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피맘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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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사랑을 준다는 것이 그처럼 행복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하늘은 잉태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여자들을 훈련시키는 것 같다. 분명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엄마가 되면서 훨씬 좋은 사람이 된 것이 맞습니다. 궁금하기도 합니다. 엄마가 되지 못했더라도 온 몸의 세포가 노래를 부르는 듯한 행복감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요? ‘사랑’이라는 명사에 호응하는 동사는 당연히 ‘받는다’로 알고 있던 제가 줄수록 더 받게 되는 사랑의 비밀을 깨우치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어쩌면 그냥 '회사'라는 공간을 견디기가 힘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왠지 비겁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 내 가장 건강한 에너지를 쓰고 싶다.’를 ‘그냥 그저 그런 아줌마로 늙어 가겠다’로 자동번역하는 두뇌구조를 가진 제게는 다른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궁리 끝에 찾은 것이 ‘작가’였습니다. 제게 글쓰기는 어떻게든 ‘그냥 아줌마’로 분류되는 것을 피해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던 셈입니다. 고백하건데 당시의 제게 ‘아줌마’는 결코 비슷해져서도 안 될 ‘루저’의 다른 이름이었으니까요.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기란 퇴사를 결심하는 것과는 또 다른 도전이었습니다. 퇴사가 과거로부터의 단절이었다면 글을 떠난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체념과 같은 의미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보같다구요? 그러게요. 이제와 다시보니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 생각에 어떻게 그리 오랜 시간을 붙들려 있었는지가 오히려 신기하게 여겨질 지경입니다.
더 이상 작가를 꿈꾸지 않는 해피맘CEO 올림 |
작년 8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르는 이 편지를 쓰고나서 그야말로 몇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해방감을 경험했다.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에 매여 정작 매일매일 주어지는 진짜 삶을 누릴 여유를 잃어버린 스스로에 대한 애처로움이 견딜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서던 무렵이었다. 2010년 '작가'라는 목적지를 정한 이후 처음 맞는 영혼의 휴식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어도 늘 묵직하게 따라다니던 강박을 떠나보낸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 것도 되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별안간 삶은 새털처럼 가벼워졌고, 매 순간 날아오를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진짜였다.
그리고 일년이 채 흐르지 않았건만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작가 따위는 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은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포도를 향한 비겁한 체념이었던 걸까? 나는 다시 또 어깨에 무거운 보트를 지고 휘청거리며 일상을 벼텨내야하는 걸까? 결국 이 지독한 형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걸까? '엄마' 하나만 감당해 내기에도 온 몸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데 여기에 다시 무언가를 더 치뤄내야 한다는 걸까?
너 정말 왜이러니?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아직도 포기가 안 되는 거니? 제발 쉽게, 편하게 좀 살아주면 안 되는 거니? 너 하나만 모른 척하면 모두가 다 편할 수 있는 거 알잖니? 그래도 꼭 해야겠니? 그렇게 모두를 힘들게 해야 속이 시원하겠니?
나도 알아. 그런데...그런데...처음엔 정말 좋았는데...그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아. 이제는 알겠어.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고 나누고 싶은 욕망'이야말로 나를 살게 하는 힘이라는 거. 그 과정이 아무리 고되고 부대낀다고 해도 그런 시간들 속에 있는 나를 사랑한다는 거.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
아이에게 사랑의 체험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엄마'의 가장 큰 의무이자 최고의 권리라고, 이 권리만 제대로 누릴 수 있어도 그 삶은 충분한 성공이라고 했다. 훌륭한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 여름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딱 9개월분의 용기가 쌓인 오늘, 그 날엔 차마 할 수 없었던 고백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나는 엄마다. 그리고 아내다.
하지만 내가 사람이 아니라면 '엄마'도 '아내'도 아무 것도 아니다.
작가가 되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배워 익혀 얻은 깨달음을 나누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고자하는 열망의 표현일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이고자 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열망이 어디 있겠는가? 이 근본적인 욕망을 제거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일까?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엄마가 아이에게 무슨 수로 사랑의 체험을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엄마로서 성공을 꿈꿀 수 있단 말인가?
엄마라 불리운지 14년차를 맞는 봄날 새벽,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 내 가장 건강한 에너지를 쓰고 싶다.’ 라는 선언에 '아이들'을 지우고 '나'를 채워넣는다. 그 시간이 모이면 다시 만나게 될 '내 아이처럼 웃는 나'를 기다리며. 온 몸의 세포가 노래를 부르는 듯한 희열을 나를 통해 재현하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