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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9일 11시 55분 등록


어렸을 때 나는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처음 보는 사람과는 부끄러워서 말도 못 했다. 아직도 작은 엄마는 우리 집에 처음 인사 오던 날, 엄마 등 뒤에 숨던 여섯살 꼬마아이였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놀리곤 한다. 반 아이들 앞에서 발표라도 하려면, 시작도 하기 전에 얼굴이 빨개지고 목소리가 떨려서 얼어붙기 일쑤였다. 저래서 사람 구실을 하고 살수는 있을지, 엄마가 걱정이 클 정도였다.

어쩌다가 중학생 때 반에서 가장 활발하고 끼가 많던 친구랑 단짝 친구가 되면서, 불치병인줄만 알았던 나의 부끄러움증은 조금씩 깨졌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방송반에 들어가면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방송을 진행하고, 강당 무대에서 연극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줍음은 많이 사라졌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스스로 동아리 회장을 하겠다고 손을 들 정도로 부끄러움이 없어졌다. 당당함과 자신감을 부추기는 트렌드를 업고 나는 점점 더 수줍음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어느새 너무 뻔뻔한 거 아니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소리를 들을 정도까지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수줍음이 사라진 건 친구와 동아리 활동 등의 영향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러운 변화인 것도 같다. 20대 때 나의 뻔뻔함을 지적하던 친구들도 어느새 부끄러움이 없는 아줌마, 아저씨가 되어있으니까.

 

이제는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는 물론 일정이 맞으면 같이 여행도 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여기에서 제일 멋있어라는 착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무대에서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부끄러움이 없어졌지만, 그런 내게도 아직까지 부끄러움의 영역으로 남았던 것은 글쓰기”였.

상상력과 감성이 부족해서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일은 간접 경험이라도 잘 쓰지 못한다. 나의 삶과 생각, 느낌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려니 부끄러운 생각부터 들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발가벗겨지는 느낌이었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척, 잘난 척 꾸미고 당당할 수 있지만, 글쓰기는 내면을 들여다보고, 드러내는 일. 가꾸지 못한 내면의 빈곤함을 들킬까봐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난 10개월간 나를 드러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끄러움에 무뎌지기도 했지만,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에 부끄러움이 사라져 갔다. 어쩜 내가 이런 글을 썼지, 하고 우쭐해지기도 했다.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으면서 다시 뻔뻔함이 되살아났다. 이제는 뻔뻔함이 불치병인 듯 하다.

부끄러움은 무뎌져갔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좋은 글을 보는 눈이 키워져서인가. 다행히도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이제서라도 깨닫고 있다. 특히 최근에 쓴 글은 너무도 부끄러워서 당장 삭제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냥 놔두려고 한다.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했고, 후회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떠올리기 위해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언젠가 당당하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냥 둘 거다.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다. 그 애들도 나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참 좋겠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책머리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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