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素田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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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베짱이다. 생물학명으로는 메뚜기목 여치과의 곤충으로 보통 사람들이 ‘중형 여치류’라고 부른다. 예전에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개미와 베짱이라는 제목의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감소시키는 대표선수로 각인되어 왔다. 아마 지금도 가끔 신문지상에 농땡이의 대명사로 등장하기도 한다. 지난여름 현대자동차의 노사분규가 한참 타오를 때 우리나라의 유명한 모 경제신무에 이러한 제목으로 떡하니 신문에 나왔다. “개미같은 도요타 노조와 베짱이 같은 현대차 노조” 라는 기사를 보고 혈압이 급상승해 응급실을 찾기도 했다.
나는 서럽다. 찰스핸디가 쓴 코끼리와 벼룩이라는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는 아주 사소한 비유로 쓰여진 그 놈이 새로운 1인 기업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나오는 마당에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변명은 싫지만 진실은 밝혀져야 된다고 본다. 그동안 쌓인 나의 오해를 좀 풀어보자.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찬 바람이 부는 겨울에 개미집에 가서 음식을 구걸했다는 장면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나는 일년밖에 살지를 못한다. 게다가 온도조절장치가 없어 겨울이 오면 꼼짝없이 죽는다. 야행성이라 낮에는 활동하기 어렵고 먹는 것도 개미와는 완전히 다르다.
두 번째로 오해하는 것은 개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을 하고, 나는 기타을 치고 놀았다는 부분이다. 이것을 어떻게 개미들에게 염장을 지른다고 해석을 했을까. 사람들의 감성과 표현이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실은 개미들에게 노동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 노래를 불러준 것이다. 이렇게 모함을 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의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숲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새나 사마귀 같은 천적한테 잡혀먹기 십상이다. 나는 목숨을 걸고 노래로 분위기를 살려주는데 이런 오해를 받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마지막으로 노래에 관한 것이다. 사실 수컷으로 태어나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간다. 인터넷의 발달로 웬만해서는 암컷들의 비위를 맞추기 어렵다. 3단 이상의 고음역대를 소화해야 하고 섹시한 율동도 필수적이다. 아버지 세대들은 단순하게 목청만 크면 되었다. 나는 성대가 짧아 어릴 때부터 연기와 춤 등을 과외를 받으면서 부지런히 연마해야 했다.
개미는 나보다 불쌍한 존재다. 집단사회를 이루고 개체가 많다는 것은 좋지만 철저한 계급사회이다. 내가 아는 일개미는 불쌍할 정도로 일을 많이 한다. 보험도 없다. 후대를 남기는 일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냥 뼈 빠지게 일을 하다가 남는 것은 죽음뿐이다.
서서히 가을이 깊어간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올해는 일찌감치 삼삼한 암컷 하나를 구해서 잘 지내고 있다. 한해를 산다는 것이 서럽기는 하지만 자연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종들이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는 존재마다 그만한 역할을 다 하게 되어있다. 구본형 선생님의 위안적인 말도 들을 수 있다. 1년을 열 번씩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인간들은 베짱이의 한해살이를 따라하지 않았으면 한다. 짧게 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전에 사귀었던 하루살이 친구가 내일을 모르듯이 어쩌면 많은 이들이 존재를 뛰어넘는 것을 잘 모른다. 인간만이 신의 흉내를 내서 갈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막연하게 길다는 것으로 대충 대충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본다. 우리 세계는 어영부영하는 시간의 낭비가 없다. 가끔 인간세계에서 요절이라는 표현으로 짧게 살다간 사람들이 오래 동안 기억되는 것이 그런 이유가 아닐까.
요즘에는 나에 대한 이미지가 서서히 바뀌고 있어 기분이 좋다. 창의성, 음악의 소중함, 문화적 가치의 상승으로 나의 진면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찰스 핸디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어서 표현하자면 진리는 첫째 조롱받고, 둘째, 반대를 받다가 셋째,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나에 대한 이미지를 반대가 있기는 하나, 곧 자명한 것을 받아들여질 것이다.
