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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00시 54분 등록
윤의 어느 날

윤은 지금 파리의 세느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를 천천히 걷고 있다. 잠시 멈춰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윤의 옛 일들이 스쳐갔다. 앞으로의 삶도 더 먼 훗날에는 이렇게 아련한 기억으로 스쳐가겠지. 이 유유한 흐름처럼 인생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리라. 강 위를 부는 바람이 윤의 얼굴 위를 감싸고 지나갔다. 낮인데도 겨울이라 바람이 차다.

윤에게 파리는 보통 이상의 의미이다. 유년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5살때까지라 기억의 단편들은 많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 시간은 윤에게 불어라는 언어를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윤은 스물 여덟 나이의 어느 가을 날에 이곳에서 첫 책의 초고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무리도 이곳에서 맺었다. 윤은 아직 그 벅찬 순간을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이곳을 찾았다. 이번에는 번역서를 내기 위해서다. 윤이 스물 일곱에 만난, 평생의 은사로 여겼던 구선생님의 신작을 영어로 번역하려 한다. 윤은 자신의 손으로 이렇게 훌륭한 책을 외국인에게 알린다고 생각하니 뿌듯함이 올라왔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윤은 이 작업이 즐겁다.

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언어재능이 있음을. 학창시절에도 언어 과목을 유달리 좋아했고 배우는 속도도 빨랐다. 어린 시절 오랜 외국 생활을 거쳤지만 윤의 한국어 구사 능력은 뛰어났다. 윤의 글은 진실되며 깊이가 느껴지고 통찰이 돋보였다. 깊고도 넓었으나 요동치지 않았다. 그러나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윤의 글은 가슴을 순간 파고 들지 않아도 어느 순간 다가와 살며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감쌌다. 윤은 이십 대 때 ‘나의 감각이 아직 살아 있을 내 나이 마흔, 그 때가 되기 전에’라는 말도 했었지만,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도 윤의 감각은 바래기는 커녕 해가 갈수록 멋과 깊이를 더해간다.

누구의 모든 면은 그 사람을 대변한다. 윤의 글도 윤을 대신한다. 윤의 아호는 해정(海瀞)이었다. 고요한 바다. 윤은 고요한 바다였다. 윤은 그 호를 좋아했다.

윤은 간간이 저술 활동을 펼쳐왔다. 스물 여덟 첫 책을 내고 그 간 다섯 권의 책을 썼다. 분야도 여럿이다.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과 자녀 양육의 산 경험을 바탕으로 청소년 교육에 대한 윤만의 견해와 안을 보여주었었다. 윤의 직장 경험을 살려 국제 통상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다. 이 분야는 윤이 어린 시절부터 오랬동안 꿈꿔왔던 것이다. 사실 지금도 이 분야에 종사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여기저기서 칼럼 요청도 많다. 한국 뿐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도 고정 독자층이 있다. 윤은 글로벌인이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만치서 어떤 이가 윤을 바라보며 윤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윤의 남편이다. 그는 역시 이번 저술 여행길에도 동참하였다. 윤과 그는 간간이 있는 이런 여행을 즐겼다.

젊은 시절 윤의 꿈 중 하나는 21세기형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었다. ‘결혼은 선택’이라는 말이 퍼지고 독신이 늘고 있는 그 시대에 현모양처라고? 앞의 21세기형이라는 수식어가 없었다면 많은 사람이 의아해 할 판이었다.

윤은 가정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오랜 외국 생활을 거치면서 더욱 뼈저리게 다가왔다. 눈물짓고 힘들어도 언제나 돌아와 쉴 수 있는 이 곳. 보금자리 같은 편안한 안식처. 가족들과 때로는 웃음 짓고 때로는 눈물지어도, 밑으로 끈끈이 묶인 정으로 다시 하나 되는 관계, 진심으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무슨 일이 생기면 우선 달려오고 걱정하는 살붙이들, 다이나믹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 자신을 닮은 인간이 자신에 의해 자신과 함께 자라는 곳. 조건 없는 사랑이 넘칠 수 있는 곳, 영구히 함께 하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특이한 공동체. 윤에게 가정이란 곳은 이 말들로는 모자라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을 건데, 결혼을 안 하고 가정을 꾸리지 않는다는 것을 윤은 생각한 적이 없다. 윤은 배우자를 아주 신중히 골랐다. 선이 아닌 최선의 선택을 위해. 탐색이 길고도 깊었던 걸까. 윤은 그가 운명이라는 것을 몇 번 만에 알아보았다.

