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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5일 12시 01분 등록

쌀쌀한 3월의 어느 날, 칠판엔 내 이름이 적혀 있다. 반장 선거 후보자의 이름을 적어 나가시던 담임 선생님은 복도에서 들리는 노크 소리에 나간다. 아빠가 나의 사고 소식을 알렸고 다시 교실로 돌아온 선생님은 칠판에서 내 이름을 지운다.

 

친구가 들려준 그 날의 장면이다. 반장 선거를 할 때였으니 학기 초였던 셈이다. 아마 지금 시기 정도 아니었을까. 칠판에서 지워진 내 이름처럼, 그렇게 나의 6학년 시절은 통째로 지워졌다. 대신 병상에서 누워 보내는 1년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톨스토이, 펄벅, 미우라 아야꼬를 그 시절에 만났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3차례의 몰입 독서 시기가 있었는데, 그 첫 시기가 바로 병상에 누워 있던 13살 때였다. 독서 외에 달리 할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은 오랜 시간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메시지가 깊게 와닿아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받아들이기 힘들어 남아 있었다. <빙점>의 메시지는 용서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메시지가 소설을 통해 흐르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원망이 있었다. 용서의 대상은 꼭 사람만이 아니라 상황이 될 수도 있는데,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용서하기 힘들었다. 성경에서는 사랑용서를 이야기하는데 사랑보다 용서가 힘들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실천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원수를 용서하라는 어렵다. ‘원수 같은 상황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기는 더욱 어렵다. 왜 이렇게 어려운 메시지를 성경도 아닌 소설이 말하는 것일까.

 

언젠가 북해도에 가서 미우라 아야꼬를 만나 봐야지. 그런 다짐은 흐르는 시간 속에 묻혀 30여 년이 지나버렸다. 눈이 매우 많이 내렸던 올해 1월에야 북해도에 있는 미우라 아야꼬 문학기념관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일생이 담긴 그 곳에서 나의 시선을 고정시킨 단 하나의 사진이 있었다.

 

병상에 똑바로 누운 채 특수 제작된 독서대를 이용하여 독서를 하고 있는 그녀의 눈이었다. 그 강렬한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을 흘렸다. 척추염(척추 카리에스)을 앓고 있던 그녀는 무려 13년을 병상에서 보냈다고 한다. 나의 1년에 비할 바가 못된다. 몸을 뒤척일 수 있는 없었던 그녀는 누운 채 읽을 수 있는 특수 독서대를 만들어 병상에서의 독서를 이어간다.


미우라.jpg

 

그녀야말로 그녀가 처한 상황을 용서할 수 없었을 터인데, 기독교 신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어루만지고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그녀는 소설을 통해 전도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된다. 13년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일상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낮에는 잡화상에서 일하고 밤에는 매일같이 3.5매의 원고지를 채우며 글을 썼다는 미우라 아야꼬. 그렇게 그녀 나이 42세 때 <빙점>이 완성된다.

 

누운 채 독서를 하는 그녀의 을 보며 나는 주역의 <풍지관(風地觀)>괘가 떠올랐다.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의도하지 않은 상황을 만나 멈추어 있는 괘. 하지만 그 멈춤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살려 관찰하고 있는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풍지관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觀我生進退(관아생진퇴)

나의 생김새를 보아서 나아가고 물러 나도다.

 

관아생(觀我生)이라는 것은 나의 생김새만이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것이다. 나를 관찰하고 나의 현재 상황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꿰뚫어 () 보며 나아감과 물러남을 정할 때 그 삶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달리면서 찬찬히 볼 수는 없다. 의도치 않은 멈춤으로 발이 묶였을 때 그 상황을 관찰해보자. 원치 않았던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용서하고 그 의미를 관찰해보자. 그러한 관찰 후 결정되는 마음의 태도는 인생에서의 나아감과 물러남을 결정할 때 도움을 줄 것이다.


읽기와 쓰기라는 축복이 귀찮게 느껴질 때, 병상에서의 독서와 남편을 통한 구술로 작품을 써내려간 미우라 아야꼬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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