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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17일 06시 34분 등록
외국에 처음 나갔던 게 82년도이니까 꼭 25년이 지났다.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25년 전이라니 잠시 세월의 쏜살같음에 말문이 막히지만 다시 한 번 숨을 고르고 계속 쓰기로 한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여러 도시를 다니게 되었는데 그 당시는 비행기 편수가 적어 지금처럼 미국이나 유럽을 매일 다니지 않았다. 비행기가 도착하면 그 곳에서 대기하던 다른 팀과 교대를 하고 다시 그 비행기가 돌아 오기까지 한 일 주일 동안 꼼짝 없이 현지에 머물게 된다. 어떻게 보자면 도착지에서 머무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게 되는데 실은 그 맛에 힘들다고 푸념하면서도 노는 궁리에 빠졌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한 도시에서 놀다가 지루해지면 우리는 자국 비행기가 취항하지 않는 다른 도시를 탐험하러 가곤 했다. 예를 들어 취리히에서 사 박 오일을 있게 되면 매번 가는 곳이 알프스 산맥 꼭대기들로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그저 그 산이 그 산으로 보이게 된다. 한창 호기심 왕성했던 이 십대의 청춘들은 노마드의 후예답게 짐을 꾸려선 불 빛 찬란한 도시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다.

당시 유럽에서 우리들에게 인기 코스는 이탈리아로 침대 열차를 타고 로마에 가는 것이었다. 밤을 꼬박 새운 10시간 가까운 비행을 하고 파김치가 된 몸이지만 그럼에도 호텔 방에 트렁크만 홀라당 던져 놓고는 기내에서 미리 모의했던 대로 각자 단출한 짐을 꾸려 새로운 모험을 꿈꾸며 기차역으로 향한다. 이미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뚫어 놓은 코스가 있어 미리 정보는 다 꿰뚫고 있다. 열차 시각에서 식당의 메뉴까지 실패하지 않는 노하우가 계속 전수되는 조직이다. 유래일 패스 구입 방법에서 기차 안에서의 매너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곤 했다.

취리히에서 로마까지는 한 10시간 정도 걸렸다. 아침에 도착 방송이 나오는 데 짧은 영어라 알아듣긴 힘들어도 “****롬.****롬”이란 말에 이내 가슴이 벅차 오르기 시작한다. 로마를 “로움”으로 발음하는 데 그 단어의 뉘앙스가 뭐라 말할 수 없이 가슴 두근거리게 만들곤 했다. 기차에서 수면을 취해야 하는 데도 책에서만 봤던 유명한 도시들을 스쳐 지나가노라면 눈을 비비며 밖을 내다보느라 새내기들은 꼬박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낯선 도시가 왜 그렇게 나를 흥분시켰을까? 새로운 것, 미지의 것들은 호기심 가득 찬 스무 살 초반의 야성을 사정없이 일깨우며 무한대의 설렘을 가져다 주었다. 처음 가는 도시에 내릴 때마다 가슴 한 켠이 무차별적으로 뜨거워 지는데 그런 밤엔 거의 잠을 못 이루곤 했었다.

입사하고 일년이 지나 비로소 뉴욕이란 도시를 처음 가게 되었다. 착륙을 위해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자 지상에 펼쳐진 야경에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호기심에 눈을 반짝거리던 어린 승무원을 앞에 두고 초로의 부부가 웃고 있던 기억이 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불빛이 가슴으로 마구 파고들어오는 데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LA나 하와이와는 달리 뉴욕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미국이란 나라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던 것 같다. 거대한 빌딩 사이의 맨하튼 한 복판을 버스가 달릴 때도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 빌딩 숲에서 맞닥뜨린 팬암 건물의 위용과 그 불빛들은 정말 당시의 나에겐 다른 세계였다는 느낌이었다.

뉴욕에서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녔다. 지하철은 절대로 타지 말라던가 밤에는 외출을 금지한다는 규율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다지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 같다. 24시간 문 여는 한국 식당에서 곰탕을 먹었고 돌아오는 길에서 마약 상인과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그저 신났던 곳이 그곳이었다.

왜 그렇게 좋았느냐는 질문에는 한 마디로 “Passion”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하곤 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활기 있는 표정, 여러 인종들의 당당함, 자유로운 복장, 브레이크 댄스 (80년대니까), 뮤지엄, 자신감, 생명력, 그저 모든 것이 살아서 거칠게 숨쉬고 있었다. 물론 처음과 같은 두근거림은 그 후 계속 되었던 방문으로 덜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첫 인상 그대로 열정적인 도시라는 기억으로 오랫동안 남아있게 된다.

요즘 읽는 그 어떤 책도 나에게 묻는 것이 있다면 열정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과거 형으로 대답하고 있노라면 마음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있다. 줄곧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다. 나는 갑자기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열정에 대한 회기 본능에 휩싸였다. 불현듯 그 도시가 미치도록 그리워지고 만 것이다.

승무원을 그만 둔 게 한 이십 년 되고 그리고 그 후 뉴욕엔 간 적이 없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세월인데 자그마치 20년이나 공백이 있었으니 많이 변했을 터이다. 문득 갑자기 그 곳에 가야 할 것 같은 감정에 며칠을 사로잡혀 있었다. 열정, 바로 그것. 안개 속에서도 무언가를 헤치고 나가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열정이 있었던 도시다.

다른 이성적인 감정들이 점잔을 떠는 사이 철 없는 충동 하나가 튀어나와선 어느 덧 뉴욕 행을 결정시켰다. 자신을 놀라게 하라는 톰 피터스의 “와우! 프로젝트”를 그냥 그대로 실현했다고 하면 너무 심할까? 이십 대 초반에 나를 푹 매료시켰던 그 도시, 나는 불현듯 그렇게 여행을 결정하고 약간 들떠있다.

그 때 그 곳에서 때론 이 곳에서 마주치곤 했던 오래된 친구와는 맨하튼의 근사한 바에서 한 잔 하기로 약속이 정해졌다. 우리는 42번가의 한 호텔에서 밤을 지새우며 한 때 죽어라 붙어 다녔던 그녀와 나의 어떤 날들을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내 속에서 그리던 꿈의 한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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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주
2007.09.17 06:59:10 *.233.202.88
어제 뉴욕의 IBM 본사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 아들의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친구 아들이지만 하는 게 하도 예뻐서 내 자식같다는 착각이 들더군요.
출중한 기량에 선미한 성품까지 겸비하니 가히 신이 빚어 놓은 걸작이다싶데요.
열정을 뿜어 내는 도시, 능력만 있다면 어느 나라 출신이든 어떤 인종이든 불문에 부치고 폭 넓게 받아들이는 기회와 자유의 도시 뉴욕.
뉴욕행을 통해 그 곳의 무한한 가능성과 서기(瑞氣), 마음껏 호흡하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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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자니
2007.09.21 18:48:36 *.187.238.150
그랬군요. ^^
향인씨의 과거의 모습이 그려 집니다.
언니를 대신하여 가끔쯤 들어와 글을 보게 됩니다.
나도 톰 피터스 책좀 봐야 되겠네요. 시골생활이 뭔지 잡일로 하도 바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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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09.22 02:28:13 *.48.38.252
하하 안개님. 무지 반갑습니다.흠..대신하여..그렇게 되었군요.ㅋㅋ
종종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희주님. 편안한 추석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3시간 있으면 집을 나설 것 같습니다. 무사히 잘 다녀올께요.새로운 기운 많이 받고 오겠습니다. 다들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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