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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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개비라고 부르는 ‘닭의장풀’의 꽃말은 소야곡(小夜曲 )이다. 길가의 습지나 냇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에게 누가 이렇게 달콤한 이름을 붙여 주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낭만적이지 아니할 수 없다. 한 편, 푸른 자주 빛, 붉은 자주 빛, 흰색 등 다양한 색의 꽃을 피우는 나팔꽃은 이브닝 로우즈(evening rose)라고 부르기도 한다.
해가 짐과 동시에 개화 작업에 들어가 새벽 4시경에 꽃을 피우기 시작함에서 온 말이리라.
나팔꽃은 새벽이라야 제격이고 소야곡은 밤에 들어야 제 맛이 나는 것처럼, 나의 글쓰기는 새벽이라야 제대로 살아 움직인다.
여명에 잡아 올린 언어들은 은빛으로 퍼덕거린다. 갯바람이라도 동행한 날이면 은빛은 청색을 띠고 식탁위에는 모시 수건이 마련된다. 이름씨는 꾸밈씨가 없어도 자기대로 빛나고 설명씨는 살랑거리는 꼬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우러짐은 펜 끝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둘만이 어울려도 강물은 흐르고 셋, 넷이 어울려도 너무 길거나 지루하지 않다. 머리가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님을 모를 리가 있는가!
나의 기상시각은 나팔꽃이 개화를 시작하는 전후다. 꽃핌이 알람시계에 기대지 않듯이 나 또한 그것에 의존하지는 않는 신체리듬의 반작용이다. 아니, 어쩌면 나팔꽃의 미세한 떨림이 나에게 전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제일 먼저 창이란 창은 다 연다. 새벽의 기운을 한껏 집안으로 불러들인다. 내가 부르지 않는다고 그가 들어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여기서는 내가 주인 됨이다. 새벽은 장미향을 품고 들어오기도 하고 낙엽 내음을 싣고 오기도 한다. 그가 나를 위해 베푸는 작은 이벤트와 흡사하다고나 할까. 다음은 창밖으로 고개를 쑥 내민다. 구름이 있는 날이면 구름과 마주 대하기고 별빛 반짝이는 하늘이 그곳에 있으면 별과 함께 잠시 넉넉해진다.
한 잔의 차를 들고 책상 앞에 앉는다. 컴퓨터가 책상위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몇 권의 책이 그 옆에 다소곳이 머무는 작은 공간이다. 언어 바구니인 메모 공책이 책상위에 펼쳐진다. 일상에 떠돌던 언어들이 각자의 빛을 발하면서 꽃으로 환생한다. 짧은 유랑의 기록에서 온 언어는 내 추억과 만나서 회상의 글이 된다. 차향기가 보태어지면 그 글은 다시 명상의 글이 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건져 올린 언어로는 도덕적 글이나 나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글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음악 속에 묻혀 있던 언어들은 거물에 걸려 올라온다. 문장은 메모 속에서 만들어져 있고 나는 그것들에 양념을 가한다. 맛을 더하는 셈이다.
' G선이 오른손 중지 끝에 와 닿는다. 활을 천천히 당긴다. 작은 떨림은 가슴을 파고들어 온 몸 구석구석을 더듬는다. 기쁨은 울음이 되어 바람 속에서 흔들거린다.'
(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시간 Handel의 Largo 기악곡을 들으면서)
윗글을 메모 장에서 건져 올린 새벽이면 헨델의 라르고 기악곡을 다시 듣는다. 음악이 끝나면 언어들은 음의 끌림에서 쉽게 헤어나지를 못한다. 그러면 나는 카운터테너나 바리톤의 음성으로 아리아를 나의 언어들에게 다시 들려준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나에게 손을 내밀면 떨리는 나의 손을 내밀어 그들을 잡는다. 그들은 다시 나의 언어로 태어난다.
‘푸르고 사랑스런 푸른 나무 그늘이 이렇게 감미로운 적은 없네
나의 사랑스런 플라타나스 나무. 너희에게 운명이 미소짓게 하자꾸나.
G선의 울림이 나뭇가지 끝에서 흔들거린다.
