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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5일 20시 39분 등록
“대한항공에서 탑승객들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11시 20분발 울란바토르행 대한항공 2157편 비행기에 탑승하실 손님께서는 42번 게이트로 빨리 오시기 바랍니다. 5분 후면 이륙할 예정이오니 서둘러 탑승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얘는 어떻게 된 일이야. 또 어디서 남 도와주느라고 늦는 거겠지. 아무튼 그 버릇은 평생 남 못 준다니까. 근데 다른 연구원들은 벌써 도착했겠지. 어제 출발했으니까…….
사부님도 가셨을 테고. 빨리 만나보고 싶은데. 영훈이는 도대체 아직까지 나타날 기미가 안보이네. 타야 되나, 말아야 하나. 연락도 안 되고’

영훈이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전 9시이다. 무려 2시간이나 넘게 기다렸다. 지나온 세월에 비하면 2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흥분된 마음이 왜 이리 가라앉지 않는지 모르겠다.

42번 게이트 위로 선명하게 보이는 빨간색 전광판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2016년 8월 17일 오전 11시 15분’

연구원 생활을 시작한 지도 8년이나 흘렀고, 연구원 후배들도 많이 생겼다. 올 초에 10기 연구원 과정도 끝이 났다. 그 기념으로 연구원 총동문회를 몽골에서 개최하게 되었고, 그 곳에 참석하려고 공항에 나와 있는 것이다. 이 행사는 처음 우연찮게 내가 이야기한 것이 영훈이가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추진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영훈이가 없었다면 흐지부지 될 뻔한 행사였다. 영훈이는 무슨 아이디어만 생기면 바로 실행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기질이 있다. 이 점 때문에 실패도 많이 하고 어려움도 많이 겪었지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연구원들이 좋아한다.

3기 연구원 생활을 하던 첫 해 몽골로 연수를 떠났다. 그 때 깜깜한 밤하늘에 펼쳐진 별쇼는 아직도 생생하다. 생각만 해도 저절로 흥분이 된다. 그토록 선명한 별빛은 생전 처음 보았다. 은하수도 처음 보았다. 그 밤하늘이 그리워 다시 몽골로 향하고 있다. 지금도 그 별들은 잘 있겠지. 혹시나 환경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등을 쳤다.
“형님, 죄송합니다. 내가 많이 늦었죠? 빨리 비행기 탑시다. 가면서 자초지종을 설명드릴께요.”

영훈이다. 전보다 흰머리는 많이 늘었지만 ‘최영장군’ 별명처럼 몸은 여전히 단단해 보이고 말은 더 쩌렁쩌렁하다. 영훈이를 만나자 마자 서둘러 탑승하였다.

몽골행 비행기 안 나란히 좌석에 앉자마자 물었다.

“이 사람, 어떻게 된 거야? 못 오는 줄 알았잖아.”
“오기 전까지 국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느라고 늦었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죠? 곧 통일이 될 텐데 통일을 대비한 조세 개혁안을 마련하는 프로젝트 책임을 맡은 것 말이에요. 프로젝트는 잘 끝났는데 갑작스럽게 국회에서 오늘까지 국감자료를 제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잖아요. 내가 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었어요. 오늘부터 휴가인데 말입니다.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래. 다행이다. 그래도 내 간장 녹인 벌을 받아야 하겠는데.”
“그럴 줄 알고 미리 형님이 좋아하는 와인 한 병 가져왔습니다. 점심 먹을 때 같이 마십시다.”

술은 잘 못 마시고, 마시더라도 소주를 좋아했던 내가 이제는 와인을 즐겨 마신다. 이것도 나의 롤 모델인 사부님의 영향이다. 사부님은 워낙 와인을 좋아해서 자주 만나 같이 즐기다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와인 애호가가 되어버렸다.

“영훈아, 우리 참 오랜만이지. 한 1년은 된 것 같은데.”
“예. 그 정도 된 것 같은데요. 지난 번 제 출판기념회때 뵙고 처음이니까 한 1년 정도 되었네요.”
“맞아. <공무원으로 산다는 것> 그 책이었지. 공무원 생활 25년을 맞아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책 속에 담았지. 네가 쓴 다른 책들도 좋지만 나는 이 책이 가장 마음에 들어. 너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잖아. 평범한 사람의 희로애락이 진솔하게 담겨있는 책이 좋아. 영웅보다는 서민의 삶이 좋거든. 그런데 너는 이 책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으니 이젠 서민이 아니지. 더구나 주위에서 시샘도 많이 받았잖아.”
“말도 마세요. 무척 망설이다 출판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반응이 좋을 줄 몰랐어요. 팬도 생겼잖아요. 형님도 아시잖아요. 이 책 때문에 고민이 많이 한 것 말이에요.”

이 책 때문에 영훈이는 남모르는 시련도 겪었다. 심지어 공무원을 그만 둘 생각까지도 하였다. 그 고민 때문에 나와 영훈이는 양평에서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던 적이 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녘에 기차를 타기 위해 양평역으로 어깨동무하고 걸어가다가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영훈이와 나는 한동안 길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러다 영훈이가 갑자기 일어나서 말했다.
“나 공무원 그만 두지 않을래요. 통일이 될 때까지 계속하렵니다. 형님, 양평을 거꾸로 보니 평양이네요. 곧 통일이 될 텐데 그러면 내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그것이 나의 소명이 아닐까 싶네요. 형님, 고마워요.”

