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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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이순신에 관하여 >
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명장. 거북선 발명가. 武人이자 文人이자 과학자
세계가 인정하는 위대한 해군 제독. 난세의 영웅, 불굴의 영웅. 軍神. 효자, 조카들도 거둠
< 생애 >
고려 때 정5품 중랑장(中郎將)을 지낸 덕수 이씨의 시조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
조선 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낸 이변(李邊)의 후손.
1545년 한성 건천동(현 인현동)에서 이정과 초계변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남
청소년기에는 외가인 충남아산에서 자람
상주 방씨와 혼인하여 외가 근처인 현재 현충사 자리에 정착
조부 이백록이 기묘사화에 연루, 부친은 벼슬에 뜻을 버림
20대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
1972년 무과 응시. 이 때 타고 있던 말이 넘어져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계속 했으나 낙방
1576년 무과급제
1579년 해미에서 10개월간 훈련원 봉사로 근무
1580년 함경도에서 여진족 방어
1586년 사복시 주부 /조산만호/녹도 둔전사의
1587년 조산만호 시절 여진족 방어를 위해 절도사 이일에게 추가병력 요청했으나 거절당함
(직속 상관인 이일이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이순신을 모함)
순변사 휘하에서 첫 번째 백의종군하며 여진족 장수를 잡아 죄를 사면 받음
전라도감사 이광의 눈에 띄어 군관으로 발탁ㅡ>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이 됨
1589년 12월 유성룡의 천거로 정읍현감이 됨
1591년 2월 정읍현감 ㅡ>진도군수 ㅡ>가리포첨절제사 ㅡ>전라좌수사/
정3품 당상관 전라좌수 수군절도사에 발탁 /이 때부터 군량미 확보/
군대 확보/ 거북선
1592년 육지로 증원하라는 조정의 명에 불복. 수군 강화. 전라 좌수영 전선 40척 보유
1592년 4월13일 함대 700척 보유한 15만명의 왜군이 부산포 함락하며 임진왜란 시작
1592년 4월16일 원균이 침략 소식 보냄/ 이 소식에 휘하 700명 비상소집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
4월 30일 전라우수군이 도착하면 전투하겠다고 장계 올림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 승리
1592년 5월 29일 사천해전 /전라우수영의 합류가 늦어지자 노량으로 함대 이동 왜적 배
30척 격파 / 거북선 첫 출전/ 어깨 관통상 당함
1592년 7월 8일 한산도 대첩 /학익진/ 육지에선 곽재우의 승리
1592년 8월 29일 부산해전/4차례의 전투/
1593년 1월 10일 웅포해전
1593년 8월 1일 삼도수군통제사
1597년 2월 25일 통제사 해임 /한양 압송 /3월 4일 투옥 /우의정의 도움으로 결백 증명.
4월 1일 사면 / 두 번째 백의종군
1597년 7월 16일 칠천량해전 /원균,이억기 등 전사 /이항복의 건의로 다시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1597년 8월 29일 진도해전/ 벽파진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 53세로 전사
<거북선 관련 기록>
선조 25년(1592)4월 13일 왜적들이 부산항을 침공 하면서부터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지만
충무공은 그 전 해 2월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하여 1년 동안 전심전력한 끝에 아슬아슬하게도 왜란 직전에 거북선을 완성 시켰다.
※거북선의 건조일정(충무공의 난중일기 근거에 의함)
●2 /8일.......거북선에 달 돛배 29필을 받았다.
●3/27일......거북선에서 대포쏘기를 시험했다.
●4/11일......돛배 만들기를 시작했다.
●4/12일......거북선에서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아 보았다.
(전쟁 하루전)
※거북선의 전투참가 경과
* 제1차 당포해전(5/4일 새벽축시:2시)
< 가족 >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李薈, 1567년 출생), 이울(李蔚, 1571년 출생), 이면(李葂, 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사후 관직>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에 증직.
1604년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으로 추봉 좌의정을 가증
1643년 인조는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됨.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움.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 건립. 1705년 현충사 건립,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이순신 장군 등재
일본 해군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 인연과 악연 >
-서애 유성룡 - 장군을 천거하고 아낌, 문무의 대표적 두 사람이 나라를 건짐
-원 균 - 이 순신 장군과 불화, 난중일기에 그의 잘못된 행동이 많이 나옴
< 평가 >
『선조실록』
- “이순신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良將)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敗沒)을 초래하여 양호지방(兩湖地方: 忠淸道·全羅道)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정인보(鄭寅普)
-「이충무공순신기념비(李忠武公舜臣紀念碑)」에서 “공(公)은 명장보다도 성자(聖者)이다. 신묘불측(神妙不測)이 오직 지성측달(至誠惻怛)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
해전사연구가(海戰史硏究家)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
-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순신의 업적은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이순신이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이순신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중략……영국 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순신은 한 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 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마크 길버트 하와이 퍼시픽대 역사학과 석좌교수
-‘세계 3대 제독’ “그는 완벽한 인간이었으며 세계적인 지도자이자 영웅이었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회고록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영국의 일본전문 역사학자인 ‘스티븐 턴불(Stephen Turnbul)’
- “이순신 장군은 한국의 영웅이자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해군지휘관 중 한 명이다. 이순신 해군 제독의 승리들은 일본군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판명됐다.”
1905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 제독 전쟁영웅인 도고헤이하치로(東卿平八郞)
- “넬슨은 군신(軍神)이 될 수 없다. 해군 역사에서 군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 한 사람 뿐이다.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나는 일개 부사관도 못 된다.”
<이순신각서(李舜臣覺書)>를 저술한 후지이 노부오(藤居信雄)
-“나를 영국의 넬슨에게 비기는 것은 가하나, 조선의 명장 이순신 장군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문화재, 유적지, 기념비 등 다수
장군의 부인인 상주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하면서 내린 교지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음.
(정경부인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정·종 1품 문무관의 처에게 내리는 명호(名號)로 외명부 부인으로서는 최상급의 품계)
< 장군의 후손들의 삶 >
순천향대 김기승 교수에 의하면 이순신 후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은 12명이 확인됐고 이 중 독립장 6명, 애국장 2명, 애족장 2명 등 10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충무공 10대손인 이규풍(1865~1932) 집안은 자신을 비롯해 어머니와 부인, 동생, 아들, 손자 등 4대가 항일전선에 나섰다"며 "무인 가문의 자긍심과 국가에 대한 책임감이 후손들을 항일 무장독립투쟁에 나서게 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충무공 이순신의 11대손인 이 민화선생은 2013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됨
(충남 아산군 출신)
< 대한민국 해군 관련 >
KD-2 구축함의 1번함은 충무공이순신함이다. 대한민국 대양해군의 주축인 구축함으로서 현재 6척이 건조되었다.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의 담당지역에 해당하는 목포시에 해군 3함대 사령부가 있다.
