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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9일 08시 43분 등록
피하고 싶은 소재를 써야 할 때
(글쓰기 칼럼에 관한 것입니다.)

글쓰기 브레인 스토밍에서 소재를 찾을 때 내가 제시한 것이다. 이것에 대한 답을 누군가 해주었으면 좋겠다. 문제를 알고 있는 사람이 항상 답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글은 그 사람의 생각의 반영이고, 일상의 반영이고, 이상의 표출이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쓰고 싶지 않은 소재를 쓴다는 것은 정말 곤혹스러운 일일 것이다. 어쩌면 쓸 수 없는 것을 써야할 때처럼 난감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 대해서 쓰는 것만큼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피하고 싶은 소재에 대해서 쓰는 것이라면 2가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요즘 내게 가장 자는 하는 주문으로 ‘그냥해’라는 것과 ‘피하고 싶은 것이면 제대로 안써지지 그러니까 쓰고 싶을 때까지 쓰지마’이다. 쓰고 싶을 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한번 해본다. 하다보면 괜찮아지겠지라며. 그 시도에서 생기는 결과에 대해서는 ‘그냥해’ 컨셉처럼 ‘그냥 무시해’이다. 이런 마음 없으면 자꾸 피해가게 된다.
결과를 생각했던 것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혹은 일어날 확률이 드문 일)에 대한 걱정때문이었을 거다. (나는 여기 이 글을 쓰게 된 소재가 된 우리 부모님이 내 글을 읽으시지 않았으면 한다. 나중에 어떤 경로로라도 보시게 되더라도 지금의 나의 마음이 그때까지 지금의 심정으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피하고 싶은 소재에 대해서 쓰는 경우는 이런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님에서 대해서 글쓰기를 하라고 했을 때, 아버지 이야기는 술술 신나서 할 수 있는 데, 어머니 이야기는 턱하고 막힌다. 술술 풀리는 이유와 막히는 이유는 감정적인 것이다. 글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그대로 드러난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다. 그래서, 피하고 싶은 소재에 대해서 글쓴이가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피하고 싶은’ 소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피하려 했던 소재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는 부분에 속한 것이다. 피하는 것을 쓰는 것은 자신과 어느 정도 화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버지는 나와 닮은 꼴이어서 나의 행동패턴을 아시고 나의 생각을 잘 이해해 주신다. 그래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할 때는 편안하다. 어머니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라서 늘 역지사지라는 것을 하지 않고는 이해 못하겠다. 이해까지 가는 과정이 복잡하고, 서로가 상대의 입장에 서서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경우는 감정적 트러블이 생기기 쉽다. 몇 번의 오해를 거치면서 어떤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말도 꺼내지 않는다. 말하기조차 싫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쌓여 어머니 얘기는 처음부터 피하고 싶은 것이 된다. 피하고 싶은 소재는 감정적인 것이 많이 개입하고, 오해라는 것으로 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소재와 자신과 화해가 필요한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왜?’라고 질문하며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왜?’라고 질문하며 그것에 얽힌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치유로서의 글이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랬다. 피하고 싶은 것은 피하면 되지만, 언젠가는 맞딱뜨리게 된다. 부모님의 이야기처럼 자주 맞딱뜨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첫 번째 쓸 때는 무척 어렵고, 그 다음부터는 심리적 저항이 점차 약해진다. 그 약해진 만큼이 치유로 채워진 것이다. 첫 번째 미스토리를 쓸 때 나는 이것을 제대로 경험했다. 그리고 나서 친구들에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편안해 졌다.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더 자주 해 볼 수 있다. 그냥 쓰는 것이다. 일기는 그래서 좋다. 일기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맘껏 자신을 가지고 놀 수 있고, 자신 안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내어서 그 소재에 대해서 나래이션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를 딸로서 보는 것이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눈으로, 어머니를 가장 잘 이해하는 나의 이모의 눈으로, 외할머니의 눈으로,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집 강아지의 눈으로, 어머니가 밭에서 키우는 콩의 눈으로 보는 어머니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들이 모두 화해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쯤되면 피하고 싶은 소재는 딸로서 보는 어머니의 과거에 겹쳐지는 나의 모습이지 진짜 어머니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렇게 피하고 싶은 소재에 대한 것을 쓰다보니, 나름대로 결론에 다다랐다. 일단은 그냥 써본다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내부에 무엇이 있는 지를 들여다 본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생각에 하나씩 자신을 옮겨가보는 것. 그 소재로부터 다른 것에 편안하게 눈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더이상 그것은 글쓰는데 피하고 싶은 소재가 아닐 것이다. 여러가지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자신이 피하고 싶었던 것을 잘 피해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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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여러가지로 생각들이 옮겨다녔습니다.
IP *.72.1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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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0.09 12:10:03 *.75.15.205
그래... 그렇게 저렇게 이렇게 쓰는 거지. 써보고 결정하면 되지. 먹어봐야 맛을 아는 것 처럼. 그러나 그냥 죽 잘 쓸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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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007.10.09 20:54:38 *.128.229.81
콩눈으로 본 엄마 -- 이런 그림 재미있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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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0.09 22:16:25 *.86.177.103
맞아! 그냥 내눈에 보이는 그대로 생각하고 쓰다보면 어느날 지극히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수 있고 그 눈으로 글을 쓸 수도 있더라. 말하자면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까? 상대방이 화가나서 길길이 뛸 때 나는 어느 순간 상대에 대해서 어떤 개인적인 감정의 눈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인간이 저러한 측면도 있구나' 등 아주 냉정해 질 수 있다는것이지. 이러한 현상은 연구원 생활 몇 개월 후에 찾아왔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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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情 정화
2007.10.10 08:13:07 *.72.153.12
세상에 재미난 일이 많아지네요. 이제야 재미난 것들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뭐 딱 꼬집어 말하긴 뭐하지만 여튼 재미나다는 거.
애정이 생겨나는 시점입니다.

같이 길길이 날뛰어서 살 맛나기도 하고, 콩눈으로 봐서 살 만하기도 하고.
에구, 왜 이런다냐. 흐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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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애
2007.10.10 17:45:25 *.92.200.65
여러 눈으로 바라본는 게임 참 흥미롭습니다. 늘 고정되 있는 내 눈으로 봐서 즐거움이 덜 했을수도 있겠군요. 저도 한번 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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