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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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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13일 11시 15분 등록

<삼국유사>

고려 충렬왕 때 보각국사 일연이 신라, 고구려, 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 지은 역사서다.

 1999년 11월 19일 부산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어 현재 부산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소장되어 있다.

활자본으로 5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편찬 연대는 1281~1283년으로 보고 있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 조선 중종때 경주부사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된 정덕본이 최고본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연본이 전한다. 
원판(原版)은 전하지 않으며 2003년에 조선 초기의 간행본과 중종 임신본이 각각 대한민국의 국보 제306호와 제306-2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가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야사에 해당하는데, 이는 일연이 《삼국사기》를 “정사”라고 존중하면서 《삼국사기》에 채 실리지 못한 단군조선, 가야, 이서국 등의 기록과 수많은 불교 설화 및 향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정사로서 편찬된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되어 있으나, 개인의 저술인 삼국유사는 내용별로 편목을 나누어 옛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기술된 옛 이야기의 주제들은 체재상의 제약 없이 저자에 의하여 자유로이 선택된 것들이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모든 설화는 삼국 시대의 것이지만, 유동하던 이야기가 고려 시대에 와서 문자로 정착된 것이다. 따라서 흘러

다니던 설화의 내용이 일연이라는 개인에 의해 작품화된 셈이므로 고려의 설화문학으로 취급될 수 있다.
고대사 연구에서 《삼국사기》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단군 신화를 비롯하여 이두로 쓰인 향가 14수가 기록되어 있어 국어 국문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향가는 《균여전》에만 11수(首)가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전적에는 전혀 전하지 않기 때문에

향가 연구에서 삼국유사는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제왕운기》와 더불어 단군 신화를 전하는 유일한 기록으로 고려 후기,

대몽항쟁 과정에서 급부상한 단군 신앙과 동족 의식을 반영한다.
일연은 그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설화들을 차용하여 자신의 메세지를 품을 매개체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방대한 정보를 여러 학자들이 힘을 합하여 정리하여 지어낸 삼국사기와는 달리 일연 개인의 경험과 학문에 근거하여 편찬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하자면 내용이 적고, 불교 설화가 내용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래서 보통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이

겹치는 사건이 있으면 보통 삼국사기가 정사고 삼국유사는 야사정도로 추정한다.
그러나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나라를 이루었던 이 땅의 민중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삼국유사는 수많은 일화를 적절히 정리하여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삼국유사 元 저자 일연 >

*고려시대 승려로서 뛰어난 학승이자 禪僧
1206년 경상도 경산 출생. 속성은 김견명.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
9세때 무량사로 취학 14세때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에서 출가
가지산문파 소속. 22세때 승과 합격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 차례로 직급에 오름
44세때 정림사 주지로 부임. 왕명을 받들어 불교행사를 주관
중편조동오위 저술로 불교계의 주목을 받음
78세때 국사로 책봉됨 (보각국사)
만년에는 경상도 군위의 인각사에 기거하며 삼국유사를 저술
역사를 왕 중심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 중심으로 생각함
저서로는 『화록(話錄)』 2권,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祖派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
1289년 84세에 인각사(麟角寺)에서 입적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로, 고대의 역사, 지리, 문학, 종교, 민속, 사상, 언어, 미술, 고고학 등과 관련하여

총체적 문화유산의 보고라 평가할 수 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삼국유사』는 기존 역사책에서 누락된 것들을 수록하고 있다.


< 저자 고운기에 관하여 >

고운기 (1961~)는  대학교수 이자 시인.
삼국유사 전공자이자 권위자. 삼국유사 마니아를 자처하는 국문학사 연구자이다. 


< 학력 및 경력 >
전남 벌교 출신. 한양대 국문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석 박사 학위취득.

「일연의 세계인식과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
1999년부터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연구원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시가를 비교 연구함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교 문학부 방문연구원,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연구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객원 교수 역임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컨텐츠학과 교수


< 활발한 저술활동 >
1980년대 초에 산 원본의 영인본 <삼국유사>제일 앞 장에 “余之學問 出於是書 而成於亦是書

(내 학문은 이 책에서 나와 이 책으로 또한 이룰 것이다)”라고 썼다.
삼국유사의 현대적 해석과 재조명 작업에 몰두하면서 고대의 인문과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집중 연구하고 있다.
그의 관심분야는 문화원형으로서 한국고전문학, 신화, 설화, 민속 및 중국과 일본의 고전문학과 민속이다.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 한다.
10여 년 넘게 삼국유사 이야기의 현장을 찾아 직접 답사하며 자료를 모았다.
삼국유사에 상상력을 덧붙여 독자들이 역사서에 쉽게 다가가도록 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삼국유사를 “한민족의 정체성과 뿌리를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책”이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책으로 꼽는다.


< 저서 >
『일연』 (1997)
새로 읽는 한국 고시가 (1998)
삼국유사 (2001)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2001)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2002)
『일연을 묻는다』(2006)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2006)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2009)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2010)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2011)
『신화 리더십을 말하다』(2012)
『모험의 권유』 (2016)
도쿄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2017)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 (2017)
새로운 세대를 위한 삼국유사 (2017) 및 다수의 공저가 있다.
옮긴 책으로는 <논어>, <한국, 1930년대의 눈동자>, <그늘에 대하여> 등이 있다.
그 외 <시힘> 동인으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섬강 그늘>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등의 시집을 냈으며 동화집으로는

 <북경거지>등이 있다.
평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15권으로 기획


< 독자들의 책 리뷰 >
-<삼국유사>에서 빌려 온 혹은 거기서 착상한 연작들을 선보임으로써, 그는 고전의 상상력에    서 수많은 서정적 순간들을 생성해 내는 일관성을 보여 준다.
-맛깔스러운 표현과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한 입체적 삼국유사다
-그의 책은 현장 답사의 상상력과 사진 이미지로 확대 재생시킨 역사 르포다.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재해석한 최초의 해설서다.
-재미난 이야깃거리를 곁들여 삼국유사를 대중의 것으로 만들었다.


<삼국유사에 대한 저자의 평>

삼국유사는 20세기에 재발견되었다. 조선 500년간 이 책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 책이 다시 발견된 것은 식민지 시대. 일본 학자들은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반면 조선의 지식인들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국유사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13세기의 삼국유사가 20세기에 이르러 부활한 것이다. 그는 삼국유사를 그리스 로마신화에 비교했다.
우리가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18세기경에 와서야 정립된 것입니다. 오랜 세월 진화를 거듭해온 것이죠. 우리의 삼국유사도 계속

진보해야 합니다. 삼국유사가 좀 더 친근하고 보편적으로 된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와 같은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 1
<사진과 사진 설명>
삼국유사는 이야기책에 가깝다.
단양 온달산성 -한 때 중원을 차지했던 고구려가 1500전에 쌓은 대표적인 고구려 식 산성
백제를 세운 사람들은 고구려의 유민들 -돌을 층층 쌓아 만든 무덤을 보면 알 수 있음
  -석촌동 백제고분
경주 나정-기원전 57년 13세의 박혁거세가 신라의 첫 왕이 됨.
  - 남산근처 나정 곁에서 발견된 알에서 나왔다 함 - 왕비는 계룡의 옆구리에서 나왔다 함
부여 능산리의 무덤 -신라고분을 담은 작고 아담한 무덤
경주 무열왕릉, 경주 김유신 무덤
경주 남산 삼화령
경주 보문동의 당간지주
토함산 동쪽 자락의 경주 장항리 절터에 있는 인왕상
경주 감은사 터에서 볼 수 있는 석탑의 실루엣
달도 해처럼 동쪽에서 뜬다. 동해에서 떠오르는 달은 황금빛이다. 달은 점점 솟아오르면서 은빛이 된다. 경주 대왕암 은빛 달과 검푸를

바닷물이 만나서 푸르스름한 달빛이 대왕암을 감싸는 순간 문무왕이 죽은 다음 되었다는 동해의 용이 보이는듯하다


<머리말>
18 삼국유사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애정을 보인 저자의 마음씀이 보인다. 그래서 우리를 알게 하고 넉넉하게

 한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이라고 친다면 삼국유사는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채소에다 비유하곤 한다.
-읽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겠다. 다만 일연 자신이 삼국사기를 존중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저자의 이런 비틀기식 표현은 마음에

안 든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라고 한마디로 규정짓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 표현이다.