< 후손들의 귀감이 되신 덕목 >
충효와 애민 정신, 뛰어난 리더십과 전략전술, 타고난 문장력과 창의력, 불굴의 투지와 인내력, 엄하시면서도 자상하심, 창의력 발휘하여 학익진과 거북선을 개발
가장 위대하신 점은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여 옥고를 치르시고서도 백의종군하여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 것.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임진(壬辰)
임진년 4월 13일에 전쟁이 일어났다 공은 전라도 좌수사가 되어 1년 동안 온갖 방비에 주력하며 전쟁 하루 전인 4월 12일에 거북선을 완성하셨으니 이 얼마나 숨 가쁜 대조냐 더욱이 옥포, 당포, 한산, 부산 해전의 대승첩이 모두 이 해에 있었다.
망궐례 [望闕禮] 궁궐이 멀리 있어서 직접 궁궐에 나아가서 왕을 배알하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예
16 다만 어머님을 떠나서 두 번이나 남도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었다.
17 공무 본 뒤에 활을 쏘았다. 군관과 색리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로 곤장을 때렸다.
제 한몸 살찌울 일만 하고 이런 일은 돌아보지 않으니 앞날 일도 역시 짐작하겠다.
000이 이웃집 개에게까지 폐해를 끼치기로 곤장 80대를 때렸다.
18 000이 부지런히 일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19 이 날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았다.
순찰관의 편지를 보니 통사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중국에 무고하여 ....그 흉악스러움은 참으로 이를 길이 없었다. 통사들이 이미 잡혔다고는 하나 해괴하고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었다.
20 좌우의 산꽃과 들 가의 봄풀이 그림 같았다. 옛날에 영주가 있다더니 역시 이 같은 경치런가
- 전쟁 중에서도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을 느끼시는 문인의 모습
만호의 애쓴 정성이 안 미친 곳이 없었다.-아랫사람의 성실함을 알아주시는 리더의 모습
여러 가지 전쟁 방비의 결함이 많으므로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고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어 보냈다. 방비가 가장 못하건만 순찰사가 표창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최상을 검사하지 못하니 참으로 기가 막혀 웃을 일이다.
-장군님,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 일이 다반사입니다.
21 승군들 돌 줍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므로 우두머리를 잡아다 매 때렸다.
무기를 검열해 보니 활, 갑옷, 투구, 전통, 환도 등도 깨어지고 헐어서 볼꼴없이 된 것이 많았으므로 색리와 궁장 감고들을 처벌했다.
23 동래에서 서로 바라보이는 바다라 그럴 리가 만무한데 말을 이렇게 꾸며 내니 그 간사함을 헤아리기 어렵다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하였다.
밤새도록 신음했다. 밤새도록 고통 했다.
크나큰 부산진이 벌써 함락되었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길이 없었다. 즉시 장계를 올리고 삼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25 그들은 모두 분격하여 제 한 몸을 잊어버리는 것이 과연 의사들이라 할 만 하다.
000 들이 왜적의 소문을 듣고는 벌써 도망해 버렸고 무기 등 온갖 물자도 죄다 흩여 버려 남은 것이 없더라 고 했다 참으로 경악할 일이다.
낙안은 회피하려는 뜻을 가진 듯한 것이 탄식스러웠다. 그러나 군법이 있는데 설사 물러나 피하려 한들 될 일인가
26 도망간 것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군중에 높이 매달았다.
화살을 빗발치듯 퍼붓고 각종 총을 바람 우레같이 쏘아 보내니 적들은 두려워 물러나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27 남김없이 모조리 섬멸시켰다.
계사(癸巳)
계사년 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으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몸을 배어 돌아갔다. 그러나 나라만을 걱정하시던 공은 7월에 진을 한산도로 옮기고 외로이 바다의 성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저에서도 공에게 삼도 수군통제사라는 새 직함을 맡기니 이해 8월의 일이었다.
30 00,00가 두 번이나 군법을 범했으므로 처형했다.
명부에 올린 해군 800여 명이 도망갔다고 하며 또 뇌물을 많이 받고 잡아 오지 않았다고도 하므로 000, 000 둘을 비밀히 보내어 70여명을 찾아서 잡아다가 각 배에 나눠주고 둘은 그날로 처형했다.
31 두 번 다 섬멸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통분하다.
우후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하였다. 기막힌 꼴을 어찌 다 말하랴. 000,000,000도 마찬가지였다. 이같이 큰 적을 무찌르는 일로
약속하는 마당에서 이렇게까지 술들을 함부로 마시니 그들의 사람됨에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33 명령도 안했는데 제멋대로 돌입하였다가 그만 얕은 곳에 걸려서 적들에게 습격을 당하게 된 것은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다. 얼마 뒤에 진도 지휘선이 또 적에게 포위되어 하마터면 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우후가 바로 들어가 구원해 냈다. 경상도의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며 끝내 돌아서서 구원해 내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은 말할 수 없다. 참으로 통분 통분했다.
오늘의 통분한 것을 무슨 말로 다하랴 모두 경산도 수사 (원균) 때문이다.
원수사의 음험하고 흉악한 뭄은 이를 길이 없었다.
34 2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면서 태도조차 수상하므로 묶어서 원수사에게 보냈더니 수사가 크게 성을 내는 것은 그 본의가 군관을 보내 고기 잡은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오자는 데에 있었던 때문이었다.
-원 균의 치졸함과 부당함과 제 민족의 머리를 베서 제 공적을 쌓으려고 하는 데는 정말 기가 막히다.
원균이 이순신 장군을 무고한 줄만 알았더니 백성의 머리까지 베려하다니
뜸 밑에 앉았노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올라 회포가 어지러워
그들에게서 원균의 옳지 못한 일들을 들으니 깊이 탄식할 일이다.
(원균이 공을 탐내어 무고한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다가 왜군의 머리라고 한 것)
- 원균의 후손들이 얼마나 창피할까
36 우수사와 활을 쏘았다. 그가 아주 형편이 없으니 우스운 일이다.