윤과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끄는 공동 CEO, 바로 윤의 남편이다. 그는 윤의 조금은 특이한 코드를 잘 이해하고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굵직한 가치관이 같아 바라보는 곳이 비슷하다. 가는 곳에 마찰이 있을 때는 잘 조율해 나갔다. 물론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함과 믿음이 기반이다. 신앙 생활도 함께 했다. 윤과 그는 서로의 자라온 환경을 이해하고, 서로의 현재를 알고, 앞으로 서로가 발전하고 성장할 방향을 이해하고 제시하며 가꿀 수 있도록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 둘은 일방적인 성공이나 희생을 바라지 않았다. 강요하지 않았다.

‘서로’, 그 둘을 표현하는 적절한 말 중 하나이다. 그 둘은 때로는 마주보며 때로는 같은 곳을 보며 서로를 위하였다. 그들은 서로에게 조언자이고 조력자였다. 시련과 고비가 있었지만, 비온 뒤에 굳는 땅처럼 서로의 정은 공고해지고 가정은 단단해졌다. 반려자. 인생의 반을 함께 하는 사람. 그 둘은 서로의 남은 인생을 나누었다. 이제 몇 일 지나면 그를 만난 지 이십 년. 윤은 그가 있음을 감사히 여긴다.



윤이 자세히 보니 남편 뒤에 누군가가 같이 있다. 이런 이게 누구야. 저 아이가 어떻게 여길...... 윤의 딸아이였다. 저런, 귀여운 것, 나를 이렇게 놀라게 하다니. 윤은 이런 깜짝 이벤트가 좋았다.

윤의 딸은 이번 겨울을 넘기면 고등학생이 된다. 윤을 닮아 깊은 속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윤의 남편을 닮아 밝고 사려 깊은 아이이다. 아이 어른 같은 이 아이는 요새 고민이 부쩍 심해졌다. 진로에 대한 여러 생각으로 심난해졌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애써 무엇을 가르치고 지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끌어줄 것이다. 이 아이의 길이다. 이 아이에게는 내가 가진 것도 있지만 나와는 다른 것을 갖고 있다. 나는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씨앗이 싹트고 무럭무럭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다. 그리고 잘 헤쳐나가리라 믿어주는 거다. 윤의 생각이다.

윤은 딸아이가 성장을 위한 도약을 하려하고 있음이 기특하다.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올라온다. 하나의 인간이 훌륭히 자라고 있구나. 부모를 보러 이런 깜짝 등장을 한 것도 그랬다. 윤은 딸아이와 웃음을 주고 받는다.


그 날은 12월24일 윤의 생일이었다.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 둘 내려앉기 시작했다. 윤은 눈을 살며시 감고 이 순간을 느낀다. 포근하고 따뜻하다.
IP *.120.6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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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바다
2007.10.16 01:53:40 *.6.5.251
언니... 다시 읽어도 눈물나네 ^^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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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10.16 08:47:26 *.244.21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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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 엄마
2007.10.16 11:11:31 *.6.5.170
어찌 그리 애미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셨는지요 큰 소리내어 웃었는데 눈물이 나는건 무슨 조화인지~~~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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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10.16 12:44:09 *.244.218.10
^^;; 제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곳에 들어와 글도 읽어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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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바다
2007.10.16 13:06:29 *.6.5.251
앗, 엄마다 ㅎㅎ 엄마도 이 글 보고 울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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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엄마
2007.10.16 13:47:20 *.6.5.170
지난 일년동안 윤은 사회 부적응자(?)로 가족들의 걱정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얼마전 깨달은건 사회에서는 좋은 보스를 못만났자만 이곳에서 훌륭한 멘토를 만나고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기만의 길을 찿아가는 모습을 보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구소장님, 지난 여름 처음 뵈었을때 제게 하신 말씀 기억하세요? 영리한 아이니 걱정하지 마라고 하신 말씀_ 이젠 어제 보다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윤을 믿기로했습니다 그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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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2007.10.17 18:37:39 *.128.229.81
우리 모두 윤이를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 아이 스스로 그렇게 만듭니다. 그러니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 후에 긴히 쓰일 빛나는 사람들입니다. 호정이 윤이에게 좋은 선물을 주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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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10.18 08:55:48 *.244.218.10
제 글이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니 기쁘네요. ^^
윤이는 이쁜 후배이고 동료이자 친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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