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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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글을 쓰는가
이 물음은 당신은 왜 변.경.연 연구원이 되었습니까? 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때로 인생은 아주 우연한 것들과의 불현듯 만남으로 인해 전혀 예상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되고, 그로인해 삶의 묘미를 더해가거나 인생의 극적 반전을 꾀하는 모험, 즉 꿈을 꿀 수도 있다. 바로 내 경우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는 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한 인연이다.
마흔 중반 한창 중년의 나이를 나는 인생의 많은 의문을 간직한 채 홀로 살고 있었다. 홀로서기를 결정한지 꼭 10년째 되는 초가을 어느 날, 나는 이곳 변화경영연구소에 문을 두드렸다. 다급하고 초조한 목소리였다. 잠재된 내 삶의 불안들이 고개를 쳐들고 내게 물음을 던져오고 있었고, 나는 한동안 덮어두고 미뤄온 그 질문들에 대해 여전히 확실한 대답을 할 수가 없어 보였다.
막막했고 피로했으며 지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계속해서 내게 대답을 요구하며 잠시도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떻게 할 거야, 이제는 무언가 결정을 해야지 않아?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건데?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안전해야 잖아? 왜 그래, 뭐하는 거야? 어떻게 살 거냐고, 이 인간아?' 아, 너무 많이 기다려왔다는 주장이리라. 물론 피할 만큼 피해온 상태였고, 더는 미룰 수도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덮어버릴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언제가 한번은 내 인생의 대청소 같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아니, 내가 지은 내 인생의 허름하고 낡은, 이제는 파리하고 앙상하게 몰골만 남은 건물더미를 폭파 해체시키고, 새로이 단정하고 깔끔하며 튼튼하게 내가 원하는 내 바람의 집을 지어야만 했다. 아마도 내심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의식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나는 최근 나의 10년 동안을 이전과는 전혀 딴 판으로 살기를 작정해왔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채찍하며 무조건 달렸다. 쉼 없이 앞만 보며 달리는 자동차 같았다. 도로면이 어떻든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무조건 나는 달려야만 했다. 쉬어도 안 되고 주저 않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오직 달리는 일 뿐이었다. 결과? 몰랐다. 무엇을 향해? 모른다. 왜? 대답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얻은 게 뭔데? 글쎄....... .
나의 꽃다운 중년 10년은 그런 엉터리 같은, 그러나 내가 산 최선이며, 무작정 인생의 해답을 기다리는 막연한 삶이었다. 어느덧 꿈은 사라졌고 혼돈만이 가중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원통했을까. 그랬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기진맥진했고, 불안했고, 그럼에도 불고하고 더 달려야만 했다. 무엇을? 왜?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다. 이렇게 살다가 죽어도 할 수 없다. 나 혼자서 답을 찾을 수도 없다. 물을 수도 말할 수도 세상 그 어디에도 나를 열어, 하소연하거나 위로받거나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저 웃었지만 웃고 있었지만, 살았지만 살고 있었지만, 내게 무엇을? 왜 사느냐? 식의 물음은 덧없는 것이었다. 결코 제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왜? 왜 나는 살고 있었던가.
그리움 때문에....... .
그리운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그리움은 추억만이 아니었다. 오늘 이 순간 그리고 다가올 내일도 나는 한없이 그립고 또 그립다. 이 마음을 나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살아있었지만 죽은 자처럼 삶이 그리웠고, 죽은 시체 같은 삶 속에서도 나는 또 내 인생의 많은 날들과 삶을 그리워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는 더 그립다.
보고 싶다. 보고 싶은 것 또한 사람만이 아니다. 내 지난 시간들의 즐거움만이 아니다. 나는 나를 보고 싶다. 살아있는 나, 마음껏 나부끼는 나, 꿈꾸는 나를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내가 사랑한 것은 너만이 아니다. 내가 사랑한 것이 너로 인한 영광만은 아니다. 나에게는 내가 있다. 나에게는 네가 있다. 나에게는 함께하는 우리가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또 다른 내가 있다. 나는 이 모두를 사랑한다. 나는 이 모두를 원한다. 나는 이 모두를 꿈꾸고 그것이 내 일상의 실체이기를 갈구한다. 이제라도, 언제까지나, 이 생명 다 하도록.
