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香仁 이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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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라는 의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칼럼에서는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비교적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다고 말해지는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써 볼까 한다. 과거의 짧은 시간의 기술이 되겠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가며 열정적으로 살았던 순간의 이야기이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시작한 것은 먼저 사무실 자리를 물색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강남의 테헤란로가 가장 그럴듯하게 알려져 있었고 외국회사였던 자사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곳이 선택되었다. 예산에 맞추어 적합한 곳을 찾느라 삼성동에서 강남 역까지의 빌딩을 일일이 다 들어가 보는데, 부동산 업주의 말만으로는 결정하기가 애매했고 한때 완벽주의자였던 그녀는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적합한 이미지가 떠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름이었는데 얼마나 땀을 흘리고 발 품을 팔았는지 쏟아지는 햇볕에 이마에 기미가 생겼을 정도이다.
이윽고 사무실자리를 결정하고 현지 사무소란 간판을 내걸고 홀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큼직한 책상에 목까지 오는 긴 의자에 앉아 막 연결된 전화선을 통해 사무실 오픈을 본사에 알렸다. 축하한다는 메시지들이 도착되는 사이 거래처 회사직원이 분재화분을 들고 나타나선 웃고 있다. 드디어 또 다른 삶의 시작이다. 가슴이 콩콩 뛰고 있었다. 이렇게 내 삶을 방치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난 다음부터 삶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멋진 제안을 하며 다가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한국과의 거래가 있긴 했어도 굳이 그 때 현지 사무소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선견지명이 있었던 회사는 그 사업분야에서 처음으로 한국사무소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후일 이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늘날에는 본사에서 일본인이 파견근무로 나와 있고 한국인 직원이 더 생겨나 일을 거들고 있다.
처음에는 현지회사의 책상을 한국에 가지고 온 것처럼 그렇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국제전화는 무역회사에서는 일반전화와 다름없다. 빠른 커뮤니케이션은 해외영업에서는 생명이다. 모든 업무는 일본에서 근무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인터넷이 지금처럼 활발하지도 않았다. 겨우 10년 전인데도 팩스 송수신으로 업무가 이루어 졌으니 정말 지금과 비교하면 강산이 변했다. 그렇게 처음 한국에서 일을 막 시작할 즈음 오늘의 그녀를 만든 한 장의 팩스가 소리 없이 도착되었다.
대기업에서의 정보는 그 전문부서로 전부 보내진다. 한국과 관련된 대 고객 업무는 이쪽으로 오게끔 되어있는지라 하루에도 몇 장씩의 팩스가 오곤 했다. 당시는 수입선 다변화라는 일종의 무역장벽이 있어 일본회사의 한국진출은 상당히 요원하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정보는 거래가 불가하다거나 타 부서를 추천하는 일들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반드시 공식적인 문서를 발송하여 혹시라도 언젠가 고객이 될지 모르는 회사에 대한 예의와 자회사의 이미지를 위해 정중한 답신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의 팩스 내용은 묘하게 그녀의 구미를 당겼다.
휘갈겨 쓰여진 상사의 코멘트는 어떤 회사가 아주 복잡한 통로를 통해 보내 왔다면서 내게 알아보라는 의례적인 말이 적혀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그 회사에 대해 넌지시 조사하면서 왜 이 회사가 이것을 보내왔을까를 추측하다 현재 처해진 법적인 문제들에 대해 약간의 학습을 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아주 유명한 회사였다. 소위 말하는 정부출자기업이다.
그들은 매우 반가워 하며 연락을 기다렸노라 하며 우리 회사의 책임자와 통화하고 싶어했다. 늘 그렀듯 나를 비서라고 생각하고 편히 말을 하다가 “제가 책임자입니다.” 하면 다들 놀란다. 오늘 날 그녀의 말투에 혹시 약간의 권위나 업무적인 말투가 튀어 나온다면 그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의연해지기 위한 그녀만의 자신감 위장을 관철하려는 투쟁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본래의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딱 부러지게 정확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자 정색을 하며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윗분들의 요청이 있음을 전해왔다. “알겠습니다.” 하며 좀 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며칠 후로 약속을 정했다.
