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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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저자연구
이 책의 저자는 고운기다. 일연이 <삼국유사>의 저자이지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의 저자는 고운기다. 얼핏 보면 책 제목의 총 글자수(공백 포함) 17자 중 '삼국유사' 단 네 글자가 차지하는 만큼의 지분만이 일연에게 있는 듯 하다(사실 책 안에 인용된 <삼국유사>의 원문 내용의 비중은 이보다 적다). 하지만 원류가 없었다면 아류가 생길수 있었겠는가? 저자연구의 중점을 일연에 두어야 하는 이유다.
일연
일연은 1206년 고려 희종 2년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김견명이다. 이 해는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때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홀어머니의 손에 양육되었으며, 1219년 그의 나이 14세에 설악산 아래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게 된다.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게 된다. 출가시 법명의 회연(晦然)이었으나 후에 일연(一然)으로 개명한다. 말년에 개명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개명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일연의 일一자는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숨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22세에 승과에 나가 장원으로 합격한 이후 몽골과의 전쟁으로 어지러운 시대 속에서도 수행생활을 계속하여,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 등의 직급에 차례차례 올랐다. 그가 처음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것은 그의 나이 44세, 경상도 남해의 정림사(定林社) 주지로 부임하면서다. 1261년(원종 2년)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일연의 수행과 학문의 깊이가 늘어가는 만큼 그 명성이 점점 퍼져 불교계에서는 일연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의 활동 범위는 이제 전국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다. 중앙 정계의 인물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각지의 사찰에 머물며 후학을 길러냈다. 그의 나이 76세에 충렬왕은 일연을 곁에 불러 자문하기도 하였다.
일연은 1283년 그의 나이 78세에 국사가 되었다. 종신직인 이 자리에 오른 이는 수도였던 개성에서 머물러야 했지만, 일연은 이듬해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麟角寺)로 은퇴하여, 5년 후 1289년에 8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이 시기에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연이 79세 때 고향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96세였다. 일연이 은퇴한 이유는 어머니에게 못다한 효를 다하고 싶어서였다. 열일곱 살에 낳은 아들을, 스물여섯 살에 떠나 보낸 어머니는 70년을 홀로 살았다. 일연은 그 어머니에게 죽기전 마지막으로 효성을 다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요 저서로는 『화록(話錄)』 2권,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祖派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
고운기
이 책의 저자이자 <삼국유사>의 역자인 고운기는 1961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었으며,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석·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 연구원(1999년~2002년 8월),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2004년),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객원교수(2007년 4월~2008년 3월)를 거쳐 2015년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 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고운기는 <삼국유사>의 전문가이다. 이 책을 제외하고도, <삼국유사> 번역본을 포함하여, <삼국유사> 관련 저서만 8권 이상이다. 그는 2002년 동저를 통해 삼국유사 읽기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일연을 묻는다(현암사)>, <길 위의 삼국유사(미래 M&B)>를 통해 삼국유사 3부작을 완성시켰다. 그가 삼국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대학시절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학위논문의 주제로 향가를 선택하면서부터였다. 향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위해 삼국유사와 일연에 대해 공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당시 많은 학자들이 해오던 문헌적인 연구 대신 현장 중심의 연구를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삼국유사의 무대가 되었던 사찰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산과 마을을 찾아다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학교 후배인 사진작가 양진과 수많은 곳을 직접 답사하며 엮은 수권의 삼국유사 관련 저서를 통해 삼국유사를 대중에게 보급하는 일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시집, 교양서, 학술 번역서 등 많은 저서가 있으며, 그 중 <삼국유사> 시리즈가 단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들어가며
p2
<삼국사기>의 '사'는 史이고 <삼국유사>의 '사'는 事라는 사실은 중학교에 올라와서 틀리는 문제였다
> 삼국유사의 '사'자가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정사로 취급되지 않는 것들은 권위가 없기 마련인데, <삼국사기>가 정사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와 그 인지도가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삼국유사>가 공인된 역사서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냥 옛이야기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야사'가 아닌, 우리 민족의 '생활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삼국사기>보다 그 가치가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p4
한문이라는 문자 수단의 이입은 그 문화를 송두리째 가지고 들어왔고,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던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름마저 거기에 기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고려 인종 23년의 일이다.
