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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5일 11시 33분 등록

노자 노덕경과 함께하는 뚱냥이의 놀자 도덕경

 

1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 도란 무엇인가?

 

라고 할 수 있는 는 영원한 가 아닙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하늘과 땅의 시원.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온갖 것의 어머니

 

그러므로 언제나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을 볼 수 있고,

언제나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근원은 같은 것.

이름이 다를 뿐 둘다 신비스러운 것.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입니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 사람이나 우마차가 다니는 그러한 물리적인 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를 아십니까를 연신 내뱉는 사이비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도리를 일컫는 것일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도덕경을 다시 손에 쥐고 깊게 읽기를 시작하며 펼친 1장은 나에게 너무나 큰 물음을 준다. 과연 란 무엇일까? 그리고 1장에서 말하고 싶은 노자의 생각은 무엇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려보았다.

 

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의 측면과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의 측면이다. 이 두가지 모두 이름과 형태가 다를 뿐 아주 신비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의 도는 무엇일까? 나는 존재하는 나로 정의를 내렸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존재하는 나의 형태를 가진 도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장성한이라는 한 인간으로 무형의 도를 말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은 나를 장성한으로 안다. 그렇다면 내가 장성한인가? 나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장성한은 하나의 말에 불과하다. ‘장성한이라는 단어로 온전한 나’, ‘존재하는 나를 완벽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나를 장과장이라 불렀고, 변경연에서는 뚱냥이라 부른다. 즉 장성한, 장과장, 뚱냥이 등은 그저 온전한 나를 만나는 문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노크 정도 일수도 있다. 부모님은 나를 아들이라 부르고, 누나들은 동생이라 부른다. 이 호칭에도 온전한 나는 없다. 아들이라는 단어가 나의 모든 것을 나타내거나, 동생이라는 단어가 나의 삶을 대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온전한 나에게는 어떠한 이름(표시) 혹은 호칭을 붙일 수 없다. 그냥 나다. 장성한도 장과장도, 아들도 아니다. ‘장성한은 어르신들을 공경한다. 그들이 살아온 삶을 존중한다. 그렇기에 마음으로 그분들을 배려해야 된다는 신념이 있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를 탈 때 어르신들은 동작이 느리다. 그 순간 나는 다른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본다. 답답함과 짜증이 역력하다. 어르신보다 상대적으로 젊은 그 사람들의 태도가 실망스럽다.

 

하지만 약속시간이 촉박하거나, 급히 이동을 해야 할 때 장성한은 어떨까? 삶의 8할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어르신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지만, 나도 이럴 때면 나도 모르게 좀 비켜 주시지, 조금만 빨리 움직여 주시지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채운다.

 

그러면 장성한은 나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르신을 공경하는 사람인가? 아니다. 내 마음의 8할이 그렇다고 할지라도 2할의 위선도 있다. ‘장성한이라는 단어로 온전한 나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똑 같은 마음으로 살 수가 없는 장성한인데 장성한은 이렇다정의를 내릴 수 있는 해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 도는 온전한 나’, ‘존재하는 나가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이 그것이고 이것이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무의 존재. 그것이 각자 인생을 살아가는 라고 생각한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는 궁극의 실재, 절대적 실재는 표현의 한계를 초월한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나는 이 표현의 한계를 초월한다.

 

그렇다면 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떻게 표현되어 지는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어떻게 표현할 묘사가 없고, 표현되어지는 말도 내가 아니다. ‘나는 너를 이렇게 생각해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생각이 솟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울함이 생기는 것이고 언쟁이, 나아가 감정적 대립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감정적 대립을 회피하기 위해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을 멀리하고 안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궁극의 실재, 절대적 실재는 존재하는 나. 나 자신도, 타인도 나를 딱 잘라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정의할 수 없다. 그렇기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신비한 존재다.

 

그렇다면 도대체 장성한, 뚱냥이, 아들, 동생이라는 옷을 입은 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이것은 궁극의 실재이며, 무명(無名)인 나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절대적이며 신비적인 실재인 존재하는 나에게 다양한 이름들이 붙여진다. 그 순간 현재, 여기,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유명(有名)’, 삶과 삶이 만나는 관계의 세계에 사는 내가 된다. 그래서 노자는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하늘과 땅의 시원.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온갖 것의 어머니

 

존재하는 나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하늘이며 땅이며,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초월한 실재이다. 여기서 어머니를 개인적인 해석으로 관계로 보고 싶다. 어머니는 자식과 가정의 기반이며, 관계지향의 대명사다. ‘존재하는 나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에 놓은 유()가 되는 것이다. 변경연의 뚱냥이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최고의 경지는 ’ ‘가 통합된 존재가 아닐까? 노자가 말한 구()가 결국 삶의 지침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욕심이 없으면 그 신비함을 볼 수 있고,

언제나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남을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근원은 같은 것.

이름이 다를 뿐 둘다 신비스러운 것.

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입니다

 

 

장성한으로서 보여줘야 할 것, 즉 친구들에게 비춰지고 싶은 나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한다. 이름만 대도 좋은 기업에 다녔었고, 그렇기에 술값도 척척 내고, 마음은 썩어 문드러져 가는데 아닌 척하고 뭐든 다 하겠다는 장성한’.

 

정말로 일이 좋아서 하는 것인지? 돈을 주니깐 하는 것인기? 아니면 더 잘하면 인정을 받을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인가? 목적을 알지도 못하면서 하얗게 일에 불태웠던 장과장’.

 

불효를 저질렀으니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공해야 된다는 강박감과 조급함을 지닌 아들.

부끄럽지 않은 동생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려고 했던 남동생

 

우선은 이 모든 것을 비우고 궁극의 실재는 존재하는 , 무의 나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욕심을 버려야 한다. 여기서 욕심은 무엇인가? 남을 의식한 성취면서 움직임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며 그것을 최선이라는 것으로 포장한 못된 근성이다.

 

로 돌아가 새로운 로 이름 붙여진 가 되는 것. 그것을 내 삶의 이정표로 삼도록 하자. 둘의 근원은 갔다. 어쨌든 시작은 하나였다. 다시 어떻게 조합을 하느냐에 따라 신비로운 문이 열릴 것인지? 아니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똑 같은 문이 열릴 것인지 결정될 것이다.

 

이제 할 일이 정해졌다. 표현할 수 없는 에 이름을 달고, 표현 되어야 한다. 그 이름은 온전한 나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하며, 그 표현은 내 존재가 고스란히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 동일시 되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더 많은 고민과 더 많은 생각과 사색을 통해 순수한 를 만들고 내 스스로가 그때는 인정할 만한 를 찾아 라는 도를 완성시키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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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1 10:21:30 *.148.27.35
아, 머리 터지는 글이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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