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素現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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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존재 의미와 나아갈 길1
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한지 3년째, 나의 어수선한 책상 앞에 메모지 사이로 뺴곰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나만의 사명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꿈꾸는 몸, 춤추는 마음”이다.
나는 “꿈꾸는 몸, 춤추는 마음”이 살아 숨 쉬는 공간과 사랑에 빠졌다.
나는 이 공간을 통해
사람들이 삶을 자유롭게 꿈꾸고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며,
함께 어우러져 즐기는 일에,
나의 심장이 멈추는 날까지 투자한다.
상담소에 처음 출근을 하던 날, 춤으로 여성운동을 꿈꾸던 나와 굳게 약속했던 한 장의 서약서다. 그 공간이 존재하기에 하루하루의 상담과 다양한 활동이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살아지는 과정이라는 믿었다. 안철수의 책을 덮으며, 나는 내 기업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초점보다 나만의 공간이 존재하는 이유와 나아갈 길에 대해 원점으로 돌아가 성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명서에 농축된 꿈의 원액이 나의 물의 강점과 만나, 어떤 맛과 빛깔의 물로 재구성 될지,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어눌하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돌아보고 싶었다.
나의 공간은 ‘꿈, 몸, 마음’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앞의 키워드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연구하는 장이며, 함께 나누는 공간이다.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이며, 그 중에서도 여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자의 정체성을 넘어 자신을 찾고, 더불어 소수의 가해자들이 범죄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항해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내가 공간을 처음 만들 때의 초점은 ‘균형’이었다. 나의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균형’이라는 눈이 존재한다. 센타는 사회구조를 통해 개인의 변화를 꿈꾸는 동시에, 개인의 변화를 통해 사회 변화를 꿈꾸는 공간이다. 이 두개의 움직임은 똑같은 속도로 맞물려 톱니바퀴처럼 움직이고 있다. 사회를 통해 개인의 변화를 꿈꾸든, 개인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꿈꾸든 그 속도는 언제나 같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균형’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는 개인의 역사적 세계와 절대적 세계의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차원의 세계를 모두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지향하는 ‘역량강화’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죄와 벌,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는 역사적 세계를 인식함과 동시에, 내면의 진정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승화되는 절대적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균형이며, ‘여기 나있음’과 ‘이곳 나 되어감’의 균형이다.
공간은 이 두 세계가 만나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역할 안에는 변화가 아니라 ‘기회제공’에 초점이 있다. 변화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생존자들이 변화해야만 한다?라고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다면, 그 당위성은 매우 위험한 것임을 상담소 활동을 통해 깨달았다. 그저 다양한 기회만을 제공한다. 나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가 아니다. 변화는 그들 자신이 하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믿음이 있다. 기회를 제공함에 있어 변화시키겠다는 당위성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나 또한 매순간 성찰이 필요하다. 당위성이 가진 힘은 너무 강력해서, 내가 있는 그대로 흐름을 바라 볼 수 있는 시각을 흐리게 하거나, 피해자를 평가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며, 가해자를 가슴깊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잃게 한다.
나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무너진다. 상담소에서 법개정 운동을 지켜보면서 가해자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는 처벌중심의 운동 방향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수많은 가해자와 잠재적 가해자들이 두렵고, 죄책감이나 수치심으로 행동을 변화시킨다면,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변화일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무언가 우리의 욕구가 이루어졌다고 믿을 때, 우리가 얻는 것은 오히려 폭력의 재생산 이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비난과 비판을 받을 때 더 공격적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무엇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된다. 사회구조가 문제라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가? 결국 우리 모두는 피해자가 아닌가.