p8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삼국사기>같은 역사서로만, <고승전>같은 불교서로만 만족하지 않았던 듯 하다. 그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고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어떤 틀을 만들어 냈다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
p10
<삼국유사>는 분명 10세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나, 13세기의 일연이라는 인물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
> "과거에 대한 사실은 역사가가 그 사실에 부여한 중요성에 의해서만 역사상의 사실이 된다."는 E.H.카의 명언은 유효하다.
p12
10세기부터 고려사회는 중국적 유교사관으로 무장한 김부식과 같은 지식인들이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단군과 단군조선의 존재는 역사로서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지금도 사대론을 신념으로 가지고 있는 고루한 인간들이 많다
p21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 그렇기에 <삼국유사>가 더 빛나는 역사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한도 끝도 없다. 그냥 우리는 단군의 후예라고 생각하자.
p24
<삼국사기>와 그 시대에 수놓아졌던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는 힘을 잃는 대신,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삼국유사>는 그 변화의 끄트러미에 자리잡는다.
p29
위만이 조선 출신의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 위만조선과 기자조선에 대한 합리적이고 명쾌한 설명!
p36
오늘날 역사학자들도 말하듯이 고대 왕권 국가란 곧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조직의 정비도 포함된다. 그런 면에서라면 한반도의 고대 왕권 국가가 위 세 나라 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p44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 캠벨의 책에서 배운 영웅 신화의 포멧은 앞으로도 주구장창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p58
몸매와 얼굴이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닭부리 같았다. 월성의 북천으로 데려가 씻겼더니, 그 부리가 발락 곧 떨어져 나갔다.
> 이 대목에서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가 겹쳐진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인간들이 닥치고 새로 변하는데, 우리 신화는 새(내지는 새알)가 인간으로 변하는 게 좀 다르군... 서양신화가 인간중심적인데 반해, 동양신화는 자연중심적인 듯 하다.
p78
이 말을 따라 해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탈해는 이 집을 차지해 살게 되었다.
> 석탈해는 잔머리의 대가다. 당나라를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후손들에 그 잔머리가 계승되었다.
p91
즐거운 상상력에 민족적 쇼비니즘이 끼여들면 곤란하다. 이런 주장들이 대체적으로는 처음에는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찾는다는 그럴듯하면서 거창한 명제 아래 시작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복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 저자가 너무 점잖은 척 하는 것 같다. 저자는 한일 축구경기 보면서 우리 나라가 극적인 역전골을 넣으면 흥분하지 않는가? 과거의 아픈 역사가 만든 지금의 민족정서를 민족적 쇼비니즘으로 매도해야 하는가? 민족이란 원래 그런것이다. 가족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왜 이북에 피붙이 하나 없는 우리가, 남북정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에 눈시울을 붉히게 되는가? 온 지구의 모든 인간을 공평하게 사랑하지 못한다고, 우리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 쇼비니즘은 민족정서, 한민족의 긍지와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p98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령이었다. 그들이 일본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정치적 의미로만 풀어서는 곤란하다.
p102
신라를 괴롭혔던 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왜는 친교를 하고, 어떤 왜는 침공을 했다.
> 그게 중요할까? 친교를 하던 놈들도 시간이 지나서 적대적 상황이 되면 침공을 했을테고, 침공만 주구장창 하던 놈들도 상황이 바뀌이 필요가 있으면 친교를 했을테니 말이다.
p116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과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 상징성이 개인성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전후관계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이 더 필요하리라 본다.
p119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것이다.
p130
그러나 이 불행한 천명의 사나이는 반은 사람이니 낮에는 사람처럼 살고, 반은 귀신이니 밤에는 귀신처럼 살았다.
p133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해 숨어 달아났다. 비형랑은 귀신을 시켜 잡아와 죽였으므로 그 무리들이 비형의 이름을 듣고 두려워하며 달아났다.
> 나는 이 이야기를 아들녀석에게 읽어주었던 옛날이야기 동화책에서 처음 보았다. 그 동화책에 나온 내용이 더 자세해서 소개를 하자면, 길달은 양아버지를 지극으로 모셨으나, 그 천성이 인간이 아닌지라 본래 자기가 살고 있던 곳이 너무도 그리웠다. 그리하여, 양아버지에게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자기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비형랑은 길달을 도구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하다. 자기 명을 어기고 도망간 길달이 더이상 쓸모가 없어서 그냥 없애버렸다.
p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밈무를 띄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 우리의 바람돌이,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가 이 분야에 일가견이 있다. 나름 신탁을 내리러 여인네들을 찾는데, 그 결말이 대부분 좋지 않은 것이 우리네 설화와 다른 부분이다.