즉시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것으로 파생될 수 있는 사업에 관해 설명을 하였다. 상사는 그녀가 흥분하면 틱틱거리고 그녀가 시큰둥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기가 흥분하는 타입으로 서로 썩 맞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이거다 하는 게 있으면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인 사람으로 일을 벌이고 처리하는 능력만큼은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제대로 의기투합 되었다.
며칠 후 어느 정도 대답할 거리를 가지고 그 회사를 방문했다. 정부기업이니 사장은 낙하산으로 왔다 간다면 상무는 몇 십 년씩 근무한 사람들로 실질적인 권한은 이들이 쥐고 있다. 내가 만난 상무와 부장은 보수적이면서도 의외로 소탈하고 성숙한 분위기의 남자들이었다. 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 멤버들과는 서로 인간적인 호감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그런 느낌은 아주 기분 좋은 것으로 직장 생활에서의 뜻하지 않은 보너스와 같다.
우선 간단한 회사소개를 하고 나의 역할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그들의 요망 사항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홍상무님은 온화해 보이는 얼굴로 현재 일본에서 판매되는 새로운 기계에 대해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더불어 한국의 에너지 상황에 아주 적합한 기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회사에서 20년 전의 우리회사기계를 수입하여 그때까지 사용하고 있었고 더구나 당시 그 기계를 한국에 처음 도입한 사람이 바로 그 분이셨다.
어느 정도 그들의 의향을 짐작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나는 즉시 상사에게 미팅결과를 보고하고 답신을 기다렸다. 그러나 웬걸, 본사에서는 한국 수출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답을 해온다. 이유는 아직 시장에서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것과 한번 설치하게 되면 유지 관리 등이 필요하게 되는 데 그런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수출은 불가하다는 것, 지나친 고가이기 때문에 시장성이 없다는 것 등이 이유였다.
보통 기계에 문제가 일어날 경우 그 책임을 그 기술부나 품질보증부에 묻게 되는데 그 부서의 반대 의견으론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많이 댄다. 영업 쪽에서는 수익을 따지게 되는데 네트워크가 깔려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런 기계를 한 두 대 팔게 되면 득보다 실이 크다는 이유로 반대의견이 더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한국에 그 회사에 걸맞는 연고가 없어서 더욱 불안해했다. 만약 잘못될 경우 회사 브랜드 이미지 추락에 대한 문책도 있었고 또 그 동안 여러 나라에서 책임소재를 둘러싸고 많은 분쟁을 겪어 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이 회사를 찾아가 정중하게 당사의 입장을 밝혔다. 상대 회사도 대기업이니 이러한 우려에 대해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주셨다. 탐구심 강한 상무님은 가만히 생각을 하시더니 그럼 샘플로라도 구입할 수 없겠는가?, 모든 책임은 우리 회사에서 지겠다, 또한 자사 건물에 설치해 사용해 보겠노라 하시는 것이다. 만약 이 회사가 제조회사이었다면 이런 요망은 일거에 거절될 수 있는 제안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연료를 파는 기업으로 우리기계의 설치가 그들의 연료판매와 연결된다는 수요개발 시각에서 보고 있었다.
몇 번인가의 본사와의 접촉은 전부 불가하다는 결론으로 계속 답신이 왔다. 상사와 나는 모처럼 의기투합했는데 좌절로 이어지니 묘한 투지가 고개를 들면서 우리를 전사로 만들어 나갔다. 당시 본사의 임원들이 한국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는 일본 완제품은 수출 불가능한 나라라는 인식으로, 매우 낯설어했으며 또 그것이 그들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일본회사들은 전혀 접촉이 없는 회사와의 새로운 관계형성에 적극적이지 않다. 영리한 상사가 아이디어를 냈다. 그들을 어떻게든 일본으로 데려와 보라, 그럼 내가 자리를 주선하여 높은 사람끼리의 만남을 주선해보겠다라는 의견이었다.