삼국유사는 어떤 책인가

<유사와 사기에 얽힌 고백>
23 삼국사기의 사는 史이고 삼국유사의 사는 事라는 사실

<삼국유사 탄생의 배경>
23 고려 초부터 이 시기 지식인들은 우리 고대사를 정리하는 역사서의 편찬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는 문자 생활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최소한 지식인들에게 한문은 낯선 문자가 아니었다.
24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사키는 촉진제다.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전범을 이루고 있었던 사마천의 사기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도저히 일어나리라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고정관념이 깨진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다는 말인가? 하늘처럼 알았던 한족의 중국도 변방의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가? 당대의 관념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25 승려들은 처음부터 중국 중심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삼국유사 첫 머리에 단군조선을 실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 이규보ㅡ 동명왕 사적 발굴
일연은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삼국사기를 가장 염두에 두었다.-기이편

<삼국유사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27 삼국유사는 왕력, 기이, 흥법, 탈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9개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이편은 단군 신화가 처음으로 문서상에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우리에게 삼국유사가 전해지기까지>
30동국통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주 관련 부분에서 삼국유사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한치윤은 삼국유사를 믿지 못한다고 한 이후 그나마 인용하거나 거론하는 일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1926년 교토대학에서 삼국유사 영인본을 내놓았는데 당대 가장 완벽한 삼국유사였다.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
31 내가 만일 삼국유사를 썼다면 이런 식으로 했을 것이라는 기분으로 어디까지나 본문의 이해와 전달을 위주로 하였다.
32 삼국유사는 분명 10세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나 13세기의 일연이라는 인물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 땅의 첫 나라}

<뿌리를 찾았던 첫 세대의 상징>
33 개천절 노래-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정인보
34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 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상징을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
단군신화는 삼국유사를 가치 있게 만든 그래서 그 저자인 일연을 일약 민족주의 사학자로 만든 데서 그 의미가 끝나지 않는다. 상징의

체계로 들여다 볼 때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우리를 이끄는 즐거운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롯이 역사적 사실이 숨어 있다.
-상상력과 역사


<세부분으로 된 ‘고조선’조>
36 홍익인간은 단군이 나라를 세우기 전 곧 그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인의 생각을 보여주는 말이다.
39 건국 연대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는 점은 더욱 중요하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나라의 이름이요 이후 우리 역사에서 이만큼

자주 국호로 애용된 이름이 없다.
40 얼마 전 북한은 평양 부근에 단군 묘를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오늘 날 북한이 정식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정통성 시비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을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41 단군 신화는 건국 신화다. 이 땅에서 첫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42 그들을 제어하는 힘은 하늘에서 나온다고 믿어 하늘의 힘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던가를 설명하면 그만이다.

단군신화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조선은 어디로 갔을까>
42 고려왕조에 들어 이전 시대를 정리하는 처음 역사서는 삼국사기가 차지했다. 삼국사기는 지식인층이 중국으로부터 문자와 그와

관련된 여러 문화를 전수받은 다음 이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43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 세련된 양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삼국사기가 외면한 이 책의 단군조선 부분을 일연이 관심가진 것은 오직 여기서만 조선이 온전히 보였기 때문이다.

 -왜 정사에서 ‘우리’가 안 보이는가? 삼국사기의 형식도 중요하다.
형식에 가려져 내용이 안 보인다며 바이러스로까지 삼국사기를 몰아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

<13세기의 시대적 분위기>
44 중국의 자존심을 하루아침에 땅바닥에 떨어뜨린 몽고의 원 건국은 변방의 나라들로서는 숨통이 트일 일도 되었다.
45 당대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동명왕전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쓴 것은 고구려인의 기개를 한껏 살리면서 고주몽의 생애를 장황히

쓴 것은 기실 민족의 발견이었다.
이승휴는 시로 쓰는 이 나라의 역사 제왕운기에서 단군신화부터 시작했다. 이승휴는 일연과 동시대 사람일뿐만 아니라 함께 시를

지으며 즐긴 가까운 벗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줄을 잇는 13세기였다.
<위만 조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47 위만이 연나라 출신임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그가 본디 조선족 출신임을 더 내세우고자 한 것이고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 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 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놓은 일연의 생각은

<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함께 읽어야할 이유 >
49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위만조선까지 조선의 시대는 강력한 한나라의 침공 앞에서 막을 내린다.
50 일연이 고조선 조와 위만조선 조를 나란히 두고 이 땅의 첫 나라인 조선에 관한 대부분을 갈무리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봐야한다.
{고구려계와 북방계}
<한반도의 전국시대와 삼국의 정립>

52 한반도판 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들이 어떻게 이합집산하여 세 개의 나라 곧 삼국시대로 접어드는가? 일연은 그것을 남방계와 북방계의 두 흐름으로 정리한다.

<북방계의 시작, 부여>
52 북방계의 흐름은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로 흘러간다.
54 금와가 자리를 이어받아 왕이 되었고 다음은 태자 대소에게 이어졌다. 그렇게 이어지기는 해도 왠지 부루의 후손들이 왜소해져 가는 모습이다.

<동명왕 기사 사기와 유사의 차이점>
<동명성황의 위대한 탄생>
56 삼국사기는 『고기』의 신이한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을 받아들인 일연의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들이 이미 무너졌을 때 그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 이라는 표현은 삼국사기에 대한 오해를 심어주고 있다.
58 주몽은 하늘님으로 이어지는 부계와 신이한 존재로서 모계를 두루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난생 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59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과정에서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북방계의 다른 흐름, 백제의 성립>

60 일연은 백제의 출발을 변한과의 관련성을 따져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는 최치원이 변한은 백제다고 한 데서 촉발된 듯 하다.

< 북방계 이동의 끝 >

63 이는 온조왕으로 대표되는 백제 건국 세력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대목이다.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는 북방계의 이주 집단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신라와 남방계}
<남방 문화 속의 신라>

65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와 같은 북방계와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보이고자 해서인 것 같다.
비록 중국계 사람들이 진한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신라의 지배계층이 아니라 그저 한가한 동네 노인들로나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확대해석하지 말자는 것이다.

<신라의 여섯 부족은 또 다른 오리지널>

65 신라의 건국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삼국사기와 일연은 처음부터 충돌한다. 삼국사기가 여섯 부족을 조선의 유민이라 한데 반해

일연은 여섯 부족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66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

< 혁거세의 탄생과 신라 건국 >
69 박혁거세가 열세 살 때인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섰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일연이 모두 같다. 이를 근거로 신라는 삼국시대를 열었던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다.
고구려의 동명왕이 그보다 20년 뒤인 기원전 37년, 백제의 온조왕은 40년 뒤인 기원전 18년에 출발하였다. 중국의 한나라 때였다.

<혁거세 탄생, 또 하나의 이야기>

72 일연은 김부식의 사론을 인용하면서 위에서본 것처럼 이 마지막 구절을 삭제했다.
김부식과는 달리 선도- 성모- 혁거세 알영부인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리라

<선도산 신모에서 나타나는 신라 왕실의 조건>

72 이 같은 지리산 성모천황 전승은 무당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알려준다. 이를 부조신화라 한다. 성거산의 여신 전승은 고려 왕족을 성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73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 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 신화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 신화나 민간 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경주의 선도산은 지금도 민간에서 성스러운 진산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마이삼존불이

바라보는 산 아래로는 태종무열왕릉 등 크고 작은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다.


