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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9일 11시 24분 등록
신동엽 전집 <敍事詩> 錦 江

제 12장 中...
...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몇 날 안가 또
딴 데로 떠나셔야 할 텐데
그런 일 해
뭘 하시렵니까』

『안될 말,
한울님께서 사람을 내신 건
농사지으라고 내신 건데
농사짓지 아니하고
생산하지 아니하면
양반보다 나을게 없지 아니한가,

그리고 우리가
혹 이 멍석 쓰지 못하고
이 채소와 과일 먹지 못하고
딴 데로 가게 된다 할지라도,

이 다음날 누군가가 이곳에
와, 멍석을 쓰고
채소와 과일을 따먹게 될게 아닌가?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한다면, 어디 가나 이 지상은
과일과 곡식,
꽃밭이 만발할 것이요
모든 農場은
모든 人類의 것,
모든 천지는 모든 백성의 것
될게 아닌가. 』 p171

이 시집 전체에서 가장 나와 배짱이 잘 맞는 구절이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런 생각을 해온 이후 아직까지 줄곧 이러한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여태까지 내가 단순하게 풀지 못한 과제이기도 하다. 먼저는 나의 책임의 소지가 크다. 한마디로 열심히 살아오지 못한 아쉬움이다. 나는 좀 더 잘 되었어야 했고 당당히 주장할 만큼의 힘 있는 위치에서 이러한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어야 했다. 세상은 아무나의 주장을 그것이 아무리 옳고 정당하다고 해서 들어주지는 않는다. 재능이 뛰어나거나 돈을 많이 쓰거나 권력 따위가 대동해 주어야 적은 입김도 크게 발휘한다. 세상사람 머무는 곳 그 어디에도 이 힘의 논리는 아직까지 여실히 통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때로 무섭고 겁이 난다. 이해 상관에 따라 언제든 변모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쩌면 나는 영원한 부적응자일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런 간단하고 바람직한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꿈 프로그램에 가서도 목격했고 몽골여행에서도 심심찮게 이런 장면들은 흔하게 일어났다. 이것 너무 심한 비판이 되는 걸까? 별 것 아니니 예로 들어 삼을 만 할 것이다.

어려서 나는 왜 불량식품이란 것이 존재하는 지 정말로 납득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그만큼 맑고 깨끗하며 순진한 것 이었다. 내가 어른이 되면 그런 어른들을 모두 다 잡아서 가두어두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벌을 내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면 더 이상은 나쁜 것, 그른 것, 해로운 것이 판을 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라고 보니 갈수록 태산이다. 하, 웬걸. 이런 주장을 펴다가 잘못하다가는 뼈도 못 추리는 것은 고사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 가서 싸늘한 시체로 버려져 있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꿈 프로그램에 가서는 자신이 자고 난 이불을 개지 않고서 몇 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 지근지근 밟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참 신기하고도 묘했다. 성년이고 사회 생활하는 사람인데 저러고도 마음이 편할까 의아해 하면서 초면에 이래라 저래라 말은 못하고 그때 내 시선이 곱지는 않았을 성 싶다. 후에 나눈 이야기지만 그 자신은 자신이 그러한 것이 전혀 거리낌이 없단다. 되레 내가 자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더라고 해서 솔직하게 말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다 지난 이야기여서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몽골에 가서는 물이 귀했다. 물통도 하나나 둘, 바가지도 몇 개 안되는데 우리 팀뿐만이 아니라 다른 팀들과 함께 세수하고 목욕하고 때때로 변기에까지 물을 퍼 날라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니 일정이 빠듯하게 정해진 우리로서는 속이 탈법하긴 하다. 그러나 사실 이럴 때야말로 질서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이성이 마비되고 만다.
먼저 하고 보는 것이 장땡이고, 내 볼일을 빨리 보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이럴 때는 규칙보다 야성적 기질이 필요하고 재빠른 판단이 앞서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바가지에 얼굴을 씻고 심지어 비누질까지 해댄다. 보다 못한 몽골 화장실담당 여장부가 급기야는 인상을 엄하게 하고 지켜 서서 한참을 눈을 부라리고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의 뚱한 표정이 하는 말인 즉은, 왜 양치질이나 물을 푸는 바가지로 세수 대야처럼 비누칠까지 해가면서 얼굴을 닦느냐는 항변이었다. 어떤 이는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집어넣고 헹구어댔으니 그녀의 주장이 백 번 천 번 옳고 맞는 말이겠다.