한국의 정부산하에 있는 회사들은 그 당시만해도 서슬이 퍼런 회사들이었다. 업자들이 무상으로 새로운 기계를 가지고 와선 제발 한번만 써 주십사 하는 인사에 날이 새는 곳이다. 기계가 채택되면 당분간 회사의 수익이 절대 보장되는 곳이니 그도 그럴 말이다.
나는 심사숙고 끝에 홍상무님과 최부장님을 마주하고 말을 꺼냈다. 아주 정중하게 우리회사의 입장과 현재 처한 딜레마에 관해 솔직하게 전부 다 말씀을 드렸다. 일본사람들이 현재 한국시장을 보는 어쩔 수 없는 시각과 우려에 관해, 그리고 내가 본 일본사람들과 우리회사의 사람들에 관한 설명, 현재 내가 당신들에게 하고자 하는 어려운 부탁에 관해 말씀을 드렸다. 더불어 같이 일본에 간다 해도 샘플조차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솔직한 말도 곁들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어려우시겠지만 저를 믿고 같이 동행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그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느 업자에게 한 번도 머리 숙여 부탁해본 적이 없는 이 회사의 간부들은 겨우 샘플구입을 의뢰하기 위해 며칠 후 기꺼이 나와 같이 도쿄행 비행기에 올라 주었다. 나리타 공항에는 미리 부탁해 둔 리무진을 가지고 상사가 마중을 나와주었고 그 날 밤 우리는 긴자에서 짐을 풀고 기분 좋은 저녁을 먹었다.
그 다음날엔 우리회사의 사장과 각 부서의 사업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격적인 미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공장 견학 끝나고 다시 앉은 회의실 책상 위에는 불가능하다던 샘플 수출 견적서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간부들은 처음이라 긴가 민가 했지만 그 날 한국 사람들을 만나보고 신뢰할 만 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우리는 그 날 기념 사진촬영을 하였다. 양국의 국기 준비에서 파티까지 모든 절차는 치밀한 상사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그 사진의 얼굴들은 그 후 한국의 내 사무실에 계속 걸려있게되며 이들이 바로 이 사업의 초석을 다진 주역들이라고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그 날의 저녁 만찬은 회의에 참석한 멤버 전원이 총 출석하여 한국에서 온 점잖은 신사들을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모두 양국 회사의 교류가 시작됨을 아이들처럼 기뻐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려는 진지한 모습들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 사업은 이 후 IMF등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잠시 주춤하면서 아쉽게도 그 회사와는 인연을 계속할 수 없게 되지만 이미 한국 수출에의 물꼬가 터진 상황이었다. 그 후 또 다른 회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으며 얼마 전 국내 유수 회사에서 국책사업으로서 이 제품이 개발되었다. 경쟁업체가 생겼다는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시장의 확대된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고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감격스러운 일로 생각한다.
그간 그녀의 상사들은 모든 칭찬은 그녀에게 돌리고, 어려운 문제는 그들이 도맡아 해결해 주고 떠나갔다. 시장개척의 훈장은 그들을 대신하여 늘 어리버리 그녀가 앞에서 받곤 했다. 이 사업을 통해 양국의 사람들이 척박한 현장에서 같이 고생하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풀어나갔다. 고마운 사람들, 잊지 못할 많은 사람들, 나는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그들을 기억하며 후배들에게 그 멋진 활약을 말해 줄 것이다.
그 때의 그 최부장님은 현재 그 기업의 사장이 되어있다. 올 봄에 그 회사의 김부장이 내게 연락을 해왔다. 업계신문에 난 그녀의 인터뷰를 보고 그 쪽 사장님이 꼭 통화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영업을 하신 거에요?” 그냥 하하 웃었다.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이럴 때일 것이다. 감동의 순간, 바로 내가 좋아하는 그런 순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벅차는 순간들이다.