{연오랑 세오녀 , 첫 설화의 주인공}
<일본의 여자 프로레슬러 히미코>
<고대 일본의 여왕 히미코>

77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가운데 위지의 왜인전에 히미코가 다스리는 나라는 야마일국이다. 비록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나 가장

 강성했다 하고 238년에는 위나라에까지 사신을 보낼 정도였다. 실재하는 나라요 왕이었다. 이영희씨는 그의 책 노래하는 역사에서

히미코가 한반도에서 건너가 가야 지방의 미오야마국을 이어 일본에 야마일국을 세운 여왕이라고 설명했다.
78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있는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79 우리가 아득한 옛 역사를 말하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너무 긴장한다면 결론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쉽다. 프로레슬링은 진짜

격투기라고 생각한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은 재미요 남은 것은 공허감이지 않았던가?

<히미코와 같은 시대의 연오랑 세오녀>

82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에 와서 처음으로 일연은 삼국사기를 떠나 독자적인 길을 가고 있는데 매우 자신만만한 태도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 해와 달을 섬긴 사람들의 이야기 >

82 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하나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그의 관심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또한 그의

 이 같은 관심과 실천 속에서 모아진 것으로 본다. 그런 이야기일수록 일연의 붓끝은 힘을 얻는다.
83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과 별 곧 일월성신이다. 고대 삶의 모습을 지금까지 충실히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는 우리는

고대인이 지녔을 사유방식의 틀을 읽는다.

<아름다운 설화 속의 정령>

88 신라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유독 토착 신앙에 강했다는 말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한다.
89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은 사람으로 설정한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정령의 존재를 알고 서둘러 따라온 신라 사람들을 우리의

 아리따운 정령들은 맨손 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 설화의 기본적인 구조다. 그리고 그것은 누천 년을 이 땅에 자리 잡고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의 심성이기도 하다.
눈여겨보면 알겠지만 이는 일연 자신이 직접 답사한 곳의 이야기를 적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종결법이다.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일본어와 비슷하게 들리는 한국어>

86 최근 세계 언어학계에서는 한국어를 어족을 알 수 없는 특이한 말로 제쳐 둔 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사실 그 지도에서 어족을

 알 수 없기로는 일본어 또한 마찬가지로 그렸다.
어쩌면 한국어와 일본어가 또 다른 어족을 구성하는 한 식구가 아닐까 생각된다.
87 일본이라는 정식 국호를 가지기 전에 그들은 스스로 倭라고 불렀다.
왜의 잦은 침공을 받는 신라로서는 비록 그 때마다 물리치기는 해도 늘 걱정거리를 안고 사는 셈이었고 그런 걱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숙원이었다.
88 신라를 괴롭혔던 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있다.

< 일본에 간 신라 왕자 천일창 >

89 천일창과 신공왕후의 연결에서 우리는 신라계가 일본열도에서 먼저 힘을 가졌음을 본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숨은 자그만 힌트를 허용한다면 일찍이 삼국시대 초반 신라와 왜가 그만큼 가까왔음을 말해 주는 증거들이

이쪽저쪽에 그렇게 널려 있는 것이다.

< 박제상 사건으로 터진 감정의 폭발 >

89 알천까지 깊숙이 쳐들어오는 적에 대해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나가지 않으면서 스스로 지치기를 기다렸다.
91 박제상이 첩보원 같은 신분으로 일본에 들어가고 왕자를 구출한 다음 모진 고문을 받으며 끝내 목숨을 잃는 사건의 전말, 거기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 쪽에 있다. 참는데도 한도가 있는 그래서 쌓이고 쌓인 감정의 폭발이라고나 할까,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 박제상, 그 빛나는 충혼의 인물 >

92 이런 대목이 삼국사기에는 없다. 그러나 이렇듯 비장하고 정연한 결의에다 무슨 해설을 더 붙이겠는가? 그대로 읽어 마음에 간직할

밖에 아무런 췌사가 필요치 않다.
94 문제는 박제상의 일 이후 신라와 왜의 관계가 다시 회복하지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과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 일본에 대한 적개심 >

95 가장 특징적인 사건 하나로 한 왕대의 성격을 나타내 버리는 것이다. 일연의 특이한 기술방법이다.
96 그 묘사가 모자란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박제상에게 초점을 맞추되 보다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묘사를 추구했던 의도가 드러나

보인다. 신라 왕실 내부의 갈등이 아닌 왜의 비인도적인 처사 쪽에 더 치중한 일연의 기술에서 우리는 어떤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97 일연의 눈은 보다 더 크고 궁극적인 데로 향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도 걸리게 했다는 점만 유의하자


{밤에 찾아오는 손님}
<야래자 설화의 전통>

98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 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 들여야 하는 운명이다.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 비극적인 사랑이 아니고 잘못된 사랑일수도 있지 않을까?
99 그런데 이 유형의 이야기들이야말로 삼국시대의 비극적 영웅들이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실감나게 전해 준다. 당대 사람들이 기이한

 인물의 탄생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였는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복사꽃처럼 어여쁜 여자>
<사람을 돕는 귀신>
104 아무리 귀신인들 그들이 곧 사람을 이롭게 하는 존재로 그려진 이상 그다지 두려울 일은 없다. 신라사람들에게 귀신은 그렇게

다가왔다.
106 불명예스럽게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진지왕을 데려다 그 혼의 힘으로 특이한 아들을 낳게 하고 이렇게 해서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못다 이룬 일을 보상하게 샜던 것일까? 몸으로 못하면 혼으로라도 말이다.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 밤손님>

108 그 같은 이야기의 틀은 도래인들에 의해 일본에까지 전파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
110 신라는 나라를 세운 시기로는 삼국가운데 가장 앞섰지만 문명의 개화가 뒤쳐진 이유는 아마 한반도에서 신라가 위치한 지리상의

여건 즉 중국과의 통로가 쉽지 않은 구석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自利만 행하고 利他의 공이 없으면 지금에는 높은 이름을 떨치지 못할 것이요 나중에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오.
111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저자는 왜 옛 유대성인의 입이라고 했을까

< 불교에 대한 거부감을 이겨내고 >
114 그런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신라 사람들이 단번에 마치고 황룡사에 모셨다. 이는 신라가 불교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최초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토착신앙 불교 그리고 화랑>

114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117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에 씌운 아상은 그토록 완고한 법이다.
미시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다. 그만큼 신라의 화랑이 더 나아가 신라의 불교 수용후의 역사가 복합적임을 말해준다.

<신라의 호국 불교적 성격>

120 승려의 입장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인륜 법칙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을 부자연

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신라불교다.
자장은 황룡사 구층탑을 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121 신라의 고승 세 사람이 모두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하고 있다. 신라인의 사상적 무장은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것은 곧 국력의 신장으로 이어졌다.

 <외교가 중요하다는 사실>

121 시련 속에서 연단되는 것일까? 그같이 불리한 조건이었기에 살아나갈 보다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 몸부림 쳤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 신라와 좋은 관계를 맺게 되고 백제는 이를 원망하였다. 백제의 침공에는 이런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123 신라와 당나라의 밀월관계는 여러모로 분위기를 잡아 나가는 모습이다. 거기에 외교의 달인 김춘추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
< 통일의 운명을 타고난 사나이 >
125 일연이 기이 편에 59조를 배치하면서 오직 그 이름 하나로 제목 삼기는 김유신 조가 유일하다. 그에게 맞춰지는 역사의 서치라이트는 밝기만 하다.
128 김유신은 호국신이 지켜 주는 존재이고 삼국 통일의 선봉에 설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음을 암시하자는 것일까?

< 민족의 결혼 >
131 김유신은 가야 출신이다. 가야가 구형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 복속된 것은 법흥왕 19년의 일이다. 김유신은 태어나기 60여년 전

유신의 증조부 구해는 수로왕의 후손이었는데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경주로 와서 살았다. 망국민에다 이민 4세의

신분적 제약은 좀처럼 지우지지 않았던 것 같다. 유신에게는 치명적인 콤플렉스였다.
일제 시대 최재서가 그린 김유신의 모습이란 바로 망국민의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번민에 찬 지식인이다 그것은 곧 최재서 자신의 의식이 투영된 분신이었다.
<진골의 탄생>
134 진골은 편협한 신라왕실이 한층 더 개방적으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제도이기도 하다.