흔들림은 떨림이 되어 나에게로 다가온다. 어찌 푸르고 사랑스런 나무그늘의 감미로움을 페르시아왕 크세르세만 알랴. 나도 그가 그립다. 울고 싶도록 그립다. 그립다고 말하면 그가 나를 다시 찾아줄 것인가! ( 중략 )
그러나 아시다시피 언어들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기만 한 것인가!
어떤 날은 단 한 문장에서 멈추어 설 수도 있다. 개성이 강해 다른 것들과 어우러짐 어려운 것이 있는가 하면 색과 향이 지나친 것들이 까탈을 부린다. 다른 재료일지라도 같은 양념으로 버무리면 다 반찬이 되는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다. 문장과 문장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고 낱말과 낱말이 따로따로 놀 때도 있다. 그러다보면 시간은 잔뜩 흘러 나는 시들어 간다. 나팔꽃이 꽃잎을 오므리는 것과 흡사하다. 새벽이 아침으로 밝아오면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다.
새벽에 퍼덕이던 언어들은 한 낮에는 신선함을 잃는다. 아무리 색다른 재료로 버무리고 해도 제 맛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반쯤 버무리다 만 언어들이 다음날 새벽에 또 다시 은빛을 반짝거리며 나에게 항상 찾아오라는 법은 없다. 어떤 때는 그들을 몽땅 버려할 때도 있고 처음부터 다시 써는 편이 오히려 나을 때가 더 많다.
글쓰기는 즐거운 유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놀이의 판이 새벽에만 열리는 사람에게는 적지 않은 고통이 따른다. 물론 조용한 가운데 넉넉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사정을 달라질 수도 있지만 출근시간을 다투는 직장인에게는 차라리 저녁 놀이판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시간의 넉넉함이 마음의 여유로움을 가져다주고 언어들과의 가슴 흥건히 젖는 놀이판을 벌릴 여유가 있음이라. 그러나 나팔꽃이 나팔꽃다움은 새벽에 개화를 함에 있듯이 나의
새벽녘 글쓰기는 언어들의 유희에 나의 행복한 동참임을 부인할 수 없다.
IP *.114.56.245
낭만적이지 아니할 수 없다. 한 편, 푸른 자주 빛, 붉은 자주 빛, 흰색 등 다양한 색의 꽃을 피우는 나팔꽃은 이브닝 로우즈(evening rose)라고 부르기도 한다.
해가 짐과 동시에 개화 작업에 들어가 새벽 4시경에 꽃을 피우기 시작함에서 온 말이리라.
나팔꽃은 새벽이라야 제격이고 소야곡은 밤에 들어야 제 맛이 나는 것처럼, 나의 글쓰기는 새벽이라야 제대로 살아 움직인다.
여명에 잡아 올린 언어들은 은빛으로 퍼덕거린다. 갯바람이라도 동행한 날이면 은빛은 청색을 띠고 식탁위에는 모시 수건이 마련된다. 이름씨는 꾸밈씨가 없어도 자기대로 빛나고 설명씨는 살랑거리는 꼬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우러짐은 펜 끝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둘만이 어울려도 강물은 흐르고 셋, 넷이 어울려도 너무 길거나 지루하지 않다. 머리가 문장을 만드는 것이 아님을 모를 리가 있는가!
나의 기상시각은 나팔꽃이 개화를 시작하는 전후다. 꽃핌이 알람시계에 기대지 않듯이 나 또한 그것에 의존하지는 않는 신체리듬의 반작용이다. 아니, 어쩌면 나팔꽃의 미세한 떨림이 나에게 전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제일 먼저 창이란 창은 다 연다. 새벽의 기운을 한껏 집안으로 불러들인다. 내가 부르지 않는다고 그가 들어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여기서는 내가 주인 됨이다. 새벽은 장미향을 품고 들어오기도 하고 낙엽 내음을 싣고 오기도 한다. 그가 나를 위해 베푸는 작은 이벤트와 흡사하다고나 할까. 다음은 창밖으로 고개를 쑥 내민다. 구름이 있는 날이면 구름과 마주 대하기고 별빛 반짝이는 하늘이 그곳에 있으면 별과 함께 잠시 넉넉해진다.