p147
이것은 전형적인 미륵하생신앙인데, 화랑도에 자연스럽게 불교가 접맥되는 순간인 것이다.
p158
신하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왕은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거기 향기가 나지 않음을 알지요. 이는 곧 당나라 황제께서 내가 배우자 없이 지냄을 놀린 것입니다"고 답한다. 꽃에 냄새가 있고 없음을 따지기 전에 이런 에피소드를 보고 잇자면, 선덕왕이 여성이기에 보다 부드럽게 당나라와의 교류를 이어 나갈 수 있었겠다 싶다.
p161
특별한 대우는 <삼국사기>에 가면 더 심해진다. <열전>이 '김유신'조로 시작하거니와, 전부 열 권 중에 세권이 김유신에게 바쳐져 있다.
> 김유신 뿐만이 아니라. 신라도 마찬가지 대우를 받고 있다. 우리 백제, 고구려는 도대체 어디 간겨?
p162
신라의 김유신의 우리 나라(고구려)의 점술가 추남이었다.
p169
일제시대 때 최재서가 그린 김유신의 모습이란 바로 망국민의 콤플레스를 안고 살아가는 번민에 찬 지식인이다.
p175
이런 활약을 했으니, 나중 그에게 흥무대왕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기까지 했겠으나, 살아서 영화도 그에 못지 않았다.
> 경주에 직접 가서 보면 김유신 릉은 여타 왕들의 릉에 못지 않다. 내 기억으로는 보통의 왕릉보다 더 나았던 듯 하다. 별도로 공원을 조성해서 입장료를 받기에 내가 그리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이름도 안 알려진 신라의 허접한 왕들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김유신의 명성이 대단하긴 하다.
p186
그 아들 신문왕이 개요 2년에 일을 마치고, 금당의 아래를 밀어 동쪽으로 구멍 하나를 뚫었거니와,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돌아다니게 한 것이다. 유언대로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이라 이름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다.
p212
익선이 도망가 숨어 버리자 큰아들을 잡아다, 추위가 극심한 날, 성안의 연못에서 목욕을 씻겨 얼려 죽였다.
> 연좌제도 이런 잔인한 연좌제가 또 있을까. 삼족을 멸하는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우리는 행운아다. 하긴 그냥 예쁘다는 이유로 겁탈을 당하고 소로 변해버리는 신화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도 감사하며 살 일이다.
p229
<구지가>로부터 <해가>까지 사이에는 이미 700여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듯 긴 세월을 두고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불리는 노래가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p241
재망매가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p249
어린 왕은 여자 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를 차기 좋아하였다. 도사 무리들과 놀았으므로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 마침내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p261
이 독서삼품과는 그다지 널리 활용되지 못하였다. 역시 기득권 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기우러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 마찬가지로 기울어져 가는 회사를 바로 세우기란 새로운 회사를 세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p264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좋은 일이 지금 모두 나타났습니다. 큰 딸을 맞아들였으므로 이제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요, 예전에 미모에 끌렸던 동생을 이제 쉽게 얻을 수 있으니 둘째요, 언니를 맞아들였으므로 왕과 부인께서 기뻐하였음이 셋째입니다.
p275
한편 왕의 입장에서는, 이제 효용가치를 넘어 또 다른 위협세력으로 떠오른 장보고를 다른 신하들이 견제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p284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햐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처용의 노래와 춤은 그 같은 비극 앞에서 체념한 것일까, 에둘러 꾸짖은 것일까?
> 둘 다라고 본다. 아니면, 이도 저도 못 하고 어쩔줄 몰라 노래나 부르고 있었겠지.
p302
그러나 정녕 아쉬움은 있다. 태자의 이 간절한 한마디, '천년 사직'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실리에만 매달리지 못하는 어떤 다른 논리 아닌 논리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p307
일연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나마 우리가 알게 되는 삼국시대의 살아있는 역사를 고마워하면서도 아쉬움은 분명 있다. 그것은 일연이 삼국의 다른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어찌 그다지 인색했는가다. (...)
