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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2일 14시 53분 등록

영국의 BBC는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블록버스터 다큐 영화로 제작하였다. 이미 타임,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일제히 칭기즈칸을 지목했던 바 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본력 있는 언론이 한 영웅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준 셈이니 고마운 일이었다.

이 [칭기즈칸 GENGHIS KHAN] 다큐영화 DVD를 여자 후배와 함께 보았다. 50분의 짧은 다큐를 보고 난 후에 후배가 던진 첫 마디는 “난 왜 칭기즈칸이 위대하게 보이지 않지?”였다. 많은 사람들은 칭기즈칸을 수백만 명을 학살한 야만인으로 기억한다. 마찬가지로 후배도 “잔인하다”는 단어로 칭기즈칸과의 첫 대면 소감을 표현했다.

다큐영화에서 칭기즈칸은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나의 동족은 숲속의 나무들처럼 많다. 나는 이 모든 사람들이 연한 고기를 먹고 아름다운 천막에서 살며 기름진 땅에서 말을 기르며 살도록 만들고 싶다.”
이를 위해 칭기즈칸은 정복한 국가로부터 지식을 배웠으며 법률 체계를 정비하였다. 또한, 자신의 유산을 글로 남기기를 원하였다. 아마도 후배는 이와 같은 독백 대사에서 드러나는 칸의 문명을 받아들이려는 태도와 사려 깊은 정책보다는 약탈과 살인을 일삼는 그의 폭력적인 정복 행위가 훨씬 충격적으로 다가왔나 보다.

칭기즈칸이 잔혹한 침략 행위를 일삼았던 것은 사실이다. 중앙아시아 분야에서 하나의 고전이 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의 저자인 르네 그루세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칭기즈칸은 인류의 재앙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왔다.”(p.361) 후배의 반응만 봐도 이 말이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역시도 칭기즈칸의 잔인한 침략 행위에 열(?) 받기도 했다.
고비 사막을 가로질러 중국 본토를 습격한 것은 역사상 가장 대담한 군사 행동이기도 했지만, 정복을 성공한 후에 몽골 군대의 약탈 행위는 역사상 가장 잔인한 장면이기도 했다. 13세기의 베이징은 인구 35만이 살고 있었던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북경 점령 후, 그들은 성 안에서 약탈과 방화, 겁탈로 한 달을 보냈다. 당시의 찬란했던 문명의 상징들은 모두 불타 버렸다. 일 년 뒤 베이징에 온 사신은 거리에 사람 기름이 진동했다고 전했다.

이런 류의 장면은 『칭기즈칸의 생애』를 읽으면서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3월 30일 몽골 군은 도시를 점령하여 주민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가질 수 없는 것은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에 몽골 군이 전시민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p.349)

칭기즈칸이 일으킨 침략은 분명 잔인함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은 본성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잔인한 인물이었던 것일까? 나는 그가 특별히 더 잔인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칭기즈칸의 생애를 읽은 모든 분들이 한 가지 척도로 그를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잭 웨더포드의 말처럼, 역사에서 위대한 역할을 한 인물은 식물 표본처럼 책 속에 깔끔하게 끼워서 보관할 수 없고, 이런 인물의 행동은 기차가 오고 가는 것처럼 구체적인 시간표에 따라 설명할 수도 없다. 나 역시 칭기즈칸에 대한 복합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때 떠오른 생각을 3가지 이유로 정리해 본다. 말하자면, 칭기즈칸을 야만인으로 몰아붙이는 이들을 향한 ‘칭기즈칸 변호문’인 셈이다.

첫째, 칭기즈칸을 현대 문명인의 척도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는 고상한 문자나 언어를 쓰는 교육을 받지 못했고, 합당한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 제도나 질서라고는 전혀 모르는 유목 문화에서 자라났다. 그는 걸음마보다 말타기를 먼저 배울 수밖에 없는 초원에서 태어났다. 초원의 법칙은 단 하나였다. 원하는 게 있다면 가지면 되는 것이었다. 다른 부족의 부녀자라고 하더라도 마음에 든다면 가지면 그만이었다. 그 균형을 지배하는 것은 힘의 법칙이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약탈하고 정복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복수심을 가졌다. 르네 그루세는 “복수는 부족에서 부족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유괴와 폭력이 되풀이되면서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고 썼다. (『칭기즈칸의 생애』p.88)