이 날은 어머님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
38 혼자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온갖 근심은 가슴을 치밀어 자려야 잠이 오지 않다가 닭이 울어서 어렴풋이 잠이 들었다.
00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같이 왔는데 그들에게서 피란 중인 임금의 사정과 명나라 장수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 통탄스러웠다.
경상도 수사 원평중(원균) 이 와서 술주정을 부리므로 온 배 안 장병들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고약스러움은 정말로 말할 길이 없었다.
-전쟁 중에 이렇게 술주정을 하면서 사람들을 열 받게 하는 인간이 경상도 수사라니!
39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을 치고 있으니 통분 통분하다. 종일토록 큰 바람이 불어 마음이 산란하였다.
40 원 수사가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돌려 큰 부대를 소동시켰다. 진중에서도 이렇게 속이니 그 음흉하고 고약한 것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 해군이 장하다고 무척 칭찬하는 것이었다. 예물단자를 준 즉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 하다가 결국 받고는 무척 기뻐하며
두 번 세 번 감사하는 것이었다.
41 해군이 이렇게도 장하니 기쁘기 비할 데 없다고 하였다.
00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나친 말이 많이 씌었으니 우습다.
관보를 가지고 왔기에 들여다 본즉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42 원수사가 000이 보낸 화전을 혼자서 쓰려고 꾀하던 중 병사의 공문에 따라서 나눠 보내라고 하니까 공분도 내려고 하지 않고 무리한 말만 자꾸 지껄이더라고 하니 우습다.
1530개를 나눠 보내지 않고 독차지해서 쓰려고 하고 있다니 그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원 균의 부정부패와 비리, 비인격적 언행은 읽는 나도 스트레스 받는데 당사자들은 어땠겠는가 이런 치들이 정치를 한다고 나서서
나라가 아직도 이 모양이다.
저녁때 00이 와서 얘기했다. 기00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선 남이 알까봐 두려워한다. 가소롭다.
이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예쁜 색시를 태우고 놀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이야말로 이를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이라는 원수사부터 역시 그러하니 어찌 하랴
43 각 도의 군사가 많아야 5천 명이 넘지 못하고 또 양식도 거의 떨어져 간다고 했다.
지난 해부터 수군 압령해 보내는 사무를 성실히 보지 않아서 도피자의 수가 거의 백여 명인데 그나마 매양 거짓말로 꾸며 대 왔기 때믄에 이날 목을 베어서 일반에게 보이었다.
44 원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흉모는 형언할 길이 없다. 이 날 밤에는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아침에 왜적 토벌할 공문을 만들어서 영남수사에게 보냈더니 술이 취하여 정신이 없다고 핑계하면서 회답하지 않았다.
44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털인들 무엇이 어떠랴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46 못된 짓을 많이 하고 돌아다니다가 갇혔다기에 붙잡아 오라고 했더니 이미 버젓이 들어와 인사를 하는 것이므로 제 마음대로 드나든 죄를 다스리고
-밖의 적을 대하기도 힘든데 안의 적까지 다스리시자니 그 삶이 무척 힘드셨다.
그 형세가 백전 백승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이 이렇게 도와주거니 수로의 적이 비록 5,6백척을 향해 오도라도 우리 군사를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47 밤기운이 몹시 차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이 조금도 놓이지 ㅇ낳아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일어난다.
48 이 소식이야말로 뼈 속들이 저려서 말을 못하겠다. 이 날 밤 바다에 달은 밝고 티끌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 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오는데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49 그러나 사람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00이 와서 하는 말이 두치 나루의 적은 헛소문이요 광양 사람들이 왜복을 가장해 입고 저희끼리 장난한 것이라고 한다. 순천과 낙안은
벌써 결딴이 났다고 한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왜적이 우리 옷을 갈아입고 우리 나라 작은 배를 타고 돌입하여 총을 놓으며 노략질해 가려 한다.
-이도 저도 못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상상조차 어렵다.
50.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 홀로 배 뜸 밑에 앉았노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은 뱃전에 비치고
정신도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 덧 닭이 울었다.
51. 원 수사의 음흉하고 간흉한 것은 형편이 없다. 형편이 없다
...하므로 자세히 추궁했더니 어떤 근거가 있는 듯한데 경상 수사가 시킨 것이라고 했다.
원 수사가 허망한 말을 하며 내게 대해서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더라고 전했다.
-무고까지 하는 원균, 전쟁 중에 장군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온갖 못된 짓을 다한다.
52 원수사의 언론은 걸핏하면 모순이 생긴다. 어처구니 없다
원수사와 그 군관은 본시 헛소리를 잘하니 믿을 수가 없다.
경상수사는 복병을 일제히 내어 보내서 복병시키기로 약속해놓고 슬며시 혼자 먼저 보냈다고 한다. 해괴한 일이다.
53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배 뜸 아패 앉았노라니 회포가 천만 갈래다.
이 날 밤, 달은 낮같고 물결은 비단결 같아 회포가 견디기 어려웠다.
말 가운데 원 수사의 음흉하고 고약한 일이 많으니 그 허무맹랑한 꼴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54 원 수사가 술을 마시겠다고 하므로 약간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다. 해괴하다.
원 수사가 와서 음흉하고 간흉한 말을 많이 했다. 심히 해괴하다.
원 수사가 또 와서 ...고 독촉한다. 참으로 음흉하다. 그가 거느린 25척의 배는 모두 내보내고 다만 7,8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니
그 마음 쓰고 행사함이 모두 이러하다
55 거기서 원수사의 음흉한 일을 듣고 또 000가 근거 없는 거짓말을 만들어 내는 꼴을 들으니 우스웠다. 종일토록 홀로 앉았으니 마음이 편안하지 아니했다. 해 진 뒤 가슴속이 답답해서 창문을 닫지 않고 잤더니 외풍에 촉상되어 머리가 몹시 아프니 염려스럽다.
쇠로 만든 총통은 전쟁에 가장 긴요한 것이언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하더니 이제 온갖 연구를 거듭하여 조총을 만들어 냈는데 왜총보다 더 잘 되어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으로 놓아 보고서는 좋다고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미 그 묘법을 알았으니 도내에 같은 모양으로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 좋겠기로..