IP *.48.32.74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시작한 것은 먼저 사무실 자리를 물색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강남의 테헤란로가 가장 그럴듯하게 알려져 있었고 외국회사였던 자사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곳이 선택되었다. 예산에 맞추어 적합한 곳을 찾느라 삼성동에서 강남 역까지의 빌딩을 일일이 다 들어가 보는데, 부동산 업주의 말만으로는 결정하기가 애매했고 한때 완벽주의자였던 그녀는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적합한 이미지가 떠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름이었는데 얼마나 땀을 흘리고 발 품을 팔았는지 쏟아지는 햇볕에 이마에 기미가 생겼을 정도이다.
이윽고 사무실자리를 결정하고 현지 사무소란 간판을 내걸고 홀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큼직한 책상에 목까지 오는 긴 의자에 앉아 막 연결된 전화선을 통해 사무실 오픈을 본사에 알렸다. 축하한다는 메시지들이 도착되는 사이 거래처 회사직원이 분재화분을 들고 나타나선 웃고 있다. 드디어 또 다른 삶의 시작이다. 가슴이 콩콩 뛰고 있었다. 이렇게 내 삶을 방치하지 않겠다고 외치고 난 다음부터 삶은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멋진 제안을 하며 다가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한국과의 거래가 있긴 했어도 굳이 그 때 현지 사무소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선견지명이 있었던 회사는 그 사업분야에서 처음으로 한국사무소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도장을 찍어주었다. 후일 이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늘날에는 본사에서 일본인이 파견근무로 나와 있고 한국인 직원이 더 생겨나 일을 거들고 있다.
처음에는 현지회사의 책상을 한국에 가지고 온 것처럼 그렇게 일을 하기 시작했다. 국제전화는 무역회사에서는 일반전화와 다름없다. 빠른 커뮤니케이션은 해외영업에서는 생명이다. 모든 업무는 일본에서 근무할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인터넷이 지금처럼 활발하지도 않았다. 겨우 10년 전인데도 팩스 송수신으로 업무가 이루어 졌으니 정말 지금과 비교하면 강산이 변했다. 그렇게 처음 한국에서 일을 막 시작할 즈음 오늘의 그녀를 만든 한 장의 팩스가 소리 없이 도착되었다.
대기업에서의 정보는 그 전문부서로 전부 보내진다. 한국과 관련된 대 고객 업무는 이쪽으로 오게끔 되어있는지라 하루에도 몇 장씩의 팩스가 오곤 했다. 당시는 수입선 다변화라는 일종의 무역장벽이 있어 일본회사의 한국진출은 상당히 요원하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정보는 거래가 불가하다거나 타 부서를 추천하는 일들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반드시 공식적인 문서를 발송하여 혹시라도 언젠가 고객이 될지 모르는 회사에 대한 예의와 자회사의 이미지를 위해 정중한 답신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의 팩스 내용은 묘하게 그녀의 구미를 당겼다.
휘갈겨 쓰여진 상사의 코멘트는 어떤 회사가 아주 복잡한 통로를 통해 보내 왔다면서 내게 알아보라는 의례적인 말이 적혀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그 회사에 대해 넌지시 조사하면서 왜 이 회사가 이것을 보내왔을까를 추측하다 현재 처해진 법적인 문제들에 대해 약간의 학습을 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아주 유명한 회사였다. 소위 말하는 정부출자기업이다.
그들은 매우 반가워 하며 연락을 기다렸노라 하며 우리 회사의 책임자와 통화하고 싶어했다. 늘 그렀듯 나를 비서라고 생각하고 편히 말을 하다가 “제가 책임자입니다.” 하면 다들 놀란다. 오늘 날 그녀의 말투에 혹시 약간의 권위나 업무적인 말투가 튀어 나온다면 그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의연해지기 위한 그녀만의 자신감 위장을 관철하려는 투쟁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본래의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딱 부러지게 정확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자 정색을 하며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윗분들의 요청이 있음을 전해왔다. “알겠습니다.” 하며 좀 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며칠 후로 약속을 정했다.