나는 코끼리와 벼룩의 비유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생태계는 그 나름대로 존재의 이유가 있듯이 노래와 나만의 세계가 있다. 나는 끊임없이 창조하고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낸다. 바로 이것이다. 창조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 벼룩과는 다른 나만의 고유한 존재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고 후대들도 그러한 삶을 살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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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럽다. 찰스핸디가 쓴 코끼리와 벼룩이라는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는 아주 사소한 비유로 쓰여진 그 놈이 새로운 1인 기업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나오는 마당에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변명은 싫지만 진실은 밝혀져야 된다고 본다. 그동안 쌓인 나의 오해를 좀 풀어보자.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찬 바람이 부는 겨울에 개미집에 가서 음식을 구걸했다는 장면이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나는 일년밖에 살지를 못한다. 게다가 온도조절장치가 없어 겨울이 오면 꼼짝없이 죽는다. 야행성이라 낮에는 활동하기 어렵고 먹는 것도 개미와는 완전히 다르다.
두 번째로 오해하는 것은 개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을 하고, 나는 기타을 치고 놀았다는 부분이다. 이것을 어떻게 개미들에게 염장을 지른다고 해석을 했을까. 사람들의 감성과 표현이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실은 개미들에게 노동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 노래를 불러준 것이다. 이렇게 모함을 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의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숲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새나 사마귀 같은 천적한테 잡혀먹기 십상이다. 나는 목숨을 걸고 노래로 분위기를 살려주는데 이런 오해를 받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
마지막으로 노래에 관한 것이다. 사실 수컷으로 태어나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간다. 인터넷의 발달로 웬만해서는 암컷들의 비위를 맞추기 어렵다. 3단 이상의 고음역대를 소화해야 하고 섹시한 율동도 필수적이다. 아버지 세대들은 단순하게 목청만 크면 되었다. 나는 성대가 짧아 어릴 때부터 연기와 춤 등을 과외를 받으면서 부지런히 연마해야 했다.
개미는 나보다 불쌍한 존재다. 집단사회를 이루고 개체가 많다는 것은 좋지만 철저한 계급사회이다. 내가 아는 일개미는 불쌍할 정도로 일을 많이 한다. 보험도 없다. 후대를 남기는 일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냥 뼈 빠지게 일을 하다가 남는 것은 죽음뿐이다.
서서히 가을이 깊어간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올해는 일찌감치 삼삼한 암컷 하나를 구해서 잘 지내고 있다. 한해를 산다는 것이 서럽기는 하지만 자연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종들이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는 존재마다 그만한 역할을 다 하게 되어있다. 구본형 선생님의 위안적인 말도 들을 수 있다. 1년을 열 번씩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인간들은 베짱이의 한해살이를 따라하지 않았으면 한다. 짧게 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전에 사귀었던 하루살이 친구가 내일을 모르듯이 어쩌면 많은 이들이 존재를 뛰어넘는 것을 잘 모른다. 인간만이 신의 흉내를 내서 갈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막연하게 길다는 것으로 대충 대충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본다. 우리 세계는 어영부영하는 시간의 낭비가 없다. 가끔 인간세계에서 요절이라는 표현으로 짧게 살다간 사람들이 오래 동안 기억되는 것이 그런 이유가 아닐까.
요즘에는 나에 대한 이미지가 서서히 바뀌고 있어 기분이 좋다. 창의성, 음악의 소중함, 문화적 가치의 상승으로 나의 진면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찰스 핸디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어서 표현하자면 진리는 첫째 조롱받고, 둘째, 반대를 받다가 셋째,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나에 대한 이미지를 반대가 있기는 하나, 곧 자명한 것을 받아들여질 것이다.
나는 코끼리와 벼룩의 비유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생태계는 그 나름대로 존재의 이유가 있듯이 노래와 나만의 세계가 있다. 나는 끊임없이 창조하고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낸다. 바로 이것이다. 창조성과 효율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 벼룩과는 다른 나만의 고유한 존재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고 후대들도 그러한 삶을 살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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