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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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나를 가장 사로잡은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을 꼽으라면 칭기스 칸이다. 물론 김구, 정약용 이 두 분의 인생이 던져준 큰 가르침과는 별도로 이순신과 칭기스 칸은 어딘가 반대되는 지점에 놓여있는 듯, 서로 다름이 나를 사로잡았다. 한 명은 끊임없이 흔들렸고, 또 한 명은 거침없이 내달렸다. 한 명은 사방이 벽이었지만, 또 한 명은 사방에 경계라곤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어딘가 닮아있음이 나를 잡아 끌었다. 2명의 위인에게 꼭 묻고 싶었지만, 발표 때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2개의 질문을 추가로 던져보았다. '죽음'과 '풍경'에 대한 질문이다.
6. 당신에게 죽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순신 : 죽음이라…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늘 죽음을 각오했지만, 또다시 살아남곤 했다. 바다에선 늘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어 넘실거렸다. 그 경계를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일 내가 나의 죽음을 선택할 수만 있다면 나는 '벨 수 있는 적들'에게 의미 있는 죽음을 당하고 싶었다. 그래,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전쟁터에서 죽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적들이 사라진 곳에서 칼로 '벨 수 없는 적들'에 둘러싸여 무의미한 죽음을 맞기는 그 무엇보다 싫었으니까.
지금 돌이켜보니 아마 동틀 무렵, 노량에서의 죽음은 내가 맞고 싶었던 그런 죽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죽기보다는 살고 싶었지만, 내가 치렀던 그 수많은 전쟁들의 의미를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마무리짓는 것은 내겐 퍽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한 때 꽃가마를 타고, 임금이 계신 궁궐로 향하는 것을 꿈꾼 적도 있었으나, 그 모든 게 부질없는 꿈이었다. 어찌 보면 나의 죽음은 내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처절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노량의 새벽은 내 삶의 완성이었다.
칭기스 칸 : 한 때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살아있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이냐? 심심하면 사냥을 하면서 하루를 즐길 수 있고, 배고프면 온갖 음식들로 마음껏 배를 채울 수 있고, 외로우면 아름다운 여자를 내 품에 안을 수 있다. 온 세상이 내 손 안에 들어오니, 이 모든 것을 여기에 놓아둔 채 홀로 떠난다는 것이 너무나 원통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조금은 쓸쓸하기도 했다. 나의 이런 심정을 '모든 것을 다 이룬 뒤의 무상함'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사내 대장부라면 한번 쯤은 꿈꿀 만한 그런 삶을 살았다. 그렇게 다 이룬 뒤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부질없는 꿈이었다. 나는 죽을 때,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나의 자손은 훌륭한 옷을 입을 테지. 맛있는 것을 먹고 준마를 몰며 아름다운 계집을 품에 안겠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덕분인지도 모르는 채…" 하긴, 누구의 덕분이라 기리면 무엇 할 것인가. 나는 이미 떠난 것을...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 살아내고, 사라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치다, 그렇게 마음껏 즐긴 뒤, 한 세상 잘 살았다, 말하고 눈을 감는 것이다.
7. 윌리엄 워즈워스가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 재생의 힘이 있어… //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당신의 삶에 이런 '시간의 점'과 같은 풍경이 있다면?
이순신 : 바다는 참 신기한 곳이다. "바다는 내가 입각해야 할 유일한 현실이었지만, 바람이 잠든 저녁 무렵의 바다는 몽환과도 같았다." 바다는 내가 목숨을 내걸고 적과 싸워야 하는 전장이었지만, 한 차례의 전투가 끝나고 나면 바다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모든 것을 감춰버렸다. 일렁이는 물결 위에 노을이 내리면 바다는 참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석양에 빛나는 먼 섬들이 어둠 속으로 불려가면 수평선 아래에 내려앉은 해가 물 위의 빛들을 거두어들였고, 빛들은 해지는 쪽으로 몰려가 소멸했다."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 넓은 바다에 가을 햇빛 저무는데
驚寒雁陣高(경한안진고) :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하늘 높이 날아간다
憂心輾轉夜(우심전전야) :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자는 밤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 새벽달은 무심코 활과 칼을 비추네
그렇게 어둠이 내린 밤 바다에 희미한 달빛이 내리면 나는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퉁소를 불고 시를 읊었다. 혼자 있는 밤이면 이리저리 뒤척이며, 가끔 이런 저런 걱정에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바다에는 언제나 삶과 죽음이, 현실과 꿈이 같이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저리도 무심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참 서글퍼졌다. 그렇게 한 차례 시름하고 나면, 나는 다시 그 바다 위에 서있었다. 칼을 들고 호령하고 있었다. 활을 쏘며 나아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남해 바다는 참으로 신기한 곳이었다.