즉시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것으로 파생될 수 있는 사업에 관해 설명을 하였다. 상사는 그녀가 흥분하면 틱틱거리고 그녀가 시큰둥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기가 흥분하는 타입으로 서로 썩 맞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 이거다 하는 게 있으면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인 사람으로 일을 벌이고 처리하는 능력만큼은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제대로 의기투합 되었다.
며칠 후 어느 정도 대답할 거리를 가지고 그 회사를 방문했다. 정부기업이니 사장은 낙하산으로 왔다 간다면 상무는 몇 십 년씩 근무한 사람들로 실질적인 권한은 이들이 쥐고 있다. 내가 만난 상무와 부장은 보수적이면서도 의외로 소탈하고 성숙한 분위기의 남자들이었다. 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 멤버들과는 서로 인간적인 호감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그런 느낌은 아주 기분 좋은 것으로 직장 생활에서의 뜻하지 않은 보너스와 같다.
우선 간단한 회사소개를 하고 나의 역할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그들의 요망 사항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홍상무님은 온화해 보이는 얼굴로 현재 일본에서 판매되는 새로운 기계에 대해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과 더불어 한국의 에너지 상황에 아주 적합한 기계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회사에서 20년 전의 우리회사기계를 수입하여 그때까지 사용하고 있었고 더구나 당시 그 기계를 한국에 처음 도입한 사람이 바로 그 분이셨다.
어느 정도 그들의 의향을 짐작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나는 즉시 상사에게 미팅결과를 보고하고 답신을 기다렸다. 그러나 웬걸, 본사에서는 한국 수출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답을 해온다. 이유는 아직 시장에서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것과 한번 설치하게 되면 유지 관리 등이 필요하게 되는 데 그런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수출은 불가하다는 것, 지나친 고가이기 때문에 시장성이 없다는 것 등이 이유였다.
보통 기계에 문제가 일어날 경우 그 책임을 그 기술부나 품질보증부에 묻게 되는데 그 부서의 반대 의견으론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많이 댄다. 영업 쪽에서는 수익을 따지게 되는데 네트워크가 깔려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런 기계를 한 두 대 팔게 되면 득보다 실이 크다는 이유로 반대의견이 더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 한국에 그 회사에 걸맞는 연고가 없어서 더욱 불안해했다. 만약 잘못될 경우 회사 브랜드 이미지 추락에 대한 문책도 있었고 또 그 동안 여러 나라에서 책임소재를 둘러싸고 많은 분쟁을 겪어 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이 회사를 찾아가 정중하게 당사의 입장을 밝혔다. 상대 회사도 대기업이니 이러한 우려에 대해서는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주셨다. 탐구심 강한 상무님은 가만히 생각을 하시더니 그럼 샘플로라도 구입할 수 없겠는가?, 모든 책임은 우리 회사에서 지겠다, 또한 자사 건물에 설치해 사용해 보겠노라 하시는 것이다. 만약 이 회사가 제조회사이었다면 이런 요망은 일거에 거절될 수 있는 제안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연료를 파는 기업으로 우리기계의 설치가 그들의 연료판매와 연결된다는 수요개발 시각에서 보고 있었다.
몇 번인가의 본사와의 접촉은 전부 불가하다는 결론으로 계속 답신이 왔다. 상사와 나는 모처럼 의기투합했는데 좌절로 이어지니 묘한 투지가 고개를 들면서 우리를 전사로 만들어 나갔다. 당시 본사의 임원들이 한국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는 일본 완제품은 수출 불가능한 나라라는 인식으로, 매우 낯설어했으며 또 그것이 그들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일본회사들은 전혀 접촉이 없는 회사와의 새로운 관계형성에 적극적이지 않다. 영리한 상사가 아이디어를 냈다. 그들을 어떻게든 일본으로 데려와 보라, 그럼 내가 자리를 주선하여 높은 사람끼리의 만남을 주선해보겠다라는 의견이었다.
