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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5일 08시 52분 등록
'쾅'

교실문이 부서지듯 열렸다. 그 열린 사이로 기동이가 뛰어들어왔다.

"서...선생님이… 선생님이…", 기동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뭐야? 무슨 일인데?"

놀란 정현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기동이에게 물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정현이를 향했다가 다시 기동이에게 모아졌다. 기동이는 허리를 굽히고 어깨를 들썩일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교실 안에는 잠시 서늘한 긴장감이 돌았다. 그 조용한 사이로 구식이의 재촉이 이어졌다.

"야! 빨리 말해봐. 선생님이 뭐?"

"선생님이 밖에…", 기동이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몇몇 아이들은 창가로 달려갔고, 또 다른 아이들은 복도로 뛰어나갔다. 승규는 복도를 택했다. 앞서 교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는 아이들 뒤에서 승규는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래도 아침에 선생님이 꺼내려던 '마지막'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선생님이 급하게 삼켜버린 덕에 다른 아이들은 그 말을 듣지 못했지만 두 번째 줄에 앉아 선생님의 입 언저리를 바라보고 있던 승규는 달랐다. 승규는 그 단어를 똑똑히 들은 것은 물론이고 그 뒤를 이어 묘하게 흔들리는 선생님의 눈빛도 보았다.

'혹시…'

승규의 걸음이 빨라졌다. 3층 끝에 위치한 2학년 8반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나가려면 교무실 옆을 지나는 중앙 현관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 평소 같으면 교무실 옆으로 나 있는 그 현관을 이용하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없을 테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복도를 가로질러 달리는 승규의 귓가에 창을 통해 조용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악기 소리였다.

경쾌하게 울리기 시작하는 악기의 소리는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맨날 '지직'거리던 운동장의 낡은 스피커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운 소리가 창을 넘어 복도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서 들었을까' 순간 작은 기억이 승규의 머리를 스쳤다. 언젠가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들려주었던 첼로 소리였다. 분명히 그때 들었던 그 슬픈 첼로의 소리가 틀림 없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왠 첼로 소리지', 승규는 의아했다.

뛰던 걸음을 멈추고 창가 족으로 몸을 돌렸다. 창 너머로 잔뜩 구름 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까치발을 하고 창 박으로 고개를 내밀자 겨우 운동장이 조금 보였다. 승규의 눈 앞에 신기한 장면이 펼쳐졌다. 운동장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건물에서 나온 아이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건물 앞의 화단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화단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승규가 고개를 내민 창문에서는 건물의 튀어 나온 벽에 가려 화단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정신 없이 뛰기 시작했다.

승규는 거의 넘어질 듯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리고는 현관을 향해 또 달렸다. 현관을 빠져 나오자마자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화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이미 아이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한 가운데 누군가가 고요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첼로 소리는 거기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회색 바지에 검정색 블라우스를 입은 누군가가 노랗고 빨갛게 화단을 가득 메운 꽃들 앞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었다. 최정희 선생님이었다.

연주는 어느새 하나의 장이 끝나고 다음 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잠시의 적막에 승규는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 했다. 다행히도 막 손뼉을 마주치려는 순간에 다시 연주가 시작되었다.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를 지나 선생님에게 다가가는 걸음이 너무도 멀고 더디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눈을 감고 있었다. 살며시 눈을 감은 선생님은 첼로의 리듬을 따라 이리저리 나부끼고 있었다.

'승규가 왔구나.'

제2장 '알르망드'를 지나 제3장 '크란트'로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그녀도 승규를 보았다. 순간 마음이 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다시 연주 속으로 빠져들었다. 최정희 선생님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고를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조금 욕심 내게 했다.

그렇게 천방지축이던 꼬맹이들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모두 숨죽이고 선생님의 새로운 모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선생님이 들고 있는 저 커다란 악기가 첼로라는 것을 아는 아이는 많지 않았다. 그저 평소엔 수수한 옷차림에 까다롭게 자신들을 나무라던 선생님의 전혀 다른 모습이 신기할 뿐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선생님이 들려주는 소리가 슬프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게 마지막이구나. 이 짧은 연주가 이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문득 정신이 아찔했다. 이십여 년을 한결같이 지켜온 자신과 아이들의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 자신의 전부와도 같았던 학교와 아이들에게 이제 이별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목이 간질거리는가 싶더니 명치 부근에 살짝 통증이 느껴졌다. 감고 있는 눈동자가 시큰한가 싶더니 머리가 멍해졌다. 그 순간 크란트에 이어 연주하기 시작했던 제4장 '사라방드'의 음계가 거짓말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첼로의 활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아이들아, 사랑하는 내 새끼들",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건 첼로라고 하는데, 선생님이 세상에서 너희들 다음으로 사랑하는 악기야. 그리고 이 노래는 바흐 할아버지가 아주 옛날에 만든 음악이야. 선생님이 첼로를 사랑하게 된 이유란다. 오늘 이 작은 첼로 음악회는 선생님이 너희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승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이라면 다시는 선생님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승규가 선생님에게 뛰어나가려는 순간 정현이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싫어요. 선생님이 가는 거 싫어요. 예쁜 교생 선생님보다 선생님이 더 좋아요. 가지 마세요.", 정현이는 어느새 울먹이고 있었다.

