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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26일 09시 39분 등록

안녕하세요.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결혼한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멋진 명절을 보냈습니다. 이번 편지는 저의 명절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명절을 전후로 지난 2주 동안, 제 블로그의 방문자가 급증했습니다. 평소에 조용한 블로그인데 갑자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게 궁금해서 방문분석과 유입경로를 찾아봤습니다. 검색어 1위로 ‘시댁에 가기 싫어’가, 조회 수 1위를 기록한 게시물은 지지난주에 보내드린 ‘가족처방전-명절에 시댁에 가기 싫어요’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게시물을 읽은 것뿐인데, 참 이상하게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기운이 차오르기 시작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싶어서 힘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개기자!”
선호빈 감독의 첫 책 <B급 며느리> 표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졌습니다. 
‘만국의 며느리여, 단결하라!’
B급 며느리 김진영 씨만큼 용감하진 못하지만, 저도 한번 개겨보기로 했습니다.


명절날 새벽의 부엌은 군대 내무실을 방불케 합니다. 시어머니는 부엌의 총 사령관입니다. 시어머니 포함 다섯 명의 10대 며느리와 저와 동서(사촌 시동생의 처) 두 명의 11대 며느리, 총 일곱 명의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의 지휘 하에 좁은 부엌에서 우왕좌왕합니다. 시어머니의 지시 사항은 떡국 위에 놓을 계란 지단의 개수나 고명으로 쓰는 김의 바삭한 정도에까지 미칠 만큼 디테일하며 엄격합니다. 그때그때 어머니의 마음 상태에 따라 요구 사항이 달라져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함정이 있습니다. 요나스 메카스의 다큐멘터리 <영창>을 반복 재생한 것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못한다! 45년 했으면 됐다!”

명절 제사를 지내고 남자들은 모두 성묘를 가고 여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쉬고 있을 때, 느닷없이 시어머니께서 선언하셨습니다. 숙모님들을 불러 작전 회의를 하셨습니다. 저는 부엌에서 혼자 혼란스러웠습니다. 부엌의 총사령관으로서, 곳간 열쇠의 주인으로서, 가부장제에서 가장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시어머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제가 가임기가 지나기 전까지 ‘아들만 낳는다면’ 이 모든 권한과 권력을 네게 주겠노라 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남녀차별과 여성혐오가 자연스러운 시댁에서 여성이지만 여성이 아닌 위치에 있는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종손’의 어머니였습니다.


“제사는 이제 다 없앨란다.”

명절이 지나고 며칠 후에도 어머니의 선언은 변함없었습니다.

“니네 시아버지랑 싸우려면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일 년 쯤 걸리겠지. 그래도 이번엔 진짜로 없앨란다. 니도 그리 알고 있으라.”


결혼한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어머니의 진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가볍고 신난 목소리, 앞으로 닥칠 새로운 변화에 들뜬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또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 동안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시어머니께서 좋아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당신께서도 늘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실상 권력의 핵심은 젠틀맨이자 호인인 아버님이었던 겁니다.


“이제 종손의 자리에서 내려오시지요.”
“이제 종손부의 자리에서 내려오시지요.”

퇴근 후 남편과 축배를 들었습니다.


“이제 민주적인 가족 문화를 만들어 봅시다!”


그 동안 종손이나 종손부로서 저희 부부가 따로 더 하는 일은 없었지만, 양 어깨를 내리누르는 부담감에 시달린 건 사실입니다. ‘때가 되면 이 모든 문화를 엎어버리리라’는 마음으로 버텼던 겁니다. 시어머니께서 저와 같은 생각을 품고 살아오셨다니 너무나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처음부터 서로의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며 민주적인 가족 문화를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결혼한 지 45년 만에 진심을 말씀해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어머니께서 이제라도 공동체를 이끄는 구성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진정으로 살고 싶었던 삶을 살게 되길 바랍니다.


***


격주 월요일에 발송하는 마음을 나누는 편지 ‘가족처방전’은 필자와 독자가 함께 쓰는 편지입니다. 가족 관계가 맘대로 되지 않아 고민하고 계시다면 메일로 사연을 보내주세요. 마음을 다해 고민하고 작성한 가족처방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김정은(toniek@naver.com)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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