내 이빨 닦았다고 남의 입에 비누칠하나. 나 똥 쌌다고 바가지에 똥 싼 바지 넣고 빨아야 하느냐 그 말이다. 우리는 이런 하찮은 일을 거론하면 시끄럽네, 잔소리가 많네, 어쩌구 질색하면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 물론 지키면서 그러는 사람은 그나마 괜찮다. 요는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이럴 때 얼른 큰 목소리에 합세하며 무리를 형성해 이런 탈을 잡는 사람을 별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럴 때 나 같은 사람은 그야말로 찍~싸게 된다. 바른 말 했다간 본전도 못 찼을 테니 말이다.

우선 나부터가 내 생활의 작은 면을 개혁하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테지만, 공동생활에서 자기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개인주의적 이기적 사고와 내몰라 하는 식의 짓거리들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이 일상에서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발생한다. 정말 그러고 싶을까 상상이 안 되지만 실상 당사자들은 아무런 불편이 없고 더군다나 당연하며, 도리어 불편하게 왜 상관이냐는 식이고 보면, 기가 막힐 뿐 바른 일을 가지고도 대꾸조차 할 엄두도 못 낸다. 아니 너무 무서워서 할 말조차 못하고 만다. 차라리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것이 대수인 것이다. 양치를 하지 말든가 고양이 세수를 하던가 말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없었던 다른 사람은 무심코 양치질을 하려다 역한 비누냄새와 바가지에 끼인 땟자국을 보며 구역질이 날 것이 틀림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는 이러한 작은 일들이 큰일과도 결부되어 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반드시 그러하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것은 비단 도둑질에서만 그런 것 같지 않다. 작은 질서를 흩트리면서 결국 큰 질서를 무시하게 되고, 부당하게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와 겁이고 두려움이고 염체고 체면이고도 없이 무감각해지는 것이리라.
내 것이 소중한 것을 알면 남의 것을 함부로 못한다. 구태여 역지사지易地思之라서가 아니라 의당 그러한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전혀 다르게 딴 판으로 의식되어지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나로서는 의문이다. 내 것 일 때와 타인의 것 일 때가 입장이 상식의 수준을 넘어 다르고, 나 편하거나 나 좋으면 그만인 것이 자신만의 방식이라고 일축해 버리며 당당하기까지 한 경우에 이르면 답답해진다. 어떤 경우는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조차 하지 못하고 상대를 얕보거나 깔아뭉개버리기까지 한다. 만일 모르고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복장 터져 죽을 노릇이지 않겠는가.

그렇다. 사람이 너무 곧으면 부러지기 쉽다. 갈대의 유연성도 필요하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합당하고 균형 잡힌 수준이란 말인가. 작은 차이를 엄격하게 지켜나갈 때에야 비로소 일상의 변혁은 생활 속에 녹아들어 실천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작금의 세상의 세태를 보면 그리 간단치 만은 않은 일인 것 같다. 어쩌면 누군가의 말마따나 오십보나 백보나 그게 그건 게 아니라 오십보와 백보는 면밀하게 달리 보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잡하고 성가시지만 그것이 설득력이 있다면 그렇게 차이를 나누어 만들어 감이 도리어 타당하고 일리 있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이러한 문제들을 짚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나의 시선과 사상이 조심스럽고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 결벽증이 아무 의식 없이 무심하게 마땅히 실현되는 날, 이글 신동엽 전집이 주장하고 있듯이, 이 땅은 훈훈하고 평화로우며 살만 할 것임에 추호의 의심도 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이거 너무 혁명 투사 같은 심한 병적 발언 아닌가 모르겠다.ㅋ)