『칭기즈 칸』의 저자 라인홀트 노이만-호디츠는 “칭기즈칸은 초원의 법칙에 순응했고, 유목민과 정착 문화 민족 사이의 영원한 싸움의 법칙에 순응했다”고 했다. 르네 그루세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의 잔혹성이 어떤 본성적인 사나움보다는 주로 그가 처했던 환경이 어떤 투르크-몽골인들의 경우보다 더 거칠었다는 데에서 생겨난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결국, 사람은 시대와 문화의 산물이다. 몽골 군은 키에프 공이 항복하자, 그를 사형에 처하고 그의 군사들도 죽이고 말았다. 이 때 키에프 공을 널빤지와 양탄자에 짓눌려 죽였는데, 후세의 러시아 사가는 이를 보고 격분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몽골 인으로서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인다는 것은 왕후에게만 허용되는 ‘명예로운 죽임’이었다. 실제로 ‘안다’의 맹세를 나눈 차무하는 칭기즈칸에게 자신의 죽음이 피를 흘리지 않은 명예로운 최후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차무하는 칭기즈칸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뿐인 것처럼 이 땅의 지배자도 한 명 뿐일세. 친구여 나에게 피를 흘리지 않는 고귀한 죽음을 허락하게.”

몽골 군은 명예로운 죽임을 행하였다고 하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더 치욕스러운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칭기즈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칭기즈칸이 태어나서 자라난 환경과 초원의 법칙으로 지배되는 유목 부족의 문화로 그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몽골 군대가 정복한 도시마다 불태우고 약탈했던 이유는 그들이 잔인했기 때문인 동시에 도시 문명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 나는 르네 그루세의 말이 설득력 있게 들렸다. “슬픈 일은 이 유목민이 농경과 도시경제의 본질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동부 이란과 북부 중국을 정복하고 나서 그는 도시와 전답을 파괴하여 이 나라들을 초원으로 바꾸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칭기즈칸이 가공할 잔학 행위를 방치해 둔 것은 당시의 몽골 인 환경으로 미루어 유목 생활이 아닌 생활 형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이외의 방법에 의한 전쟁은 전혀 몰랐으며, 정착민의 토지는 약탈이나 학살, 인간 사냥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초원의 법칙이 지배하는 문화에서 거칠게 자라났다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 야만적인 일과 13세기의 몽골 부족들이 생각하는 야만적인 일은 일정 부분의 틈이 존재할 것이다. 그 틈을 메꾸는 것은 13세기 몽골 유목민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틈을 메꾼 후에라야 우리는 보다 정확히 칭기즈칸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나는 르네 그루세의 『칭기즈칸의 생애』를 읽고 칸에 대한 생각이 많이 교정되었다.

둘째, 지금도 칭기즈칸이 보여주었던 침략 행위보다 더 잔인한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칭기즈칸이 잔인하다고 말하는 후배에게 우리가 더 잔인할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초원의 법칙보다는 덜 야만적인 문화권에서 발생한 사건인 ‘광주학살’에 대한 얘기를 들려 주었다. 후에 나는 아예 책 한 권을 건네며 읽어보라고 했다. 강준만의 『리영희 한국현대사의 길잡이』였다. 이 책에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벌어진 참혹한 비극의 몇 장면을 싣고 있다.

최정운의 증언이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마음껏 모든 가능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며 무지막지하게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이번에는 박남선의 증언이다.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씹할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워커발로 할머니의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 이런 내용들은 이 책을 읽으며 너무 잔인하여 몸서리를 쳤던 내용들이다. 그래서 초서(베껴쓰기) 작업도 하지 못했던 구절들인데, 지금은 겨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더 잔인한 내용은 이 책의 135 페이지에 기록된 내용들이지만, 여기서는 그저 황석영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옮겨 적는 것으로 대신한다.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단 말이냐. 나는 일제 때에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 ․ 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다. 저놈들을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월남전에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 봤지만, 저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 저런 식으로 죽일 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 놈들을 죽여 버려야 해’ 하면서 오열을 터트렸다. 온 거리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칭기즈칸 부대는 자기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을 학살했다. 살인 도중에 그들의 처절한 절규를 직접 이해하지는 못했으리라. 언어라도 달랐을 터이니 말이다. 칭기즈칸은 적어도 자기 민족을 위해서는 선정을 베푼 정치가였다. 잭 웨더포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위해 새롭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르네 그루세는 칸은 질서와 선정에 대한 타고난 감각을 보여주었고 잔혹한 야만적 감정과 함께 어떤 마음의 고결함과 고상함이 있었다고 평했다.