갑오 (甲午)
명나라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강화를 주장하며 싸움을 피하려고만 했다. 그래서 갑오년 3월에 명나라 지휘관은 공에게 싸움을 중지하고 돌아가라는 패문까지 보냈다. 우리가 우리 땅에 있는데 어디로 가란 말이냐고 항의하던 공의 가슴은 울분으로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58 피란하던 때 고생하던 일들을 갖추갖추 말함에는 개탄함을 이기지 못했다.
어머님께 가니 ...기운이 아주 가물가물해 앞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하니 다만 애닯은 눈물을 흘릴 뿐이다. 적을 토벌할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하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으로 탄식하지는 아니 하셨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시다. 비록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셨으나 훌륭하신 어머니, 효도도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셨다.
원수가 방해하려 한다고 했다. 가소롭다. 예로부터 남의 공을 시기하는 것이 이같은 것이니 무엇을 한탄하랴
격군들이 거의 다 굶어 죽게 되었다는 말은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다.
원수사가 000와 000이 좋아하는 여자들을 모두 다 관계하였다고 한다.
-한 쪽에서는 굶어죽고 있는데 원 균은 자기 욕망만 채우고 있다.
60 문서들이 제멋대로 꾸며졌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또 격군에 대한 일을 들으니 아전들의 간악한 짓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61 몸이 불편하여 저녁 내내 누워 신음하는데
-몸이 아픈 구절은 너무 많아 더 쓸 수도 없다. 몸과 마음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상상조차 안된다.
64 경상수사가 보려 왔다 술이 여남은 잔 들어가자 미친 말이 많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65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랏일이 이러하고야 평정될 리가 만무하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암행어사 000은 국가의 위급함을 생각지 않고 다만 눈앞을 꾸며 갈 것만 노력하고 남쪽 지방의 종착 없는 소리만 믿으니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악목에
대한 진회와 다를 것이 없다. 나라를 위하는 아픔이 더욱 심하다.
66 000이 와서 말하되 수군을 많이 잡아 오지 못했다고 원균에게 매를 맞고 또 발바닥까지 치려 하더라 하니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67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 앉고 눕기조차 불편했다.
68 종일 아프고 불편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70 원 수사는 짐짓 취한 체 광증을 부리며 함부로 무리한 말을 뇌까리니 순무도 그 괴이함을 이기지 못했다. 하는 짓이 극히 흉악하였다.
72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회포가 산란했다. 무슨 말로 형언하랴 가슴이 막막하기 취한 듯, 꿈 속인 듯,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위대하신 분도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이렇게 힘들어 하시고 고통스러워 하신다.
73 호남 방백들이 나라를 저버리는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유감스러웠다.
75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수군 여러 장수들 및 경주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 하니 앞으로는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었다. 통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원 균이 취해서 망발을 부린 것 때문이었다.
-임금이 이런 분부를 할 정도니 얼마나 서로 싸우면 그럴까.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전쟁 중에도 힘을 합하지 못하니...
무덥기가 쇠라도 녹일 것 같았다. 아침에 울이 본영으로 갔다. 작별하는 정회를 이길 길이 없었다. 홀로 빈 마루에 앉았노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76 영의정(유성룡)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나라를 근심하는 이로 이보다 더할 분이 없을 것이다.
78 촛불을 켜고홀로 앉아 있노라니 온갖 걱정이 치밀어 왔다.
79 어머님, 면의 병세는 여전히 중하다는 것이었다. 애타는 마음이건만 어찌하랴
이는 필시 질투하는 자들이 말을 만들어 하는 것이리라 통분함을 참지 못하겠다.
이 날 밤 심사가 산란해서 홀로 마루에 앉아 있는데 내 마음을 스스로 걷잡을 수 없었다. 걱정이 쌓여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만일 유 정승이 어찌 되었다면 나랏일을 어찌 할 것이랴 어지할 것이랴 -나라걱정에 불면의 밤을 보내시는 장군님
79 집이 새어 마른 데가 없어 간신히 밤을 지냈다.
-아마 하인을 깨워 수리하시기보다 혼자 참으셨나보다.
점괘 얻은 그대로이니 그 참 절묘하구나 -주역을 보신건가?
장기 두는 것을 보면서 소일하였다 그러나 근심이 속에 있으니 어찌 조금인들 편할 것이랴
85 의병장 성 응지가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슬프다. 이 날 아침 탐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세가 아주 위중하다는 것이었으니 벌써
생사간 결말이 났을지도 모른다. 나랏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에 생각이 미칠 수 있으랴마는 세 아들 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꼬
아프고 괴롭구나.-가족보다 나라사랑. 얼마나 답답하고 가슴 아프셨을까요
영의정과 심충겸(병조판서)의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 분개한 뜻이 많이 적혀 있었다. 원 수사의 일은 참으로 해괴하다. 날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했다니 이는 천고에 탄식할 일이다. 앉았다 누웠다 잠을 못 이루고 촛불을 켠 채 뒤척이며 지새었다.
86 초저녁에 불 밝히고 혼자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국사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닭이 운 뒤 머리가 가려워 견딜 수 없어서 사람을 시켜 긁게 했다.
그들이 남김없이 사로잡혔다는데 그것을 전혀 보고하지 않는 것이 아주 해괴하기로 편지에 그것을 지적하여 보냈다
군량 훔쳐낸 자를 처형했다.
간 밤 꿈에 바다 속에 있는 외로운 섬이 달려가다가 내 눈 앞에 와서 주춤 서는데 그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혼자 서서 끝내 그것을 구경했었다. 참 장쾌했다. 이것은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오로지 나라 생각으로 꿈도 해석도 나라사랑으로 끝나는 장군님
90 원 수사의 속이고 무고하는 짓을 많이 말했다. 참으로 해괴하다 나중에 원도 왔다. 그 흉패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버리고자 하면서 버리지
91 못하는 것에 까닭이 있다. 세 아이가 마침내 의지할 곳이 없게 되는 까닭이다.
밤에 달빛이 대낮 같아 밤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루지 못했다.
93 이같이 국사가 위태하게 된 날을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를 갚겠다고 생각은 하지 않고 배짱 좋게 음란한
계집을 끼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 바깥 여염집에 있으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그래 어떠하며 ..깨니 꿈이었다.
-꿈에서도 걱정하시고 야단치시는 장군님
을미 (乙未)
충무공께는 잠시도 휴전이 없었다. 한산도는 언제나 바쁘고 붐비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나라 근심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96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라 일을 생각하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97 그에게서 순변사 이 일의 처사가 극히 형언할 수 없고 나를 해치려고 몹시 애를 쓴다는 말을 들으니 참으로 우스웠다.
