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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19일 11시 51분 등록

  

오래 살아 인생의 지혜를 가지게 된 사람,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 자연의 마음을 가지게 된, 자연을 닮게 된 사람, 그리고 머지않아 자연 속으로 돌아갈 사람, 그것이 할머니였다.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152

 

너무 오래 아팠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직도 아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닮은 할머니로 늙어 가는 것은 마흔 셋을 맞이하는 젊은이인 내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구체적인 욕망이었다.

 

연구소의 사람들 중에서 스승을 대신할 이를 찾아,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미션을 앞둔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제 길을 나서는 이들에게 꼭 필요하다 여겨 배치해둔 장치였지만, 그들을 위한 것이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기는 했지만 이번만은 도무지 적극성이 생기지 않았다. 더 이상 사람은 필요없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다 그가 나오는 팟캐스트를 들었다. 방송을 듣기 전까지 그는 내게 위험 인물이었다. 말할 수 없이 까칠한 인상에 정말로 사나워보이기까지 하던 그.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사람. 5월 수업의 자문위원으로 모셨기에 무작정 피해다닐 수는 없을테지만 그렇다고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사람. 제발 무사히모면할 수 있기만을 바라게 되는 그런 어려운 사람이 내게 였다.

 

몇 번이나 듣고 또 들었는지 모른다. 한 번도 누군가와 공유해본 적이 없는 그 길의 풍경이 그의 목소리를 통해 묘사되고 있었다. ‘어떻게 그 느낌을 아는 거지? 저 사람은 대체 누구지?’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여전히 그는 멀고도 먼 저 세계의 존재였다. 나로서는 불가피하다 여겨 시도한 매.. 공적인 연락에도 당최 회신이 없는 그. ‘그는 어쩌면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진짜 숲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버리기로 했다. 그 편이 마음 편하니까.

 

레이스 2주차, 예비 연구원 각자가 선택한 멘토들을 섭외하고 연결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통화를 시도할 용기를 모으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통화가 끝난 후의 內傷을 건사하는 것도 수월치는 않았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하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에라잇! 걍 다 그만둬 버릴까보다. 그나마 본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그만두는 것이 모두를 위한 일인지도 몰라. 그런 가늠을 위해 레이스를 배치한 거 잖아. 무리하지 말자구!’

 

유혹은 달콤했다. 하지만 전에 없이 단호한 목소리가 이에 맞서고 나섰다. ‘모르고 시작했니? 이 정도도 각오 안했니? 제대로 해보기나 하고 징징거려도 늦지 않아. 정말 할 수 있는 걸 다 해본 거니?’ 도리없이 마음을 고쳐먹었다. 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후회없이 다 해보겠다 새 결심을 다졌다.


신기한 일이었을까? 새 마음을 먹은 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전에는 맛보지 못하던 깊은 기쁨이 나를 찾아왔다. 치른 비용에 비해 넘치는 효과가 분명했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라는 주문에 걸려 넘어진 바로 그 다음에서 나를 기다리던 수없이 많은 기쁨들을 흘려보내도록 했던 지난 선택들이 더없이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오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갈 작정이었다. 다행히 의외로 친절한 그는 지구 끝으로 나를 부르지는 않았다. 아이들 등굣길에 함께 나와 서둘러 KTX를 타고 그를 만나기로 한 오송역으로 향했다. 어떤 선물이 또 나를 기다리고 있는걸까? 내심 차오르는 기대를 느끼며 그렇게 2년 가까이 도보 생활권을 벗어난 적이 없는 일상에 드라마틱한 변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오송역에 10시 반에 도착해 1시 반이면 여우숲을 떠나야하는 일정. 그렇게 3시간이 내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역에서 숲까지 1시간이 넘게 걸리는 이동시간까지 고려하면 겨우 두 시간이 채 못 되는 시간이었다. 일목요연하게 뽑아 온 질문에 맞춰 조목조목 대답을 얻고 싶은 욕심이었지만 운전을 하고, 바로 마음쓰이는 다음 일정을 맞이해야 하는 그에게 빽빽한 질문지를 들이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황이 파악되자 방침이 정해졌다. 오늘의 인터뷰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방식으로 진행한다! 이야기는 언어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공간도 말하고, 상황도 말하고, 물건도 말하고, 심지어는 공기도 말한다. 하물며 사람이 말하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여기서 하는 언어화된 을 너머서는 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어를 거치지 않은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그 메시지야말로 언어의 궁극적 목표다. 더구나 오늘의 인터뷰이는 누구보다 풍요롭게 숲말을 구사하는 비언어커뮤니케이션의 전문가가 아닌가

 

 

여우숲.jpg  



정말로 그럴 생각은 절대로 없었다. 본 게임에 앞서 가볍게 레이스를 마무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믿었으니까. 책 한권만 꼼꼼히 리뷰해도 훌륭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돌아와 나는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빨려들 듯이 그의 시간들을 따라다니고 있는 나는 대체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던 걸까?


이 짧은 지면에 그와 나눈 이야기를 다 옮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를 만난 후 나는 전에 모르던 또 하나의 풍경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눈과 가슴이 함께 뻥 뚫리는 듯한 그 시원한 풍광을 그가 없는 곳에서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새로운 욕망을 품게 되었다는 것. 어느 날 문득 내게 온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끌림의 끝을 묻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것뿐.



여우숲2.jpg


하루 일상의 평화를 치른 대가로 이보다 더 한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타고난 인터뷰어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이미 사람이 아닌지도 모른다. ^^

 

무수한 생명과 대등한 입장에서 살아보면 그대도 알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보다 말없는 생명들에게 감사와 사과의 마음이 더 잘 전달된다는 것을. 이런 경험 한두 가지쯤 품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도 이미 자연이 된 것임을 나는 압니다.

 

숲에서 온 편지91

 


 o <숲에게, 숲에서,숲으로> 시리즈 리뷰( http://www.bhgoo.com/2011/index.php?mid=r_review&document_srl=8400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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