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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2일 15시 58분 등록
18번.
모임에 가면 늘 부르는 노래,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대비해서 준비해 두는 노래.
이것마저 준비하지 않았다면 춤이라도 춰야 한다. 그러나, 노래 못하는 사람이 춤을 감히 출 것인가.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는 상황이 아닌, 춤을 추고 싶을 때 추는 것이 아닌 자발성이 없는 놀이에서는 18번이 없다는 것은 놀이에 낄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노래를 하나씩 챙겨서 모임에 가게 된 것은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무슨 일을 해도 가장 먼저 지목되고, 무엇인가를 해서 눈에 띄는 것도 있는가 하면, 하지 않아도 눈에 띄는 것이었다. 신입생. 그것은 모든 이벤트에 앞서 불려지는 이유였다.
지목되는 것은 같이 즐기는 것이라기 보다는 재롱을 떠는 것에 가까웠다고 할까. 그렇게 한명두명 신입생이 자신의 장끼를 뽐내는 자리에 억지로 떠밀려 나가 노래하다보면 어느 새 모임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몇 곡의 노래를 함께 부르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두들 신이나서 박수를 쳐가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처음 몇 명의 노래는 경운기의 시동거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발동이 걸리기 전에 힘차게 돌려주는 것과 같은.

물론 이런 생각이 신입생 초반부터 들었던 것은 아니다.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아는 것인가 보다. 몇 번을 같이 놀다 보니 노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받아들일 때쯤 되었을 때, 그때부터는 모임에 대비해서 노래를 준비한다. 평소에 음악을 잘 듣지 않는 편이라 아는 노래는 없지만, 일부러라도 부르기 쉽고 가사도 무난한 노래 하나 연습해서 챙기고, 억지로 떠밀릴 것에 대비해서 신나는 노래 가사도 하나 외워둔다.

몇 년전 이맘 때에 선배들이랑 같이 갔던 소풍이 생각난다. 소풍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돌아오는 관광버스 안에서 박수를 쳐가며 노래는 불렀다. 아버지께서 자주 듣던 남진의 노래다. 그리고 몇 곡의 트로트가 이어졌다. 관광버스의 좁은 통로 안에서 춤판이 벌어졌다. 춤을 추던 선배 하나가 나와서 추라고 손을 잡아 끈다. 박수만 치고 있던 나는 빤히 쳐다본다. 이건 미칠 노릇이다. 흥도 나지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열심히 손을 잡아 빼며, 그때 불쑥 한마디,
"난 춤추고 싶지 않은데요."
내 손을 잡아 끌었던 선배의 말,
"누군 추고 싶어서 추냐?"
그럼 대체 추고 싶지도 안으면서 왜 추는 건지...... ‘난 추고 싶지 않은데요.’라는 발언도 위험한 발언이지만, ‘누군 추고 싶어서 추냐?’도 무서운 발언이다. 여기에다 대고 ‘그럼 왜 추는데요?’ 했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그것은 [호모 루덴스]에서 호이징하가 놀이에서 가장 위험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한 ‘놀이의 파괴자’나 할만한 발언이다. 놀이 자체를 중지하게 만드는 의문을 품게 하는 발언. 놀이판을 만든 사람을 무시하는 발언.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발언.

여하튼 얼굴 바짝 들이대고 말하던 선배의 표정이 이상하기도 하고, 그 선배의 말도 기막히기도 해서 강압에 못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선다. 노래는 계속 이어지고, 한번도 춰보지 않은 춤들을 따라하며 이리저리 몸을 놀려댄다.

‘♩♪♬
나의 꿈 나의 모든 것
어여쁜 꽃 한송이
모진 바람 불어와서
내 님을 데려갔나.
너와 나의 그 마음
영원한 약속인데
...
.....
♩♪♬’

그렇게 흥겨워 ‘보이는 놀이’가 억지로 시작되어서는 진짜로 흥겨워질 때까지, 더 이상 지쳐서 그만 놀고 싶을 때까지 논다.

날씨 선선해지고, 소풍철이다. 관광버스는 신이나서 흔들면서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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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의 마지막 요소로 든 ‘재미’라는 요소는 어떠한 분석이나 논리적인 해석도 거부한다.”
-[호모 루덴스, 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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