99 원 균의 고약한 짓을 많이 전했다. 참 놀랄 일이었다.
원균이 포구에 있는 배 설과 교대하려고 여기 이르렀기로 교서에 숙배하게 하였더니 불평한 기색이 많으므로 두 번 세 번 타일러 억지로 행하게 하였다 하니 너무도 무식한 것이 우스웠다.
103 항복한 왜들은 모두 불러 모으고 곧 머리를 베라고 명령했더니 망기시로가 조금도 두려운 빛이 없이 죽으러 나왔다 참 독한 놈이었다.
이 날은 어머님 생신인데 몸소 나가 잔을 드리지 못하고 홀로 먼 바다에 앉았으니 회포를 어지 다 말하랴
105 어머님은 평안하시다 하고 아내는 불 난리로 심신이 많이 상해서 천식이 더해졌다고 한다. 걱정이다.
106 사직의 위엄과 영험을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쳐난 바가 있다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로는 교서를 외면서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음을 어찌하랴-겸손하심
그 하는 말을 듣고 행동을 살펴보니 그것을 보장하기 어려워 아직 기다려 보기로 하고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107 군량을 도둑질 하다가 잡혔으므로 처벌했다.
108 나라의 정세가 아침 이슬같이 위태로운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만한
주춧돌같은 인물이 없음을 생각해보니 사직이 장차 어떻게 될지 몰라 마음이 산란했다.
110 밤이 깊어 다락 위에 누웠으니 초생 달빛은 다락에 가득 차고 정회를 이길 길이 없었다.
112 이날 밤 으스름 달빛이 다락을 비치는데 잠을 들지 못하고 시를 읊어 긴 밤을 새웠다.
113 호남 순찰사는 헐어 말하는 빛이 많았다. 탄식스러웠다.
114,5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남에 와 죽고 삶을 같이 하더니
오늘 밤 이 달 아래 잔을 나누면
내일은 우리 서로 떠나겠구려
115 다만 목화만 가져왔기로 모두 나누었다
116 이 날 밤, 바람은 몹시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이 낮과 같아 잠을 들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밀었다.
118 아버지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아니했다. 홀로 앉아 그려보며 정회를 이길 길이 없었다.
병신(丙申)
공은 휴전 중의 시간을 이용해서 잠깐 동안이나마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는 것으로써 고잦ㄱ 큰 행복을 삼았다. 이 해는 공의 어머님이 81세 되시던 해였다. 10월에 진중에서나마 수연 잔치를 차려 드린 것이 모자가 서로 만나 보는 마지막 기회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123 꿈에 영의정과 함께 이야기했다. 한동안 둘이 다 의관을 벗어 놓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 걱정을 털어 놓다가 끝내는 억울한 사정까지 쏟아 놓았다. 만일 서쪽의 적이 급히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들어 덤비게 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가시랴 하고 걱정만 되뇌이며 할 말을 알지 못했다. 점을 쳐보니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괘는 참 좋다.
125 이날 밤 바람이 차고 매우므로 아이들이 들어오기에 고생스러울 것이 걱정스러웠다
126 홀로 앉아서 아들이 떠나간 것을 생각하고 심회가 편치 않았다.
...내일 새벽으로 가서 타일러 쫓으라고 하였다. 이놈들이 어찌 물건을 사려고 온 것이랴 우리의 허실을 엿보러함일 것이다.
127 기한을 어겨 늦게 온 강진의 죄를 다스렸다.
128 이날 밤에 달빛이 대낮처럼 밝고 물결이 비단결 같아서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랫 사람은 밤새도록 술이 취해서 노래들을 불렀다.
129 아들 면이 잘 갔는지 못 갔는지 몰라서 밤새도록 궁금했다.
130 00와 00이 와서 백성을 침해하는 영리들의 폐단을 이야기 했다.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참 어이 없다. 조정의 지도가 이럴 수 있는가 체찰사로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이렇게 무의미할 수 있는가 국가의 일이 이렇고 보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아침에 서류초안을 수정했다.
131 식후에 우수사를 만나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는 모든 것을 사과했다.
큰 비가 쏟아지는 통에 나만 먼저 배로 돌아왔다.
우수사는 취해 쓰러져 정신을 못 차리므로 작별도 못하고 왔다. 우스웠다.
132 첨사가 성내지 아니할 일에 성을 내어 지휘선의 급수군에게 곤장을 때린 것은 참 놀라운 일이었다.
또한 들으니 원 흉은 곤장 40대를 맞고 ...
오전 7시 쯤에 동남풍이 몹시 불어 지붕이 걷힌 데가 많았고 창문 종이가 떨어져 비가 방안으로 뿌려 들므로 사람이 괴로와 견딜 수가
없었다.
이날 밤에 허한이 등을 적시고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 심기가 좋지 않았다.
133 이날 밤에 바닷달은 어슴푸레 비치고 밤 기운이 몹시 추운데 자려야 잠이 오지 않고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못했다.
몸이 좋지 않았다.
아침에 종 금이를 시켜서 머리를 빗기었다.
오전 4시쯤 몸이 편치 않아 금이를 불러 머리를 긁게 했다.
밤 9시 지나 영등이 그의 딸을 데리고 술병을 들고 왔다고 하나 나는 보지 않았다.
새벽에 미역을 따러 나갔다.
134 다락에 기대어 저녁나절을 보냈는데 심회가 언짢았다. 머리를 꽤 오랫동안 빗었다.
135 습열로 인해서 침을 20여 군데나 맞았더니 속에 번열이 나는 것 같아 종일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136 수길이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기 한량없으나 믿을 말이 못된다.
노천기가 술을 먹고 주책없이 굴다가 0, 0, 0에게 욕을 당했다고 아뢰므로 곤장 30대를 때렸다.
137 이 날은 어머님의 생신인데 헌수하는 술잔을 올리지 못하여 심회가 평온하지 못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두 번이나 구토를 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나가지 않았다
138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신음했다.(12일)
들으니 한산도 뒷산 상봉에서 다섯 섬과 대마도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하기 때문에 혼자 말을 타고 올라가 보니 과연 다섯 섬과 대마도가
보였다.
다락에 기대어 혼자 시를 읊조렸다.