한편 <삼국사기>가 비슷한 상황일진대, 고려시대 지식인들이 삼국의 적자로 신라를 인정했을 뿐, 그렇다면 다른 두 나라를 그 부속품 정도로 보지 않았다는 섭섭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 반쪽짜리, 아니 1/3짜리 삼국이야기인 셈이다. 아무리 역사가 승리자의 편이라고는 하지만 말이다.
p315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가지고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 문제로 비화해서는 곤란하다. 일본 특히 왕실의 뿌리가 한반도라고 해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거나, 한국이 종주국이라고 하는 따위의 생각은 참으로 난센스다. 한반도니 일본열도니 하는 말은 모두 후세가 만들어 낸 관념이다. 그들은 먹고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던 당대의 생활인들 뿐이었다.
p325
백제가 망할 무렵, 일본의 구원군은 적시에 도착하지 않았고,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 싸우려는 시늉만 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p332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
p338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낸 왕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p351
도리어 아자개가 왕건에게 항복을 한 시기는 고려와 후백제가 한창 싸움을 벌이는 와중이었다. 아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궁지에 빠뜨린 이 일을 두고 우리는 부자간의 불화 이외에 무엇으로도 까닭을 설명하기 어렵다.
불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똑같은 되풀이를 견훤과 그의 아들 신검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끝없이 반항하다 망한 견훤집안 3대다.
p359
당대의 문장가들이 동원된 편지 싸움인 만큼, 중국의 고사들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자기를 합리화하는 글 솜씨는 찬란하다.
> <사기열전>에서 유세가들의 말빨에 혹사당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이런 류의 글들이 조금은 식상하게 느껴진다
p372
이렇게 받은 알 여섯 개를 9간 중에 아도간이 집으로 가져갔다. (...) 기록자는 중국의 좋다는 임금의 이름을 죄다 갖다 댔다. 그 가운데 처음 나타난 이를 수로라 했고, 나라 이름은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불렀는데, 여섯 가야 가운데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기 찾아가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p379
그들이 주목한 두 가지는, 석탑의 자질을 분석하는 것과 왕후사의 불당정면에 그려진 물고기 두 마리 그리의 근원을 캐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이 두 가지가 남방계 특히 인도로부터 유래하는 돌이요 그림임을 증명해 냈다. 허 황후가 분명히 인도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p384
다만 그것으로 식민지 운운은 난센스다. 제 땅에 아직 제대로 된 나라도 갖추지 못하던 때에 무슨 식민지 경영이란 말인가?
사료가 부족한 쪽만 억울할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원망스러운 것이고, 일연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 역사란 원래 그런 것이다. 안타깝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한, 이 시대의 그 어떤 것도 정치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야청청의 길을 걸을 수는 없는 듯 하다.
p386
흥법은 곧 흥국이었다. 처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도교에 빠져 불교를 배척한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걸었고, 우여곡절끝에 불교의 세계에 접했으면서도 날로 번창한 신라는 그에 따라 나라도 번창해갔다.
> 결과론일뿐이며, 저자의 생각일뿐이기도 하다. 백제는 불교국가가 아니였던가.
p398
신라 불교는 처음부터 순교자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교의 전통은 면면하다. 이로부터 뒷날 100여년이 흐른 다음, 법흥왕이 불교를 세우자했을 때도 이차돈의 순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가?
p406
시비왕이 고행을 할 때였다. 메추라기가 매에게 쫓겨 시비왕의 품으로 들어왔다. 왕은 메추라기도 살여야겠고 매도 굶길 수 없었으므로, 자기 살을 메추라기의 몸만큼 베어서 저울에 달아 메에게 먹였다.
> 시비왕은 부처의 전생으로, 자비의 화신이다.
p409
개자추가 허벅지살을 베었다한들 이 엄청난 절개에는 비하지 못할 것이요, 홍연이 배를 갈랐다 한들 이 장렬함과는 견주지 못할 것이다. 이가 곧 임금의 믿음에 의지해 힘써 아도의 본 마음을 이룬 성자이다.
> 이차돈의 순교
p421
<탑상>편은 기본적으로 탑과 불상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부분이고, 거기에 경전과 사리가 추가된다. 이것들은 불교의 신앙 대상으로 만들고 떠받들여졌다.
p424
오직 인연 있는 땅에서만 가능하다면 신라는 바로 그런 인연을 갖춘 곳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배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신라가 가진 불국토사상 또는 본지수적사상이라 부른다.
p429
결론은 아쇼카왕이 보냈다는 불상은 이같은 불교의 역사로 볼 때 믿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아직 불상이 나오자면 500여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시점이다.
p454
눈에 대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보이게 했다는 학의 깃털은 곧 그를 출가로 이끄는 방편이었다. 그리고 그 깃털의 진짜 주인은 오대산의 다섯 성중이요, 그 가운데서도 문수보살이었으리라.
p464
"그렇게 현명하고 곧다면 지난밤 내 꿈속의 모습을 그려내거라. 어긋나지 않다면 용서하리라."
