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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11시 35분 등록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 별명이 하나 붙었다. 아내가 붙여준 것도 같고, 친구 중에 하나가 그리 부르기 시작한 것도 같다. 그 태생이 불분명하고 내 입으로 그 별명을 퍼트린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끔씩 나를 그리 부르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영 틀린 별명은 아닌 듯도 하다. 그 별명이 무언고 하니, 바로 '가는 곳마다 모임이 생기는 남자'다.

연구원 지원서에 자신의 장점을 쓰라는 부분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에 '오지랖이 넓다'라고 써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장점이 무어냐?'고 물어, 그 답을 정리해서 지원서에 썼는데 쓰기 전에는 이게 무슨 장점인가 싶어 이리저리 꽤나 망설였던 부분이다. 그런데도 턱 하니 장점이라고 적어낸 걸 보면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리 싫지는 않은 부분인 모양이다.

이리저리 생긴 모임이 참으로 많기도 했다. 영어 학원에 나가면 영어 공부 모임이 생겼고, 동료들과 술자리를 한번 하면 술모임이 생겼다.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들과도 이런저런 핑계를 빌어 모임을 만들었다. 그런데 오지랖이 넓고 아는 사람도 많다고 큰소리쳤지만 그 중에 일부는 이제 잘 기억도 못하는 걸로 봐선 만들기만 했지 유지를 썩 잘하지는 못했던 것도 같다.

그렇게 만들어진 모임 중에서도 유난히 사람들이 놀라는 모임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신혼 여행 동기 모임'이다. 정확한 명칭이 없어서 이렇게 그냥 이름을 붙이긴 했지만 신혼 여행이 무슨 기수가 있는 학교도 아니고 보면 처음 듣는 사람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을 듯도 싶다. '신혼 여행 동기 모임'은 신혼 여행가서 만난 부부들과 만든 친목 모임이다. 2003년 10월 18일에 결혼해서 호주 시드니로 신혼 여행을 갔다가 만난 다섯 커플이 모임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두 부부는 서울에 살고, 한 부부는 천안에 살고, 한 부부는 포천에 살고, 또 한 부부는 저~기 부산에 살고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얼굴 보기도 쉽지 않을 법한데, 우리는 4년째 해마다 두어 번씩 자리를 만들고 있다. 한 번은 위 쪽에서 모이고, 또 한 번은 아래 쪽에서 모이고 하는 식이다. 같은 서울 하늘을 이고 사는 친구들도 일 년에 두세 번 만나기가 힘든 것을 보면 내가 생각해도 흔한 인연, 흔한 모임은 아니다.

지난 주말에 다섯 가족이 부산에서 모이기로 약속이 잡혔다. 다섯 부부의 결혼 기념일에 맞춰 함께 축하하는 조금은 특별한 의미로 마련된 만남이었다. 우리 부부도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부산으로 차를 달렸다. 다섯 시간이 넘는 먼 여행 길이었지만 모처럼 사람들을 만난다는 반가운 마음이 긴 시간을 가벼운 설렘으로 채웠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도착한 숙소에 차를 세워놓고 광안리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장소에서는 뜻밖의 장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적인 규모의 '광안리 불꽃축제'가 하필이면 우리가 만나기로 한 바로 그 장소, 그 시간에 계획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하철에 내려서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차량이 통제되고 있었던 탓에 지하철을 타고 근처까지 가서 다시 걸어가는 것이 약속장소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러시아워의 만원 전철을 떠올리게 하는 무지막지한 인파 속에서 아이를 안고 가방을 메고 찬 바람을 가르며 걷고 또 걸었다. 평소 같으면 십여 분이면 되었을 거리를 삼십 분이 넘게 걸려 더듬더듬 걸은 끝에 겨우 목적지에 닿았다. 숨은 턱까지 차 올랐고 온몸은 찬바람 가운데서도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머리 속에는 '하필이면 불꽃축제가 오늘일까'하는 불만이 맴돌았다.

그 순간이었다. 멀리 만나기로 한 일행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하늘로 불꽃이 쏘아져 올랐다. 놀라운 장관이 머리 위로 펼쳐졌다. 불편함을 향해 쌓였던 불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탄성이 가득 자리했다. 혼이 빠질 듯이 아름다운 불꽃과 굉음의 한가운데에서 다섯 부부가 만났다. 불꽃놀이는 그렇게 다섯 부부의 결혼 기념일을 축하해주었다. 그 화려한 축하의 세례 속에서 다섯 부부의 행복한 밤이 깊어갔다.

행복한 주말 나들이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월요일 아침, 회사로 향하는 길에는 여전히 아름다웠던 불꽃놀이의 장관과 행복한 다섯 부부의 수다가 함께 했다. 놀이와 일상은 묘하게 섞여서 하나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일상의 곳곳에 놀이를 위한 여백을 준비하고, 놀이의 끝에 다시 돌아올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만드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일상과 놀이는 결국 둘인 듯 하나의 모습으로 서로의 존재를 소중히 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놀이가 오래된 놀이의 재미를 빛 바래게 하지만 않는다면, '가는 곳마다 모임이 생기는 남자'의 행복한 놀이는 당분간 일상과 멀지 않은 곳에서 계속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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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칼럼도 아니고 일기도 아니여~ '같기도'가 생각나네요. 억지로라도 이번 주의 주제와 연결을 시켜볼까 하다가 마감과 졸음에 쫓겨 결국 포기했습니다. 다음주에 다시 힘내겠습니다.
IP *.22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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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윤
2007.10.22 11:37:19 *.227.22.57
너무 쫓기듯이 다녀온 부산여행이라 초아선생님께 전화 연락도 드리지 못하고 그냥 올라온것이 계속 맘에 걸리네요. 선생님~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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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10.22 12:23:48 *.244.218.10
좋네.. 가는 곳마다 모임이 생긴다니... ^^
난 쉽지 않은 인연들 그냥 흘려보내는 거 같아 아쉬운데...

재밌네요.. 신혼 여행 동기 모임...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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