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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27일 10시 33분 등록
"아얏!"

발바닥이 따끔한가 싶더니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이에 아픔이 잦아들었습니다. 초원의 한 켠에 펼쳐진 물줄기를 따라 첨벙거리고 놀아대는 재미는 그까짓 발바닥의 꼼질거리는 아픔 따위는 쉽사리 잊게 만들었습니다. 몽골의 드넓은 초원과 투명한 강물은 발에 생긴 조그만 상처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저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몽골에 대한 별다른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저 칭기즈칸에 대한 책을 한 권 읽었고, 여행사에서 오신 어떤 분께 간단한 설명을 들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나마 읽은 책은 이미 머리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졌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지명들은 뜬구름처럼 뒤섞여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번 몽고 여행은 좋은 사람들과 불편한 어딘가로 떠나는 이색적인 경험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전부였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지금도 저 건너편 게시판에서는 드넓고 순수한 몽고의 풍광들이 여러 사람의 색에 따라 낱낱이 펼쳐지고 있으니 거기에 이런저런 감탄을 덧붙이는 것은 이 번 글에서는 하지 않으렵니다. 그저 제 짧은 글로 몽고에 대한 기억을 조금 되살려보자면, 몽고의 초원은 고요했습니다. 너무나도 고요한 그 사이로 각각의 존재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새소리도 벌레소리도 없는 그 넓은 초원에서는 바람도 숨을 죽였습니다. 그저 내가 걷는 소리가 나의 존재를 알려주었고, 멀리 떨어진 다른 사람의 존재가 더욱 가까이 와 닿았습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이번 몽고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내내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몽고에서 발표하게 될 과제에 대한 부담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은 책 이야기를 주로 했었는데, 이제 나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강점'과 '기질'이라는 다소 무겁고 투박한 주제는 몽고의 맑은 자연과 그다지 쉽게 어울리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매번 그랬듯이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을 먹었던 나의 짐작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박살이 났습니다.

우리는 매일 적게는 한 명에서 많게는 세 명까지 자기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조금씩 어색하고 수줍게 시작되었던 우리들의 이야기는 밤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낮 동안에는 눈부신 햇빛 속에서 말을 타고 초원을 누볐던 우리들이 별빛이 쏟아지는 몽고의 게르 안에서는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귀 기울이고 보듬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웃음을 터트렸고, 또 때로는 울먹이기도 했습니다. 예리한 질문은 날카롭게 빈자리를 파고들었고 대답해야 할 이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서로의 좋은 점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고 그렇게 발견된 좋은 점들은 서로를 흐뭇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그 자리에서 묘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각자가 타고난 기질을 가지고 강점으로 발전시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에 순간순간 우리의 상처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모순과 불일치가 돌출되었습니다. 강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아픔들이 치유가 필요하다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강점과 기질에 덧붙여 상처와 아픔을 확인해가는 중에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털어놓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목이 턱 하니 막혀왔습니다. 코 끝이 간질간질해지는가 싶더니 눈으로 무언가 기운이 확 몰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쉬는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털어놓고 울컥거리기를 여러 번 반복한 끝에야 겨우 제 이야기를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스운 모양새로 제 이야기를 털어놓은 덕에 저는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충전 받았고 불끈거리는 용기도 생겼습니다. 물론 제가 안고 있던 고민과 상처가 그 자리에서 다 치유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한결 가슴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자리했던 그 녀석의 정체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물놀이를 하다가 발바닥에 생긴 상처는 아주 조그만 것이었습니다. 바늘로 살짝 찔린 듯한 상처는 가시가 박힌 듯이 따끔거렸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때때로 양말을 벗고 발바닥을 코 앞까지 끌어 당겨 살펴보았지만 가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발에 상처가 생겼다는 소리에 여러 사람이 달려 들었지만 별다른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테를지의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핀셋까지 동원해 이리저리 헤집어 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습니다. 많이 아픈 것도 아니었고 계속 거슬리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조그만 상처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때때로 저를 귀찮게 했습니다. 평상시에는 잘 모르다가 어느 순간 불쑥 불편한 통증을 주었습니다. 잊을 만하면 한번씩 저를 괴롭혔습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지난 밤에 조금 독한 마음을 먹고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스탠드를 밝게 켜고 날카로운 손톱깎이를 상처 부위에 들이 댔습니다. 발바닥에서 통증이 느껴졌지만 조금 더 안쪽으로 힘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무언가 조그만 것이 톡 빠져 떨어졌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래알처럼 생긴 작은 돌 조각이었습니다. 순간 일주일이 넘게 느껴지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편안해졌습니다.

마음에 생긴 상처를 발바닥에 박힌 작은 돌 조각처럼 단번에 뽑아낼 수는 없을 지도 모릅니다. 몽고의 밤하늘 아래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그 아픔과 상처들을 손톱깎이나 핀셋으로 쉽사리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조금 아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문득문득 떠올라 가슴 한구석을 아프게 하는 상처를 그냥 놓아두기엔 어쩐지 개운하지가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가슴에 작은 상처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나요? 소란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틈에서는 잘 보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문득 떠올라 가슴을 아프게 하는 작은 생채기들.

가벼운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털어놓을 사람을 찾아보세요. 수다에는 치유의 힘이 숨어있습니다. 가슴 속 상처를 주절주절 쏟아내다 보면 그 상처의 존재가 문득 선명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그다지 깊거나 치유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은 항상 혼자의 몫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상처를 짧은 글에 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곱게 적은 종이를 다시 곱게 접어서 높은 곳에 올라 훌훌 날려보는 건 어떨까요? 아니면 예쁜 꽃무늬 접시에 담아 활활 태워보는 건 어떨까요? 스탠드 불빛을 환하게 밝히고 손톱깎이를 조금 깊숙이 쑤욱 밀어 넣으면 뜻 밖에 모래알만한 상처 조각이 툭 빠져나올 지도 모릅니다.