그러고 보면, 칭기즈칸 부대보다 5 ․ 18 때의 공수부대의 잔혹함이 더하다. 자기 민족의 절규하는 언어를 모두 듣고 반응하면서도 저런 만행을 저지를 수가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흔히 폭력성을 절대적으로 나쁘다고 보지는 않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평가한다.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죽이는 것보다 자기 민족끼리 다투고 죽이는 것을 더 슬픈 일로 여긴다. 외계인을 침략하는 것보다는 지구인들끼리 치고 박는 것을 더 비극으로 친다. 그렇다면 낳아 주신 부모를 자기 손으로 살해하는 것보다 슬픈 일, 더 잔인한 행위가 있을까!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정말 잔인한 일일 것이다. 그것도 초원의 법칙은 야만이라고 규정하는 21세기에 말이다. 불행하게도, 지금도 아, 잔인하다! 라고 할 만한 일들이 종종 벌어지고 있다.

셋째, 나는 인간의 본성이 똥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칭기즈칸이 다른 사람보다 특히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세 번째 이유다. 사람의 본성이 똥이라고 생각하게 된 후, 나는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덜 받게 되었다. 물론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진실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람을 깊이 신뢰한다. 본성이 똥인 사람들이 신을 향하여, 혹은 자신이 믿는 가치를 향하여 성숙하고 선하여지려는 노력이 믿음직하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그 노력이 빗나가서 실망을 안겨 줄 때가 있지만, 실수를 하고 실망을 만들어내는 것은 나도 똑같다는 것을 안다.

사람의 본성을 무시한 발언은 너무 고상하고 이상적이다. 함께 칭기즈칸 다큐영화를 본 후배는 내가 건네 준 책을 읽고 꽤 충격을 받은 듯하다. 학교 다닐 때, 학생들이 시위를 해도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그저 순경들이 안쓰러워 보였다고 한다. 왜 시위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종종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말뿐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관심은 모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친한 사람에게는 아주 잘 한다. 때로 감동할 정도로 그의 섬김의 손길은 섬세하고 지극하다.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필시 어디서 주워듣고 마음에 들어 끌어안은 표현이었으리라. 나는 용기내어 솔직히 말했다. 이 명제는 당신을 잘 표현하는 명제가 아니라고. 그리고, 너무 고상하고 이성적이라고 말이다.

이 점에서 다산 선생님은 아주 인간답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또한 적당히 고상하다. 그래서 교훈적이다. 내 자식의 굶주림과 남의 자식의 굶주림을 똑같이 아파하는 것은 어찌 보면 위선이다. 인정과 실정에 반하는 지나친 고상함은 ‘사람의 길’이 아니다. 다산이 걸어간 길은 내 자식의 굶주림 때문에 남의 자식의 굶주림도 구원하려고 노력한 삶이었다. 부모로서 가슴 아픈 마음을 미루어 남의 부모의 아픔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박무영 선생은 이렇게 표현했다. “다산의 출발은 내 집의 생활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 정직함이지만, 그것은 ‘온 천하의 굶주림’을 책임지려는 태도로 발전한다.”

후배는 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해 주었다. 오히려 홀가분해진 표정이었고, 이렇게 말했다. “맞아요. 나는 우리 부모님을 다른 부모님보다 더 사랑해요. 어디서 주워듣고 좋아서 담았다고 말한 것이 직격탄이네요. 선배 말이 맞아요. 그냥 좋아서 한 말이지 제가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기분 나쁠 수도 있을 터인데, 잘 받아들이며 고마워하는 그가 기특하다.

인간의 본성을 외면한 발언은 너무 고상하다. 멋있게 들릴지는 몰라도 실효성은 없다. 인간의 본성은 거룩하거나 고상하지 않다. 그런 본성이 어떻게 학습되고 훈련되느냐에 따라 사람의 행동은 어떤 경향성을 갖게 된다. 초원의 법칙이 지배했던 칭기즈칸이 살았던 문화는 뺏고 빼앗는 것을 절대악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아니었다. 그들이 침략과 약탈의 경향성을 가졌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발로 차고 때렸던 적이 있었다. 집 안에서 내가 제일 강아지를 귀여워하던 터였기에 내가 생각해도 이해 못 할 일이다. 지금 이렇게 적기엔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아마도 애완견을 소중히 다루기보다는 차고 때리는 문화권에 살았더라면, 나도 폭력적인 개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 섬뜩하다.

