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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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스민 문학] 효과 빠른 진통제
안녕하세요? 마음편지 여러분.
일본인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환갑을 바라보는 영문과 교수님입니다. 우리가 친구가 된 것은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뉴욕의 한 교실에서였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당시 잘 나가는 대학 입시 강사였고,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강사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전환하여 낯선 도시인 뉴욕에서 저와 수업을 들었습니다. 저보다는 스무 살이나 많아서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저희는 뉴욕의 거리를 함께 방황하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불을 밝히기도 하고, 밥을 같이 먹으며 서로를 격려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은행에 가서 자신의 자금을 체크하고, 방학 때는 일본으로 돌아가 단기 입시강사를 해서 다시 돈을 모은 후에 다음 학기에 등록하는, 참 어려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학위를 마친 후, 그는 영국으로 가서 다시 공부를 하였습니다. 가끔씩 이메일을 주고받는 이 친구는 한국에 학회 방문차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이해인 수녀님께서 <일본인이 쓴 한글 서예전>이라는 행사에 저를 초대 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께서 보내주신 행사 소개 동영상들을 보니, 일본분들께서 서예로 직접 수녀님의 시를 쓰기도 하고, 낭독도 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인터뷰에서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내 마음은’을 썼어요. 작년에 일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문제로 여러 가지 사건이 있어서 제가 의기소침했을 때 읽고 마음이 두근거려서, 읽으면서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키우는 말’을 골랐습니다. 아이들일 자랄 때 칭찬을 많이 못해줘서, 말이라는 건 정말 중요하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일할 때도 마음이 예쁜 사람은 자연스럽게 예쁜 말이 나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또 예쁜 말로 말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말로 말하는 것이 같은 여자로써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시를 읽고 공감했기 때문에 이 시를 골랐습니다.”
아쉽지만, 저는 그 행사에 가기로 약속을 드렸으나, 그날 오후부터 통증이 심해져서 몸을 움직이기 힘든 상태가 되었습니다. 문자 한 줄 보내기도 어려워서 참석이 어렵다는 말씀조차도 하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후에 수녀님께서는 행사의 사진들을 보내주셨는데, 제가 오길 기다리셨다며 손수건에 싼 책 한권을 준비해두셨는데, 전달해주지 못해 아쉬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쓴 책이 외국어로 번역이 되고, 제가 쓴 문장을 다른 언어권 사람들이 아름다운 서예에 담아 읽고 낭송하는 느낌은 어떨까요? 앞서 말씀드린 제 친구인 일본인 교수에게 이 행사를 이야기하며, 저는 제 책<파산수업>을 선물했습니다. 물론,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된 책입니다. 한글을 모르는 친구에게 저는 각 챕터를 펼치며 영어로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제가 책에서 소개한 문학작품들의 대부분은 유명한 작품들이어서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친구는 저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닥칠 때 접하게 되는 아름다운 시 한 줄, 문학 작품 속 인물들을 이해하는 공감은 언어를 뛰어넘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이것만 가지고는 먹고살기 힘들다고 해서, 생활이 어렵다고 해서, 글을 쓰고 소통하는 것을 멈추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저에게 다가온 이 일들을 겪으며 밤에 통증이 찾아오면 저는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 인종과 생활이 다른 누군가가, ‘파산’의 늪에 빠졌지만, 저의 책을 읽고는 감동을 받았다는 이메일을 받게 되는 장면을요. 아, 이런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통증이 가라 앉는 느낌입니다. 그러고보니, 이것만큼 약효 빠른 진통제는 없는걸요?
정재엽 올림 (j.chung@hanam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