"저도 선생님이 안 가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는 맛없는 반찬도 잘 먹고 노란 스티커 안받도록 착하게 할게요."

어느새 승규의 뒤에 와있던 기동이가 말했다. 좀처럼 선생님에게 말을 하지 않는 구식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색종이는 구석부터 잘라 쓰고, 아무리 더워도 선풍기를 마음대로 틀지 않을게요."

승규는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그 때 마침 느릿한 눈짓으로 아이들을 훑어보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억지로 눈물을 참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쯤은 승규도 알고 있었다. 승규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무엇보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하고 싶었다. '앞으로 다시는 집을 나가지 않겠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이 붉어진 건 선생님인데 정작 말을 할 수 없는 건 승규였다. 창피하게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것도 같았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이들을 떠나는 선생님의 마음을 설명할 재간이 그녀에겐 없었다. 그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나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첼로통을 때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녀는 아까 연주하다 멈춘 사라방드의 음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수도 없이 연습했던 그 음계를 잊어버리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사라방드를 건너뛰고 제5장 미뉴에트를 연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두 명씩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정현이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승규도 울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하늘도 울고 있었고, 다행히 그녀는 그 빗줄기 사이로 눈물을 감출 수 있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가 아이들을 건너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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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15 07:32:50 *.72.153.12
발표했던 것보다는 훨씬 짧네. 뒤쪽을 확 잘라버린 이유가 뭐니?

발표할 때... 아이들이 뛰고 말하는 것들이 생생하게 들리더라.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 그래서 푹 빠졌다.

만일 선생님이 학교를 떠난다면 이런 이유때문일거고 했던 거, 그걸 난 상상도 못했다. 난 정년퇴임일거라고 생각했지. 그게 내가 갖힌 틀이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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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10.15 08:58:40 *.227.22.57
짧아? ㅎㅎ 잘라버리지 않았어. 이게 전부야. 이상하다. 그치?

소설이란걸 어떻게 쓰나 했는데, 처음에 걱정했던 것보다 재미있었네. 나도 글을 쓰면서 비교적 쉽게 아이들의 이미지가 떠올랐어. 그간 봐었던 학교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일까? 푹 빠졌다니 고맙네.

떠나시는게 좋을지, 아니면 남으셔야 할지... 내가 답을 말할 수는 없었고 그냥 이런 풍경을 떠올리고 본인의 감정을 더듬어 보실 수 있기를 바랬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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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10.15 14:50:46 *.132.71.8
자르지 않았는데 짧게 느낀 것은 왜일까?
나는 비가 오면서 그 뒤로 이어지는 부분이 시간이 멈춘듯이 아주 천천히 흘러가서 거기서 부터가 1/3은 차지하는 것처럼 느꼈었어.
앞부분은 전개가 빠르고 뒤로 갈수록 느려지는 전개처럼.... 그래서 그런가 뒤가 잘린 느낌이 들었어. 감정 넣고 읽는 것과 눈으로 후르르륵 읽는 것의 차이인가?(갸우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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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향기
2007.10.16 11:11:39 *.109.100.237
아이들 이름은 왜 그렇게 정한거야?
-최정희 선생님 글에 나오는 인물들이야~애들이 하는말들도, 생각도 다 선생님 글에 나오는 내용들이지..
아~그렇구나..

작은거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항상 최선으로 최고의 글을 뽑으려 노력하는 당신이 자랑스럽네요 ^^

너무 세심한거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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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0.17 06:32:25 *.48.38.252
이런..숲속의 향기님이 바로.......그 분이셨구만..어쩐지..ㅎㅎ

역시 "감동"이 있어. 정말 소설같다.
밤새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찾는 정성. 그녀도 분명 좋았으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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