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瀞 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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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한 브레인스토밍
<위대한 나의 발견>, 그 도입 부분을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강점과 약점, 재능에 대한 내 개인적인 생각들을 버려야겠구나. 왜냐하면, 내 인생은 언제나 약점을 보완하고 단점을 극복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졌었기 때문에 내 생각과 정 반대되는 내용을 받아들이려면 나를 일단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책 제1장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뭐야, 나 인생 잘못 살았어?’ (갸우뚱, 긁적긁적)
그러면서 <위대한 나의 발견>은 나로 하여금 또다시 과거를 여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 좋은 기억이나 힘들었던 경험 위주가 아닌 나의 강점, 나의 재능.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내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했었는지 그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아프리카에서 6살 때, 흑인 아이들을 모아 놓고 ‘나비야’를 불러 주며 나의 율동을 따라 하게 했던 기억. 프랑스에서 학교 다닐 때, 합창부에서 활동했던 기억. 벨기에 한인 교회에서 노방전도 솔로를 도맡아 했던 기억. 귀국하고 고등학교에 편입한 첫 날 아이들의 ‘노래해!’라는 요구에 못 이겨 잘 부탁한다는 말 대신 노래로 아이들의 관심을 끌었던 기억. 대학생이 되어서는 노래방에서 마이크 한 번 붙잡으면 놓고 싶지 않아했던 기억. 그리고 언제나 음악 과목 점수는 상위권이었다.
그런 반면, 초등학교 때 나의 평균점수를 깎아먹었던 과목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미술이었다. 그렇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림 그리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 오죽하면 따로 미술 과외까지 받아봤을까. 그러나 아무리 과외를 하고 그림 그리는 연습을 해도 나의 미술 실력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도 잘 그리고 싶은 마음에 꾀를 내어 이미 그려져 있는 그림을 통째로 외워서 그것을 재생시키곤 했었다. 내가 그릴 줄 아는 그림이라고는 암기되어 내 머릿속에 박혀 있는 그 그림밖에는 없었으니 미술 과목은 언제나 최하위권이었다.
나는 지는 것을 싫어한다. 아마 그래서 더 살면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그리도 발버둥을 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적당히 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보다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서 잘해보자 라는 생각이 완강했었나 보다. 운동을 해도 게임을 해도 오락을 해도 이겼을 때의 희열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은 아마도 승부욕이 강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몸이 유연했다. 그래서였을까.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운동 신경이 발달한 편이였고, 구기종목 웬만한 운동은 다 즐기는 편이다. 그렇다고 잘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어쨌든 재미를 느낀다. 나이가 들어서는 우연한 기회에 처음으로 째즈댄스를 접하게 되었고, 벌써 4년 째 꾸준히 해 오고 있는 것을 보면 좀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던 게 후회되기도 하다. 나를 많이 아껴주셨던 째즈댄스 교수님이 있었는데, 그 분이 말씀하기를 보통 발레리나들이 엄청난 노력 끝에 만들 수 있는 발등의 볼록한 뼈가 나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만들어져 있다고 하셨다. 머리로 하는 공부 말고, 몸으로 하는 것도 발전시킬 기회가 있었다면 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하곤 한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즐긴다. 어릴 적에는 내성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말보다는 글이 편했고, 친구들에게 자필로 장문의 편지를 써서 건네주는 것을 행복해 했었다. 새로운 단어를 배울 때면 그것을 써먹어 보기 위해서라도 글을 썼고, 외국 학교에서 에세이 쓰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창작 활동처럼 다가왔었다. 각종 논술 경시대회에서도 입상했었고, 지금 생각해보니 학교 신문에 글을 기고한 적도 있었다. 문득 문득 글이 쓰고 싶을 때는 홈페이지에 자주 끄적거리고, 연구원 생활을 하는 지금 글 쓰는 것이 매우 즐겁다.
나는 매사에 칭찬 받고 싶어한다. 칭찬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만은 나는 조금 유별난 듯싶다. 왜냐하면, 잘 못하고 있을 때조차 칭찬 받고 격려 받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못하고 있을 때 왜 그렇게 못하냐는 소리를 들으면 더 못하는 타입이다. 잘 할 수 있다고 응원해주고 북돋아줘야 발전하는 사람인가보다.
나에게 있어 생각하고 고민하고 탐구하는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어렸을 적부터 밤 12시 이전에 잠들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항상 그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에는 이러지 말아야지 아니면 그렇게 하길 참 잘했어. 라는 식으로 나의 생각과 행동과 말을 평가하는 나만의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 나는 내가 집중하고 있는 곳에서 시선을 떼는 게 쉽지는 않다. 같은 실수 반복하는 것을 많이 싫어한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하는 경향이 있다. 겉과 속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것,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관심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에는 무관심하고 그러한 것들은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단, 하고 싶어하는 일에 있어서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경향이 있다. 하기 싫은 것을 참고 억지로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그냥 놓아버리고 만다. 책임감 강한 나이지만, 나의 호기심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느끼지 못하나 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정말이지 정치적인 동물은 못 되는가 보다.
