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승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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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노하우를 게임으로 배운다? 와 좋군요.
재미있는 게임 하나를 해 봅시다.
준비물은 종이 하나와 펜 하나. 간단하지요? 당신의 옆에 있다면 지금 손에 들어보세요.
제한 시간은 1분입니다.
1분안에 제가 앞으로 묻게 될 질문에 대해 최대한 많이 적어 내려가시면 됩니다.
혹시 답을 적는 도중에 궁금한 생각이 들더라도 일단은 무조건 1분동안 적으세요.
준비되셨지요? 그러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동그란 것’은 어떤 것이 있나요? 모두 적어주세요”
준비되셨지요? 자 그럼, 시~작!
자. 1분 됐습니다.
몇 개나 적으셨나요? 이제 확인을 해 볼까요?
10개 미만 : 설마요… 정말이라면.. 직업으로 육체노동을 하십시오.
20개 미만 : 아, 안타깝습니다.. 혹시 50세 이상의 연령대 이십니까? ^^;
30개 미만 :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끝에 평균이시군요.
40개 이상 : 창의성의 대단하십니다.
제가 여태껏 본 가장 많이 쓴 사람은 53개를 썼습니다.
다른 수강생 앞에서 읽어달라 부탁했지요. 그가 읊기 시작합니다.
“눈동자, 시계.. 수박, 사과, 배.. 맥주병뚜껑, 소주병뚜껑, 사이다병뚜껑, 콜라병뚜껑..
10원짜리, 50원짜리, 100원짜리, 500원짜리..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야구공, 축구공, 배구공, 농구공, 골프공..”
“아, 그건 반칙이죠~”
야유가 터져나옵니다. 강의장이 웃음바다로 변합니다.
‘반칙’이라 한 사람의 종이에는 어쩌면 그냥 ‘공’이라 적혀있거나, ‘동전’이라 적혀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은 ‘행성’이겠지요.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혹시 야구공, 축구공을 적다가 왠지 꺼림직해서 그만두지는 않았나요?
재미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룰을 만들었군요. 게임 시작할 때 진행자인 제가 그러한 ‘반칙’에 대해서 말 한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저는 다만 게임의 목적이 ‘최대한 많이 쓰는 것’이라고만 말씀드렸지요.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 뇌의 작용을 보여주는 듯 하네요.
오른쪽의 뇌는 ‘뜨거운 녀석’입니다. 돈키호테지요. 일단 목표가 보이면 ‘일단 뛰어!’ 입니다. 아이디어를 마구 생산해내지요. 물론 쓸모 것들도 많이 만듭니다. 반면, 왼쪽의 뇌는 제법 ‘똑똑한 녀석’ 입니다. 재고, 판단하고, 분석해서 괜찮은 아이디어를 골라내어 주지요. 때로는 뜨거운 녀석이 달려갈 때 옆에서 태클을 걸기도 합니다. “야, 그건 반칙이잖아!”
정리하면, 우뇌는 아이디어의 양적 성장에, 좌뇌는 아이디어의 질적 성장에 각각 기여한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역할이 명확히 다르지요.
문제는 이 두 녀석이 동시에 뛴다는 것입니다. 앞서 게임을 할 때를 생각해보세요. “축구공, 야구공, 배구공…” 우뇌가 달려나가기 시작합니다. 그 때 좌뇌가 흘겨봅니다. “잠깐, 이건 너무 치사한 짓이잖아. 걍 ‘공’이라 적어.” 이 잦은 핀잔 때문에 뜨거운 녀석은 자꾸 주눅이 들지요. 마치 회사에서 회의할 때 기세좋게 한마디 이야기했다가 상사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신입직원처럼 말입니다. 어쨌든 평범한 생각은 대개 이렇게 진행됩니다. 뜨거운 녀석과 똑똑한 녀석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다보니 결국 평범해지고 마는 것이지요.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이 단어 너무 유치하잖아!’ ‘이건 너무 속을 드러냈나?’ ‘좀 더 세련된 표현은 없을까?’ 등등, 글을 써 나가다보면 이미 쓴 것에 대한 검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좌뇌의 태클이지요.
감정의 ‘흐름’이 드러나는 모든 글이 좋은 글은 아니지만, 좋은 글에서는 작가의 감정 상태와 그것의 자연스런 흐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감정이 잘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내부의 검열자에 의해 계속해서 딴지를 걸리면, 흐름이 끊어지게 되고 결국 무미건조한 평범한 글이 되어버립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의 저자 나탈리 골드버그는 말합니다.
“말할 때는 오로지 말속으로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글을 쓸때는 쓰기만 하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뜨거운 녀석과 똑똑한 녀석이 서로 싸우지 않고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통통 튀면서도 유치하지 않을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답은 동시달리기가 아닌 ‘이어달리기’를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첫번째 주자는 뜨거운 녀석입니다. 한 가지의 생각에 필이 꽂히면, 그 ‘처음 생각’을 안고 마구 달려나가도록 고삐를 놓아 주십시오. 그와 동시에, 중간에 끼어드려고 하는 똑똑한 녀석은 말려야 합니다. 그냥 무시하는 것이지요.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많이 설치지는 않습니다. 앞의 게임처럼 시간을 정해두고 최대한 많이 쓰는 것을 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바삐 달려나가느라 방해꾼을 신경쓸 겨를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첫 생각에 불을 활활 붙여 주는 것, 사회적 체면 또는 내면의 겸열관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에너지의 심장부에 도달하는 것, 피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진짜 마음이 보고 느끼는 것을 쓰는 것이다… 내부 검열자의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하라.” – 나탈리 골드버그
손을 계속 움직이세요. 방금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지금 쓰는 글을 조절하려고 머뭇거리게 됩니다. 최대한 빨리 적으세요. 생각하려 들지 마세요. 논리적 사고는 버리고, 더 깊은 핏줄로 자꾸 파고들어 감정의 에너지를 느끼세요. 다가오는 감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슬프면 울면서 쓰세요. 멈추지는 마세요. 자신의 감정을 넘어서야만 저 반대편 심장부에 이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고 나면 이제 안달이 난 똑똑한 녀석이 이어달리게 하세요. 논리적 구조와 문법, 철자등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잠시 쉬었다가 고치는 것이 더 좋겠군요. 두 녀석이지만 사실 내 한 몸에 들어있는 것이라 바톤터치하는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쳐쓰다 보면 쓰던 당시에는 참 유치하다고 느꼈던 단어들이 의외로 괜찮게 빛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쓰면 좋은 표현’은 없습니다. ‘상황에 적당한 단어’만이 있을 뿐이지요. 감정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 이러한 단어들이 저절로 찾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Finding Forrester)에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한 학생을 가르치는 유명한 작가의 말이 나옵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가 배운것과 같군요.
“초고는 가슴으로 쓰고, 재고는 머리로 써야 한다”
“You write your first draft, with your heart. And you re-wirte, with your head”
감정 다음에 논리가 이어달리게 하십시오.
뜨겁게 달구어 완전히 익힌 다음에 날카롭게 요리하세요.
왜냐구요?
그렇게 써 보니 이 글을 두시간 만에 쓰게 되었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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