그 사람이 곧 11면 관음상을 그려냈다. 꿈과 맞으니 황제는 의심이 풀려 용서해 주었다.
p470
꿩은 두 날개를 펼쳐 두 마리 새끼를 감싸고 있었다. 매도 불쌍히 여기는지 잡지 않는 모양이었다. 충원공이 이를 보고 측은히 여기면서 느낀 바 있어 이 땅을 살펴보라 하니, 절을 지을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 혜통이 목격한 뼈다귀 어미 수달의 이야기만큼이나 처연한 이야기이다.
p473
박박은 막상 도착해 부득을 보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p481
자비롭고 희생적인 어머니의 정성과 같은 성격을 가진 이가 관음보살이다. 이는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다음 더욱 강화된 생각이라고 한다.
p484
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 두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누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가
남쪽 암자 가까운데 그리로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p485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p496
의상이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진신을 만나는 과정은 하나의 전범을 보여주지만,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같은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럴 계기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 우리 역사교육은 원효에 비해 의상을 너무 저평가해온 듯 하다. 마치 육조 혜능이 그의 도반이었던 신수로 인해 돋보이게 되는 고사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오조가 제자들에게 깨달음에 대해 말해보라고 할때 신수가 말했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다.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붙지 않도록 하라.”
신수의 이 게송에 대하여 혜능이 쓴 게송은 다음과 같다.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도 대(臺)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가 붙겠는가?”
이 게송 한방으로 신수는 찌그러지고, 우리는 육조혜능만을 기억하게 되었다.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삼국유사의 유명한 설화 한방으로 원효가 후대에 의상보다 뛰어난 인물로 기억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p507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됐다 싶으면 들러붙는 것이 사람 마음으로 감당못할 일, 그러나 가고 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 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청컨데 이쯤에서 헤어지지 합니다.
> 이혼사유가 한스러운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꿈에 게고개에 묻은 아들이 생각이 났던 것이다. 행여나 싶어 가서 파보니 돌 미륵상이 나와 물로 깨끗이 씻어 가까운 절에 모셨다.
p515
"평소 세상의 경전에는 익숙해 이치를 궁구하는 데는 신통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불교 공부를 하자 도리어 썩은 풀 같았다. 헛되이 유교를 공부하는 것이 실로 생애의 두려움으로 다가와" 드디어 출가하다.
> 문자의 나열은 진리 앞에 잡초와도 같은 것인도 모른다
p519
"비록 이런 몸을 가졌더라도 무상의 고통은 벗어나지 못하오. 그래서 내가 어느 달 어느 날에 그 고개에서 몸을 버리나니, 법사는 와서 영원히 가는 혼을 송별해 주시오."
약속한 날을 기다렸다가 가서 보았다. 거기에 한 늙은 여우가 검기는 옻칠을 해놓은 것 같은데, 헉헉거리며 숨을 쉬지 못하다가 얼마 있지 않아 죽었다.
p531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p535
하늘 괴는 기둥을 만들리라는 두 번째 줄에서 우리는 그가 지닌 속뜻을 짐작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원효의 품격을 지켜 주자는 사람들의 배려를 읽을 수 있다. 전설은 대체적으로 주인공과 전승자 사이의 합작으로 만들어진다.
> 원효가 본디 뛰어난 위인이었겠지만서도, 이런 합작으로 인해 우리가 모르는 위장들이 한꺼풀 두꺼풀 씌워진 것은 아닌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p551
지난 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아,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p568
일연이 그를 찬한 시에서 "무성한 꽃들 고국에 심었으니 / 종남산과 태백산 똑같은 봄이로다" 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무성한 꽃들이란 화엄의 세계를 말한다.
p585
과연 미륵보살이 나타나 <점찰경> 두 권과 더하여 간자 189개를 주면서 말했다. (...)
