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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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작을 위한 마무리 – 화수미제
성질 급한 나는 항상 책의 마지막 페이지부터 본다. 엔딩이 궁금한 것이다. <주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64괘 중 제일 먼저 들여다 본 것은 마지막 괘, ‘화수미제(火水未濟)’였다. ‘미제(未濟)’는 직역하면 ‘아직 건너지 않았다’는 뜻으로 ‘미제사건’이 바로 여기에서 온다. <주역>의 마지막 괘가 ‘미제’라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걸까? 이러한 궁금증과 함께 들여다본 ‘화수미제’의 첫 괘사는 아래와 같다.
未濟 亨 小狐 汔濟 濡其尾 无攸利 (미제 형 소호 홀제 유기미 무유리)
미제는 형통하니(亨), 작은 여우(小狐)가 거의 건너서(汔濟) 그 꼬리를 적심이니(濡其尾), 이로울 바가 없다(无攸利).
작은 여우가 내(川)를 ‘거의 건너서’ 꼬리를 적셨다고 하니 ‘다 된 밥에 재가 뿌려진’ 상태라 하겠다. 이로울 것이 없다. 왜 작은 여우일까? 여우는 꾀가 많은 동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작은 여우는 경험의 부족으로 노련미는 없을 수 있겠다. 여차 저차 하여 내를 건넜으나 마지막에 이르러 안타깝게도 꼬리를 적시고 만다.
무슨 일이든 ‘거의 다 되었다’, ‘끝이 보인다’ 싶을 때 안도와 함께 방심의 여지가 생긴다. 끝이 보일수록 잔꾀를 부리지 말고 초심으로 돌아가 우직하게 갈 길을 가야 한다. 목적지가 거의 다가왔을 때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장애물은 없지만 마음 속 조급함이 여우의 꼬리를 적시게 한다.
‘화수미제’를 다시금 읽고 있을 때엔 구정 연휴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아이들도 3월이면 새 학기가 시작된다. 음력으로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는 주간이기도 했다. 나 역시 작년 4월부터 시작한 과정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화수미제’와 함께 음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 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생각하며 괘사를 좀 더 살펴보았다.
曳其輪 貞吉 (예기륜 정길)
그 수레를 끄니 결국 길하다.
첫 괘사에는 내를 건너는 여우만 언급했으나 이번에는 수레가 등장한다. 이쯤 되면 작은 시내가 아니다. 내를 인생길로 비유하자면 수레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재능, 기술, 재산 등이 실려 있을 것이다. 이렇듯 가진 것을 총 동원하여 변화와 발전을 위한 내를 건너는 모험을 하니 결국 길하다는 것이다.
未濟 征 凶 利涉大川 (미제 정 흉 리섭대천)
미제의 상태로 계속 나아가면 흉하니, 큰 내를 건넘(涉大川)이 이롭다.
<주역>에는 ‘리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섭대천(涉大川), 즉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유리하다. 꼬리를 적셨건, 다된 밥에 재를 뿌렸건 아직 건너지 못한 ‘미제’의 상태를 지속하면 흉하다. 행여 마무리에 흠이 있었다 하더라도 잘 추스리고 용기 내어 큰 내를 건너는 모험과 도전을 감행하는 것이 이롭다고 <주역>은 말한다.
변화와 발전을 위한 길에는 깊고 얕은 또는 짧고 긴 여러 형태의 냇물이 놓여 있을 것이다. 내를 건널 때마다 어떤 부위도 적시지 않고 완벽하게 건널 수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꼬리를 적시기만 할 것이 아니라 수레에 실린 물건 중 아끼던 것이 물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주역>은 그렇다고 상심하거나 낙담하거나 지레 포기하지 말고 더 큰 내를 건너는 모험과 도전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한다.
<주역>의 마지막 괘가 아직 건너지 않은 ‘미제’로 끝나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사계절이 그러하듯 인생 역시 순환한다. 추운 겨울 끝에는 봄이 오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3월의 입학식을 앞둔 2월의 졸업식에는 ‘졸업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축사가 매해 되풀이 된다.
끝이 보일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자. 방심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자. 그러나 행여 꼬리를 적실지라도 수레를 끌고 변화와 발전을 위해 더 큰 강을 건너자. 새로운 시작을 앞둔 모두의 마무리를 축하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