<화려한 무대 뒤의 여인>
135 사실 김유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은 누구에게도 견줄 바 아니다. 힘으로 안 되면 지략으로, 지략으로 모자라면 신술을 써서라도

주어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그였다.
138 일은 제가 벌여 놓고 길길이 날뛰는 유신의 노한 목소리에 묻혀 한 여자의 여린 일생이 가려 있다.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문무왕 법민>

140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 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 삼키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법민은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낸 사람이다.
-같은 민족을 치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였으니 당이 신라를 우습게 봤겠다.
당나라를 온 몸으로 막아내 이 정도나마 땅을 지킨 그 힘으로 통일하면 좋았을 것을

<사천왕사로 지켜낸 땅>

141 671년에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오고 간 장문의 외교 문서는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을 보다 더 분명히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전문이

실린 이 답신을 읽다 보면 문무왕의 당당한 면이 잘 드러난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자기 나라를 자키기 위해 얼마나 고투했는가가 삼국사기에서는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142 뇌물은 그 옛날부터 필요악이었던 모양이다. 사천왕사를 끝내 보여주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이렇게까지 했으나 이는 신라가 당나라와 벌이고 있는 신경전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 죽어서는 나라를 지키는 용으로 >
143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문무왕의 이런 행적은 크게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문무왕의 조서 -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144 문무왕의 이같이 거룩한 생각은 그 아들 신문왕에게 이어져 더욱 아름답게 꽃핀다.
왕의 신념은 비록 축생도에 떨어진들 변함없어 보인다.
法政과 敏明 두 왕대가 전성기를 구가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때 이름은 이름값을 하고 있다
145 금당 아래의 동쪽에 구멍을 낸 감은사, 용더러 다니라는 통로를 만들어 준 것이란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느낌이 가득해진다. 부자간의 짝짜꿍이 잘 맞아도 이렇게 잘 맞을 수 없다. 한반도에 남은 절의 탑 가운데 이만큼 기품 있고 의젓한 것이 없으리라

< 더 할 수 없는 선물 만파식적 >

145 그러나 일연은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였다.
146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날더러 바치라고 했습니다.
147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고장난명 (孤掌難鳴)
1. 외손뼉만으로는 소리가 울리지 않는다, 혼자의 힘만으로 어떤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뜻
2. 맞서는 사람이 없으면 싸움이 일어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 만파식적은 어디로 갔을까? >

149 벼슬이 높아져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으면 한 글자씩 덧붙이는 신라의 관습이 있다.
만파식적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더할 데 없는 보배이나 거기에 공을 더 세우니 글자를 하나씩  더 붙여주었던 것이다.

 {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 왕비를 두었던 왕 >
150 고려시대에 들어 편찬된 두 책의 저자가 모두 정실로서 왕비의 격을 중요하게 보았기 때문에 후궁이 여럿이었을 텐데도 기록한 것은 왕비 한사람이다.
151 3대에 걸쳐 그들은 나란히 첫 왕비를 대궐에서 내보내고 있다.(출궁)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바야흐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였다.

< 3대에 걸친 출궁 사건 >
154 신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과 경덕왕에 이르는 3대의 출궁 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삼국통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진골은 양과 질에서 많은 발전을 한다. 태종과 문무왕 대에는 강력한 왕의 힘으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문무왕이 죽는 순간부터 노골화된 이 권력투쟁은 반역과 반역의 악순환이었다
그것은 가까운 최고 권력층에서 터졌다.
155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 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신문왕 즉위년에서 시작해 혜공왕 폐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은 반역의 칼날, 그것은 김춘추 직계후손의 쓸쓸한 종말을 불러왔다.

<왕의 이혼 위자료는 얼마?>
157 경명의 반역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된 지 21년 동안 웬만한 절치부심이 아니고는 이루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 경덕왕은 순원의

 외손자요 왕의 장인인데도 그들이 시작할 때와 똑같은 상황에서 이제는 마침표를 찍었으니 세월과 권력은 무상한 것이다.

<꽃과 여인 그리고 사랑의 노래>

158 일연이 이 세 가지 사건으로 성덕왕대를 그렸다는 그는 왕으로서 덕을 베풀기 힘쓰고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159 수로부인의 자태와 얼굴이 너무도 뛰어나 매번 깊은 산과 큰 연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신물들에게 끌려갔다.
160 하이라이트는 꽃을 꺾어 바치는 노인의 다음 행동이다.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지어 바쳤다.
     자주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 함께 부르는 노래의 힘 >

161 아름다운 이의 자태는 언제나 눈 도둑들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 - 중구삭금: 사람들의 일치된 생각과 거기서 나오는 힘이 저 신들의 가공할 위세를 쳐부술 수 있다
162 구지가의 시대에 이 노래는 신이 중심인 신화에 속한 신가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삶 속에 노래가 자리한다. 전체적인 틀은 유지하면서도 700년의 세월이 가져다 준 주목할 만한 변화다.
해가는 신가에서 민요로 넘어오는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 동해 바다 그리고 국도 7호선 >

162 속 태우고 있었을 남편은 아랑곳 않고 용에게 받은 극진한 대접을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수로부인
163 그가 잡혀 들어간 바다 속은 바닷가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발을 굴러야 할 위험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정 반대였다.

동해 바다를 끼고 올라가는 국도는 7호선 번호는 홀수선이, 남북을 짝수선이 동서를 잇는 국도에 붙여진다. 7호선은 오직 관동 지방의

유일한 길이라는 점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164 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이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동해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첫 성전환증 환자}

< 일연이 그리는 경덕왕의 존재 >
164 경덕왕 때 인상적인 일들이 줄을 잇는다. 희명, 욱면, 사방불 캐내고 황룡사에 종을 만들어 건 이가 경덕왕이다. 그 시대의 두 사람의 뛰어난 향가시인- 충담사과 월명사
166 요컨대 역사서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다지 비중 있게 그려지지 않았을 이 왕이 일연에게는 각별히 다가온다.

<아들을 바랐던 왕>
167 대사께서 하늘님께 청하여 자식을 가졌으면 하오. 하늘님이 하늘과 사람은 어지러워져선 안 되느니. 지금 그대가 마치 이웃 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였노라. 이제 이후로는 다시 통하지 못할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충분하오.
표훈이 하늘님과 만나는 곳이 토함산이었다.

< 재앙을 극복하는 길 >

169 향가가 신라 이후에도 승려층에 의해 전승된 것은 고려 초의 스님 균여가 향가를 남기고 있는 점을 통해 입증되지만 같은 스님인

 일연이 삼국유사 속에 공들여 향가를 모아 놓은 점을 설명하는 데도 유용하다.

<죽은 누이를 위해 부르는 노래>
170 월명사의 제망매가 -서정 시가, 신라 향가 최고의 명편. 구태여 요란을 떨지 않는 것이 진정성에 가까운 법이다.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 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참고: 미타찰(彌陀刹)은 <극락정토의 저승 세계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 <무심코 흘러가는 우주의 시간에서 이승의 시간이 경과하고

저승의 시간이 도래하여 극락정토에서 사는 찰나의 세월>을 의미하는 것. 이승과는 다른 또 다른 우주의 공간인 것이고. 월명사의 누이가 가는 곳이며, 그곳으로 가는 것을 월명사는 모르는 것이 아니고 잘 알고 있으며, 그 역시 죽어서 극락정토에 또다시 누이의 형제자매로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171 다시 만날 날을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야말로 구도자이면서 시인으로서 월명사가 택할 최선의 길이다. 그 지점이 곧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최후의 시도>

174 구물걸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이 보잘 것 없는 백성이로되 다스리는 자의 따사로움을 알고 믿고 따른다면 그들이 어디로 가겠는가?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이것이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 여자 같은 남자 >
{지는 해 뜨는 해}
< 마지막 희생자 >
177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성골과 진골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178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
백성들이 이를 걱정하여 다라니로 은밀한 문장을 지어 길거리에 내붙였다.
179 ‘그가 아니면 누가 이런 문장을’ 이라고 단박에 지목하여 철창에 집어넣은 그 사회의 꽉  막힌 위정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단박에 하늘이라도 무너졌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간절해도 끝내 가슴에 묻어야 할 답답한 현실이 엄연하지 않던가?