가슴에 모래알처럼 박힌 상처가 있다면 한번쯤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IP *.22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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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8.27 11:46:20 *.75.15.205
늘 의젖한 종윤의 목이 메이던 순간이 아직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아요.
늘 아우들을 챙기고 그리고 누이들과 형들에게까지 심성 곱게 다가서는 그대는 강점 발견과 기질에 이어 꿈 풍광 그 자체라오. 언제나 넉넉한 그 품에 주원이와 주원 엄마와 부모님 그리고 가족 들이 함께하지요. 그리고 진짜 진짜 변.경.연 식구들까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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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007.08.27 12:11:11 *.231.50.64
종윤오빠, 말하던 것을 멋지게 써냈네.
난 결국 구름빵은 써내지 못했어.. ㅋㅋ
이번 칼럼이 정말 나에게도 위로가 된다.
그리고 수다의 힘을 믿고 앞으로도 열심히 떠들어 보자구..
새삼스레 더 고마운걸~~^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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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08.27 12:31:43 *.244.218.10
그랬군요..기억나요.
발바닥을 아프게 한 것 그 모래알이였군요. 그리고 결국 뺐군요.

나도... 열심히 떠들고 열심히 써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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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8.27 13:30:15 *.249.162.56
저는 형이 발표를 시작하자, 눈에 뭔가 들어간 듯 계속 불편해서 게르를 빠져 나왔습니다. 언이에게 빌린 안약을 한 두 방울 넣고서, 쏟아질 듯 아름다운 몽골의 별밤을 올려다 보며 캄캄한 초원을 서성이며 형의 발표를 들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였는데, 무엇이 제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저도 엄지 발가락에 박혀 있던 몽골의 작은 돌조각 하나를 빼냈습니다. 이상하게 상처가 아물지 않고, 어딘가 불편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까만 돌 조각 하나가 남아있더군요. 힘을 주어 쿡, 빼내고 나니 편해졌습니다. 돌을 빼내어야 상처가 아무나 봅니다. 마음이 담긴 차분한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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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8.28 07:24:10 *.72.153.12
돌도 참 차분히 빼네.
요란떨며 죽네 사네 하며 빼내는 사람도 있는데, 쫌 챙피하네.
발바닥의 아픔도 돌을 빼내는 것도, 결국은 그 아픔을 가진 사람의 몫이라는 것에 공감. 그러니, 우리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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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곤
2007.08.28 16:44:47 *.179.222.162
네가 목이 턱 막힐 때 난 깜짝놀랐다. 종윤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거든. 상처가 수다로 치유된다고 말하는 걸 읽으니 이제서야 이해가 되네.ㅋ 좋다. 일상의 작은 것에서 길어올린 통찰력있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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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8.28 21:03:42 *.86.177.103
상처가 있기에 치유책을 생각할수 있는것, 그러나 상처의 고통으로 밤하늘을 바라볼 때 별이 더 빛나는 때가 있더라. 넉넉한 모습이 좋다. 우리가 서로 비집고 들어갈 틈들이 있어서 더욱 좋다. 좋은 글이 있어서 더더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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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8.29 14:50:13 *.227.22.57
써니누나~ 의젓하다고 하니 다음부턴 못 울겠네~ ㅎㅎ 고마워요.

소라~ 고맙다고하니 몸둘바를 모르겠군. ㅎㅎ 근데 다시 읽어보니 문장을 못다듬어서 온통 서걱거린다. 암튼, 우리 수다의 힘을 믿어보자구~ 그리고 나한테 해준 강점 얘기 잘 기억하고 고민해볼께.

민선~ 그래. 태를지의 게르앞에서 내 발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봐주던 너를 보면서 살짝 당황했던 생각이... ㅎㅎ 그땐 그렇게 안보이더니 결국은 쑥! 뺐지. 열심히 떠들고 열심히 쓰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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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08.29 14:54:35 *.227.22.57
도윤~ 그래. 그 강점 발표 끝나고 네가 해준 얘기도 오래두고 고민하고 잘 정리해볼께. 고맙다.

정화~ 차분하긴... 얼마나 아프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뺐다고~ 그래그래. 응원하고! 격려하자! 힘내~

뱅곤형~ 형이 해주는 통찰력이라는 말에 움찔! ㅎㅎ 몽고 다녀오고 형에 대해서 조금더 알게 되어 좋네요. 맨날 말로만 했는데... 동네에서 함 봐요~

정희누나~ 정말 같이 못가서 아쉬웠네요. 상처의 고통으로 더 빛나는 별이라... 그러고 보니 그날 발표하고 게르를 빠져나왔을 때 하늘에서 쏟아지던 별 생각이 나네요. 고맙습니다. 다음주 수업때는 우리 만나겠죠? 오래 못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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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언
2007.08.30 22:10:52 *.128.229.198
사람들은 살면서 저마다 몇개씩의 모래알을 가슴에 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는 가장 평화로운 순간, 내부로부터의 통증과 균열을 자아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모래알에 대해 말을 하면, 빼내는 순간은 너무도 고통스러워 눈물콧물뿐 아니라 마음으로 비명을 지릅니다. 그리고 때로는 모래알이 너무 커서 몇번이나 그렇게 고통스러운 작업을 해야, 진정이 됩니다. 종윤 오라버니 글을 읽고 나니 모래알에 대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아직도 제 마음 속에는 아직 채 빼내지 못한 모래알들이 알알이 그 모서리를 날카롭게 세우며 제 무른 마음 속을 사정없이 찔러댑니다. 그것들을 모두 놓을 수 있는 용기를 어서 내었으면 좋겠어요. 이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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