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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6일 23시 56분 등록

지난번 여행 이후 천하의 야행성이 아침형 인간으로 바뀌었다. 평생 늘어지게 늦잠 자는 것을 체질이라 믿고 살아 온 인간인데 어쩐 일일까? 알람 시계에 의존 안하고 7시 전에 눈을 뜬다는 것은 나로선 획기적인 사건이다. 혹시 이것이 지금보다 훨씬 더 어르신의 세계로 접어드는 증상은 아닌지 혼자 심각하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되니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 그 중에 제일 멋진 것은 떠 오르는 태양을 매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대모산 위로 머리를 내미는 해를 온 몸으로 맞이한다. 그 동안은 불면증이랍시고 새벽에야 자느라 내 방이 이렇게 볕이 잘 드는지 몰랐었다. 좌향이 동동남이다. 이렇게 찬란하고 멋진 아침을 나는 오랫동안 참 잘도 놓치고 있었다.

일단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하루가 유용하게 쓰인다. 머리도 맑고 집중도 잘 된다. 고양이와 더불어 아침 햇살을 온 몸으로 즐기다 보면 삶의 생동감도 어느새 곁에 와 있는 듯하다. 이게 웬 일인가? 혼자 있는 시간이 이렇게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의 인생 무섭지 않을 것 같다. 정말 계속 이렇게 쭉 행복할지 사뭇 궁금하고 두근거리기도 한다. 평상심이란 손님, 잘 모셔야 될텐데..

그러나 몇 가지 곤란한 점도 없지 않다. 일단 저녁 11시만 되면 졸려서 견딜 수가 없다. 테레비 시청도 힘들고 밤새 책을 읽는 고요한 순간도 반납했다. 그간의 불면증이 없어지고 혼자 술 마시며 궁상 떠는 시간이 사라진 것 까지는 좋은 데 그러다 보니 감수성도 실종되버린 느낌이 든다. 그런데 마침 이런 와중에 시를 읽고 느낌을 써야 한다. 당연히 잘 안 된다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린다.

한 때 잠이 안 온다고 한 잔 두 잔 마시던 술기운에 어느 날인가 끄적거리던 글이 있는데 지금 보니 좀 한심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옮겨본다. 이런 아침도 있었다.

[아침 도망자]

아침이 쳐들어온다.
불 켜놓은 한 줄 조명이 무색하다.
밤새 숨어 있던 방
비집고 들어오는 동쪽 창문에
날개 옷 입은 아이
화들짝 놀라
떼쓰기 시작한다.

더 이상 막을 틈 없는 커튼
하는 수 없어
맥주 캔을 딴다.

적막 대신
차 소리도 쳐들어온다.
고요함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한 캔을 딴다.
전화벨에 소스라친다.
이제 다들 깨어났구나.
씩씩한 목소리
네, 네, 좋은 아침!...

숨어있긴 다 틀렸다.
다시 맥주 캔을 딴다.

이렇다고 매일 마신 건 아니다. 술꾼으로 오해할까 걱정되지만 가끔 쓸쓸해지면 그렇게 한 잔씩 마시고 조용히 보내기도 했다. 혼자 사는 이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하게 잘 산다면 그것도 지나친 변명이 아니겠는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요즘은 이런 시간이 뜸해졌음을 촉복으로 여긴다. 가을에 유난히 우울해지는 원인 중 하나가 자외선 양 부족이라고 한다. 아침부터 일조량이 많아지니 그 동안 매년 사시사철 찾아오던 그것이 잠시 모습을 감춘 듯하다. 가을엔 정말 햇볕을 많이 쐬어야겠다.

햇볕 덕택에 편안하고 너그러워졌지만 데 마음이 편하니 좋다는 시를 읽어도 그랬구나..하는 정도로 절절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모처럼 시에 관한 책을 읽었으니 한 수 써보려고 노력을 했음에도 앞의 우울한 시와는 달리 정반대의 시가 써지고 말았다.

[햇볕]

햇볕아, 반갑다.
도대체 언제부터 꼬박꼬박 이 시간에 올라온 거니?
너를 늦게 아는 척 해서 미안.
근데 햇볕아. 오늘은 몇 시까지 거기 있어줄래?
나 오늘 빨래할까 하는데 뽀송뽀송 말려줄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음미하다가 이런 이런…
슬그머니 넘어간 3년 먼지가 여기저기 눈처럼 쌓여 있네.
저걸 닦어? 말어? 잠깐 폼만 잡는 고민 중..
나만 눈 질끔 감으면 아무 상관 없다구? 그려그려..

