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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28일 08시 39분 등록

#1. 새벽을 걷다. _ 서울, 오전 3 : 30

새벽을 걷는다. 썩어빠진 이빨 마냥 삶이 통째로 뒤흔들려. 잠 못 이루고 새벽을 걷는다. 검은 하늘에 별이 한 두 개 쯤. 겨우 돋아나 있는. 가끔씩 생각난 듯. 귀뚜라미 우는 8월 말의 답답한 새벽을 걷는다. 사는 게 무엇이더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헛된 질문들과 함께. 한없이 깊이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약삭빠르게 즐기지도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삶이. 나를 통째로 뒤흔든다. 미지근한 물에 제대로 녹지 않은. 커피믹스 알갱이처럼. 서걱거리는 씁쓸한 새벽을 걷는다. 많이 보고 싶었는데. 쓸쓸하다는 혼잣말을 뒤로 한 채. 사는 게 참 슬픈 일이라는 울먹임을 외면한 채, 휘청거리는 새벽을 걷는다.

#2. 바람 소리를 듣다. _ 몽골, 오전 11: 20

홀로 들판에 서서. 바람 소리를 들었다. 흙먼지 냄새와 함께. 고요한 풍경과 함께. 바람 소리를 들었다. 구름은 덧없고. 하늘은 끝없다. 홀로 언덕에 올라 바람 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그 곳에 서서. 바람 소리를 들었다. 귓볼을 스치는 몽골의 그리운 바람 소리가 내 영혼을. 뒤흔들었다. 맑은 풍경 소리처럼 나를 일으켜 세웠다. 땅은 끝없고, 마음은 투명하다.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 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선도 없었다. 삼각형도. 사각형도 없었다. 경계가 없었다. 온통 사방 천지에. 한계란 없었다. 영원한 세상도 없었다. 내가 전부인줄 만 알았던 세상 따윈. 그곳엔 존재하지 않았다. 쓸쓸한 길 위의 노래. 깨어나지 못하고 스러져간 것들의 노래. 모든 것들을 날려보내는. 거친 자유의 노래를 들었다. 한없이 고요한 지평선 너머. 새하얀 뭉게구름을 스치던 푸른 바람 소리를 들었다.

#3. 말을 달린다. _ 몽골, 오후 3 : 15

온 몸을 뒤흔드는 탱탱한 진동과 함께. 말을 타고, 바람을 가른다. 온 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말을 내달린다. 찰싹 찰싹. 물결치듯 경쾌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초원을 가로 지른다. 츄우, 츄우, 츄우, 말을 내달린다. 츄우, 츄우, 츄우, 나를 내던진다. 츄우. 츄우. 츄우. 무난한 삶을 폐기한다. 츄우, 츄우, 츄우, 길들여진 삶을 집어 던진다. 하나, 둘, 내던진다. 나를 둘러싼 일상의 껍질들을 날려 버린다. 츄우, 츄우, 츄우, 시원하게. 속 시원하게. 끝없는 그 곳을 내달린다. 츄우, 츄우, 츄우,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를 향해. 말을 내달린다.

#4. 날이 저문다. _ 몽골, 오후 6 : 50

아직 시간은 있겠지. 하고 걸어온 길의 끝. 어느새 날이 저문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날이 저문다. 감히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의 끝. 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까. 하는 질문의 끝. 감히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의 끝.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하는 망설임의 끝. 어느새 날이 저문다.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는데. 이미 날은 저문다.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나의 전부가 되어. 저 길의 끝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빨래들처럼 흩날린다. 미처 살아보지도 못한 날들이. 삶의 전부가 되어. 서서히 오늘의 커튼을 내린다. 동그란 게르를 붉게 물들이며 날이 저문다.

#5. 그 곳을 그린다. _ 서울, 오후 7 : 10

아직 돌아오기도 전에 이미 그리워졌다. 서울과 몽골 사이, 가득함과 텅 빔의 간극이 너무나 컸다. 일상과 자유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컸다. 답답한 공기가 나를 숨막히게 했다. 일상의 쳇바퀴들이 나를 답답하게 했다. 떠난 후에야 내가 길들여져 있음을 깨달았다. 돌아오기도 전에 내가 그 곳을 무척 사랑했음을 깨달았다.

그립다. 어딘가 정겨운 사람들. 그들의 순박한 웃음, 로빈 후드의 숲 속, 헬렌 강에 반짝이던 햇살, 혼자서 헤매던 표지 없는 광활한 초원, 쉴새 없이 고개들 끄덕이던 말들, 속력을 내기 위해 말이 박자를 바꾸던 바로 그 순간, 힘껏 내달린 후 땀에 흠뻑 젖은 갈색 털, 한없이 고요한 풍경 속을 스쳐 지나가던 바람 소리. 로드무비처럼 쓸쓸한 길 위의 풍경들. 동화책 속 그림처럼 아름다웠던 어느 날 저녁. 꿈결처럼 떨어져 내리던 별똥별. 나를 비쳐주던 거울 같은 사람들. 짧고 달콤한 낮잠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몽골의 나날들이. 많이. 그립다.