나는 내 안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몰랐다. 생각할 겨를도 틈도 주지 않고, 차라리 문을 닫아 걸고 살았다. ‘필요치 않아, 너 따위는 필요치 않아.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기다려, 더 기다려.’ 그렇게 나를 다그치고 윽박지르며 살았다. 나를 몰랐기 때문이다. 어느 날, 본능이 나를 이곳 변화경영연구소로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마도 나는 살짝 맛이 간,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미친 여자고 내가 만난 내 스승 또한 삶의 강가에서 미쳐본 경험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알아 볼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는, 내 스승 앞에 나는 두려워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아직도 헤매고 있는 내 측은한 누더기 같은 삶을 그의 앞에서 무거운 머리를 풀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변화경영연구소에 왔고 전에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아주 막연하게 기억에서 조차 희미한, 아스라한 어린 소녀적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오래 갈망하였으나 삶의 질곡에서 길을 잃어버린 내 인생의 실체, 내가 걷고 싶었던 그 길가를 다시금 산책하고 있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나는 나를 치료해야 한다. 내 부덕의 소치와 미숙한 부실 경영으로 인한 부도 같은 삶, 그로 인해 허물어지고 피폐해진 내 삶의 영혼을 우선 추슬러야 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남은 인생을 어떻게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지를 찾아 그 일을 행하며, 아직 남아있는 용기와 도전정신과 꿈을 가지고 좀 더 바르고 곱게 펼쳐 살아가고 싶어서다. 미처 여러 경황은 미흡한 상태다. 그러나 나름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중년이 아닌가. 몇 년 후면 내 나이가 벌써 쉰을 바라본다. 더 늦기 전에 인생이 내게 준 길을 묻고 찾을 것이다. 행여 남은 아쉬움일랑 모두 불사르듯 한껏 살아가련다. 후회도 미련도 애틋함도 모두 후련히 살아내고, 세상 끝 날에 가뿐하게 홀연히 사라지고 싶다.
무엇보다 이 두 마음을 다지기 위해 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글을 쓴다. 아직 너무나 남루한 글이라 부끄럽다. 나에게 남다른 글재주가 보이지도 않으며, 제대로 문장이나 글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 그 흔한 문예반도 거치지 않았다. 일기 같은 글을 퇴고도 없이 감정이 격한 상태로 그대로 올린다고 혼줄 난적도 있고, 그 표현이 거칠고 경박하다는 질타도 심심찮게 듣곤 한다. 그러나 내게 단 한 가지 희망이 있다. 내 스승은 열심히 하려고 하는 자를 도우신다. 나도 내가 노력하는 만큼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그렇게 변.경.연의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저 내게 책 한권 선물하고 싶다. 그 동안에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 스스로가 내 삶을 보듬어 어루만지고, 행여 나와 같은 이웃이 있다면 나의 이야기와 함께 삶을 나누리라. 나는 사랑하는 이웃을 많이 건사하고 싶다. 내가 책을 내게 되면 더 많은 벗들이 생기리라. 그날을 고대해도 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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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음은 당신은 왜 변.경.연 연구원이 되었습니까? 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때로 인생은 아주 우연한 것들과의 불현듯 만남으로 인해 전혀 예상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되고, 그로인해 삶의 묘미를 더해가거나 인생의 극적 반전을 꾀하는 모험, 즉 꿈을 꿀 수도 있다. 바로 내 경우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는 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한 인연이다.
마흔 중반 한창 중년의 나이를 나는 인생의 많은 의문을 간직한 채 홀로 살고 있었다. 홀로서기를 결정한지 꼭 10년째 되는 초가을 어느 날, 나는 이곳 변화경영연구소에 문을 두드렸다. 다급하고 초조한 목소리였다. 잠재된 내 삶의 불안들이 고개를 쳐들고 내게 물음을 던져오고 있었고, 나는 한동안 덮어두고 미뤄온 그 질문들에 대해 여전히 확실한 대답을 할 수가 없어 보였다.
