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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6일 01시 49분 등록
하객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곧 Miss lee와 테리우스의 결혼식이 거행될 예정입니다. (Lady and gentle men, Now we have a wedding ceremony miss Lee and Mr.Terrius. Please have a seat. Thank you) 홀에서 사회를 보는 소전의 방송멘트가 들려온다. 여기는 뉴욕의 프라자 호텔 그랜드볼룸이다. 맑은 가을과 어울리는 베이지색 벽면과 오크트리로 장식된 천장의 은은한 빛이 고고한 분위기를 품어낸다. 입구에서부터 홀까지 길게 이어진 붉은 장미의 긴 행렬과 홀을 둘러싼 분홍, 노랑, 흰색의 장미들이 눈이 부시다. 또 하나의 눈부신 것이 있다. 로비에서 하객들을 분주하게 맞이하는 신랑 테리우수의 모습이다. 악수를 하면서 활짝 웃는 것이 보기 좋다. 참, 세상에나, 내가 결혼을 하다니. 그것도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선 이 마당에.

1년 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미국으로 건너온 지 5년이 지난 작년 이맘때 브로드웨이 뉴욕 화랑에서 그동안 틈틈이 쓴 시와 수채화 전시회를 열었다. 분주한 개막식 행사와 손님들의 인사가 끝이 나고 의자에 앉아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갑자가 종아리에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종아리에 얼굴을 비벼대고 있었다. 옛날에 동거했던 테리 생각이 났다. 털의 색깔과 무늬하며 크기도 비슷하다. 같이 살던 테리가 죽은 후 다른 고양이를 들이기기 싫었다. 테리의 공간을 영원히 남겨놓고 싶었다. 손을 내밀어 보니 품안으로 쏙 들어온다. 테리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맹인이었던 테리의 여윈 몸에 비하여 탄력이 느껴진다. 고양이의 푹신한 온기가 전해온다. 갑자기 내 눈 앞에 뭔가 번쩍한다. 전시장 정면에서 성큼 성큼 들어오는 사람이 보인다. 까만 정장에 흰 셔츠를 입고 금발에다 수염이 어울린다. 구레나룻에서 야성적인 냄새가 묻어났다. 갑자기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온다. 심장이 두근두근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내 심장의 박동소리인가? 점점 가까워지자 고양이가 품안을 벗어나 그 남자에게로 꼬리를 흔들면서 뛰어간다. 그 테리를 닮은 고양이의 주인이었다. 고양이의 인연으로 만난 그 남자, 바로 테리가 이어준 것은 아니었을까?