< 준비되는 새 나라 >
182 배를 타고 가던 일행이 풍랑을 만나자 일종의 제비뽑기로 희생양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구약성서의 요나 이야기와 닮았다. 거타지가 쏜 화살은 곧 이 세상의 부조리를 향하여 날아가 박히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가?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의 낱낱을 쓰기에 지쳤을 즈음에

그 자신에게나 읽는 이에게나 한 가닥 희망 곧 새 나라 탄생의 빛을 실어주려는 일연의 붓끝

< 김부대왕이라는 칭호 >

186 일연의 의도는 견훤과 왕건의 비교 곧 그것은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의 덕망을 보여 주려는 데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비운의 왕자>

187 태자의 이 간절한 한마디, 천 년 사직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실리에만 매달리지 못하는 어떤 다른 논리 아닌 논리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아버지인 경순왕은 새 나라 고려의 부마가 되어 40여 년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두 아들의 출가는 한층 측은해 보인다.

< 천 년 사직은 막을 내리고 >

188 조선 조에 들어 김부식은 사대주의에서도 민족적 주체성에서도 모두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신라 왕조를 마감하는 김부식의 사론은 그가 감당하고자 했던 시대적 사명과 자신의 논리가 잘 들어가 있는 문장이다.
189 일연은 오히려 올바른 김부식 팬이었다. 좋은 부분을 인용하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엿보이고 좋지 않은 부분을 놓고 비판하다거나

굳이 자기 관점에서 해석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비록 승려지만 불교의 말폐를 지적하는 것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이면서 불교가 살아날 길이기도 하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아쉬운 백제의 역사>
191 일연이 삼국의 다른 두 축을 이루는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에 어찌 그다지 인색했는가
고려시대 지식인들이 삼국의 적자로 신라를 인정했을 뿐 다른 두 나라를 그 부속품 정도로 밖에 보지 않았다는 섭섭한 결론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백제 고도의 대표는 부여가 아니다>

195 고구려로부터 가중되어 오는 압박을 견디기에 백제는 너무 작은 나라였다. 그래서 그들의 천부적인 이동솜씨를 발휘해 어느 덧

 배를 만들어 남쪽으로 일본열도를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한강유역을 고집하지 않을 바에야 일본에 이르기 가까운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것이 웅진으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속내로 보인다.
그러므로 웅진 부여 천도 뒤의 백제역사는 특히 그것이 왕실과 관련된 것일수록 늘 일본과의 교섭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따뜻했을 것 같은 백제의 풍속>
<곤지왕자로부터 시작하는 백제와 일본의 왕계>
197 일본 특히 왕실의 뿌리가 한반도라고 해서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한다거나 한국이 종주국이라고 하는 생각은 참으로 난센스다.
198 815년 일본왕실에서 만들어진 신찬성씨록이라는 책의 한 기사에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민달왕이 백제의 왕족임을 밝히는 내용이다. 이 왕은 나라에 백제궁을 짓기도 했다. 왕실과 귀족들이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책에 왕의 출신지가 백제라고 분명히 밝힌 것은 여기뿐이라고 한다. 최근 일본의 사학자 중에는 이 흠명왕이 실은 백제 성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다.
199 그동안의 일반적인 역사서에서도 성왕은 일본에 처음 불교를 전해 준 왕으로 기록
무녕왕이 이토록 아우를 배려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무녕왕 자신이 일본의 왕실에서 함께 살다가 아버지인 동성왕의 뒤를 이으려 고국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6세기에 들어서서 즉위한 일본의 왕들은 줄줄이 백제 왕실과 한 집안이었음을 알게 된다.
200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 왕자는 일찍이 일본 왕실에 건너가 있다가 아들을 본 동성왕으로 손자를 보내 무녕왕으로 올리고

그로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마지막 의자왕까지 후손들이 차례로 왕위에 앉을 수 있는 길을 연 사람이다. 더욱이 다른 손자인 계체왕은

일본에서 왕으로까지.

<백제가 어떻게 일본 왕실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202 특히 바로 코 아파에 있는 한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 호족을 대표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203 200명도 채 안 되는 집권층이라면 탁월한 문화를 지닌 소수가 가서 단번에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소수계가 바로 백제계였다

<일본의 독립선언>
203 왕실로만 놓고 본다면 일본은 분명히 백제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7세기 후반 들어 종주국 백제가 멸망했다. 의자왕과 항렬이 같았던 일본의 천지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놓고 있다. 그 나라 사신의 설명으로는 나라가
204 해 뜨는 곳에 가까운 까닭에 일본으로 이름 하였다고 한다.
    -신당서 제 220권에 나오는 동이전 일본 조의 기록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년,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 선언으로 보인다. 그 이후 일본 왕실에서 백제의 흔적 지우기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수도를 교토로 옮기면서 헤이안 문화를 열었던 환무왕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맹랑한 눈에 맹랑한 자가 보인다>
205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서동은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실현 가능성 없다는 이 일을 돌파할 꾀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가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는 말에서 그런 발전이 참된 발전인가 의심스럽다.
서동과 드루킹이 문득 연결이 된다.
206 엉뚱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진짜처럼 둘러댄 게 어디 이 하나 뿐인가? 정말이지 서동만큼 맹랑한 사람은 일연 당신이다.

<한 편의 완벽한 드라마>
206 전형적인 영웅의 일생 첫 머리다. 기이한 출생, 특이한 능력의 소유자, 그 때문에 받는 고난 등의 배치가 그렇다.
208 영웅은 자기가 타고난 비범한 재주로 고난을 극복해낸다. 서동은 이웃나라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

하는 것으로 그 첫발을 내딛고 있다.
209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서동과 무왕 그 아슬아슬한 연결>
<미륵보살 쟁탈전 속의 선화공주>
215 금 은 진보와 호박등 각종 보배가 땅에 흩어져 있으나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고 ...
예전 사람들은 이런 물건 때문에 서로 해치고 옥에 갇혀 무수한 고뇌를 받았다 하는데 지금은 기왓장이나 돌과 같아서 아무도 지키려

하지 않는다. -천국의 재미있는 표현
217 일연이 승려들 중에 드물게 다루고 있는 백제 승려가 해현이다.

{견훤, 비운의 영웅}
<백제 땅에서 나온 마지막 왕>
219 일연이 비슷한 인물로서 궁예는 빠뜨리고 견훤 한사람에다 상당한 분량을 바치고 있다는 점에서 왠지 야릇하다. 실상 견훤은 백제

땅에서 나온 마지막 왕이다.

<3대에 걸친 물고 물리는 불화>
222 아들이 아버지에게 끝없이 반항하다 망한 견훤 집안 3대다. 식민지 치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이념과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다 망해 버리는 집안을 그린 염상섭의 소설 삼대는 이미 천여 년 전을 무대로 삼아도 통할 이야기다.

<호랑이가 키운 아이>
224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 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훤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왕건이 연패하는 중인데도 신라에서는 고려와 화친하고 더 나아가 나라를 맡기자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었다.
225 됨됨이가 견훤처럼 사나운 사람보다 온순하고 정이 많기로 왕건이 그들의 뒤를 잘 봐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편지로 싸운 한 판>
225 싸움터의 칼바람이 스산하게 묻어 있는 그러면서 기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붓놀림은 그대로 칼 없이 겨루는 한 판이다.
228 역발산 기개세라 한 항우 앞에 유방은 언제나 꼬리 감춘 쥐였으나 민심의 향배가 그들의 운명을 가르지 않았던가?
230 짤막한 노래 하나 등장시켜 견훤의 말년을 실감나게 그린 일연다운 솜씨를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라이벌에게 의지한 마지막 생애>

231 이 와중에도 살길을 찾는 이는 용케도 그 길을 간다.