‘가해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거나 구타하거나 폭력을 행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분노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피해자들은 분노의 책임을 가해자에게 돌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의 분노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가해자든 피해자든 변화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비판하거나 판단, 평가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충분히 그들을 공감해주어 마음의 문을 열수 있을까, 그들 스스로 자신의 분노의 원인과 자극의 차이를 어떻게 발견하고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킬 것인가.’ 나는 이 고민들을 심신통합(균형)의 이론과 실천으로 풀어보고자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였다. 공간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혼란스런 역동을 지켜보고 정리한다. 그것은 공간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의 실질적 사례로 자리 잡아 갈 것이다.
공간을 통해서 개인의 변화가 사회구조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를 희망했다. 개인이 가부장제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모델에서 자유로워져 본래의 자신의 개성과 감수성을 회복해 가는 것이다. 중심의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속에서 자기 자리를 보고, 개성 있는 목소리로 다른 자리에 있는 이들과 토론의 장, 공존의 장을 열어 가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진정한 평등, 존중, 상호성에 근거한 존재의 만남과 사랑, 그 사랑으로 우리 안에 병들어 있는 가부장적 여성성과 남성성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온전한 ‘나’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 관계 속에서 자신안의 신성을 깨달아가는 영혼의 진보, 이러한 사랑을 꿈꾸는 초월적 공간이기를 바랬다.
공간은 진정한 자기를 선택하는 과정을 위해 몸과 꿈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길 위해서 상대성의 세계를 균형 있게 양손에 쥐고, 절대적 세계에서 우리는 ‘선택하는 나’로 존재하기 위해 매일 춤을 추고 꿈을 꾸며 즐길 것이다.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뜻을 다해, 성품을 다해, 다해서, 다해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놀이를 할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도 자기가 되는 것이고, 수련을 하는 것도 자기가 되는 것이고,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것도 자기가 되는 것이고, 하고 싶은 일을 일으킨다는 것도 결국은 다 자기가 되는 길이니, 그 공간은 온전히 내가 되어 가는 길, 그 자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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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가 없죠?
계속해서 수정해야 할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짧게 시작해 봤습니다.
앞으로 좀 더 구체적이고 쉽게 다듬어 가야겠죠...^^
IP *.231.50.64
성폭력상담소에서 일한지 3년째, 나의 어수선한 책상 앞에 메모지 사이로 뺴곰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나만의 사명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꿈꾸는 몸, 춤추는 마음”이다.
나는 “꿈꾸는 몸, 춤추는 마음”이 살아 숨 쉬는 공간과 사랑에 빠졌다.
나는 이 공간을 통해
사람들이 삶을 자유롭게 꿈꾸고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며,
함께 어우러져 즐기는 일에,
나의 심장이 멈추는 날까지 투자한다.
상담소에 처음 출근을 하던 날, 춤으로 여성운동을 꿈꾸던 나와 굳게 약속했던 한 장의 서약서다. 그 공간이 존재하기에 하루하루의 상담과 다양한 활동이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살아지는 과정이라는 믿었다. 안철수의 책을 덮으며, 나는 내 기업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초점보다 나만의 공간이 존재하는 이유와 나아갈 길에 대해 원점으로 돌아가 성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명서에 농축된 꿈의 원액이 나의 물의 강점과 만나, 어떤 맛과 빛깔의 물로 재구성 될지,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어눌하지만 진정성을 가지고 돌아보고 싶었다.
나의 공간은 ‘꿈, 몸, 마음’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앞의 키워드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연구하는 장이며, 함께 나누는 공간이다.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이며, 그 중에서도 여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자의 정체성을 넘어 자신을 찾고, 더불어 소수의 가해자들이 범죄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찾아가는 항해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내가 공간을 처음 만들 때의 초점은 ‘균형’이었다. 나의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균형’이라는 눈이 존재한다. 센타는 사회구조를 통해 개인의 변화를 꿈꾸는 동시에, 개인의 변화를 통해 사회 변화를 꿈꾸는 공간이다. 이 두개의 움직임은 똑같은 속도로 맞물려 톱니바퀴처럼 움직이고 있다. 사회를 통해 개인의 변화를 꿈꾸든, 개인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꿈꾸든 그 속도는 언제나 같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균형’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는 개인의 역사적 세계와 절대적 세계의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나는 두 가지 차원의 세계를 모두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지향하는 ‘역량강화’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죄와 벌,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는 역사적 세계를 인식함과 동시에, 내면의 진정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승화되는 절대적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성과 남성성의 균형이며, ‘여기 나있음’과 ‘이곳 나 되어감’의 균형이다.
