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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5일 10시 37분 등록
나만의 공간, 출퇴근 전철



요즘 아내가 <며느리 사표>(영주, 사이행성)라는 책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퇴근한 저를 볼 때마다 <며느리 사표>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이 책 정말 대단해! 그뤠잇! 대가족 장남의 아내이자 며느리로 살아온 저자가 5년이 넘게 조금씩 돈을 모아 2천만원을 만들어. 그리고 방을 하나 얻지. 아침마다 남편과 자녀들을 회사와 학교로 보낸 후에 남몰래 조용히 자신만의 방으로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제서야 자신만의 인생을 처음으로 느꼈다는 거야!”

밤 9시가 다 된 시간, 퇴근하여 집에 들어와서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 부엌 부뚜막에 올려진 이름 모를 과자를 하나 입에 집어 넣고 우물거리던 순간이었습니다. 아내가 저를 보며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아! 당신에게도 그런 공간 하나 있어야 하는데!”

순간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보았습니다.

“나에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고? 이게 무슨 이야기야?”

아내가 목소리 톤을 조금 높이며 대답합니다.

“당신은 직장인이잖아!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당신이야. 자신만의 공간에서 휴식도 하고 충전도 할 수 있는 시간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겠어? 당연히 당신이지!”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나만의 공간은 어디인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이 그저 몸 가는 데로 마음 가는 데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였던가? 금방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내 답을 찾았습니다.

“나도 그런 공간 있어”

“어딘데?”

아내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묻습니다.

“출퇴근 전철이야. 시도 읽고, 책도 읽고, 인터넷 서핑도 하고, 음악도 듣고, 글도 쓰고, 다음 글 쓸 주제 고민도 해보고. 전철 이야말로 나에게 자유로운 공간이야.”

전철이 저에게 주는 의미를 설명하려면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회사 매각과 구조조정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을 느끼던 2012년 초, 불안한 마음을 카페에서 아내에게 털어놓았던 날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 회사에서 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으로 숨통이 조여오는 것 같던 날들이었습니다. 주말 오후, 카페에서 커피잔을 앞에 놓고는 아내에게 고백했습니다. 회사는 조만간 매각될 것 같고 구조조정이 있을 것 같다고, 이 모든 상황이 진실로 두렵다고 고백했습니다. 저의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내를 처음 만났던 2000년 이후 처음으로 아내에게 두려움에 떠는 저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다 들은 아내는 이야기 했습니다.

“중요한 것을 찾지 말고 소중한 것을 찾아야 해요. 그러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중요해 보일 거예요.”

며칠동안 아내의 말이 제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2012년 2월 7일, 출근 지하철에서 처음으로 블로그를 썼습니다.


<중요한 것보다 소중한 것 찾기>

중요한 것을 찾지 말고 소중한 것을 찾아야해요. 그러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중요해 보일 거예요. 아내가 엊그제 일요일 저녁 커피를 마시며 해준 말이다. 하루하루 중요한 것을 찾아 다니며 소진되어가는 내게 맑은 물 한잔 같은 가르침이었다.

하늘의 구름은 잡을 수 없지만 내 옆 우물에 깃든 구름을 보며 우물물을 길을 수도 있고 시를 쓸수도 있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을 게다.

파주 운정(雲井)에서 서른 아홉 인생을 시작하였다. 중요한 것 찾기보다 소중한 것을 찾아 이 블로그에 기록해보리라.

2012년 2월 7일 08시 01분
(https://blog.naver.com/august0909/70130708167)


그 날 이후 매일 매일 출퇴근 전철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블로그를 열어놓고 한 글자라도 쓰려고 했습니다. 회사나 사회가 중요하다고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이 순간 내 자신에게 진실로 소중한 것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한 문장 한 단어라도 써보려 했습니다. 그 기록들이 저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august0909)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전철은 회색지대 입니다. 직장도 아니고 집도 아닌 공간입니다. 경계 밖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저의 일상을 차지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직장에도 집에도 매이지 않지만 분명한 영역이 있는 시공간. 그 곳에서 저는 자유롭습니다. 인터넷 글을 보고, 책을 읽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피곤하면 눈도 잠시 붙입니다.

파주에 사는 저에게 어떻게 서울로 그 먼 길을 출퇴근 하냐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출퇴근 시간 덕에 살아갑니다. <며느리 사표>의 저자는 남 몰래 만든 공간에서 지내면서 자아를 되찾습니다. 직장에 매어 있는 저는 어쩌면 회사의 며느리에 다름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출퇴근 전철이라는 저만의 공간이 있습니다. 전철에서 보내는 출퇴근 시간 이야말로 아침 저녁마다 저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시간입니다. 저는 그 시간을 통해 자아를 되찾고 있습니다.

유형선 드림 (morningstar.yoo@gmail.com)
IP *.183.177.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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