진표는 성인의 글을 받아 금산사에 와서 지냈다
>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메트가 동굴에 들어가 <코란>을 받아쓴 것과 비슷한 이야기
p594
이 소들이 겉은 우둔하나 속은 밝은 모양이오. 내가 받은 계법이 매우 중요함을 알기 때문에 무릎을 끓고 우는 것이지요
강릉 바닷가에서 물고기들에게 설법을 했다는 사실은 앞서도 밝혔지만 진표의 전도는 대체로 이렇게 이어진다
그때, 명주 근방에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스님이 그들을 위해 계법을 설명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모시며 삼보 정성을 다했다. 얼마 있다가 고성 해변에 셀 수 없이 많은 고기들이 죽은 채 떠올랐다. 백성들은 이것을 팔아다 먹을 것을 장만해 죽음을 면했다.
> 물고기들이 부처로구만
p596
무릇 미륵 신앙이라 민중들의 삶에 더욱 밀착되는 법이다. 그들의 어려운 삶 속에 동참하는 데서 이 신앙의 정수가 드러난다.
세 사람은 복숭아 나무에 오르더니 땅에다 몸을 거꾸로 처박았다. 그렇듯 용맹스럽게 정진하며 참회하였다
p602
미륵 신앙에서 본령은 상생 신앙보다 하생 신앙에 있다. 세상이 혼란스러울때 미륵불입네 자치하고 나서는 사람들은 이 하생 신앙을 잘 이용한 것이다.
p604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 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 그게 무엇이든 과거와의 결별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이 타고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p605
현교는 드러난 불교, 밀교는 숨어있는 불교
p617
산 복숭아 시냇가 살구가 울타리에 비쳤는데
오솔길에 봄이 깊자 양쪽 언덕에 꽃이 피었네
그대가 우연히 수달을 잡았던 인연으로
나쁜 용은 서울 밖으로 멀리 쫓게 되었네
p621
제 40대 애장왕 때였다. 승려 정수는 황룡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밖에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거적대기로 몸을 덮고 밤을 지샜다.
> 서글픈 미소는 이때 지어야 하는 것인가?
p625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에 의해 만들어진 미타사의 예불에 욱면이라는 여자도 참가한다. 그런데 그 집 주인 귀진은 자기 종이 함께 나와 있는 것이 못내 못마땅한 표정이다. 일거리를 잔뜩 주고는 하루안으로 마치라 해놓고 자기는 절하러 절에 간다.
> 콩쥐 팥쥐 이야기, 신데렐라 이야기의 전형
p629
천리를 가는 사람은 첫걸음부터 알아보는 것이지요. 아제 스님을 보니 동쪽이라면 그렇다 하되 서쪽은 알 수 없겠습니다.
p632
앞서 소개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에서처럼 위 예의 여자도 관음보살의 현신이다.
p637
특히 조선왕조 이후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사람이 사는 마을의 절을 자꾸 없어지고 산에만 남게 되어, 이제는 그것이 보편적인 현상처럼 보인다.
p644
산 속에서 세 오빠 악한 짓 견딜 수 없어
꽃다운 잎에선 대신 죽겠노라 한마디
의리의 소중함 몇 가지로 들어 죽음도 가벼이
수풀 아래서 몸을 내놓았네, 떨어지는 꽃처럼
p652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살펴보자. 절에서 탑돌이를 해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에서 죄악을 징벌하려 하자 스스로 대신했으며, 신이로운 처방을 전하여 사람을 구했고, 절을 세워 부처님의 계울을 가르쳤다. 이는 한갓 짐승이 인자한 성품을 가져서가 아니다. 아마도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내는 여러 가지 방법이고, 김현이 탑돌이에 할 수 있는 한 온 마음을 다하는데 감동하여 적이 도움을 주려 했던 것일 따름이다.
> 호랑이 처녀가 몸을 바쳐 보은하려는 이유가 김현에게 감동한 하늘의 배품이였다면, 호랑이처녀는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들의 사랑은 거짓이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호랑이처녀에게 감정을 몰입한 독자들은 허탈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p662
내가 여러 차례 왔으나 그 때마다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옷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했으니,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면 그것을 옷에게 주어야 마땅하지요
p683
국왕인 원성왕이 이 상서로운 일을 듣고 불러서 국사로 삼고자 했다. 스님은 이 말을 듣고 곧 암자를 버리고 숨어 버렸다. 여기서부터, 한판 권투경기에 비유하자면, 연희는 문수보살과 변재천녀에게 라이트와 레프트 스트레이트를 얻어 맞는다.
p686
결국 연희는 왕의 사신이 찾아오자 "제 업으로 받아야 할 줄 알고, 부르심대로 궁궐로 가서 국사에 임명되었다"고, 일연은 마지막에 쓰고 있다.
p688
<삼국유사>가 승전이라고 말하는데 동의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일연 개인이 가지고 있던 깊은 효심이다.
p691
"아이는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구하기 어렵소. 잡수실 것을 뺏어버리니, 어머니가 너무 배고파하시는구료. 이 아이를 묻어 어머니가 배부르도록 해야겠소."