그 이후로 더욱 공무원 생활을 열심히 했다. 정말 무서울 정도 열심히 했다. 영훈이의 끈기는 누구도 부러워할 정도이다. 그래서 오늘도 늦은 것이다.

“그런데 형님, 다른 연구원들은 벌써 몽골에 갔겠죠?”
“그럼, 옹박이 잘 챙겨서 벌써 갔지. 그게 몇 년도지. 2007년도에 못 간 아쉬움을 이번에는 제대로 풀겠다고 얼마나 열심히 챙겼는데.”

“맞아요. 옹박하고 최선생님만 못 갔죠.”
“영훈아,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이번 행사도 추진하기 어려웠을 거야. 이런 말해도 될는지 모르지만 너 참 독종이다. 뱅곤이보다 더 독종 같아. 그 바쁜 와중에 어떻게 이번 행사를 어쩜 그렇게 꼼꼼하게 챙겼니?”
“형님도 참. 내가 원래 이런 일 좋아하잖아요. 전 한 가지 일만 하는 것 별로 재미가 없어요. 더구나 이번 일은 연구원 일이잖아요. 내게 연구원은 어머니와 같아요. 이곳을 통해서 낳은 자식만 해도 ‘일곱’인데요.”
“그렇구나. 나는 ‘다섯’밖에 안 되는데. 나보다 부자네. 그건 그렇고, 다른 연구원들은 몇 명이나 참석하니?” 여기서 자식은 쓴 책을 말한다.
“정확하게 사부님을 포함해서 75명입니다. 그리고 그 외 꿈벗이랑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102명입니다. 거의 비행기 한 대를 전세 낼 정도죠. 하하하”
“와! 그렇게 많아. 참, 세월도 많이 흘렀고 연구원도 많이 늘었구나.”

감회에 젖는 동안 점심시간이 되었고,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영훈이는 늦게 온 벌로 가져온 와인 한 병을 꺼냈다.
“형님, 이 와인 기억나세요?”
“글쎄. 아, 맞다. 이거 정말 뜻 깊은 거잖아. 이거 모르면 안 되지.”
“그래요. 10기 연구원을 마지막으로 졸업시킬 때 10년 동안 꼬박 창고에 고이 간직하고 계시다가 10기 연구원이 졸업하면 꺼낸다고 하시면서 주시던 그 와인이죠. 사부님이 직접 한잔씩 따라 주실 때 어찌나 감개무량한지, 잘 울지 않는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잖아요. 하여튼 사부님도 대단하시다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그러게 말이다. 나의 롤모델이지만 내가 좇아가려면 한참 멀었다. 몇 수 앞을 내다보는지 도통 모르겠어.”

우리는 건배를 하면서 지난 세월이 남긴 추억을 더듬으며, 와인 마시랴 수다떨랴 정신이 없었다.

“소전농장은 잘 되어가?”
“예, 며칠 전에도 상추랑 깻잎이랑 따서 초아샘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 했잖습니까. 갑자기 전화를 하시더니 ‘지금 대전에 올라가는 길인데 술 한 잔 할까’ 하시잖아요. 그래서 부랴부랴 밭에 나가 고추랑 오이랑 따서 먹었죠.”
“너 참 대단해. 이제 나이도 들었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냐?”
“태생이 그런가봐요. 난 무엇을 하든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에요. 움직여야 에너지가 생기고 힘이 나죠.”

나랑 한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겉모습이나 열정으로 보면 30대 못지않다. 이런 후배를 연구원 동료로 지금껏 알고 지낸다는 사실이 참으로 행복하다. 그저 옆에만 있어도 힘이 생기고 에너지를 얻는다.

잠시 창밖을 보니 구름이 몽골초원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다. 저기 흰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최영장군’이 보인다. 나를 따라오라며 손짓을 한다. 그는 ‘마그마’다. 그의 열정은 오늘도 식을 줄 모른다. 그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옆에서 도와주어야겠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그의 열정이 탈 수 있도록 옆에서 계속 땔감을 넣어줘야겠다. 그럼 사부님은 불쏘시개로 열정이 활활 타오르게끔 불을 지펴주시겠지. 와인 맛이 참 끝내준다.
IP *.212.167.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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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10.15 23:36:49 *.120.66.207
마그마... 어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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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0.17 06:35:39 *.48.38.252
정말 최영훈씨를 잘 표현하셨네요. 재밌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
창용님의 또 다른 탁월한 모습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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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2007.10.17 09:06:16 *.99.242.60
형님 고마워요.
나의 일면을 잘 묘사해줘서 고맙습니다.
뜨거운 마그마 같은 열정을 가지면서도
열정 뒤의 뜨거움을 식혀주는 부드러운 바람같은 존재도
되겠습니다.
연구원 총동문회를 몽골 울란바트르에서 하는것은
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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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0.17 09:08:49 *.249.162.56
수업하는 날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창용 형의 발표가 가장 좋았습니다. 제목부터 진행 방식까지 영훈이 형을 아주 잘 드러내주었고, 공연(?) 내내 연신 미소가 머금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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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17 18:42:56 *.128.229.81
이 장면을 잡아 낸 힘이 바로 The Goal 능가하는 좋은 경영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대는 내년 12월을 넘기지 말고 써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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