막막했고 피로했으며 지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계속해서 내게 대답을 요구하며 잠시도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떻게 할 거야, 이제는 무언가 결정을 해야지 않아?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건데?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안전해야 잖아? 왜 그래, 뭐하는 거야? 어떻게 살 거냐고, 이 인간아?' 아, 너무 많이 기다려왔다는 주장이리라. 물론 피할 만큼 피해온 상태였고, 더는 미룰 수도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덮어버릴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언제가 한번은 내 인생의 대청소 같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아니, 내가 지은 내 인생의 허름하고 낡은, 이제는 파리하고 앙상하게 몰골만 남은 건물더미를 폭파 해체시키고, 새로이 단정하고 깔끔하며 튼튼하게 내가 원하는 내 바람의 집을 지어야만 했다. 아마도 내심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고 의식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나는 최근 나의 10년 동안을 이전과는 전혀 딴 판으로 살기를 작정해왔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채찍하며 무조건 달렸다. 쉼 없이 앞만 보며 달리는 자동차 같았다. 도로면이 어떻든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무조건 나는 달려야만 했다. 쉬어도 안 되고 주저 않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오직 달리는 일 뿐이었다. 결과? 몰랐다. 무엇을 향해? 모른다. 왜? 대답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얻은 게 뭔데? 글쎄....... .
나의 꽃다운 중년 10년은 그런 엉터리 같은, 그러나 내가 산 최선이며, 무작정 인생의 해답을 기다리는 막연한 삶이었다. 어느덧 꿈은 사라졌고 혼돈만이 가중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원통했을까. 그랬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기진맥진했고, 불안했고, 그럼에도 불고하고 더 달려야만 했다. 무엇을? 왜?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다. 이렇게 살다가 죽어도 할 수 없다. 나 혼자서 답을 찾을 수도 없다. 물을 수도 말할 수도 세상 그 어디에도 나를 열어, 하소연하거나 위로받거나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저 웃었지만 웃고 있었지만, 살았지만 살고 있었지만, 내게 무엇을? 왜 사느냐? 식의 물음은 덧없는 것이었다. 결코 제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
왜? 왜 나는 살고 있었던가.
그리움 때문에....... .
그리운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그리움은 추억만이 아니었다. 오늘 이 순간 그리고 다가올 내일도 나는 한없이 그립고 또 그립다. 이 마음을 나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살아있었지만 죽은 자처럼 삶이 그리웠고, 죽은 시체 같은 삶 속에서도 나는 또 내 인생의 많은 날들과 삶을 그리워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는 더 그립다.
보고 싶다. 보고 싶은 것 또한 사람만이 아니다. 내 지난 시간들의 즐거움만이 아니다. 나는 나를 보고 싶다. 살아있는 나, 마음껏 나부끼는 나, 꿈꾸는 나를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
내가 사랑한 것은 너만이 아니다. 내가 사랑한 것이 너로 인한 영광만은 아니다. 나에게는 내가 있다. 나에게는 네가 있다. 나에게는 함께하는 우리가 있다. 그리고 나에게는 또 다른 내가 있다. 나는 이 모두를 사랑한다. 나는 이 모두를 원한다. 나는 이 모두를 꿈꾸고 그것이 내 일상의 실체이기를 갈구한다. 이제라도, 언제까지나, 이 생명 다 하도록.