> 그게 최선이더냐? 그냥 굶겨 죽여라.
p693
옛날 곽거가 아들을 묻어 하늘에서 금 솥을 내려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이를 묻으니 땅이 돌 종을 솟아나게 했구나. 옛 효도와 지금의 효도를 하늘이 함께 살피셨도다
> 너무도 유교적인, 극도로 유교스러운 교훈이다.
고려장이라고 하는 인습이 생겨난 다음부터
> 고려장 하면 떠오르는 우화인데, 자식의 등뒤 지게위에 실려서 숲속길을 헤치며 떠나가는 고려장길에 꽃잎을 하나둘씩 따서 길에 뿌리는것을 본 자식이 아버지에게 그 꽃잎을.따서 길에 뿌리는것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고 그러시는거냐 물으니 아버지가 답을 한다ㆍ
"아니다! 얘야, 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봐 그러는거다."
사실 저자는 잘못된 사실을 단정적으로 얘기하고 있는 듯 하다. 고려장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일제에 의해 우리 민족의 후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날조된 이야기일뿐이다. 노부모를 산에 버리는 고려장의 풍습에 관해서는 몇몇 설화들만 존재한다. ‘기로전설(棄老傳說)’이라고 불리는 설화는 70살이 된 늙은 아버지를 풍습대로 아들이 지게에 지고 산중에 버리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함께 갔던 손자가 나중에 아버지가 늙으면 지고 온다며 그 지게를 다시 가져오려고 하자, 아들은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셔 지성으로 봉양했다. 이후 풍습이 없어졌다는 설화다.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노모의 지혜’라고 불리는 설화는 한 관리가 늙은 어머니를 풍습대로 산에 버리려 했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봐 가지를 꺾어 표시를 했고 관리는 차마 어머니를 버리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어느날 중국의 사신이 노새 두 마리를 가져와 어미와 새끼를 알아맞히라고 하여 모두 풀지 못했는데, 관리의 어머니가 굶긴 뒤에 여물을 주어 먼저 먹는 놈이 새끼라고 알려 주어 문제를 풀 수 있었고, 그 뒤로 늙은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지역에 따라서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며, 늙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로 표현되기도 한다.
p694
누가 뭐라 해도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인 불국사와, 가장 신비스런 불상인 석굴암을 지은 사람이 김대성이다.
p697
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를 지었다고 한다.
p699
복을 빌어 받되 받은 다음부터 제복이라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p701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듣고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 이것이 진짜 어미의 마음이다.
p707
이는 일연의 개인적인 성향인 시취미가 크게 작용한 결과다. 시에 대한 애착과 남다른 식견으로 향가 가운데서 뛰어난 작품들을 골라 <삼국유사> 속에 실은 것이다.
> 이것이 고운기가 <삼국유사>에 천착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p711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열어제치자
벗어나는 달이
흰 구름 쫓아 떠간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 겹쳐져라
일오천 자갈벌
낭이 지나오시던
마음의 끝을 쫓노라
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못 덮은 화랑이여
p725
이럴 때에 사람들은 건전한 상식 대신 괴이함과 요행을 바라기 마련인데, 고려 사회를 지탱하는 불교 또한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 있었다.
p733
이른바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선승의 눈에 비친 시대상은 한마디로 파탄과 혼란 그 자체였다. (...) 모든 기존의 질서는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무너져 버린 다음이었다. 새롭게 서야할 질서, 그것을 일연은 불교 안에서부터 보았던 것은 아닐까?
p736
중국은 분명 이중의 전범을 가지고 있었다. 예악과 인의를 내세우기는 표면적 전범이오, 신이로운 현상을 통한 합리화는 이면적 전범이다.
p742
칠백쪽을 넘나드는 책의 맨 끄트러미에 있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책에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이거니와,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누군가일 게다. 그도 저도 아니면 (...) 흔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고.
> 반강제로 수행하는 고독한 책 리뷰어입니다.