139 홀로 다락 위에 앉았으니 온갖 정회가 그지없다.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 보고 개탄하는 생각이 많았다.
141 해괴스럽기 짝이 없으므로 곤장 30대를 때렸다. 할머님의 제삿날이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143 꿈이야기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 하겠다.
해전 뒤에 항복한 왜인들이 놀음 한번 놀기를 간절히 청하기에 금하지 않았다
144 이날 저녁 바닷달이 하도 밝아서 혼자 다락에 기대었다가 10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바깥 도득을 못 없앤 이 때 안 도둑이 이러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아들 회가 방자 수를 곤장 때렸다 하기에 아들을 뜰 아래로 불러 잘 타일렀다.
종일 나가지 않고 홀로 다락 위에 앉아 있었다.
145 이날 밤 속이 답답하여 자지 못하고 밤중까지 않았다 누웠다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듬
표범가죽
종 경이 몹시 앓는다고 하니 염려된다. 편지 부쳤다. 꿈에서도 땀을 흘렸다
146 늦도록 다락에 앉아서 아이들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느라고 바람에 상하는 줄도 몰랐다.
몸이 불편하여 공무를 보지 않았다. 아닐 밤에 땀이 옷 두 겹을 적시었다
147 어둘녁에 달빛은 비단같고 회포는 만갈래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랫동안 어머님 안부를 듣지 못해 답답했다. 곤장 맞아 죽은 사람
148 종일 노를 빨리 저어 밤 10시쯤에 어머님 앞에 이르렀다. 백발이 부수수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일어나시는데 기운이 흐려져 아침 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렵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 밤이 새도록 위로하여 그 마음을 풀어드렸다.
모시고 옆에 앉아 아침 진지상을 드리니 대단히 즐거워하시는 빛이었다.
지나온 지역이 온통 쑥대밭이 되어서 참혹한 꼴을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우선 전선 정비하는 것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주어야겠다.
저녁에 들으니 아들들이 초시에 뽑혔다고 한다.
150 원 공(원균)의 흉한 행동은 기록하지 않는다.
151 이야기 한 중에 강개한 일이 많았다 아침 식사에 쇠고기 반찬을 놓았으나 나라 제삿날이므로 먹지 않고 도로 내놓았다.
수경은 내어버린 아이를 이 담의 집에서 얻어다 기른 것이다.
공헌을 생각하니 애처로운 마음을 이길 수 없었다.
152 이 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
최씨의 딸 귀지가 와서 잤다.
153 새벽에 어머님을 모시고 일행을 데리고 배에 올라 본영으로 돌아와서 종일토록 즐거이 모시니 다행 다행이다. (7일) 일찍이 어머님을 위한 수연을 베풀고 종일토록 즐기니 다행 다행이다. 종일토록 어머님을 모셨다. 내일 진중으로 돌아가는 것을 어머님이 퍽 서운해 하시는 기색이었다.
정 유 (丁酉)
공은 나라를 위해 뼈와 살을 다 바쳤건만 공에게 돌아간 것은 감옥살이 뿐이었다. 그러나 공은 아무도 원망하지 아니 했다. 마지막 생명을 나라를 위해서 바칠 수 있는 시간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감사하며 말없이 백의 종군까지 하였고 또다시 공은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었던 것이다.
156 울적한 마음을 한층 이기기 어려웠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식후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술을 마시고 몹시 취했다.
경기 관찰사 수하에서 심부름 하는 이름도 모르는 군사의 집에서 잤다. 000이 내 행색보고 술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황
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니 고맙기 그지 없었다. 선영에 이르렀다. 수목이 두 번이나 산화를 겪고 타 죽어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산소에 나아가 울며 절하고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사당에 울면서 절하였다.- 으......
157 멀고 가까운 친척과 아는 이 들이 모두 모여 와서 오래 못 본 정들을 풀고 갔다. 동네 안에서 각기 술병을 들고 와서 멀리 가는 길을
위로하므로 정리상 거절하지 못하고 몹시 취하여 헤어졌다. 000은 노래 부르고, 000도 노래 부르는데 노래를 들어도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금부도사는 술을 잘 마시는데 실수하지는 않았다. 새벽이 꿈이 몹시 산란하여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마음이 매우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걷잡을 수 가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일까 병드신 어머님을 생각하며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조금 있다가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 나가 뛰며 궁그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158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
친숙한 벗 오종수가 모든 것을 정성껏 해주니 뼈가 가루가 되어도 잊기 어렵다.
000씨가 연일 진심으로 상복 만드는 일들을 돌봐주니 슬프고 감사한 말을 어찌 다 하랴
마을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아픔이야 어떻게 다 말하랴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 길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바랄 뿐이다.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한 밤중에 홀로
앉았으니 슬픈 생각을 견딜 길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장군님의 진실한 마음을 사람들이 알아주고 함께 위로하는 장면에 감동 받았다. 평소의 행동을 알 수 있다.
159 000도 보러 와서 원균의 망령되고 패악된 짓을 많이 말하였다.
160 000이 와서 눈물을 흘리며 원균의 일을 이야기 하였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아 슬픈 정회를 견딜 길 없었다.
울의 이름을 열로 고쳤다. 열은 음이 悅이다 싹이 처음 튼다는 데나 초목이 기운차게 자란다는데 쓰는 글자라 글자 뜻이 매우 좋다.
000이 한산에서 와서 원공의 못된 짓을 낱낱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다 배반하므로 앞으로 일이 어지 될지 알 수 없으리라고 하였다. 이 날은 단오절인데 천 리 밖에 멀리 종군하여 어머님 영연을 멀리 떠나 장례도 못 모시니 무슨 죄로 이런 갚음을 당하는고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아침 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
-장군님도 마음 약할 때가 자주 있었다. 고통을 견딘 꿋꿋함 속에 숨은 마음의 아픔
161 저녁에 000이 한산에서 돌아와서 흉한 자의 못된 짓을 많이 이야기하였다.
아침에 중 덕수가 짚신 한 켤레를 바치므로 거절하고 받지 않았으나 두 번 세 번 간절히 말하므로 값을 주어 보내고 짚신은 00에게
주었다.
서산 군수 00이 음흉한 자의 일을 많이 말했다.
원가가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 사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 놓고 그 처를 사통하려고 하니 그 계집이 말을 듣지 않고 밖으로 나와서 악을 쓴 일이 있었다고 한다. 원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려 덤비니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았으며
그렇게 해서 날이 갈수록 심히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
162 그 소문이란 모두 흉인의 일이었다. 부사가 노자를 보내주어 참으로 미안스러웠다.