내가 배운 것과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분명 옳고 바른 것이 정석이라고 가르치고 마땅히 그러하지만, 세상은 정석보다는 지름길과 편한 길을 원하고 그것에 맞추어 타협하기 일쑤다. 이러한 무분별한 사고방식과 무의식적 비양심적 행동양상은 심각한 문제의 여지가 있다고 보여 진다. 염체 없는 짓이 버젓이 행세를 하고 오히려 아무 거리낌이나 반성 없이 부추김을 받으며, 역성을 드는 무리들이 큰소리로 조정을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면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점들은 심히 우려된다. 바른 실천 없이 개혁 혹은 변혁은 눈 가리고 아옹 하는 격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적당이란 말을 제법 적절히 사용하지만 그 적당히 때문에 되는 일이 없고, 매사가 그 모양으로 성과가 부진하며 아무 소득 없이 일이 힘만 드는 까닭이 아니던가.
어디가나 시침 뚝 떼고 자기 안위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의식이 팽배하기 일쑤다. 뒤따르는 혹은 뒤처지는 누구든 그들은 그 때 그 상황 하에서는 순식간에 이미 전체의 우리가 아니다. 먼저 골인 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요, 결국에는 성과라는 대 명제와 목적 하에 그러한 일련의 모습이 종착역으로 귀결됨에 씁쓸한 기분이 들 때가 더러 있다.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 뭉뚱그려져서는 개선과 조절은 힘들며, 부조리가 정칙을 넘어 떡하니 자리를 잡고 득세를 해버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더욱이 이상스러운 것은 그러한 일들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미리 제지하거나 지키자고 외치면 바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그야말로 부적응자요 한마디로 말해 쪼다가 되어 돌림빵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무슨 어이없는 경우라 할 것인가.

하기야 세상이 두 얼굴 혹은 다중의 인격으로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일찍이 6학년 즈음에 나는 처음 알았다. 그것도 담임선생님에게로부터. 연세가 지긋하신 당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의 6학년 담임선생님은 욕심 많은 여자 선생님으로서 처세에 능수능란能手能爛하며 심하게 표현해서 교활狡猾함 그 자체였다. 그 때까지 내가 알아온 선생님들과는 전혀 딴판으로 확실하게 달랐다. 직접적으로 나와는 상관이 없었지만 무차별적 공격이라 할 정도로 심하게 학생을 편파적으로 차별하는 모습에 나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하곤 했다. 나는 인간이 얼마나 이중적이며 겉과 속이 다르게 양면적으로 시시각각 둔갑하여 살아갈 수 있는가를 목격하고는 납득하지 못해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그날 이후 그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은 싹 사라지고 오래도록 멍에 같은 것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한 교훈이 되었다. 아무나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절망감과 다짐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내게 직접적으로 그 아이에게 퍼부어 대듯 그러했다면 아마 돌아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도 다 사람 봐가면서 그러는 것이기는 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매일 선생님께 진한 능멸에 가까운 괄시를 받던 그 애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다. 아니 세월이 그만큼이나 흘렀음에도 친하지도 않았던 그 아이 이름까지도 또렷이 생각이 날 정도다. 어쩌면 전에 없이 믿고 존경해야 할 사람으로부터 난생 처음 강렬하게 느낀 불신감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때 그나마 내가 방황하지 않은 것은 순하디 순했던 여자 교생선생님과, 우연히 알게 되어 중학교로 올라가는 몇 개월의 사이동안 옆 반 선생님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던 일인 것 같다. 옆 반 선생님은 참으로 자애로웠으며 현명하고 지혜롭게 단 시일동안 우리에게 공부는 물론, 막바지 초등학교 시절을 상기하매 당신과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들을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이벤트도 마련해 주셨다. 그때 그 선생님께서 베풀어 주신 성의는 작은 일이었지만, 돌이켜 보건데 우리들에게는 큰 자신감과 모험심을 배울 수 있는 꿈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는 자그마한 키에 야무지셨던 그 선생님의 사리분명하심과 긴 안목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던 너른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흐뭇한 장면으로 떠오르곤 한다.

