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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17일 03시 47분 등록
꼬마 디자이너들

나는 요즘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다는 기분에 휩싸여 지내고 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3-40대의 변화경영 연구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몇 주 전부터 나보다 한참 어린 중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다 보니 자연스레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나의 사춘기 시절을 다시금 꺼내 보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배경은 대략 이렇다. 나는 이번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인도로 해외 선교를 갈 참이었다. 몽골에서의 해외 연수 일정을 마치고 인천공항에 착륙해 핸드폰 전원을 켜는 순간, 한 통의 문자를 통해 이미 나의 참여 여부는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주변 어른들의 만류로 인해 결국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아쉬움을 달래고 있던 어느 날……

같은 교회 언니로부터 인도 선교를 가기 위해 대신해서 한 달 동안 중학생 아이들 영어를 가르쳐 줄 선생님을 찾고 있다는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다. 나는 기꺼이 그러마 하고 승낙했고, 비록 내가 직접 인도에 가지는 못하지만 인도에 가는 선배 언니를 위해 대타로 일해주면 간접적으로나마 선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겠구나 싶었다. 인도의 아이들에게 전해 줄 예정이었던 나의 애정과 사랑을 대치동의 어느 학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대신 주게 된 셈이다. 그렇게 해서 근 한 달 동안 아이들과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왔고, 이번 주가 나의 마지막 주가 될 것이다.

마지막 주라고 생각하니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들었나 보다. 아이들이 하나같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저마다 생김새도 다 다르고, 성격과 말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리고 꿈도 서로 다 다르다. 그러나 나를 안타깝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주입식 교육의 현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학원 숙제에 찌들어 있어 한창 무럭무럭 자라날 나이에 70대 노인처럼 삶에 활력이 없는 아이들.

내가 수업하러 갔던 첫 날의 강의실 분위기는 적막 그 자체였다. 영어 공부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불투명한 아이들은 그저 쳇바퀴 돌아가듯 그렇게 학원 문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들의 지친 영혼이 힘없는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듯했고, 그들의 지루함과 의욕상실이 나의 온 몸으로 전해져 왔다. 나는 속으로 ‘이건 아닌데’ 라고 생각했고, 두 번째 날부터는 아이들과 그냥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영어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이 있고 난 다음에야 영어가 있는 것이지 영어가 삶을 만들지는 않기에 말이다.

내가 있는 동안만이라도 아이들을 풀어주자는 생각이었고, 이 아이들에게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임시’ 학원 선생님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꿈에 대해 이야기했고,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서로 나누었으며, 그 짧은 시간 동안만큼은 현실에서 벗어나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물론, 잘 따라와 주는 아이들도 있고, 그런 얘기를 왜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아이들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짧게나마 그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연습을 하게 했다는 것.

이제는 강의실에 들어서면 적막보다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수업을 한다. 사실, 영어 공부는 제쳐놓고 이 아이들을 영혼의 비타민이 될 만한 전시회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데려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루에 백 개씩 외워야 하는 영어 단어 속에서 도대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울까, 이 답답한 마음을 혼자서 달래곤 한다.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나도 그들과 똑 같은 환경 속에서 자랐고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나도 내 어린 시절의 6년을 대치동에서 살았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정석수학과 A급 수학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었다.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할 나이에 알아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책을 억지로 보느라 꽤나 괴롭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훗날 얼마나 도움이 되고,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었는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노력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공부하는 이유와 그 의미를 알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여기까지는 전적으로 나의 생각이고,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참 많은 것을 배운다. 아이들은 거짓말할 줄 모른다. 칭찬하면 기뻐하고, 혼을 내면 주눅 들고, 돌려 말할 줄 모르고,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한다. 톰 피터스조차도 젊은 세대를 따라갈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순수함이라고 했다. 문득, 생각나는 말이 있다.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나는 잠시 리더가 되는 연습을 해 보았다. 때로는 칠판 앞에 서서 열심히 떠들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들 틈에 끼어 같이 웃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학생들이 앉아 있는 책상에 앉아 보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따끔하게 충고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맛있는 간식을 사주기도 하고, 이렇게 우리는 함께 하나의 팀을 이뤄 매번 새로운 이야기 꽃을 피웠다. 말하기와 듣기, 쓰기와 읽기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말이다.

저번 시간에는 한 아이가 새로 들어왔는데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더 편하다며 나와 영어로만 대화하고 싶어한다. 한국말이 너무 어렵고 싫다고 불평하는 이 아이에게 나는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앉혀 놓고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국말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잘 알지만, 그래도 한국인은 한국말을 잘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누가 뭐래도 너는 한국인인데, 한국말을 싫어하면 너는 네 자신을 싫어하느냐고. 오히려 영어도 잘하고, 동시에 한국말도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어려우면 열심히 노력해서 배우면 되지 않겠느냐고. 나는 진심으로 해 준 말이었으나 얼마나 마음으로 받아들였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내 말을 기억해줄 거라고 믿는다.

4시간 동안 거의 쉬는 시간 없이 떠들다 보면 지치기도 하지만, 오히려 아이들에게서 큰 힘을 얻곤 한다. 그리고 간혹 가다 뒤로 넘어갈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아이들이 있다. 하루는 한 아이가 나에게 뜬금없이 질문한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 삼촌한테 시집 오시면 안돼요? 그러면 저한테는 외숙모가 되는 거잖아요”

나, 완전 자지러지게 웃었다. 수업하는 내내 그 이야기를 해 살짝 민망했으나 그 마음이 너무 예쁘고 고마워서 혼자 감동했다. 이 아이들과 헤어질 생각을 하니 조금 섭섭하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학원 원장님께서는 나에게 좀 더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을 하신다. 아마 이번 주에 그 가부를 결정해야 할 듯하다. 참 신기한 사실은 내가 박차고 나온 두 번째 회사의 외국인 상사 이전에 계셨던 한국인 지사장이 바로 이 학원 원장님의 절친한 친구분이라는 것. 넓고도 좁은 게 바로 세상이구나 싶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라고 하더니, 뭔가 많은 것을 거두게 되는 2007년 가을이 예상된다.

얘들아, 나는 너희들을 각자의 인생을 설계할 줄 아는 꼬마 디자이너로 기억할 건데 너희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게 될까?
IP *.6.5.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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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09.18 21:10:58 *.60.237.51
요즘 바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구나..^^

종윤이형이 미국 갔다왔으니, 북리뷰팀 한 번 모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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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바다
2007.09.18 23:15:58 *.6.5.152
안그래도 추석 지나고 10월달 오프 모임하기 전에 모일까 생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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