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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09시 28분 등록


이번 주 토요일(10월 20일), '사랑나눔 봉사단'이란 이름으로 11월에 있을 콘서트를 위한 사전 행사를 진행했다. 고등학생들과 함께 아직 연탄을 사용하는 달동네를 찾아가 연탄과 라면을 기부하고 배달해주는 행사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두툼한 겨울 옷을 꺼내 입고 회사를 향했다. 생수와 봉사 활동에 참여할 학생들의 선물을 버스에 싣고, 학교에 들러 학생들을 태우고 중계동으로 출발한다. 차에서 도시락을 먹고, 깜박 졸다 눈을 떠보니 어느새 도착이다.

서울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 놀란 것도 잠시, 모두들 이것 저것 챙기고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학생들은 모두 옷을 갈아입고, 연탄을 나를 채비를 한다. 진행 스탭들은 물품을 챙기고, 학생들 조를 나누고, 방송국에서는 '거짓말'이란 노래로 요즘 제법 유명하다는 B 모 그룹과 함께 촬영 준비를 하고 있다.



손으로 직접 연탄을 만들어보는 행사와 간단한 증정식과 함께 오늘의 공식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연탄을 처음 보는 학생들도 많다. 드디어 연탄 배달이 시작되고, 새까만 연탄을 수레로, 지게로, 손으로 언덕 위로 옮기느라 모두들 정신 없다. 나는 언덕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오르내리며 무겁다고 투정하는 학생들의 지게에서 연탄을 덜어주고, 수레를 밀어주며 잠시 봉사 활동을 함께 한 뒤, 행사 사진을 찍기 위해 촬영이 진행되는 곳을 향했다.

촬영 내용은 B 모 그룹이 어렵게 지내는 이웃들을 찾아가 연탄과 라면을 배달해준다는 따뜻하지만 조금은 뻔한 내용으로, 이를 편집해 2주 뒤에 있을 콘서트 생방송 중간에 내보낼 예정이다. 그들이 연탄을 나르고, 라면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것을 지켜 보며 같이 웃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달동네에 무슨 차가 이렇게 많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집들은 몹시 낡은 반면에, 차는 모두 멀쩡한 새 차이다.



촬영이 거의 끝나갈 무렵, '동네 사랑방'인 듯한 어느 집으로 들어가던 아주머니의 시니컬한 말 한마디가 내 귀에 꽂혔다. "놀고들 있네. 연탄을 줄 거면 조용히 주고 가지. 방송은 무슨…. 재개발 시작되면 여기 있는 연탄을 다 때지도 못할 텐데."

그제서야 조금 이상하던 느낌의 실마리가 차르르, 풀려나간다. 이 동네는 저 앞에 보이는 아파트 단지 들처럼 곧 재개발이 될 테고, 그 때문에 이곳엔 실제로 사는 사람들보다는, 재개발 뒤의 차익을 노리고 집을 사 둔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 물론 이 연탄과 라면을 받는 사람들은 이 곳에 세들어 사는 서민들일지도 모르지만, 알고 보면 참, 눈가리고 아웅이다.

여기에서 나는 기업의 일회적인 사회 봉사 활동이나, 방송을 위한 상업적인 촬영이나, 한 컷의 신문 기사를 위해서 행사를 기획한 홍보 대행사의 노력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 또한 엄연히 그 속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어딘가 불편했던 나의 마음을 글을 통해 털어놓는 것 뿐이다.

'호모 루덴스'에서 호이징하는 이런 탄식을 내뱉었다. "오늘날의 문명은 이미 놀이를 잃었다. 놀이가 아직 남아 있는 듯한 부분에서도 그것은 거짓된 놀이일 뿐이다. ... 오늘날의 문명은 거짓되게 놀기 때문에 어디서 놀이가 끝나고 어디서 놀이가 아닌 것이 시작되는지를 말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의 이 행사는 한 편의 역할극 같기도 하다. 학생들은 얼굴과 손을 연탄 가루로 새까맣게 칠하고는 나름대로 열심히, 혹은 농땡이를 치며, 친구들과 히히덕거리며, 낑낑대며 연탄을 나르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진행 요원들이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지시하고 있고, 또, 누군가는 홍보용 기사에 쓸 스틸컷을 촬영하고 있고, 가수들은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땀 흘리며 연기하고 있고, 연출자와 촬영 기사 또한 몇 분 동안의 방송을 위해 진지하게 촬영에 임하고 있다.




갑자기 이 놀이 속에서 맡은 역할에 시들해진 나는 조금 미안하지만, 코끝이 빨개진 아이들을 뒤로 한 채 골목길을 잠시 걸었다. 그러다 어느 낡은 지붕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 녀석도 나를 바라보고는 움직임을 멈춘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동안 서 있었다.

10월의 어느 추운 토요일 오후, 곧 재개발될 서울의 어느 달동네에서, 분홍빛 코스모스는 하늘거리고, 나는 누런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다. 누가 뭐라 해도, 고양이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백 퍼센트 진지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가을 햇살에 취한 고양이는 어느새 졸고 있다. 천하 태평한 고양이의 나른한 잠꼬대가 차가운 가을 바람과 함께 내 귀를 스친다.

"참, 놀고들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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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10.22 11:47:36 *.227.22.57
아~ 도윤아. 좋다.

놀고들 있는 그 틈에 나도 끼어있다는 사실이 조금 뜨끔하기도 하지만 말이야. 난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3시가 되서야 겨우 책을 다 읽었다. 그랬으니 글은 어찌 썼는지 기억도 잘 없다. 갈수록 엉망이다. 북리뷰팀 과제도 해야 하는데...

담담한, 깔끔한, 시원한, 따뜻한 네 칼럼에 난 괜히 스스로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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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10.22 12:29:21 *.244.218.10
역시.
문제제기에 뒷마무리까지 깔끔.
... 그리고 빠지지 않는 시각장치. ^^*

나 역시 놀고들 있는 그 일당이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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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윤
2007.10.22 15:14:43 *.249.162.56
그랬다면 다행입니다... ^^ 내심 제목이 불손하여 걱정했는데...

종윤이형, 엉망 아니니깐 걱정하지 마세요! 어찌 그 많은 일들을 다 하셨는지 감탄할 따름입니다..

민선 누나, 많이 밝아진 듯 해서 보기 좋으네~ (글에선 말 놓고, 만나선 말 높이고, 좀 어색하니... 다음에는 그냥 말 놓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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