제2권 사진
삼국유사 후반부는 불고 이야기로 가득하다. 공주갑사의 철로 만든 당간사주
불교가 신라에 처음 전해진 때를 겨울에 핀 매화꽃으로 상징한 일연의 시
이차돈 순교비를 볼 수 있는 경주 백률사
운문사(청도) 는 일연이 71세 때 주석하며 삼국유사를 본격적으로 편찬하기 시작한 곳
부석사는 의상이 세운 절, 안양문은 극락으로 가는 문
낙산사는 원효, 의상, 범일의 쟁쟁한 스님들의 이야기를 간직한 절, 원통보전 꽃담
경주 분황사는 신라 칠대 성지 중의 하나
바위 하나에서도 불상을 찾아내려고 애쓴 신라인들의 마음
경주 황룡사 터, 황룡사 구층탑은 높이가 아파트 20층 정도 되었다 함
대구 팔공산 너머의 군위 인각사에서 입적한 일연. 저술이 100여 권에 이르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국사의 자리를 버렸다는 것이 적혀 있음

{불교로 보는 역사}

33 전반부와 달리 여기서부터 후반부의 삼국유사는 완연히 불교적 성격을 띤다. 일각에서 삼국유사를 불교문화사라 정의 내리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34 불교를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시켜 나갔는지가 나라의 흥망성쇠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생각 -불교 역사주의라고 명명
이 땅에 가장 먼저 온 승려는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순도다.
35 고구려는 불교를 그다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 같다.
36 백제에도 중국의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하러 온다.
37 계룡산 갑사는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38 그는 삼국사기가 전해 주는 역사적 사실 이상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사릴 이상의 것이란 물론 상상이다. 그러기에 시의 형식을 택했다. 그러나 상상은 시간이라든가 구조라든가 어던 기제에 실릴 경우 사실 이상의 사실이 된다.
39 이는 매우 완만하면서도 일순간에 벌어지는 깨달음처럼 극적이다.
이같은 시적 상상은 그 선연한 형상력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사실 이상의 사실 어디로 데려가고 있다. 순례자의 길은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 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40 어쩌면 우람한 줄기에 무성한 가지를 뻗는 나무는 쉽게 뿌리내리지 못하는지 모른다.

{순교의 흰 꽃 이차돈}

45 일연은 삼국의 역사에서 신라를 중심에 두었다.
48 왕은 메추라기도 살려야했고 매도 굶길 수 없으므로 자기 살을 메추라기 몸만큼 베어서 저울에 달아 매에게 먹였다.
49 오늘 우리는 사실을 따지는 것이 중요할까 사실이 무엇이건 거기 실린 순교자의 마음을 고이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할까
-이차돈의 사에 대해서도 세 가지의 상황이 있었다
51 신라불교가 뿌리내리는 데에 치른 값진 희생의 전통 그것은 곧 아도와 이차돈의 순교다.
일연은 아도가 자진했다는 아도본비의 기록을 채택했는데 거기에는 이차돈의 순교와 연결하려는 분명한 의도가 담겨있다. 삼국사기는 이와 반대로 아도본비의 기록을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이렇듯 한 가지 일을 두고 바라보는 차이는 뜻밖에 크다.
-인간의 일은 이렇다. 신은 인간 모두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52 마 캐는 가난한 청연 서동이 왕이 되고 그 부인 선화공주와 함께 창건한 것이 익산의 미륵사다.
53 백제에 비한다면 고구려에 대한 일연의 태도는 노골적으로 비판적이다. 보덕이라는 큰스님이 제 나라에 있지 못하고 피신해야 했던 것을 일연은 나라가 기우는 혼란스런 상황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고 있다.
다음 해 사신을 당나라로 보내 불교와 노자를 배우겠다고 하자 당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런 것들도 중국의 허락을 받아야했나
보장왕이 즉위한 해에 이르러 삼교를 함께 일으키고자 하니 총애 받
54던 신하 개소문이 왕을 설득하기를 유교와 불교를 함께 키우다 보면 도교가 번성하지 못한다고 했다 - 세력가와 유세가가 생각난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를 인용했다고 하나 여러 군데 일연의 손질이 가해졌다.
나라가 망한 이유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 한 것 때문이라는 결론에서 그 의도는 명백해진다. 삼국의 흥망을 불교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보려했던 일연의 태도는 의천의 이 같은 입장과 더불어 결론 내려지고 있다.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57 황룡사는 옛 경주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신라의 한가운데였고 거리상으로만 아닌 마음속에서는 신라인이 상상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였다. 그러기에 경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비록 지금은 허허벌판일지라도 황룡사 터에 한번쯤은 서 보아야 한다.

거기서 남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완만한 능선이나 명황산성으로 구획된 동쪽의 방벽이나 천마총으로부터 시작하는 서쪽의 고분군을

한눈에 넣어 보아야 한다. 서라벌 천 년의 사람들을 떠올려보아야 한다.
금당과 회랑 등을 놓았을 돌들이 무어라 외치는지 들어 볼 만도 하다.
..너의 등을 덮여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62 그러나 이 연기담은 얼마나 사실과 가까운 것일까?
아소카는 콤플렉스가 많은 왕이었다. 못생긴 얼굴에 형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죄책감마저 가득했다. 그것은 이상한 형태로 뻗어 나와

결국 가상지옥을 만들어놓고 잘생긴 사람을 들여보내 죽이는 해괴한 짓을 저질렀다 -악한 사람이 리더가 되었을 때의 상태
왕일지라도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친 것은 독실한 불교신자인 한 신하를 만나면서부터다
-바른 유세가를 만난 세력가
63 아쇼카의 기념주라 불리는 이 유명한 조각 기둥은 불교 미술의 출발이라는 매우 큰 의미
66 그대의 나라는 여자가 왕 노릇을 하고 있어서 덕은 있으되 위엄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이웃 나라들이 건드리는 것이오.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가운데 구층탑을 지으시오
67 신라를 가운데 두고 중국과 인도의 불교 문화 그리고 가까이는 백제로부터 들어온 기술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곳이 황룡사다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70 신자이건 아니건 오랜 전통 속에 우리들이 피와 살이 된 불교의 뿌리는 암암리에 깊다.
더욱이 절은 성소이면서도 낯익은 우리 건축의 한 틀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라 특히 조그만 암자에 들렀을 때 마치 고향 마을의 옛집에 찾아온 듯한 포근한 느낌이다.
절은 그 익숙함의 풍경에서 그 자체로 안식의 공간을 우리에게 주는 듯하다.
72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끓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74 믿거나 말거나 하자면 황당한 이야기일지언정, 그 속에 숨은 절절함마저 앗아가지 못한다.
77 자신들이 믿어마지 않는 어떤 절대자에 대한 꾸밈없는 흠모는 이런 기적을 낳게 한다.
일연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이 같은 세계 속에서 살았음을, 우리에게 조용히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78 그 어머니에 대한 어떤 향념이 삼국유사에 더러더러 묻어 잠겨 있음을 찾아내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80 꿩이나 그 새끼 몇 마리를 살렸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살린 어떤 매커니즘이 중요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그런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왜곡하는 사람들 탓이지 신 탓이 아니다.
부모가 잘 가르쳐도 말 안 듣는 자식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82 간밤 계를 더럽혔으리라 생각하고 비웃어 주려 부득의 처소를 찾아온 박박은 막상 도착해 부득을 보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나는 마음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박박이 더 좋다.
83 경남 의안의 백월산
이 세상 밖의 뜻을 품으며 친구 사이로 가까이 지냈다.
저 멀리 극락 세상에 대한 뜻이 커지면 커질수록 세상에서 한 몸이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를 보게 되었다.
84 부처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아야지. 세상에 묶인 끈을 벗어 버리고 더할 수 없는 도를