컴 앞에 앉다가 지정석에 놓여있는 거울을 잠시 바라본다..
허걱. 새치에 주름…이건 어쩐다..
거울 앞의 블라인드를 조절하고 자연 조명을 만든다.
다시 조명발로 돌아간다.

어느 덧 세탁기가 다 됐다고 종알종알..
알았어, 알았다구...종종 걸음으로 걸어가 세탁물을 넌다.


시 아니라고? 내가봐도 시 아니다. 그거 제대로 알면 못쓰지. 그런데 참으로 나는 변덕스런 인간이다. 엊그제까지 지지리 궁상을 떨다가 어째 오늘은 볼일 다보고 나온 사람처럼 이리도 경망스런 시가 써지는 것일까?

내게는 시를 쓰기 위해서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① 아침에도 시를 쓸 수 있는 감성을 키운다.
② 아니면 다시 야행성으로 돌아간다.
현재 답은 ①번으로 앞으로도 굳세게 밀고 나가련다.

아침형 인간이 되기 얼마 전 인사동의 재즈 스토리라는 카페에 간 적이 있다. 노래를 듣기도 하고 싱어와 가볍게 한 잔 하기도 했는데 느낌이 아주 좋아 후다닥 쓴 시가 있다. 어쩌면 슬픈 노래나 짙은 호소력의 목소리에는 영원히 면역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 날이다. 무딘 감정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나를 놀라게 했던 그 날도 분명 새벽에 썼다.

[우리는 모두 똑 같은 열병을 앓았거나 앓고 있다.]

간판도 없이 허물어질 듯
담쟁이 넝쿨의 재즈 카페,
몇 가지 언어가 섞여있는
두런거림, 속닥임, 웃음 뒤로
숨겨놓은 흐느낌이 나를 부른다.

고개를 길게 빼서
진원지로 시선을 보낸다.
평범한 윗도리를 걸친
맑은 눈의 뮤지션
내 대신 주문을 외우고 있다.

봉인한 그 날부터
얼어 붙었던 마법의 호리병.
가슴팍 벌어진 싱어의 고음에서
연기가 새어 나온다.

레테의 강은 꿈이었을까.
그대 모습이 흔들거리며
당신 닮은 그림자가
호리병 밖으로 나오고 있다.

“뭐 어때요…”
“…………………………”
“그럼 또 어때요….”
“………………………..”
프로이드를 읽는 뮤지션.

한 마디 말
따뜻한 미소
심장을 덥히는 건배.

우리는 모두 똑 같은 열병을 앓았거나 앓고 있다.
IP *.48.38.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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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제
2007.10.28 21:46:08 *.86.177.103
난 11월의 적막한 고독을 한없이 좋아하지요. 차가운 달빛, 생각에 잠긴 별들, 환상입니다. 향인씨도 자외선 확 한 번 줄여보아요.색다른 멋을 느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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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칸
2007.10.29 09:36:55 *.92.16.25
누나 글을 오랫만에 읽는데 왜 이리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지. 시를 읽는 내 마음이 불경스럽다.ㅋ 시라는게 굳이 따지자면 자유로움 아니오. 형식과 내용이 뭐 그리 대수가 되리오. 근데 누나, 나는 맨 마지막 아침형 인간 전에 인사동 다녀온 시가 마음에 드오. 재즈같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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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0.30 09:22:58 *.48.42.248
우제님, 고독은 그거 우리같은 이들에는 매일 먹는 주식이랍니다. 그래 가끔 그렇지 않은 순간이 오면 맛난 외식먹는 기분이지요. 오늘도 따뜻한 햇볕이 가득, 가을에 열심히 저장해서 겨울에도 파 먹을랍니다.

병칸, 살살 웃지말거래이.누나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인겨. 마지막 거는 필(?) 받아서 일필휘지..
그나저나 재아엄마 이야기, 너무 재밌다. 여기저기서 비리 폭로..
허긴 넘칠 때도 됐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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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30 09:48:46 *.128.229.81
시가 쉽게 써지면 통쾌하다.
고양이 수염 위의 햇빛 같은 시가 좋다.
재채기 나오는구나. 에^치
기분이 썩 좋아진다
다시 코구멍 속 간지러운 재채기

향인의 실실 얼굴이 보이는 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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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인
2007.10.30 10:02:02 *.48.42.248
앗, 선생님과 동시접속의 감격스런 순간.
답글또한 감동의 실실로 그대로 전달되옵니다.ㅎㅎ

일전에 제가 어떤 시 하나를 읽고 한 사흘 우울증이 날라가 시가 있습니다. 쫌 옮기기가 그렇지만 만인의 행복을 위하여 이 한 몸 희생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럼 감상들 하시고..

[수문 양반 왕자지 ]

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이대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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