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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런 나의 영웅
산방의 아침은 길기도 하다. 태양이 몸을 쓰다듬는 느낌에 눈을 떠 넋놓고 바다같은 하늘을 누린다. 아, 이 부드러운 느낌이 저기 저 바다가 품고 있는 태양의 손길이라니. 일상에서 흐트려놓았던 온 몸의 기운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조용한 기쁨에 감히 오체를 방바닥에서 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더 이상을 기대할 이유가 없을 만큼 만족스러운 정렬이 찾아온 이후에야 조심스레 몸을 돌려 또 한참을 머문다. 비로소 일어나 앉는다. 분홍과 초록이 예쁘게 섞인 탁 트인 시계가 크루즈에서나 만날 법한 로맨틱한 바다를 절반쯤 밀어올린다. 환호해야할지 탄식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눈동자에 들어온 풍경의 우열을 가려야할 이유가 있을 리가 없건만 어쩔 줄 몰라하는 삶의 관성이 귀엽다. 나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산이 움직이는 소리에 이끌려 마루문을 열고 데크로 나왔다. 그가 시원스레 기지개를 켜는 것을 보고 '아하!'했다. 그래서 요가의 그 자세를 '다운독'이라고 부르는구나. 수강생을 의식했건 걸까? 산이 다시한번 또박또박 시연을 한 후 턱을 바닥에 얹고 그만의 명상에 든다. 나도 더불어 평화를. 일부러 주문하려 했다면 이 미묘한 디테일을 배치하는데만도 한참을 끙끙거렸어야할 절묘한 아름다움들 안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하기만 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 걸까? 감은 눈의 스크린 위로 어젯밤의 시간들이 흘러간다. 어미짐승이 다친 새끼를 핥아주듯, 도저히 그 이상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세심하고 정교하게 제자들의 마음결을 골라주던 그의 얼굴에서 한참을 머무는 카메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미 물안에 있으면서도 목이 타들어간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그들이 그는 얼마나 안스러울까? 틀림없이 함께 타고 났을 그 감각을 도무지 찾아내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애처로울까? 제 힘으로는 물 한모금 넘기기 어려워하는 새끼들을 위해 온 몸으로 길어올린 양분을 하나하나 입에 넣어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 놀라운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도 같다.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리 애를 써봐야 양분은 딱 본인의 기력만큼만 흡수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아니 흡수는 고사하고 몸 안으로 제대로 집어넣기 조차 어렵다는 것을. '하지만 이것이 어찌 효율을 셈해 하고 말고를 결정할 할 수 있는 일일까? 내 미처 느껴내지 못하던 그 긴 시간을 단 한마디의 불평없이 기다려준 자연 앞에서 어찌 내 정성의 대가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도 백만번쯤 같은 깨달음을 되풀이하고야 어제 내가 만난 모습의 스승으로 익어왔는지도 모르겠구나.
다시 마루문을 열자 몸에 닿는 온기와 장작 내음이 새삼 포근하다. 어제 이 맘때는 상상으로도 알 수 없던 느낌. 몸은 더없이 상쾌하고 영혼 또한 충만하기 이를 데 없다. 이 뿐이어도 아쉬움이 있을 리 없건만 창을 살짝 여는 순간 와락 안겨오는 비를 머금은 산바람, 불내음을 품은 온기와 시원한 바람이 절묘하게 어울려 만들어낸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속에서 넘기는 책장 소리란. 집에서 읽을 때는 도무지 뭔소린지 들어오지 않던 시인의 목소리가 별안간 가슴을 파고들어 오는 것은 우연이었을까.
문, 혹은 벽 한 시절 밀고 나갔던 길을 문이라 생각했다 이곳과 저곳의 경계가 분명했을 때였다 그 경계의 사이에 문은 언제나 빗장이 완강했다 문을 지탱하는 것이 벽이었다니 이곳과 저곳의 그 일치할 수 없는 벽이 다리에 이르는 것이었다니 어제의 날들이 오늘을 지켜준다니 이제 누구도 쓰러진 길을 일으키지 않는데 죽은 자들은 옛일처럼 산에 오른다 그리하여 모든 것들은 흐르므로 변하지 않고 다만 쓰러진 먼 별들이 젖은 불을 밝히는 밤이다 길은 아득하고 목을 놓는 밤이다 박남준 시집『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중에서 |
놓여있던 시집 말고도 갖고 온 책, 그것도 무려 이 공간에서 쓰여진 바로 그 책을 거의 다 읽고 일어나 아침채비를 마치고 앉았는데도 채 아홉시가 되지 않았다. 시계 안의 태엽을 감는 요정도 산방의 아침을 즐기느라 일을 잠시 쉬고 있는 걸까? 시간요정의 일손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만큼 황홀한 시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만 느낄 수 있다는 그 신비로운 시간의 흐름을 나도 드디어 경험하고 있는 건가? 어제의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센서를 또 한조각 나에게 선물하는데 성공한 거구나!
어제 아침,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를 백만개쯤 읊어대는 용의 머리를 치지 않았더라면. 예약된 방에서 뜻하지 않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을 때 그러게 내가 뭐랬냐며 마을로 내려가 콜택시 번호를 따던 그 괴물의 배를 가르지 못했더라면. 속으로 전쟁을 치르느라 제풀에 만신창이가 된 몸을 가누느라 폐를 무릅쓰고 산방에 잠시 몸을 뉘었다 나오는 밤길위, 다음달 수업 윤곽도 얼추 잡혔고 궁금하던 산방구경까지 했으니 지금이라도 돌아 가자며 집요하게 꼬셔대던 여신의 달콤한 유혹을 물리칠 수 없었더라면. 결코 얻지 못했을 보물이었다. 그리고 무사히 나의 세계로 돌아와 그 보물을 다시 한번 만끽하고 있는 지금, 내 영웅의 위대한 귀환을 의심할 이유가 있을까?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45면
쑥스럽긴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의 영웅, 기대했던 것보다 백만배쯤 더 사랑스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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