이루어야 하네. 먼지 날리는 세상에 코를 박고서야 어찌 세상의 무리들과 다름이 있겠는가?
‘부처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되어야하고 진리를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찾는다’는 말은 평범 속의 비범이다.
수행자의 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박박의 교조적인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인 융통성이라고나 할까
부득은 여자를 암자 안으로 맞아들여 머물게 했다. 밤 깊도록 맑은 마음을 지키며 등잔불 아래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웠다고 일연은 조심스럽게 쓰고 있다.
88 성불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관음보살이 흔히 여자의 모습인 것은 삼국유사 안에 여기 말고도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다. 여자는 부녀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섭화자라 할 만하다.
90 부득과 박박의 수행의 차이는 그들이 이 땅을 떠난 다음에도 사람들의 입 속에 오래도록 남아 았었을 터이니 - 발톱 하나 만큼의 차이
92 참 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한다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찬이나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삼국유사야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낙산사의 힘}

94 절 주변에 쌓은 담은 고집쟁이의 그것이 아니다. 속된 것으로부터 지키는 어떤 성스러움의 의지라 할 수 있다.
96 마땅히 승려가 가야할 길, 그러면서도 세속의 인연이 주는 모진 시련, 허망한 세상을 저버릴 수 없다면 그나마 뜻있게 살아가는 방법- 그런 이야기들이 관음과 정취보살의 친견 그리고 조신의 꿈에 잘 나타난다.
98 참으로 치밀하고 정성들인 노력 후에 얻은 만남이다. 그런 노력으로 얻지 못할 무엇이 있겠는가 웅변하는 듯하다. 나는 이것을 치밀하고 정성스런 만남이라고 명명한다.
그제서야 앞서 만난 여자들이 바로 성녀이며 전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뜻밖의 만남이 곧 보살과의 만남임을 영원히 모르고 지났다면 사정은 다르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나중에 알게 되는 이 우연의 메카니즘, 사실 우리들의 만남은 대부분 이렇다.
100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다만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나는 이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명명하였다.
무릎을 칠 일, 거기서 애석해 하는 동네 아저씨 같은 분위기, 원효는 그렇게 인간답게 다가오는 매력이 있다.
101 굴산사가 있는 지금의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는 다름 아닌 범일의 고향이었다. -학바위에서 처녀가 아이를 낳아
한 쪽 귀가 잘린 미천해 보이기만 하는 사미승을 주의 깊게 기억해 두지 않은 것은 범일의 잘못이었다.
103 현실과 신이가 하나가 된 만남
104 한단지몽- 한 세상 사는 온갖 영고성쇠가 한솥밥 끓는 사이에 불과하다는 비유
106 고운 얼굴 아름다운 미소도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 꼴입니다. 별 볼일 없으면 버리고, 됐다

 싶으면 들러붙는 것이 사람 마음으로 감당 못할 일 그러나 가고 말고 사람의 뜻대로 안될 일이요 헤어짐과 만남 또한 운수가 있으니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걸 알겠네
허망한 줄 모르면서 이전투구하고 알면서도 뭔가 이뤄보려 악착을 부리는 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이다.

{운문사 이야기}

110 기록자가 자기 시대의 이념만을 고집해 당대의 생생한 자취를 남겨 주지 못한 점 삼국사기는 거기서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정사는 생생하지 않은가
114 자리만 행하고 이타의 꿈이 없으면 지금에는 높은 이름을 떨치지 못할 것이요, 나중에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오. 어찌 중국에 들어가 불법을 얻어 이 나라의 미혹한 백성들을 인도하지 않으시오? 원광에게 나타난 이 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115 이 이야기는 신라의 불교 신앙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민간 신앙과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할 것이다.
116 세속오계는 다분히 유교의 삼강오륜에서 오륜과 닮아 있다. 거기에는 일상적인 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범위의

불교계율이 잘 스며들어 있다.
119 하늘님은 제 할 일이 아닌데 했다 해서 죽이려고 하였다.
121 운문사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산사의 새벽과 새벽과 함께 오는 개명의 순간을 만끽한 바 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원광과 보양과 학일과 일연으로 이어지는,  이 절을 세우고 지킨 이들의 숨소리를 들었다. 운문은 구름의 문, 아마도 운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곳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다. 흔히 개선이 개악을 부르는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122 원효는 너무 커서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일연은 원효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123 신라뿐 아니라 세계의 위인이라 치켜세운 원효에게 결정적인 흠이라면 파계요 그것은 인간적 고뇌라 말하는 춘원의 저변에는 사실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려는 의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원효에게 파계라면 춘원에게는 변절이 있다.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원칙은 무너지기 쉽고 오해는 따르기 쉽다.
125 어느 성인이건 그 민중의 자리로부터 위대한 생애를 펼치지 않았던가?
126 전설은 대체로 주인공과 전승자 사이에 합작으로 만들어진다. 그 주인공이 승려이기에 꺼림칙한 기분은 나라의 이익으로 명분을

세운다. 그만한 여유와 융통성이 신라를 신라이게 했던 것은 아닐까? 원효는 다리 아래로 떨어짐으로써 그를 데려가려는 이들에게 명분을 제공한다.
128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노가바의 창안자는 다름

 아닌 벌써 1400년 전의 원효라고 할 수 있다.
고고한 학승만으로 폐쇄적인 선승만으로 아닌 모두의 승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인간 원효를 가장 잘 바라본 이는 아마도 일연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129 실수도 한 번으로 족하지 비슷한 일이 계속되면 변명도 궁색해지는 법이다.
132 원효는 대체로 낮은 자리에 사는 사람들의 친구였고, 우리는 이런 장면들에서 바보 같은 원효가 진정 바보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다.
133 원효는 이 나라 불교의 첫 새벽이다. 그로 인해 한국의 불교가 만들어지고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분황사는 만년의 원효가 거처한 곳이다.

{의상, 화엄의 마루}

138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의상은 한 그림자에 외로이 싸우며 죽음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았다.

원효가 감성적이라면 의상은 이성적이다.
142 이에 그는 의상에게 신의 호위가 있음을 알았고 그 도가 뛰어난 것에 감복했다.
    하늘님, 천사 이야기가 나옴
147 원효가 현실주의라면 의상은 교조주의다
148 의상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원칙대로 정진한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부처의 화신이라고 했다. 일연이 의상을 법사라고 부른 까닭도 이에 있을 것이다. 이 법사란 말 속에는 의상의 교조적 신앙 태도가 함의된다.
{밀교의 한 자락}

150 시구렁창 같은 세속일지라도 거기서 뒹구는 것이 세상살이의 즐거움일까 ‘출가한 이는 누구에게나 사연이 있다’ 라는 선입견이

우리에게 있다.
153 신라 출신의 대표적인 입축승려 혜초는 바로 선무외의 제자다.
157 신통력을 미끼로 헛된 이름을 팔거나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것은 밀교의 본령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자는 것이다. 일연은 밀교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다.
161 뼈만 남은 수달이 제 새끼 있는 곳으로 가 있는 것을 보고 출가한 혜통의 인생에 불교가 어떻게 심어져 있는지 보여주고 살구꽃 같은 그의 생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찬미하고 있다.
163 노골적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나선 조선조의 정치 이념에 따라 한국의 불교사는 잠시 주춤한다. 이 때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은 쪽이 밀교나 점찰법회 같은 것이었다. 이른바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었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165 이론으로서 받아들인 철학을 넘어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실천 원리로 불교가 신라사회에 자리잡혔음을 알 수 있다. 크건 작건