163 체찰사는 ‘음흉한 사람의 무고하는 행동이 심했건마는 임금이 굽어 살피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 할꼬’ 하는 것이었다. 안은 본시
죽을 죄도 아닌데 여러 번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다소로 죄의
경중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 온다는 것인가
164 체찰사가 시국의 그릇된 것을 무척 분히 여기며 다만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했다.
166 중복날이라 쇠라도 녹일 것 같고 땅은 찌는 듯했다.
167 한산도 여러 곳에 가는 편지 14장을 썼다. 달빛을 이고 돌아왔다.
00 00 이 보러 와서 부채와 짚신을 바치므로 다른 물건으로써 갚아 보냈다.
서늘한 기운이 돌기 시작해서 밤이 쓸쓸하다. 새벽이 일어나 앉으니 아프고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169 적 한 놈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어버리니 통탄함을 어찌 말하랴
170 이 날 밤 가을 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하랴
오늘이 돌아가신 아버님 생신인데 멀리 천리 밖에 와서 군복을 입고 있으니 이런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171 빈 방에 홀로 앉았으니 그리움과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오늘은 칠석,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 하랴
172 이 날 밤 달빛이 대낮같아 어머님 그리는 슬픔과 울음으로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했다.
일찍 아침을 먹고 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이 되었는가 저녁에 홀로 빈 방에
앉았노라니 정회가 끓어올라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거리기만 했다.
173 000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 꼴이 같지 않아 어리석고 용렬하다 두메에 박혀 사는 사람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리라
이 날 낮에 000을 시켜 칼을 갈게 했는데 아주 잘 들어 적장의 맨 대가리를 벨 만했다.
--비 오자 길 떠난 아들 걱정하시는 장군님, 비와 폭풍은 왜 그리 많이 부는지...
174 모든 사람이 울며 말하기를 대장 원 균이 적을 보자 먼저 뭍으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같이 뭍으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대장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입으로 옮길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먹고 싶다고들 했다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176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운 회포가 그 어떠하랴 비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178 배 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아니했다. 그 건방진 태도가 말할 수 없었기에 그 영리를 곤장 때렸다.
곽란- 차게 새서 그런가 해서 소주마심-인사불성 -밤을 앉아 샘- 계속 곽란
바다에서 잤다.
헛소문을 퍼뜨리되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헛소문 퍼뜨린 두 명을 잡아 곧 목 베어 효시하게 하니 군중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장군님, 후손들이 요즘도 헛소문 많이 퍼뜨립니다.
179 내가 탄 배가 곧바로 적선을 향해 달려들면서 포를 쏘니 적도는 능히 당해내지 못하고 달아났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었다.
180 적선 133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대장선이 홀로 적선 속으로 들어가 포환과 화살을 풍우같이 쏘아내건만 여러 배들은 바라보면서 진군하지 않아 사태를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배 위에 있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 보며 질려 있기로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되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곧바로 우리 배에 덤벼들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심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고 했다. 000의 배로 가서 먼저 목 잘라 효시하고 싶었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이 달려들게 되어 사세가 낭패될 것이라 중군에게 군령 내리는 0000를 세우니 김00의 배가 가까이 오고 거제 현령 00의 배도 왔다.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하고 다시 불러 ‘안 위야 군법에 죽으려느냐 물러가면 살 듯 싶으냐’ 했더니 안 위가 황급히 곧바로 들어 싸우려 할 때 적장의 배와 다른 2 적선이 안 위의 배에 달라붙고 안 위의 격군 칠, 팔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나는 배를 돌려 바로 안 위의 배가 있는 데로 갔다. 안 위 배 위 군사들은 죽기를 한하여 마구 쏘아대고 내 배 위 군관들도 빗발같이 쏘아대어 적선 2 척을 남김없이 모조리 섬멸하니 천행 천행이다. 우리를 에워쌌던 적선 30척도 깨뜨림을 당하니 모든 적들은 당해내지 못하고 다시 범접해 오지 못했다.
-아아 장엄하다...
181 00이 크게 이긴 것을 보고하는 장계를 가지고서 배를 타고 올라갔다.
정유 2 (53세)
182 00에 이르니 순천과 낙안의 피란민들로 길이 가득 찼으며 남자여자가 서로 부축하고 가는 것이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울면서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인제는 우리가 살았다’고
옥과현에 이르니 원은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나는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는 원을 붙잡아 내다가 곤장을 치려고 하였더니 000가 미리 내 뜻을 알고 급히 나왔다.
183 오직 혜희라는 중이 와서 인사할 뿐이므로 그에게 승병의 직첩을 주었다
김제군수 000이 산골로부터 내려와서 병사의 처사가 뒤죽박죽인 것을 말하면서 하는 짓을 보면 패망할 것이 뻔하다고 했다.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가져다 바치는 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권하는 것이었다.
그 편에 배 설의 황겁해 하는 꼴은 들으니 괘씸하고 한탄함을 마지못하겠다. 권세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이나 하여 제가 감당치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국가의 일을 크게 그릇치건마는 조정에서 살피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184 배 설이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 사람이 많은 군량을 훔쳐내서 딴 데로 가져갔기 때문에 곤장을 때렸다. 배 설이 약속을 어기는 것이 괘씸했다. 배 설이 배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고..배설은 교유서에 예를 받들지 않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거짓말 한 두 사람은 목을 베어 효시했다. 배 설은 벌써 도망쳐 버렸다.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을 명령하니 여러 배들은 피하지 못하고 적선을 일시에 쫓아 갈두까지 이르자 적선이 멀리 도망하므로 더 쫒지 않았다.
185 적이 과연 야습을 해와 탄환을 많이 쏘고 덤비었다. 내가 탄 배가 바로 앞장을 서서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흔들렸다. 적들도 범할 수 없음을 알고..
여러 장수들을 불러서 대책을 토의하였다. -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좌의정의 인사 압력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186 홀로 배 위에 앉아 어머님 그리운 생각에 눈물지었다.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이 날 밤 神人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하였다.
187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
190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거죽에 통곡 두 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거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깜깜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 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191 어둘 무렵에 코피를 되 남짓이나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고 눈물짓고 하였다. 어찌 다 말하랴 이제는 영령이라 불효가 여기까지
이른 줄을 어떻게 알았으랴 비통한 마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누를 길이 없다.