새로운 곳에 가보는 것,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에 대해 쾌감을 느낀다. 단순히 가봐야지, 먹어봐야지, 해봐야지 하고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일단 발동이 걸리면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주의 타입이다. 걱정하거나 겁이 많은 게 아니어서 나쁘게 말하면 일단 저지르고 보자-주의였다. 사실, 그래서 이룬 것도 많았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항상 할까 말까 망설일 때는 그냥 하는 쪽을 택했던 것 같다. 하고 후회하는 것이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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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나의 발견>, 그 도입 부분을 읽으며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강점과 약점, 재능에 대한 내 개인적인 생각들을 버려야겠구나. 왜냐하면, 내 인생은 언제나 약점을 보완하고 단점을 극복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졌었기 때문에 내 생각과 정 반대되는 내용을 받아들이려면 나를 일단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책 제1장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뭐야, 나 인생 잘못 살았어?’ (갸우뚱, 긁적긁적)
그러면서 <위대한 나의 발견>은 나로 하여금 또다시 과거를 여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 좋은 기억이나 힘들었던 경험 위주가 아닌 나의 강점, 나의 재능.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내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했었는지 그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했다. 아프리카에서 6살 때, 흑인 아이들을 모아 놓고 ‘나비야’를 불러 주며 나의 율동을 따라 하게 했던 기억. 프랑스에서 학교 다닐 때, 합창부에서 활동했던 기억. 벨기에 한인 교회에서 노방전도 솔로를 도맡아 했던 기억. 귀국하고 고등학교에 편입한 첫 날 아이들의 ‘노래해!’라는 요구에 못 이겨 잘 부탁한다는 말 대신 노래로 아이들의 관심을 끌었던 기억. 대학생이 되어서는 노래방에서 마이크 한 번 붙잡으면 놓고 싶지 않아했던 기억. 그리고 언제나 음악 과목 점수는 상위권이었다.
그런 반면, 초등학교 때 나의 평균점수를 깎아먹었던 과목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미술이었다. 그렇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림 그리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 오죽하면 따로 미술 과외까지 받아봤을까. 그러나 아무리 과외를 하고 그림 그리는 연습을 해도 나의 미술 실력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도 잘 그리고 싶은 마음에 꾀를 내어 이미 그려져 있는 그림을 통째로 외워서 그것을 재생시키곤 했었다. 내가 그릴 줄 아는 그림이라고는 암기되어 내 머릿속에 박혀 있는 그 그림밖에는 없었으니 미술 과목은 언제나 최하위권이었다.
나는 지는 것을 싫어한다. 아마 그래서 더 살면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그리도 발버둥을 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적당히 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보다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서 잘해보자 라는 생각이 완강했었나 보다. 운동을 해도 게임을 해도 오락을 해도 이겼을 때의 희열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은 아마도 승부욕이 강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몸이 유연했다. 그래서였을까.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운동 신경이 발달한 편이였고, 구기종목 웬만한 운동은 다 즐기는 편이다. 그렇다고 잘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어쨌든 재미를 느낀다. 나이가 들어서는 우연한 기회에 처음으로 째즈댄스를 접하게 되었고, 벌써 4년 째 꾸준히 해 오고 있는 것을 보면 좀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던 게 후회되기도 하다. 나를 많이 아껴주셨던 째즈댄스 교수님이 있었는데, 그 분이 말씀하기를 보통 발레리나들이 엄청난 노력 끝에 만들 수 있는 발등의 볼록한 뼈가 나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만들어져 있다고 하셨다. 머리로 하는 공부 말고, 몸으로 하는 것도 발전시킬 기회가 있었다면 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히 하곤 한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즐긴다. 어릴 적에는 내성적인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말보다는 글이 편했고, 친구들에게 자필로 장문의 편지를 써서 건네주는 것을 행복해 했었다. 새로운 단어를 배울 때면 그것을 써먹어 보기 위해서라도 글을 썼고, 외국 학교에서 에세이 쓰는 것이 내게는 최고의 창작 활동처럼 다가왔었다. 각종 논술 경시대회에서도 입상했었고, 지금 생각해보니 학교 신문에 글을 기고한 적도 있었다. 문득 문득 글이 쓰고 싶을 때는 홈페이지에 자주 끄적거리고, 연구원 생활을 하는 지금 글 쓰는 것이 매우 즐겁다.
나는 매사에 칭찬 받고 싶어한다. 칭찬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만은 나는 조금 유별난 듯싶다. 왜냐하면, 잘 못하고 있을 때조차 칭찬 받고 격려 받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못하고 있을 때 왜 그렇게 못하냐는 소리를 들으면 더 못하는 타입이다. 잘 할 수 있다고 응원해주고 북돋아줘야 발전하는 사람인가보다.
나에게 있어 생각하고 고민하고 탐구하는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어렸을 적부터 밤 12시 이전에 잠들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항상 그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에는 이러지 말아야지 아니면 그렇게 하길 참 잘했어. 라는 식으로 나의 생각과 행동과 말을 평가하는 나만의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 나는 내가 집중하고 있는 곳에서 시선을 떼는 게 쉽지는 않다. 같은 실수 반복하는 것을 많이 싫어한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하는 경향이 있다. 겉과 속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것,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관심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에는 무관심하고 그러한 것들은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단, 하고 싶어하는 일에 있어서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경향이 있다. 하기 싫은 것을 참고 억지로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그냥 놓아버리고 만다. 책임감 강한 나이지만, 나의 호기심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느끼지 못하나 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정말이지 정치적인 동물은 못 되는가 보다.
새로운 곳에 가보는 것,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에 대해 쾌감을 느낀다. 단순히 가봐야지, 먹어봐야지, 해봐야지 하고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일단 발동이 걸리면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주의 타입이다. 걱정하거나 겁이 많은 게 아니어서 나쁘게 말하면 일단 저지르고 보자-주의였다. 사실, 그래서 이룬 것도 많았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항상 할까 말까 망설일 때는 그냥 하는 쪽을 택했던 것 같다. 하고 후회하는 것이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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