칭기스 칸 : 두말할 것도 없다. 내가 쓰러졌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워 준 곳은 언제나 영원한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부르칸 칼둔이었다. 모든 물이 시작되는 부르칸 칼둔은 내게 막막한 초원을 내달릴 수 있는 힘을 주는 성지였다. 글을 모르는 내게 부르칸 칼둔은 위대한 스승이었다. 깊고 맑은 자연은 나를 되돌아 볼 수 있게 했고, 성찰하고 깨우치게 했고, 초원에선 늘 상처 뿐인 나에게 평화를 주었고, 두려움을 박차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부하들이 나를 따랐다면 그것은 바로 부르칸 칼둔이 내게 준 넓은 마음 때문이다. 내가 저 넓은 유라시아 대륙을 마음껏 호령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부르칸 칼둔이 내게 준 거침없는 기개 때문이다. 부르칸 칼둔에서 나는 광활한 넓이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거대한 마음의 깊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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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당신에게 죽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이순신 : 죽음이라…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늘 죽음을 각오했지만, 또다시 살아남곤 했다. 바다에선 늘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어 넘실거렸다. 그 경계를 구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일 내가 나의 죽음을 선택할 수만 있다면 나는 '벨 수 있는 적들'에게 의미 있는 죽음을 당하고 싶었다. 그래,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전쟁터에서 죽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적들이 사라진 곳에서 칼로 '벨 수 없는 적들'에 둘러싸여 무의미한 죽음을 맞기는 그 무엇보다 싫었으니까.
지금 돌이켜보니 아마 동틀 무렵, 노량에서의 죽음은 내가 맞고 싶었던 그런 죽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죽기보다는 살고 싶었지만, 내가 치렀던 그 수많은 전쟁들의 의미를 스스로의 죽음을 통해 마무리짓는 것은 내겐 퍽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한 때 꽃가마를 타고, 임금이 계신 궁궐로 향하는 것을 꿈꾼 적도 있었으나, 그 모든 게 부질없는 꿈이었다. 어찌 보면 나의 죽음은 내 삶의 무의미함을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처절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노량의 새벽은 내 삶의 완성이었다.
칭기스 칸 : 한 때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살아있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이냐? 심심하면 사냥을 하면서 하루를 즐길 수 있고, 배고프면 온갖 음식들로 마음껏 배를 채울 수 있고, 외로우면 아름다운 여자를 내 품에 안을 수 있다. 온 세상이 내 손 안에 들어오니, 이 모든 것을 여기에 놓아둔 채 홀로 떠난다는 것이 너무나 원통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조금은 쓸쓸하기도 했다. 나의 이런 심정을 '모든 것을 다 이룬 뒤의 무상함'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사내 대장부라면 한번 쯤은 꿈꿀 만한 그런 삶을 살았다. 그렇게 다 이룬 뒤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부질없는 꿈이었다. 나는 죽을 때,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나의 자손은 훌륭한 옷을 입을 테지. 맛있는 것을 먹고 준마를 몰며 아름다운 계집을 품에 안겠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덕분인지도 모르는 채…" 하긴, 누구의 덕분이라 기리면 무엇 할 것인가. 나는 이미 떠난 것을...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 살아내고, 사라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치다, 그렇게 마음껏 즐긴 뒤, 한 세상 잘 살았다, 말하고 눈을 감는 것이다.
7. 윌리엄 워즈워스가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 재생의 힘이 있어… //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당신의 삶에 이런 '시간의 점'과 같은 풍경이 있다면?
이순신 : 바다는 참 신기한 곳이다. "바다는 내가 입각해야 할 유일한 현실이었지만, 바람이 잠든 저녁 무렵의 바다는 몽환과도 같았다." 바다는 내가 목숨을 내걸고 적과 싸워야 하는 전장이었지만, 한 차례의 전투가 끝나고 나면 바다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모든 것을 감춰버렸다. 일렁이는 물결 위에 노을이 내리면 바다는 참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석양에 빛나는 먼 섬들이 어둠 속으로 불려가면 수평선 아래에 내려앉은 해가 물 위의 빛들을 거두어들였고, 빛들은 해지는 쪽으로 몰려가 소멸했다."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
水國秋光暮(수국추광모) : 넓은 바다에 가을 햇빛 저무는데
驚寒雁陣高(경한안진고) :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하늘 높이 날아간다
憂心輾轉夜(우심전전야) :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자는 밤
殘月照弓刀(잔월조궁도) : 새벽달은 무심코 활과 칼을 비추네
그렇게 어둠이 내린 밤 바다에 희미한 달빛이 내리면 나는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퉁소를 불고 시를 읊었다. 혼자 있는 밤이면 이리저리 뒤척이며, 가끔 이런 저런 걱정에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바다에는 언제나 삶과 죽음이, 현실과 꿈이 같이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저리도 무심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참 서글퍼졌다. 그렇게 한 차례 시름하고 나면, 나는 다시 그 바다 위에 서있었다. 칼을 들고 호령하고 있었다. 활을 쏘며 나아가고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남해 바다는 참으로 신기한 곳이었다.
칭기스 칸 : 두말할 것도 없다. 내가 쓰러졌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워 준 곳은 언제나 영원한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부르칸 칼둔이었다. 모든 물이 시작되는 부르칸 칼둔은 내게 막막한 초원을 내달릴 수 있는 힘을 주는 성지였다. 글을 모르는 내게 부르칸 칼둔은 위대한 스승이었다. 깊고 맑은 자연은 나를 되돌아 볼 수 있게 했고, 성찰하고 깨우치게 했고, 초원에선 늘 상처 뿐인 나에게 평화를 주었고, 두려움을 박차고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부하들이 나를 따랐다면 그것은 바로 부르칸 칼둔이 내게 준 넓은 마음 때문이다. 내가 저 넓은 유라시아 대륙을 마음껏 호령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부르칸 칼둔이 내게 준 거침없는 기개 때문이다. 부르칸 칼둔에서 나는 광활한 넓이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거대한 마음의 깊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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