한 잔의 차를 들고 책상 앞에 앉는다. 컴퓨터가 책상위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몇 권의 책이 그 옆에 다소곳이 머무는 작은 공간이다. 언어 바구니인 메모 공책이 책상위에 펼쳐진다. 일상에 떠돌던 언어들이 각자의 빛을 발하면서 꽃으로 환생한다. 짧은 유랑의 기록에서 온 언어는 내 추억과 만나서 회상의 글이 된다. 차향기가 보태어지면 그 글은 다시 명상의 글이 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건져 올린 언어로는 도덕적 글이나 나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글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음악 속에 묻혀 있던 언어들은 거물에 걸려 올라온다. 문장은 메모 속에서 만들어져 있고 나는 그것들에 양념을 가한다. 맛을 더하는 셈이다.
' G선이 오른손 중지 끝에 와 닿는다. 활을 천천히 당긴다. 작은 떨림은 가슴을 파고들어 온 몸 구석구석을 더듬는다. 기쁨은 울음이 되어 바람 속에서 흔들거린다.'
(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시간 Handel의 Largo 기악곡을 들으면서)
윗글을 메모 장에서 건져 올린 새벽이면 헨델의 라르고 기악곡을 다시 듣는다. 음악이 끝나면 언어들은 음의 끌림에서 쉽게 헤어나지를 못한다. 그러면 나는 카운터테너나 바리톤의 음성으로 아리아를 나의 언어들에게 다시 들려준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나에게 손을 내밀면 떨리는 나의 손을 내밀어 그들을 잡는다. 그들은 다시 나의 언어로 태어난다.
‘푸르고 사랑스런 푸른 나무 그늘이 이렇게 감미로운 적은 없네
나의 사랑스런 플라타나스 나무. 너희에게 운명이 미소짓게 하자꾸나.
G선의 울림이 나뭇가지 끝에서 흔들거린다.
흔들림은 떨림이 되어 나에게로 다가온다. 어찌 푸르고 사랑스런 나무그늘의 감미로움을 페르시아왕 크세르세만 알랴. 나도 그가 그립다. 울고 싶도록 그립다. 그립다고 말하면 그가 나를 다시 찾아줄 것인가! ( 중략 )
그러나 아시다시피 언어들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기만 한 것인가!
어떤 날은 단 한 문장에서 멈추어 설 수도 있다. 개성이 강해 다른 것들과 어우러짐 어려운 것이 있는가 하면 색과 향이 지나친 것들이 까탈을 부린다. 다른 재료일지라도 같은 양념으로 버무리면 다 반찬이 되는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다. 문장과 문장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고 낱말과 낱말이 따로따로 놀 때도 있다. 그러다보면 시간은 잔뜩 흘러 나는 시들어 간다. 나팔꽃이 꽃잎을 오므리는 것과 흡사하다. 새벽이 아침으로 밝아오면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다.
새벽에 퍼덕이던 언어들은 한 낮에는 신선함을 잃는다. 아무리 색다른 재료로 버무리고 해도 제 맛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반쯤 버무리다 만 언어들이 다음날 새벽에 또 다시 은빛을 반짝거리며 나에게 항상 찾아오라는 법은 없다. 어떤 때는 그들을 몽땅 버려할 때도 있고 처음부터 다시 써는 편이 오히려 나을 때가 더 많다.
글쓰기는 즐거운 유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 놀이의 판이 새벽에만 열리는 사람에게는 적지 않은 고통이 따른다. 물론 조용한 가운데 넉넉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사정을 달라질 수도 있지만 출근시간을 다투는 직장인에게는 차라리 저녁 놀이판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시간의 넉넉함이 마음의 여유로움을 가져다주고 언어들과의 가슴 흥건히 젖는 놀이판을 벌릴 여유가 있음이라. 그러나 나팔꽃이 나팔꽃다움은 새벽에 개화를 함에 있듯이 나의
새벽녘 글쓰기는 언어들의 유희에 나의 행복한 동참임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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