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2007년 10월 21일 14시 12분 등록
나는 스스로 자신에 대해 상당히 깐깐하고 보수적인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 자유와 일탈을 원망하는 것 자체가 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튀어 나오는 다른 모습일수도 있음이다. 사실 나는 털털한 척 하면서도 사람을 만나면 상대에게 격이 있는가 없는 가를 곧잘 따지곤 한다. 지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미리 설정해 놓곤 저는 그렇지 못하면서 상대에게 그것을 바라는 이중적인 부분도 있다. 또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누구보다 혐오하면서 상대에게만 요구하는 몹쓸 버릇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글을 쓰면서도 잘난 것만 보여주려 하는 속성 또한 걸치고 있다. 남의 글을 읽고도 글 자체에 점수를 후하게 주는 편이 아니다. 그의 생활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하면 그저 그런 글은 가차없이 무시해 버리게 된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위에 열거한 대상에 모두 포함되는 나는 그래서 절망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들린다. 삶 또한 꿰뚫어 보는 역량만큼 그 통찰에서 온다. 한정된 물통에 아무리 많은 물을 쏟아 부어도 다 흘러 넘치기 마련이다. 절대로 주워 담을 수가 없다.
글이 꼭 그러하다. 쓴다는 행위는 자판을 두들기면 무언가 자음과 모음의 조합으로 한 페이지 두 페이지라도 얼마든지 써 내려갈 수 있다. 그 안에 전달되어 옴이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본인이 울컹 거리는 마음 없이 쓴 글이라면 금방 들통나고 만다. 오히려 그간의 이미지마저 구기는 게 글이다. 말이야 사람의 기억에 의존하니 되새김이 안되지만 글은 그렇지가 않다. 똑 같은 자음과 모음의 집합이라도 저마다 그 글의 모양새가 다른 것이 그 특징일 것이다.

몇 달 동안인가를 습작을 하면서 느낀 것은 내 그릇의 비좁음이다. 아무리 보약을 먹어도 간에서 흡수가 안되면 헛돈만 낭비하는 것처럼 그릇이 작으니 그저 흘러 넘칠 뿐이고 밑천이라는 게 뻔해 바닥난 지 오래이다. 그저 내 손가락의 작은 상처 때문에 아프다고 징징대는 외에 타인의 가슴에는 들어가는 흉내만 내다보니 신변잡기의 글에 머물고 있다.
또한 때로는 교활한 머리로 농담 따위를 얼추 뭉뚱그려 읽는 이에게 양해를 구하는 허접한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니 저의 심금을 울리지도 못하며 읽는 이의 가슴에도 다가가지 못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많은 사람이 말하는 삶의 방식,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나 스스로의 주관이 있다면 힘을 받아 잘 쓸 수도 있음인데 그렇지가 못하다 보니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뒤로 숨는 경우가 왕왕 있다. 매사에 그런가 보다 하는 황희 정승 같은 태도는 글 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그저 원만하고 무난한 표현으로 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남의 글을 읽어도 주체성이 없는 글은 훅하고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자신도 알지 못하는 모호한 표현이나 돌려쓰기는 간혹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주체성이 없는 이유로는 성격도 있겠지만 무지함이 더 클 것이다.

그럼에도 가끔 글이 교만해져 있다.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의 무지를 감추기 위한 역겨운 잘난 척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갖지 못하니 저 스스로 도취하고자 자가 발전 식의 못난 글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런 글은 금방 들통이 난다. 사실 그런 글을 쓸 때는 어떤 면에서는 애정의 결핍 상태라는 사인을 보낼 때일지도 모른다. 너그러운 사람은 아량으로 넘어가 주겠지만 날카로운 사람에겐 이내 한 줌의 조롱거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딜레마를 넘어설 수 있을까?