#6. 멈추지 않는 떨림 _ 서울, 오전 3 : 05

나는 보고 들었다. 나는 느꼈다. 몽골의 고요한 풍경과 그리운 바람소리를 마음껏 즐겼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몸 안에 울려 퍼진 진동이 그칠 생각을 않는다.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어쩌란 말이냐. 어쩌란 말이냐. 대체 날 더러 어떡하란 말이냐.

길 위의 삶, 황야의 삶에서 돌아온 뒤, 내가 영원한 세상이라고 믿었던, 전부라고 믿었던 세상이 다른 사람이 그어놓은 경계선일 뿐임을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 정한 한계일 뿐임을 비로소 알았다. 그 동안 살아왔던 익숙한 세상을 툭, 한번 쳐다보았다. 그 어디에도 벽은 없었다. 한계는 없었다. 마음이 정한 경계가 내 삶의 테두리였다. 그 뿐이었다.

텅 빈 그곳. 광활한 몽골의 초원에서. 영원히 푸른 끝없는 하늘 아래서. 나는 이렇게 살도록 태어났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사람임을 느꼈다. 나와 맞지 않는 삶을 살래야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알았다. 내 안의 꿈틀거리는 가능성을 보았다. 이제 나는 내가 정한 한계를 벗어나려 한다. 주위에서 그어놓은 내 삶의 굴레를 넘어서려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상자가 내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 상자 밖 세상을 한번 성큼성큼 걸어볼까 한다.

나는 떠날 것이다. 이미 알았으므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나의 삼십대는 그렇게 내달리며 살 것이다. 나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바람처럼 말을 달리며 내 삶의 지평선을 사정없이 뒤흔들 것이다.

유랑을 향한 오랜 갈망이 솟구쳐
관습의 굴레를 못 견뎌 하더니,
겨울잠에 빠진
야성을 다시 일깨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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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 런던, 야성이 부르는 소리 中

IP *.249.1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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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곤
2007.08.28 16:45:59 *.179.222.162
도윤의 뽕맛이 느껴진다. 글에서도 너 후까시 잡을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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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8.28 22:08:56 *.70.72.121
침묵하고 있다가 한 방에 날려버린 도윤의 저력(?)에 누이들은 흐믓했다. 그리고 아무도 생살이 들어난 새신랑 도윤의 초원의 벌판 같은 넓은 가슴을 움켜쥔 그의 등짝을 더는 넘보지 못하였다.^^ 야! 너무 멋져~ 알라뷰 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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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8.29 07:30:53 *.72.153.12
고요와 바람을 즐길 줄 아는 멋진 넘.
질주를 즐길 줄 아는 멋진 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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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8.29 13:36:36 *.249.162.56
병곤형, 죄송합니다. 글이 너무 무겁죠.. ^^;;

써니 누나 & 정화 누나, 멋지다니 황송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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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8.29 23:19:28 *.109.92.138
글이 참 도윤스럽다.(좋은 의미야~) 너랑 말타고 초원을 달리던 그 순간이 자꾸 생각난다. 또 한 번 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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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007.08.30 11:34:07 *.231.50.64
도윤아, 왜 니글을 읽는데 슬프지? (나 울고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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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
2007.08.31 11:51:12 *.134.133.166
이 글을 읽으니 형이랑 단둘이서 울란바타르의 호텔 테라스에 서서 야경을 바라보았던 때가 기억납니다. 그 때, 형이 했던 말도 떠오릅니다. 서로 다르기에 더욱 좋은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좋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우정도 서서히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제 방 탁자 위에 올려 둔 바나나가 익어가는 것처럼 빠른 속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관계가 무르익어간다면, 그저 좋은 것 같네요. (나도 울고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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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9.01 15:28:02 *.60.237.51
저는 이번 여행에서 소중한 거울을 얻었습니다. 어딘가 닮았지만 서로 다른 거울들, 바로 여러분입니다.

종윤이형, 저도 셋째날, 신나게 말을 달려 집으로 돌아오던 그 몽골의 오후가 잊혀지질 않네요^^

소라누나, 몽골 구름빵 이야기 잘 읽었음.. 나도 이제 힘을 좀 빼볼까? 물론 쉽지 않겠지만.. ^^

희석아, 그 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나는 조금 슬픈 기분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변덕이 심하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란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너를 좋아하고 있으니, 네 말처럼 서서히 익어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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