내가 저자라면
우선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은 나 자신에게 경의를 표한다. 말로만 주구장창 들어오던 <삼국유사>를 통권으로 읽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부분의 설화는 교과서나 어린시절 동화책등을 통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것들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삼국유사>에서 나온 것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해설서인 이 책을 살펴보기에 앞서, 원류인 <삼국유사>의 구조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삼국유사>를 흔히 야사(野史)라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그 가치를 고려해볼 때 정식 사서보다 뛰어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래서 나온 명칭이 ‘대안사서(代案史書)’인데 일리가 있는 이름이다. 삼국유사는 왕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당대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보여준다. 삼국유사는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 등 9개의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력과 기이편은 당대에도 역사서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료를 모아 놓은 것이고, 흥법 이하의 편들은 불교와 관련이 있으나 불교에만 치우쳐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많은 일화들에 왕과 귀족과 같은 지배층이 아닌 일반 서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점이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필하는 가장 큰 매력일 듯 하다.
다시 주지하지만 이 책은 <삼국유사>의 발췌 해설서이다.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 고운기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삼국유사>속의 이야기들과 그에 대한 해설로 책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삼국사기>와의 비교와 발췌로 이루어져 있다. 통상의 해설서가 원본을 수록하고 이에 대한 해설을 덧붙이는데 반해서, 이 책은 처음부터 해설을 시작하고, 필요한 경우 원본의 내용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극도의 해설서인 셈이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이야기들중 유명한 것들은 어려서부터 교과과정등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라 책을 보는데 무리가 없으나, 그렇지 않은 것들의 경우 원본 스토리를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들이 적지 않다. 북리뷰를 하면서, 김원중 교수가 쓴 <삼국유사>를 옆에 놓고 참조하였는데, 김원중 교수의 삼국 유사는 원문에 충실하다. 한자로 된 원문도 수록하고 있어, 관심있는 독자들은 더욱 원문을 가깝게 느낄수 있다. 저자가 집필한 <사기열전>과 포멧이 똑같은데, 개인적으로는 김원중의 <삼국유사>가 더 마음에 든다.
역사서는 이미 그 역사를 편찬한 이의 개인적 사상이 반영되어 있는 책이다. 독자들은 사실 그대로의 역사보다는 저자의 역사관에 더 큰 영향을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 역사서를 다시 해설서로 편찬하는 것은 역자의 사상과 가치관까지 이중으로 투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역사관, 가치관이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 독자는 악영향을 받게 된다. 저자(고운기)는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삼국유사의 전문가이다. 역사적 견해가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가설이나 추측, 그리고 자신의 느낌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적지 않다. 독자들에게 주체적으로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한 대목이다.
개인적으로 <삼국유사>의 전편을 읽은 적이 없다. 이 책을 보고 난후, 틈틈이 김원중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본 이야기들을 읽을 생각이다. 그 독서에 있어, 고운기의 해설서가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어떠한 프레임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원본 역사서를 먼저 보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비록 읽기 지루하고, 제대로 책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많다 하더라도 말이다. 타인의 결정론을 머릿속에 지닌채 원본을 보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원본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보고, 나중에 남의 생각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비추어 발전시키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책 속에는 많은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 몇 장을 제외하고는 사진이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렵다. 단순한 장식용이나 지면 늘리기에 불과해 보이는 사진이 적지 않다. 책의 두꺼움을 감안한다면, 차라리 사진을 많이 빼서 책의 두께라도 줄이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게 개인적 생각이다. 내가 저자라면 글의 맥락상 꼭 필요한 사진만 넣겠다.
마지막으로 원저자인 일연의 관점에서 한가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일연의 수고와 노력으로 그나마 우리가 알게 되는 삼국시대의 살아있는 역사를 고마워하면서도 아쉬움은 분명 있다. 그것은 일연이 삼국의 다른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어찌 그다지 인색했는가다. (...) 한편 <삼국사기>가 비슷한 상황일진대, 고려시대 지식인들이 삼국의 적자로 신라를 인정했을 뿐, 그렇다면 다른 두 나라를 그 부속품 정도로 보지 않았다는 섭섭한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 본문 p307
너무 신라 일변도로 치우친 부분에 아쉬움을 느낀다. 저자 고운기도 책 속에서 위와 같이 언급한 바가 있지만,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편파적인 듯 하다. 그 당시 세계관으로 신라를 계승한 고려의 입장에서는 먼 옛날 백제와 고구려나 다른 나라나 다름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국유사>라는 책 제목대로 우리의 역사로 삼국을 포용하기로 했으면, 어느 정도의 지분은 고구려와 백제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 사료의 부족 때문이었는지,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후대인으로서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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