갑자기 멀리서 소전의 방송이 다시 들린다. “잠시 후 신랑입장이 있겠습니다. 하객여러분께서는 힘찬 박수로 신랑을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피식 웃음이 난다. 사회자의 소리로 듣고 긴장하면서 손을 접었다 폈다 하며 왔다 갔다 하다가 방송 소리를 듣고 움찔 놀라며 심호흡을 하는 모습이 귀엽다.나와 눈이 마주치자 윙크를 하면서 브이 자를 그리며 식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날 고양이로 맺어진 인연은 둘이 서로 혼을 쏙 빼놓은 채 눈에 번개 불이 번쩍였고, 그 불빛이 가슴속 깊은 곳을 관통하였다.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그는 사춘기 때 나의 우상이었던 아버지의 원숙함을 가지고 있었다. 진리를 사랑했고 감성적이었다. 헤어질 때 그의 뒷모습은 영낙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무대 위에 있을 때이다. 소년같이 순수하고 다정다감하던 그가 무대 위에 올라가면 카리스마를 가진 뜨거운 남자로 변신한다. 흡사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그의 포효하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열정이 나의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다. 첫 만남 이후로 나는 그의 공연을 빼놓지 않고 보았다. 늘 같은 장면도 그에게는 색다르게 표현할 줄 아는 연출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고,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중해 석양이 물들어 가는 배 앞전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석양을 등지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고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느린 화면처럼 일어나서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고, 뒤이어 그의 뜨거운 입술을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사랑의 느낌이 입술을 통해 가슴으로 들어왔고 머릿속으로 왔다. 고등학교 때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각인된 바로 그 장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가 스칼렛 오하라에게 청혼하는 순간이 떠올랐다. 내가 꿈꾸었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불같은 사랑의 고백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리는 전주곡이 되었다. 지중해 여행 이후로 우리는 찰떡처럼 붙어 지냈다. 그의 앞에 서게 되면 오랜 세월동안 꼭꼭 숨어있던 나의 여성적인 기질이 나타났다. 그를 위하여 요리 하는 기쁨과 퇴근을 기다리는 애타는 심정도 겪어보았다. 그의 월급을 받아보는 행복한 순간도 맛보았다. 테리우스는 그의 연기처럼 늘 새로웠다. 사랑하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을 적절하게 숨기지 않고 표현할 줄 알았고 나의 자리와 공간을 정확하게 지켜주었다. 그의 사랑은 나에게 끝없는 시상과 그림의 창작활동으로 표출되었다. 나는 동물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표현하는 화가가 되었고, 그것을 아름다운 언어로 옮기는 시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의 작품을 보고 여성특유의 섬세함과 존재의 편안함을 준다고 한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의 주인공인 신부가 입장하겠습니다.”
다시 소전의 멘트가 들려온다. 일어나려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 한 모퉁이가 저려온다. 이런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주었어야 하는데,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갔어야 하는데, 아마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야. 하고 조금 위안을 삼아본다. 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슴이 다시 뛰어온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에 박자를 맞추면서 천천히 걸음을 떼어본다. 멀리서 테리우스가 환하게 손을 흔들며 웃고 있다. 그 빛 속에서 하객들의 모습이 하나둘 씩 들어온다.

원더플 은남, 브라보 은남, 오마이 갓..., 나의 외국인 커뮤니티 친구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다양한 피부색만큼이나 그들의 환호성도 각양각색이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6년 전 뉴욕에 처음으로 왔을 때부터 친구처럼 대해주었고, 타향살이의 설움을 같이 나눈 동지이자 형제였다. 아프리카에서 온 통고, 멀리 프랑스에서 온 소피, 머리 러시아에서 온 쏘냐, 그들은 같이 등산과 하이킹, 요트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고 예술과 철학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끊임없는 창작의 에너지를 전달해 주었고, 날카로운 조언으로 나의 작품세계를 넓혀 주었다. 그들과 같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얼마간의 작품이 모이면 공동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우리는 때론 스승과 제자처럼 배웠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다양한 형태로 공유하였다. 낯선 사람들에게도 개방되어 누구나 편하게 쉬었다 가는 쉼터가 되었다. 여기를 거쳐 간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팬이 되었다.

앞쪽 좌석에 산요에서 같이 일했던 사장님들의 모습도 보인다. 10년 전 내가 한국 지사에 근무할 때에 추진되었던 GHP 부품공장 건설 건이 끝내 무산되었다. 더 이상 내가 있을 필요가 없었다. 옛날에 그러했듯이 다시 사표를 내었다. 산요에서는 나를 놓치는 것이 싫었는지 다시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지사의 컨설턴트를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일 년에 절반 정도, 전 세계 가고 싶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근무자들에게 필요한 절한 조언과 교육이 주된 업무였다.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첫 여행지를 뉴욕으로 정하였다. 새로운 출발이었지만, 비장한 와세다 대학을 준비할 때의 비장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든 과정이 하나의 놀이요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공부하였고, 심리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컨설턴트의 일도 점점 자리를 잡아 갔다. 심리학의 인문학적인 요소와 공조 설에 대한 지식 그리고 스튜어디스를 비롯한 많은 경험들은 나를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올려놓았다. 특히 산요에서 배운 실전 협상은 당사자의 필요한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따뜻하면서도 노련한 협상가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나의 고객들은 꾸준히 늘어갔다. 내가 거래하는 회사의 파트너들에게 까지 소문이 나서 나는 귀한 몸이 되었다. 그 동안 투자를 해놓은 금융상품으로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상담의 대가는 모두 자선사업에 사용하였다. 그냥 돈만 주는 자선사업이 아니라, 그들의 공동체에 활력을 주는 활동을 하였다. 멸종동물 보호에서부터 자연을 아끼는 단체에도 아낌없는 성금을 보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마주치는 나의 도움이 필요한 곳에 상담한 기업들과 묶어주었다. 그들로 하여금 학교와 병원을 세우게 하였고, 일자리를 만들어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다. 우수한 학생들에게 유학의 기회를 주었다. 나의 작은 노력과 관심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는 그들의 환한 표정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주례석에 앉아계신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선생님은 여전히 푸른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이렇게 좋은 날에 잔상이 많이 떠오르는 것 일까. 내가 조그마한 성공에서 머무르고 자만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나에게 새로운 빛을 주셨다.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변화의 단초를 주셨다.