실천의 문제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워지는 때 그런 사회를 지탱해 주는 것은 저 잘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분의 옷 한 벌 없이 살아가는 한 승려가, 돌아가 덮을 이부자리 하나 없는 처지에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벗어 주고 알몸으로 달려가거니와 그 순간이 바로 신라 사회의 고갱이였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168 거창하게 모임을 만들고 절을 짓고 근엄한 예불을 올리는 이들에게 부처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껍데기 미타 신앙이 가진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자는 목적이라기보다 제 육신을 잊고 끝내 버리고 만 욱면이라는 평안한 시기의 부유한 층의 계집종에게 초점을 맞춘

이야기에서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위안과 격려를 받는다.
171 아미타 서방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기야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사람과 현실의 삶에 고단하게 매인 사람은 마지막의 자리가 서로 멀다. 그러나 엄장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내였다. 늦게나마 생각을 바꾸고 성실히 수행하여 마침내는 친구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광덕과 엄장의 성불은 한결같이 여자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174 사실 살아 돌아와 저승의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이 화를 부르는 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

186 짐승이라도 인자한 마음씀이 저와 같으니 이제 사람이면서 짐승만 못한 이들은 어찌하리

{숨어 사는 이의 멋}

188 불교가 아직 사회의 전면에 있었을 때 승려들의 역할 또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이었다. 세상과의 절연이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 같은 시궁창에 뒹굴어도 살아 있음이 소중하고 복마전 같은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아옹다옹 싸우며 한 세상

마치는 것이 慕情의 세월이다. 공자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드러나고 없으면 숨는다고 했다. 여기서 숨음과 드러남의 매개체는 道다.

불교에서의 숨음은 이와 다른 면이 있는 듯하다.
189 혜현은 중국으로 공부하러 가지 않고 고요히 물러나 세상을 마쳤으나 이름은 여러 중국의 나라에 퍼져 전기가 만들어졌다.

특히 당나라 때에 명성이 자자했다.
190 헛된 명성을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자 하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혜현은 그가 이룬 높은 경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는데도 도리어 거기서 달아나 홀로 지냈으니
193 그런 이들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누린 즐거움이랄까를 일연은 부러운 듯 그리고 있다.
194 일연은 아직 젊은 시절부터 자기가 머문 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꼼꼼히 메모해 두었던 듯하다. 이것이 삼국유사 찬술의 재료가

되었는데 여기서 그 결정적인 증거를 보게 된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곳곳에서 머물 때 마다 써 둔 메모들의 집합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5 숨는다는 것은 오히려 잘난 척 하는데 불과하다.
숨되 숨는 것이 아니요 드러나되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불교의 변증법적 피은의 논리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교가 보는 효도}

202 그것은 인간에게 닥치는 거대한 시험이고 시험 앞에 굴하지 않도록 연단시키는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 관습이었다. 그 시험에 걸려

넘어지지 않았던 아브라함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갈 만한 지도자기 될 수 있었다.
207 일연은 불국사의 구름다리와 석탑 그리고 강당을 조각한 석목에 들인 공이 경주의 여러 절 가운데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고 칭찬한다. 오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가 보는 안목 그대로다.
210 진정의 스승 의상은 제자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려 제자 3천명을 데리고 소백산의 추동으로 갔다. 풀을 엮어 움막을 짓고 3천명을

모아 약 90일 동안 화엄대전을 강의했다.
제자 지통이 강의에서 주요한 부분을 모아 두 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이 책이 바로 추동기다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211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 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더할 나위없는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지극히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한 이 시가 장르에 대해 비록 편린으로나마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오직 삼국유사밖에 없기 때문이다.
책 한 권에 실린 단 14수가 천 년의 시가사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신라 사람들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고급의 문자 수단인 한문을 두고 왜 굳이 향찰을 만들었을까?
212 표기수단의 어려움이 우리 글로 짓는 우리의 시가를 갖게 하는 동기가 되었으리라
한문이라는 고급 언어 수단을 가지고도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신라인들은 그들의 고유정서 이것을 담아 낼 그릇으로서 우리만의 표기 수단을 필요로 했던 것 같고 <찬기피랑가> <제망매가> <원왕생가> 같은 절창의 노래를 얻어냈다. 향가는 그런

노래이기에 일연조차도 이를 평가해 ‘천지간 귀신이 감동하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213 제망매가는 누구나 공감하는 향가의 최고작품이다. 일연은 시에 대한 애착과 남다른 식견으로 향가 가운데서 뛰어난 작품들을 골라 삼국유사 속에 실은 것이다.
좋은 시인은 좋은 시를 쓰기도 하지만 좋은 시를 알아볼 줄도 안다. 일연은 분명 그런 시인이었다.
214 시는 현세의 문제 속에 있으면서 현세에 안주하지 않는 초월성을 가진다. 신라시대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215 화랑밖에 없다. 다만 같은 화랑 출신이라 해도 관계에 나가 화려하게 출세한 이들은 여기서 제외되며 현세에서 박탈된 사람들이

시인이 된다. 그들은 그 박탈감 속에서 오히려 현세 이상의 어떤 것을 보고 노래하는 것이다.
217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곧 신라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저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이 남자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가 넘친다는 평처럼 이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두 가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냈다.
218 태어난 일 자체가 설움, 우리는 그 운명의 짐을 버리지 못한다.
222 재물이 지옥에 가는 근본임을 알고 바야흐로 깊은 산중으로 피해가서 일생을 보내려 하는데 어떻게 감히 이것을 받겠는가?
노래 한 곡에도 감동하는 도적들이나 한 구비 너머 두 구비까지 내다보는 영재의 깨달음이나 모두 놀라운 경지에 있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1권에서는 사진작가 양진의 사진 14장, 2권에서는 12장의 사진이 먼저 나오고 머리말 → 차례→삼국유사는 어떤 책인가→본문의 첫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삼국유사> 원본의 전체 조목에서 1권에 15개, 2권에 15개 제목 총 30개로 추린 저자는 삼국왕조사의 일화들을 다룬`기이'편(1권)과 불탑의 유래·고승 일대기를 다룬 `흥법'편(2권)을 뼈대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저자는 20년 이상을 삼국유사를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삼국유사의 연구도 연구지만 그 자신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 즐긴 것 같다.
시인답게 각 장의 제목도 눈길을 끈다. 현대의 젊은이들도 호기심을 가질 만한 제목들이다.
또 삼국유사 속의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고 그 밑에 문학적 글을 써 놓은 것이 좋았다.
어떡하든 삼국유사 속 이야기를 현대로 불러내어 함께 읽으며 그 속에서 우리의 모습 일부도 느낄 수 있도록 한 작가의 마음씀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1권 162쪽에 ‘...다시 다음 시대 본격적으로 인간의 삶이 노동을 통한 생산물로 유지하는 시대에 노래는 민요가 되었고, 민요가 노동현장에서 불렸을 때 노래의 제의적 성격이 감소되는 대신 기능적 성격은 충분히 살아있게 된다.’ 의 구절이 있다.
구지가에서 노동 현장을 떠올리는 작가의 모습에서 그의 성향을 느낄 수 있다.
81쪽에 ‘두 사람은 본디 아내를 데리고 살다가 역외가상이 있어 속세의 인연을 버리고 산중으로 숨는다’ 는 문장은 뜻이 이해가 안 되었다.
1권 170쪽에도 제목은 ‘재앙을 극복하는 길’ 인데 그 길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111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라는 저자의 글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그 말한 분을 옛 유대성인이라고 쓴 이유가 궁금하다.
성경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고 분명히 나와 있다. 옛 이야기를 시시콜콜 다 따지며 인용한 저자는 학자임에도 예수를 예수라고 안 쓴

 이유는 실수를 한 것인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다.
그것보다도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가 아니고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가 정확한 인용이다. 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표현이며 먼저 된다는 뜻은 뭔가 성공하고 전복한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란 뜻이다. 잘못 인용했음에도 저자는 아예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라고 못 박고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이런 식으로 두리뭉실 인용하는 것은 신화나 설화 관련 글을 쓰는 사람들의 성경을 대하는 특징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이야기책이라 하더라도 구전된 것이 아닌 이상 인용은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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