한국의 정부산하에 있는 회사들은 그 당시만해도 서슬이 퍼런 회사들이었다. 업자들이 무상으로 새로운 기계를 가지고 와선 제발 한번만 써 주십사 하는 인사에 날이 새는 곳이다. 기계가 채택되면 당분간 회사의 수익이 절대 보장되는 곳이니 그도 그럴 말이다.
나는 심사숙고 끝에 홍상무님과 최부장님을 마주하고 말을 꺼냈다. 아주 정중하게 우리회사의 입장과 현재 처한 딜레마에 관해 솔직하게 전부 다 말씀을 드렸다. 일본사람들이 현재 한국시장을 보는 어쩔 수 없는 시각과 우려에 관해, 그리고 내가 본 일본사람들과 우리회사의 사람들에 관한 설명, 현재 내가 당신들에게 하고자 하는 어려운 부탁에 관해 말씀을 드렸다. 더불어 같이 일본에 간다 해도 샘플조차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솔직한 말도 곁들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어려우시겠지만 저를 믿고 같이 동행해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그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느 업자에게 한 번도 머리 숙여 부탁해본 적이 없는 이 회사의 간부들은 겨우 샘플구입을 의뢰하기 위해 며칠 후 기꺼이 나와 같이 도쿄행 비행기에 올라 주었다. 나리타 공항에는 미리 부탁해 둔 리무진을 가지고 상사가 마중을 나와주었고 그 날 밤 우리는 긴자에서 짐을 풀고 기분 좋은 저녁을 먹었다.
그 다음날엔 우리회사의 사장과 각 부서의 사업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격적인 미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공장 견학 끝나고 다시 앉은 회의실 책상 위에는 불가능하다던 샘플 수출 견적서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의 간부들은 처음이라 긴가 민가 했지만 그 날 한국 사람들을 만나보고 신뢰할 만 하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우리는 그 날 기념 사진촬영을 하였다. 양국의 국기 준비에서 파티까지 모든 절차는 치밀한 상사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그 사진의 얼굴들은 그 후 한국의 내 사무실에 계속 걸려있게되며 이들이 바로 이 사업의 초석을 다진 주역들이라고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그 날의 저녁 만찬은 회의에 참석한 멤버 전원이 총 출석하여 한국에서 온 점잖은 신사들을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모두 양국 회사의 교류가 시작됨을 아이들처럼 기뻐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려는 진지한 모습들이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 사업은 이 후 IMF등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잠시 주춤하면서 아쉽게도 그 회사와는 인연을 계속할 수 없게 되지만 이미 한국 수출에의 물꼬가 터진 상황이었다. 그 후 또 다른 회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으며 얼마 전 국내 유수 회사에서 국책사업으로서 이 제품이 개발되었다. 경쟁업체가 생겼다는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시장의 확대된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고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감격스러운 일로 생각한다.
그간 그녀의 상사들은 모든 칭찬은 그녀에게 돌리고, 어려운 문제는 그들이 도맡아 해결해 주고 떠나갔다. 시장개척의 훈장은 그들을 대신하여 늘 어리버리 그녀가 앞에서 받곤 했다. 이 사업을 통해 양국의 사람들이 척박한 현장에서 같이 고생하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풀어나갔다. 고마운 사람들, 잊지 못할 많은 사람들, 나는 언제까지나 생생하게 그들을 기억하며 후배들에게 그 멋진 활약을 말해 줄 것이다.
그 때의 그 최부장님은 현재 그 기업의 사장이 되어있다. 올 봄에 그 회사의 김부장이 내게 연락을 해왔다. 업계신문에 난 그녀의 인터뷰를 보고 그 쪽 사장님이 꼭 통화하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영업을 하신 거에요?” 그냥 하하 웃었다.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이럴 때일 것이다. 감동의 순간, 바로 내가 좋아하는 그런 순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벅차는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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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 [칼럼20] 도요새의 비상 [2] | 素田최영훈 | 2007.08.05 | 40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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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 우리 순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 [3] | 교정 한정화 | 2007.07.30 | 27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