들은 태극기 집회에서 추위에 떨었다. 그리고 그들은 집에 돌아와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화가 사라진 그 곳에는 공허한 고함소리만 가득하다. 나는 하나의 목소리가 사회 전체를 뒤덮는
것이 두렵다. 태극기 집회든 촛불 집회든 추운 겨울 우리가 거리로 나온 이유를 우리는 스스로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현재 또는 미래의
내 아이, 내 손주에게도 차분히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나서 내 아이, 내 손주가 하는 이야기에도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다면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장하라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태극기 집회 하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느꼈던 조롱과 비웃음을 떠올리며, 나는 과연 그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돌이켜 보았다. 말하는 것 보다 듣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다르지 않다. 우리의
과제다. 둘 모두의 역할을 우리가 해낼 때 보다 더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로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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