나는 내 안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몰랐다. 생각할 겨를도 틈도 주지 않고, 차라리 문을 닫아 걸고 살았다. ‘필요치 않아, 너 따위는 필요치 않아.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기다려, 더 기다려.’ 그렇게 나를 다그치고 윽박지르며 살았다. 나를 몰랐기 때문이다. 어느 날, 본능이 나를 이곳 변화경영연구소로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마도 나는 살짝 맛이 간,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미친 여자고 내가 만난 내 스승 또한 삶의 강가에서 미쳐본 경험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알아 볼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는, 내 스승 앞에 나는 두려워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아직도 헤매고 있는 내 측은한 누더기 같은 삶을 그의 앞에서 무거운 머리를 풀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변화경영연구소에 왔고 전에는 생각해 보지도 않은, 아주 막연하게 기억에서 조차 희미한, 아스라한 어린 소녀적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오래 갈망하였으나 삶의 질곡에서 길을 잃어버린 내 인생의 실체, 내가 걷고 싶었던 그 길가를 다시금 산책하고 있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나는 나를 치료해야 한다. 내 부덕의 소치와 미숙한 부실 경영으로 인한 부도 같은 삶, 그로 인해 허물어지고 피폐해진 내 삶의 영혼을 우선 추슬러야 한다.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남은 인생을 어떻게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지를 찾아 그 일을 행하며, 아직 남아있는 용기와 도전정신과 꿈을 가지고 좀 더 바르고 곱게 펼쳐 살아가고 싶어서다. 미처 여러 경황은 미흡한 상태다. 그러나 나름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중년이 아닌가. 몇 년 후면 내 나이가 벌써 쉰을 바라본다. 더 늦기 전에 인생이 내게 준 길을 묻고 찾을 것이다. 행여 남은 아쉬움일랑 모두 불사르듯 한껏 살아가련다. 후회도 미련도 애틋함도 모두 후련히 살아내고, 세상 끝 날에 가뿐하게 홀연히 사라지고 싶다.
무엇보다 이 두 마음을 다지기 위해 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글을 쓴다. 아직 너무나 남루한 글이라 부끄럽다. 나에게 남다른 글재주가 보이지도 않으며, 제대로 문장이나 글공부를 해본 적도 없다. 그 흔한 문예반도 거치지 않았다. 일기 같은 글을 퇴고도 없이 감정이 격한 상태로 그대로 올린다고 혼줄 난적도 있고, 그 표현이 거칠고 경박하다는 질타도 심심찮게 듣곤 한다. 그러나 내게 단 한 가지 희망이 있다. 내 스승은 열심히 하려고 하는 자를 도우신다. 나도 내가 노력하는 만큼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그렇게 변.경.연의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저 내게 책 한권 선물하고 싶다. 그 동안에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내 스스로가 내 삶을 보듬어 어루만지고, 행여 나와 같은 이웃이 있다면 나의 이야기와 함께 삶을 나누리라. 나는 사랑하는 이웃을 많이 건사하고 싶다. 내가 책을 내게 되면 더 많은 벗들이 생기리라. 그날을 고대해도 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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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우제성! 말투가 어째 초아선생님 같다. 경상도 라서 그런가? 어디가 그러냐고요? 보장한다. 내가 처음 글쓰기를 끼적이다가 본격적으로 달라붙게 된 일종의 계기가 초아선생님의 그 강추 "보장한다" 잖겠우. 점점 발을 빼시는 듯 하지만 ㅋㅋ ^-^
처음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글의 질을 떠나 이렇게 변.경.연에 찰싹 달라붙게 되부렀네요. 언니야, 언니가 보장해줌 신나지. 나보다 쪼금이라도 많이 산 양반이 해주는 말씀이니까. 정 안 되면 우리 탁주집 같이 함 대박 날 걸요. 히힛. 그건 진짜 자신있는데... 크흐흐.
우리 흔들릴 때 마다 한 잔씩! 부라보!! 오, 우리들의 찡한 인생이여~ 살아 있는, 또한 죽은 모든 일상이여! 찬란한 축배를, 우리들의 어울림을 위하여!!!
처음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글의 질을 떠나 이렇게 변.경.연에 찰싹 달라붙게 되부렀네요. 언니야, 언니가 보장해줌 신나지. 나보다 쪼금이라도 많이 산 양반이 해주는 말씀이니까. 정 안 되면 우리 탁주집 같이 함 대박 날 걸요. 히힛. 그건 진짜 자신있는데... 크흐흐.
우리 흔들릴 때 마다 한 잔씩! 부라보!! 오, 우리들의 찡한 인생이여~ 살아 있는, 또한 죽은 모든 일상이여! 찬란한 축배를, 우리들의 어울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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