갑자기 눈물이 솟아오른다. 주책없게 이렇게 좋은 날에 눈물이라니. 눈앞이 어른거린다. 선생님의 말씀이 귓가에 윙윙거린다. 그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모든 기억의 파편들이 여기저기서 날아오기 시작한다. 나를 어렵게 했고 내가 힘들게 했던 사람들, 내가 이루고자 했던 일들, 나를 가로막았던 것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꼭 달라붙어 있던 어두운 형체들이 뜯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사라지면서 나의 뽀얀 속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또 다른 시작이다. 다시 충만하게 채울 것이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가는 길이 아니다. 나의 영원한 반쪽 테리우스와 함께 가는 것이다. 감사의 마음이 샘처럼 솟아오른다. 선생님의 주례가 끝이 나자 온 세상이 정지한 것 같은 정적이 찾아온다. 나의 마음이 속삭인다. 이제 다시 나아가라고. 행진, 앞으로, 행진 세상 속으로 뒤를 돌아보니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함성과 환호들. 음악소리가 들리고 걸음을 걸어본다.

두세 걸음을 걷다보니 우리 두 사람의 걸음걸이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니체의 말대로 어떤 사람이 정말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대지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춰진다고 하였다. 바로 이런 기분이다. 걷는 것 같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 둘은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춤추는 걸음으로 카펫 위를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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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0.17 05:06:14 *.48.38.252
우울할 때마다 들여다 봐야겠어요.ㅎㅎ 어쩜 영훈씨같은 분이 이런 섬세한 글을 다 쓸수 있을까..감동 먹을려고 함. 그 날 발표할 때 거기 왜 그리 덥던지..웃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표정관리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는 거..암튼 넘 재밌습니다. 영훈씨의 다른 면을 발견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구요... 그러니까 어쨌거나 빨리 이 나라를 떠야 뭔가 생겨도 생기겠네요..ㅎㅎ 자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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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2007.10.17 07:39:04 *.99.242.60
잘 보아주셨다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막상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막 써지는데,
정확성과 뒷감당이 조금 걱정이 되고
본인의 얘기를 쓰려고 하니 실현가능성과 너무나 먼 미래가
어렵게 하더군요.
자기의 꿈을 다른 사람이 써주는 것도
이 두가지 장점과 단점이 조합가 되어
아주 괜찮은 형태가 될 것 같아요
결혼식 사회자는 저라는 것..
미리 못박아 둠..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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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17 20:29:50 *.128.229.81
miss Lee 얼굴 엄청 빨게 졌더라. 복분자 3잔 먹은 줄 알았다. 그러니까 테리하고 제이미가 같은 사람이지 ? 두 사람 아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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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0.18 21:46:06 *.48.38.252
선상님, 참말로 와이리 짖굳으신다여..ㅋㅋ 쫌 봐주십사 부탁.....에고 영훈씨. 장군의 몸을 해가지고 요따구 야리꾸리한 말을 할 줄 뉘가 알았으랴. 암튼 난 빨리 이 나라를 떠야혀..근데 연구원은 수료하고 가더라도 가야겄지유? 맴같아선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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