우리가 당장의 오늘, 우선의 편함과 이득만을 탐하지 않고, 우리의 이웃과 우리의 벗들이라 생각하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능동적이고 진취적으로 질서秩序를 지켜나가고, 불필요한 수고를 더는 생활을 실천實踐해 갈 수만 있다면 세상이 혼잡하고 혼탁할 일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왜 아직도 불량식품이 판을 치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며, 폭주족이 난무하는 길거리를 무섭고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야 하는가 말이다. 나는 도대체 이 혼돈과 무질서가 왜 지켜지지 않고 점점 더 악화 일로를 치달으며, 출세와 부귀영화를 위해 남을 짓밟고 비방해야 하는지, 왜 남의 것을 탐하고도 버젓이 활개를 펴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공평하고 정당하며 투명한 사회의 건설은 요원하기만 한 것인지 초등학교 저학년 그때처럼 답답하고 궁금하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 모두를 위한 단정한 가짐과 간결한 질서는 정말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나부터 하나하나 차근히 변혁될 수 있기를 바라며 작은 차이로 큰 혁신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이글 신동엽의 전집을 읽으며 그의 간절한 조국애와 민족애를 빌어 소망함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새로운 씨가 되는 COREANITY와 함께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꿈꿔본다.

IP *.70.7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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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2007.10.29 09:12:25 *.128.229.81
써니는 종종 초딩의 무지막지한 몽둥이로 우리를 찍- 싸게 한다. 크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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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곤
2007.10.29 10:06:10 *.92.16.25
이게 진짜 칼럼이구나. ㅋ 누나의 기질적 특성이 아주 선명하게 돋보이는 글이네. 누나 맘처럼 세상이 그렇게 굴러갔으면 참 좋으련만. 어디까지 질서고, 어디까지 유연함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개인화, 파편화가 가속화되는 세대에 일침을 가하는 적절한 글이오. 누나가 여걸이 되어 이 나라를 통치하면 시원시원하겠다. 아님, 독재가 될려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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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2007.10.29 10:53:07 *.231.50.64
ㅎㅎㅎ.. 언니 내 이야기 많이 나오네..^^
난 지금도 가끔 이불을 밞고 다녀서 울 엄마 속터지게 하는데..
언니의 글들도 잘 참고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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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0.29 11:11:08 *.75.15.205
푸하하. 지금 보니 디기 우끼다. 이게 도대체 몇 십년 동안 칼을 품은 겨? ㅋㅋㅋ

사부님, 죄송합니다. 꾸벅

아우님, 나가 독재기질 있어라? 앞으로 잘하숑. ㅎㅎ

사실은 시간관계상 다 못 적고 출근해 버렸는디 말여라

꿈벗 모임에서도 레인보우파티에서도 질서 있고 깨끗하게 잘해보자 뭐 그런 뜻도 있어라. 걱정도 팔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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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2007.10.29 20:24:09 *.70.72.121
소현낭자야, 이름은 이뻐가지고 그라믄 안 되제. 자폭하냐 시방?
이불빨래가 을매나 힘드는 줄 아는 겨?
소라야, 시어매가 봤다가는 당장에 언니꼴 난다. 조심혀.ㅋㅋㅋ

찜질방에 가고 싶다. 뭐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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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정
2007.10.30 09:21:46 *.244.218.10
나도 비슷한 고민 여러 번 했는데 말이지.
언니가 또 숙제 하나 안겨주네.

조만간 만나야 쓰겄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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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0.30 13:08:33 *.75.15.205
엥, 고민? 여러 번? 야가 또 궁합 맞추네. 무슨 숙제럴? 적벽에서 만나자. 과제 혀야 되잖여. 시간이 나것냐? 너도 찜질방 갈래? 정화랑 어제 찜질방 다녀왔다. 가는 찜질 안하고 잠만 자네.ㅎㅎ 소현인 강남에서 친구와 있다고 해서. 우린 발가벗고/(입어도 돼) 논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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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2007.11.04 23:40:19 *.72.153.12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서 배운 데로 살문 누가 뭐라 한다고?
그놈이 누구여?
언니가 확 엎어버려.

더운데서는 방 뜨겁다고 방에 궁시렁궁시렁 욕하믄서 자는 사람이잔여.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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