많이 읽고 흡수하고 공부하는 것, 열심히 써 보는 것, 삶을 사랑하는 것, 이 이상의 무엇이 있겠는가? 수많은 선전을 하지만 결국 살 빼기의 비법이 운동과 소식이듯 글 쓰기에도 별다른 비법은 없을 것이다. 좋은 책을 많이 읽고 깨우치고 열심히 그 느낌을 적어보는 것이다. 사실 나는 책을 읽는 것은 참으로 재미가 있다. 독서의 폭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주체성도 확장되어가는 느낌을 준다. 아직은 점으로만 찍혀 있지만 이런 놀이를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선으로 연결될 것을 믿고 있다. 나는 이제부터 이런 행위를 “놀이”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과연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나는 어떤 글에 감동을 받는가?
감히 말하자면 “통찰과 해학이 어우러져 있으면서 기품 있는 글”이다. 사실 누구나가 원하는 글일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마음만 앞서고 자판을 마주 대하면 시간과 급한 마음에 항상 딜레마가 발생한다. 전혀 곰삭은 맛이 나질 않는다. 할 수없이 그래서 글을 쓸 때 요령을 발휘하기도 하고 마감시간이 가져다 주는 초능력을 만끽하기도 한다. 이것도 훈련과정 중의 하나라고 애써 자위하지만 여전히 갑갑한 것은 사실이다.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 계속 고정관념화되는 생각들을 깨 부수고 흐르는 물줄기를 만드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관념만 가지고는 다람쥐 쳇바퀴이거나 오히려 더 후퇴되기 십상이다
나는 과연 나를 만족시키는 삶을 살고 있는가? 대답은 글쎄요 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글 쓰기 또한 만족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미 답은 나와있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삶, 실천하는 삶이다. 스스로 감동하는 삶에서 감동적인 글이 나올 것이다.

“통찰과 해학이 어우러져 있으면서 감동적인 글”.
언젠가 그런 좋은 글을 써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공부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1년간의 훈련은 게으름뱅이에게 유익한 과정이 될 것이다.
IP *.48.38.252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12 [29] 놀이로 이끄는 사람 vs. 놀이의 파괴자 교정 한정화 2007.10.22 2590
411 [칼럼 29] 그녀, 연애를 시작하다 [6] 海瀞 오윤 2007.10.22 2644
410 [칼럼026] 가는 곳마다 모임이 생기는 남자 [2] 香山 신종윤 2007.10.22 2835
409 (29) 놀고들 있네! [3] 時田 김도윤 2007.10.22 2446
408 [칼럼 29] 딱지 따먹기 [1] 余海 송창용 2007.10.22 4088
407 [칼럼29]거위의 꿈. [5] 素田최영훈 2007.10.22 2393
406 의식주 문제를 놀이로 만드는 법 [2] 현운 이희석 2007.10.22 2660
405 네 안의 너와 놀아봐. [5] 호정 2007.10.22 2236
404 연구원 놀이터에서 춤을 추다 [4] 素賢소현 2007.10.22 2126
403 혼자놀기-신이 숨겨둔 장난감 찾기놀이 우제 2007.10.21 3031
402 [29] 노모와 땡중 사이, 그녀의 놀이감 [2] 써니 2007.10.21 2775
» (28) 글 쓰기 "놀이"의 딜레마 香仁 이은남 2007.10.21 2317
400 (28) 이상한 나라의 소라 (Sora in Wonderland) file [6] 時田 김도윤 2007.10.16 3055
399 니체를 사랑하는 사람들 [3] 우제 2007.10.16 2430
398 [28-2] 꿈꾸는 초록나무의 운명애Amor fati [2] 써니 2007.10.16 2384
397 [28-1] 꿈꾸는 초록나무의 성장기 [3] 써니 2007.10.16 2340
396 [칼럼28]향기로운 결혼식 [4] 素田최영훈 2007.10.16 2123
395 윤, 파리에서 어느 날. [8] 호정 2007.10.16 2450
394 [칼럼 28] 오늘도 흐르는 마그마 [5] 여해 송창용 2007.10.15 2146
393 [칼럼025] 선생님, 가지 마세요. [5] 香山 신종윤 2007.10.15 2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