192 언상은..제 몸 하나 보존하려는 계책으로 수군에 오지 않고 몸을 산골에 몸을 숨긴 지 달포가 넘더니 이제 적이 물러간 뒤에야 무거운 벌을 받을까 겁내어 비로소 나타나니 그 하는 짓이 극히 해괴하다.
194 이 날 밤 자정에 면이 죽는 꿈을 꾸고 슬피 울었다.
195 아산 집에 편지를 쓰자니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눈물을 거둘 수가 없었다.
196 000이 적을 토벌한 사연을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곤장 50대를 때렸다. 군량을 훔쳐 실은 죄로 곤장을 쳤다.
유지 -내 뜻을 생각하여 소찬 먹는 것을 치우고 방편을 좇도록 하라 그리고 아울러 고기 반찬을 하사하셨으므로 더 한결 감개무량했다.
197 이 날 밤에 나 덕명이 와서 이야기 하는데 머무르고 있음을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니 한심하다.
--가라고 말 못하시고 끝까지 마주 대해주시는 모습, 잘 참으신다. ㅎㅎ
이 밤은 해가 다 되는 그믐밤이라 비통한 마음이 더욱 더했다.
茂戌 (무술)
임진란 이후 7년의 전쟁은 무수한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고 이제 마지막을 고하는 최후의 해가 되었다. 아니 충무공 자신이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는 최후의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충무공은 자기 한 몸을 던져 조국을 위기에서 영원히 살린 것이다.
201 유제독이 달아나려고 한다 하였다. 통분하다 통분하다. 나랏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고
< 내가 저자라면 >
충무공 친필초고본/ 노산 이은상 역주해/ 현암사
『난중일기』는 1962년 국보(국보 76호)로 지정되었으며 국가기관인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에서 소장 및 관리하고 있다.
『난중일기』는 집에 있던 아주 오래된 책이다.(1968년 간행)
이사를 여러 번 다니면서 책을 많이 버렸는데 이 책이 남아 있었다.
언젠가 완독하리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이 나이가 되어버렸다.
옛날 책이라 글씨도 작았지만 새 책보다 옛날 책을 읽기로 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하다. 옛 문제가 맘에 와 닿는 걸보니 나도 옛사람이네.
맨 첫 장에는 ‘충무공 난중일기 보급에 즈음하여’ 의 제목으로 재건국민문고 보급회 회장 김지홍님의 편지가 붙어 있다.
고문에는 익숙한 성함이 보인다. 소설가 박 종화, 간행위원에는 김동리, 서정주, 오주환, 예용해님의 성함도 있다.(친구 아버님)
그 다음 페이지엔 장군님의 영정 (김은호 화백 그림)
충무공 해전도 그림(덕수궁 미술관 소장)
충무공 친필 시구의 순서로 편집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난중일기 해설→차례→본문→난중일기 원문→신구지명대조표로 구성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그가 전쟁 당시에 직접 적었던 일기이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모두 일곱 권으로 일곱 권의 일기와 서간첩 한 권,
<임진장초>라는 책 한 권, 도합 아홉 권으로 구성된 책이다.
현재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書簡帖壬辰狀草)>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제1책은 〈임진일기 壬辰日記 〉로 27매 (1592.5.1. ∼ 1592.5.4., 1592.5.29. ∼ 1592.6.10., 1592.8.24. ∼ 1592.8.28., 1593.2.1. ∼ 1593.3.22.),
제2책은 〈계사일기 癸巳日記 〉로 30매(1593.5.1. ∼ 1593.9.15.),
제3책은 〈갑오일기 甲午日記 〉로 52매(1594.1.28. ∼ 1594.11.18.)
제4책은 〈병신일기 丙申日記 〉로 41매(1596.1.1. ∼ 1596.10.11.),
제5책은 〈정유일기 丁酉日記 〉로 27매(1597.4.1. ∼ 1597.10.28.),
제6책은 〈정유무술일기 丁酉戊戌記 〉로 20매(1597.8.4. ∼ 1598. 1.4.),
제7책은 〈무술일기 戊戌日記 〉로 8매(1598.9.15. ∼ 1598.10.7.)로 되어 있다.
난해한 한문으로 기록했다. 아주 급하게 쓴 초서로 적혀있고 마치 이두와 같은 용법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난중일기>는 일본에서 먼저 해석을 시도했고, 일어판 번역본이 나와 널리 읽혔다.
이 책은 군 사령관이 전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서술한 기록으로서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개인의 일기 형식으로
기록되었지만 날마다의 교전 상황이나 이순신 장군의 개인적 소회, 그리고 당시의 날씨나 전장의 지형, 서민들의 생활상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유려(流麗)하다.
임진왜란에 관한 전쟁 사료 중 육지에서 벌어진 전쟁에 관한 자료들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반면 해전에 관한 자료로는 『난중일기』가
유일하다고 할만하다. 이런 관점에서 『난중일기』는 당시의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군사적 갈등을 포함한 세계사 연구에 중요하며
세계적 관점에서도 매우 귀한 자료이다.
『난중일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여러 근대 유럽 나라들에서 임진왜란 해전을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폭넓게 활용되어 왔다.
‘세계 최초의 장갑선’이라고 알려진 ‘거북선’에 관한 기록과 거북선을 이용하는 전술은 전쟁사 연구자들에 주목을 끌었다.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는 이순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1905년 5월의 러일전쟁 당시 대마도 해전에서 이순신의 전법을 활용해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물리쳤다고 공언한 바 있다.
(대마도에 실제 그 곳을 기리는 장소가 있다)
오늘날 임진왜란 해전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임진왜란 시기의 해전사를 연구할 때 『난중일기』를 필수 인용 문헌으로 활용한다.
197쪽에 ‘이 날 밤에 나 덕명이 와서 이야기 하는데 머무르고 있음을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니 한심하다.’ 는 문장에는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가거라’ 한 마디 하셨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냥 참고 묵묵히 000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충무공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전쟁 중에 일기를 쓴다는 것은 더욱 자기와 마주해 보는 것이리라.
충무공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겠다는 목표를 가진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死後, 자신이 그렇게 큰 인물로 인정받을 줄 모르셨을 것이다.
그저 묵묵히 자신이 처한 처지에서, 군인이라는 직분에 나라를 지키려는 사명에 최선을 다한 것이 절로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름을 먼저 구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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