이제, 글을 정리한다.
한 인간이 그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대 문명의 척도로 칭기즈칸의 잔인함을 측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지금도 칭기즈칸과 그의 부대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잔인한 행위들이 종종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오히려 이 시대에는 칭기즈칸의 잔혹함만 있고, 칭기즈칸의 용기는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인간의 본성이 똥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조금 다른 시선으로 인간을, 그리고 칭기즈칸을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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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07.07.02 12:09:32 *.211.61.150
사람은 시대를 잘 타고 나야 한다는 말을 한다.

만약 희석이 조금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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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7.02 20:30:45 *.72.153.12
광주 사건을 비디오로 처음 봤을 때, 난 구역질을 하고 그것이 생각나서 먹을 수 없었다. 난 그때 내가 인간인 것이 싫었다.

인간이란 참 이상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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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7.03 00:56:05 *.70.72.121
희석아, 나는 인간의 본성이 善과 仁 을 기본으로- 喜,愛, 怒, 樂 ...이라고 생각하는데... 똥도 그렇지 않을까? 너가 아빠가 되면 이해할 걸. 아가가 말야 전능하신=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거. 구유에 누우신 아기가 희석이 아기적 너의 모습과 다를까? 이 다음에 너의 분신이 생기면 꼭 지켜봐.

자라면서 좋은 것만 배울 수 없고, 본래의 본성을 지킬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노라 그리 외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알기에 우리가 더 나아지자고 여기 모여 함께 공부하는 게 아닐까? 신의 본성은 인간이 아닐까? 예수가 사람이 되신 이유가 뭘까? 인간과 신이 함께 하자는 것이 아닐까?

그럼 예수님이 바로 똥이네. 그럴 수도 있겠다. 날마다 나의 불필요함을 걸러내는 똥, 나의 찌꺼기로 배설 되는 똥, 그리하여 맑은 것을 추구해나가라는 위대한 똥,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섬세한 정수/온 세상의 혼/아트만/브라마/바로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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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7.03 02:05:42 *.48.41.28
승자에 대한 패자의 두려움은 그 속도에도 있었다고 보는데 몽골군이 너무 빠른 속도로 이겨 나갔고 그 놀라움이 공포로 변하면서 많은 말들이 있었다고 본다. 사실 잔인한 것으로 치자면 그보다 더한 것들도 어느 나라에서나 존재하지. 초원 삼림문화와 정주문명의 충돌, 서로 이해할 수 없어 부딪치는 장면들이 많았어. 진지한 글, 잘 읽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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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
2007.07.03 07:25:55 *.134.133.16
이렇게 제 생각을 표현한 것은 처음이예요. 갈등을 불편해하는 제 성향 때문에 저는 제 생각을 잘 표현하지 못하지요. ^^ 그런데, 어디서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형, 누나들이 무척이나 편해진 것 같고 성장하고 싶다는 욕심이 용기를 만들어낸 것 같네요. 제 생각을 교정하고 더 나은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싶었거든요. 고마워요. 형, 누나들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된답니다. 진심으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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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7.03 13:45:10 *.114.56.245
용기 있어서 참 좋다. 난 지나치게 무서우면 피해 버리는 경향이 있거든 .'칭기스칸 변호문' 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가진다. 다가오는 주말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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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2007.07.04 11:04:04 *.47.222.18
핑게 없는 무덤은 없다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현운님의 생각에 절대적으로 동조하는 입장이지만 그전에 절대 선이라는 부분이 존재하는지 궁금하네요. 성인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인간이 지켜야 할 무엇인가가 있겠죠. 누구의 잣대인지 몰라도요.
어쩌면 말씀하신것이 문화이체라는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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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수
2007.07.06 10:05:49 *.77.121.49
현운님의 새로운 시도 잘 보았습니다.
구소장님의 '사람에게서 구하라'에도 표현되었듯이,
내 안에도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는 것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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