공간은 이 두 세계가 만나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역할 안에는 변화가 아니라 ‘기회제공’에 초점이 있다. 변화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생존자들이 변화해야만 한다?라고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다면, 그 당위성은 매우 위험한 것임을 상담소 활동을 통해 깨달았다. 그저 다양한 기회만을 제공한다. 나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가 아니다. 변화는 그들 자신이 하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믿음이 있다. 기회를 제공함에 있어 변화시키겠다는 당위성이 아닌,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나 또한 매순간 성찰이 필요하다. 당위성이 가진 힘은 너무 강력해서, 내가 있는 그대로 흐름을 바라 볼 수 있는 시각을 흐리게 하거나, 피해자를 평가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며, 가해자를 가슴깊이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잃게 한다.
나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무너진다. 상담소에서 법개정 운동을 지켜보면서 가해자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는 처벌중심의 운동 방향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수많은 가해자와 잠재적 가해자들이 두렵고, 죄책감이나 수치심으로 행동을 변화시킨다면,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변화일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무언가 우리의 욕구가 이루어졌다고 믿을 때, 우리가 얻는 것은 오히려 폭력의 재생산 이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비난과 비판을 받을 때 더 공격적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무엇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된다. 사회구조가 문제라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는가? 결국 우리 모두는 피해자가 아닌가.
‘가해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거나 구타하거나 폭력을 행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분노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피해자들은 분노의 책임을 가해자에게 돌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신의 분노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가해자든 피해자든 변화를 강요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비판하거나 판단, 평가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충분히 그들을 공감해주어 마음의 문을 열수 있을까, 그들 스스로 자신의 분노의 원인과 자극의 차이를 어떻게 발견하고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킬 것인가.’ 나는 이 고민들을 심신통합(균형)의 이론과 실천으로 풀어보고자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였다. 공간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혼란스런 역동을 지켜보고 정리한다. 그것은 공간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의 실질적 사례로 자리 잡아 갈 것이다.
공간을 통해서 개인의 변화가 사회구조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를 희망했다. 개인이 가부장제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모델에서 자유로워져 본래의 자신의 개성과 감수성을 회복해 가는 것이다. 중심의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전체 속에서 자기 자리를 보고, 개성 있는 목소리로 다른 자리에 있는 이들과 토론의 장, 공존의 장을 열어 가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진정한 평등, 존중, 상호성에 근거한 존재의 만남과 사랑, 그 사랑으로 우리 안에 병들어 있는 가부장적 여성성과 남성성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온전한 ‘나’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 관계 속에서 자신안의 신성을 깨달아가는 영혼의 진보, 이러한 사랑을 꿈꾸는 초월적 공간이기를 바랬다.
공간은 진정한 자기를 선택하는 과정을 위해 몸과 꿈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길 위해서 상대성의 세계를 균형 있게 양손에 쥐고, 절대적 세계에서 우리는 ‘선택하는 나’로 존재하기 위해 매일 춤을 추고 꿈을 꾸며 즐길 것이다.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뜻을 다해, 성품을 다해, 다해서, 다해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놀이를 할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도 자기가 되는 것이고, 수련을 하는 것도 자기가 되는 것이고,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것도 자기가 되는 것이고, 하고 싶은 일을 일으킨다는 것도 결국은 다 자기가 되는 길이니, 그 공간은 온전히 내가 되어 가는 길, 그 자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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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가 없죠?
계속해서 수정해야 할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짧게 시작해 봤습니다.
앞으로 좀 더 구체적이고 쉽게 다듬어 가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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